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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혹하는 남자
생리를 보름 동안이나 하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인터넷을 뒤져 보니 호르몬 불균형이거나 자궁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다. 서라는 산부인과를 찾았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처방을 내렸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나 봐요?”
“네? 아, 그게.”
“음…… 자궁에는 별문제가 없고요. 다만 좀 무리한 일을 했거나 스트레스성 생리 불순일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의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음주와 흡연을 삼가며, 휴식을 취하라는 것. 그것도 며칠 동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면 더 좋겠다며 그녀의 속을 긁어 댔다.
“선생님, 그게…… 제가 백수가 아니라서요. 사실 쉴 형편이 안 되거든요.”
말끔한 얼굴의 남자 의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백수는 쉴 필요가 없죠. 큰일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고요.”
“저, 제가 요 며칠 동안 좀 우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혹시…….”
“정신과는 옆 병동입니다.”
“정신……과요?”
“아,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신 건강 의학과라고 부르죠. 제가 실수했네요.”
의사는 뭔가를 휘갈겨 쓰다가 싱긋 한 번 웃고는 몸을 뒤로 뺐다. 나가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네.”
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저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음주와 흡연을 삼가며 어쩌고저쩌고…….
간호사가 처방전을 출력하고 있자 서라는 습관적으로 다시 안면에 웃음을 띠었다.
생리 불순, 스트레스, 게다가 과도한 출혈…….
이렇게 피를 줄줄 흘리다가 혹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과대망상이 들려는 찰나, 그나마 병원에서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긴 했다. 전에도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수록 생리양이 많아지곤 했지만 이번엔 보름 동안이나 하다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윤서라 씨!”
“네, 팀장님.”
어딘지 묘한 눈빛을 한 남자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매끈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가끔 유혹적인 시선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곤 했다. 회사임에도 그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를 유혹하고 작업을 거는 데 능숙하다는 남자, 그의 이런 점이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라는 그 앞에서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습관적인 미소. 아무 의미도 없는 대외적인 표정이었다.
“너무 점심시간 끝날 때 딱 맞춰서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서라가 살짝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1시.
요즈음 매일 야근을 하느라 병원 갈 시간이 없어 점심시간에 어렵게 시간을 냈는데, 아슬아슬했나 보다.
“잠시 병원에 들렀다 왔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 항상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뇨.”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 내가 조퇴도 시켜 주고, 사정을 봐주지 않겠어요?”
어딘지 심각해 보이는 팀장의 눈길이 점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결혼할 애인도 있으면서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차 팀장. 세련된 마스크에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게다가 소문으로는 우리 회사 고위층의 아들이라는 얘기도 있고, 재벌설도 있다.
그 때문일까. 은근 사내 여직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데다가 그 역시 여자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 애인이 있지만 아직은 결혼 전이기에 그 자리를 노리는 여직원 또한 있는 것도 같고.
자유연애 시대에 애인 있는 게 뭐 대수라고.
간혹 화장실이나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씁쓸해진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고. 애인도 부익부 빈익빈인가.
“이번 전반기 실적 현황이랑 지난번 브리핑한 자료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나한테 가져와요.”
“오늘 중으로요?”
각 지점별로 실적 현황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며칠은 걸리는데.
“저, 팀장님. 오늘 중으로는 무리입니다.”
“내가 말한 오늘 중은 윤서라 씨 퇴근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럼 또 야근?
서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 달에 20일 이상 야근이라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항상 이런 식이라는 거.
“팀장님.”
“윤서라 씨, 나도 오늘 남아서 늦게까지 일할 생각이니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요. 어차피 야근 수당 꼬박꼬박 나오고 나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뭔가요?”
그가 얼굴을 들어 서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묘한 눈빛이다. 여자들은 그의 저런 표정을 보고 섹시하다고들 한다. 대체 섹시하다라는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딘지 사심이 가득 들어가 있는 눈빛이다. 먼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대놓고 상대를 유혹하는 얼굴.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기에.
“끝나고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하죠.”
“네?”
“나랑 술이나 한잔하자고요. 또 거절할 겁니까?”
차건우 팀장 밑에서 2년을 일했다. 처음 1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다른 상사들처럼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큰 갑질도 없었다. 오히려 팀 내 직원들에게 다정하고 살뜰하기까지 했다. 뭐, 그런 점이 오히려 더 부담은 되었지만 그래도 매일 소리 지르고 화나면 막말해 대는 상사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그녀의 직속 상사는 화를 조절 못하는 분노 조절 장애자였다. 전혀 화를 낼 상황이 아닌데도 직원들에게 윽박지르고 서류를 집어 던지기 일쑤였다. 회장실에 한번 불려 갔다 오면 화가 극에 달해 본인 화를 감당 못 하고 쓰러지기를 여러 번.
결국 또다시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걸 부하 직원들이 부축해 119에 신고하고 난리를 한바탕 치른 후에 그는 자동 퇴사 처리 되었다.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으므로 사회생활 부적응과 회사 내에서 자주 소란을 일으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이 강제 퇴사 사유였다.
그 후에 부임한 상사가 차건우 팀장이었다. 그는 전임 팀장과는 180도 다른 인물이었다. 일은 물론, 감정 조절을 잘하는 것을 넘어 항상 여유 넘치고 위트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능글능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직원들마저 얼마나 잘 챙기는지. 마치 풍족한 집에서 잘 자라 인생이 잘 풀린 금수저 같은 분위기랄까?
그에게는 일도, 여자관계도 어려움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일을 지시할 때도, 야근을 시킬 때도, 심지어 회식을 청할 때도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경직되지 않고, 인간관계를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보는 시각부터가 이미 다른 상사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웬걸. 애인이 있으면서 그녀에게 들이대다니.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남자가 저러니 더 의아할 뿐이었다.
‘팀장님, 저 좋아하세요?’라고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임자 있는 남자와 괜한 구설수에 올랐다가 회사에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혹여 이상하게 엮여 잘리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매달 나가는 집 대출금과, 생활비에, 밀린 대출금 이자에, 묵은 이자에 이자까지 생각한다면 꼬박꼬박 돈 나오는 회사에서 기필코,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녀는 양 주먹을 암팡지게 불끈 쥐었다.
게다가 한 시간 전 산부인과에서 음주와 흡연을 삼가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저, 술 마시면 안 돼요. 팀장님,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술 한잔하자는 것도 거절이네요. 윤서라 씨?”
“마지막이라고요?”
차 팀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면서 말했다.
“우리 회사가 2년마다 부서 이동이 있다는 건 알 겁니다. 곧 공식 발표가 나겠지만 다음 주 중으로 새 팀장이 올 거예요. 이번엔 윗선에서 갑자기 그렇게 결정을 하는 바람에.”
서라는 뭔가 집히는 게 있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팀장님, 혹시 결혼하세요?”
그가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몸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내 결혼에 관심 있었는지는 몰랐는데요. 아닙니다, 결혼.”
잠시 서라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던 차 팀장이 꽤 사무적으로 말했다.
“나한테 약혼녀가 있는 건 맞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경영 지원 팀으로 발령이 난 상태인데…… 나름 만족해요. 부사장 직속이라서요.”
그가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차건우 팀장은 일명 바람둥이로 유명한걸. 게다가 저 헷갈리는 행동이라니.
“술 마시면 안 된다. 그래서 거절인가요? 마지막까지?”
그의 시선이 다시 서라를 향해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윤서라 씨는 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잡힌다. 차 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빈틈이 없어요. 항상 뻣뻣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얼굴은 참 예쁜데.”
그가 앉은 자리에서 뚫어질 듯 서라를 응시했다.
“내 말이 틀린가요?”
“저, 팀장님.”
“그 예쁜 얼굴, 나한테 좀 오래 보여 주면 안 될까 싶은데…… 정말, 안되겠어요?”
그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자, 서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지막인데 무슨 말을 못 할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고.
“윤서라 씨…….”
“조금만 더 나가시면 성희롱입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웃었다.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
“아하…… 성희롱.”
“가 봐도 될까요?”
“가 보는 건 괜찮은데, 성희롱이란 말은 매우 언짢네요.”
“죄송합니다.”
“가 보세요!”
서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양아치 새끼! 하지만 이제 해방이다.
완전히 해방이야.
하지만 그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다음 팀장이 과연 어떤 사람일지.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녀로서는 당연한 염려일지도 모른다. 직속 상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직장 생활의 희비가 갈리니까.
생리를 보름 동안이나 하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인터넷을 뒤져 보니 호르몬 불균형이거나 자궁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다. 서라는 산부인과를 찾았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처방을 내렸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나 봐요?”
“네? 아, 그게.”
“음…… 자궁에는 별문제가 없고요. 다만 좀 무리한 일을 했거나 스트레스성 생리 불순일 수가 있습니다. 일단은…….”
의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음주와 흡연을 삼가며, 휴식을 취하라는 것. 그것도 며칠 동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면 더 좋겠다며 그녀의 속을 긁어 댔다.
“선생님, 그게…… 제가 백수가 아니라서요. 사실 쉴 형편이 안 되거든요.”
말끔한 얼굴의 남자 의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백수는 쉴 필요가 없죠. 큰일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고요.”
“저, 제가 요 며칠 동안 좀 우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혹시…….”
“정신과는 옆 병동입니다.”
“정신……과요?”
“아,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신 건강 의학과라고 부르죠. 제가 실수했네요.”
의사는 뭔가를 휘갈겨 쓰다가 싱긋 한 번 웃고는 몸을 뒤로 뺐다. 나가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네.”
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저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음주와 흡연을 삼가며 어쩌고저쩌고…….
간호사가 처방전을 출력하고 있자 서라는 습관적으로 다시 안면에 웃음을 띠었다.
생리 불순, 스트레스, 게다가 과도한 출혈…….
이렇게 피를 줄줄 흘리다가 혹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과대망상이 들려는 찰나, 그나마 병원에서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긴 했다. 전에도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수록 생리양이 많아지곤 했지만 이번엔 보름 동안이나 하다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윤서라 씨!”
“네, 팀장님.”
어딘지 묘한 눈빛을 한 남자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매끈하고 도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가끔 유혹적인 시선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곤 했다. 회사임에도 그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를 유혹하고 작업을 거는 데 능숙하다는 남자, 그의 이런 점이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라는 그 앞에서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습관적인 미소. 아무 의미도 없는 대외적인 표정이었다.
“너무 점심시간 끝날 때 딱 맞춰서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서라가 살짝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1시.
요즈음 매일 야근을 하느라 병원 갈 시간이 없어 점심시간에 어렵게 시간을 냈는데, 아슬아슬했나 보다.
“잠시 병원에 들렀다 왔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 항상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뇨.”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 내가 조퇴도 시켜 주고, 사정을 봐주지 않겠어요?”
어딘지 심각해 보이는 팀장의 눈길이 점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결혼할 애인도 있으면서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차 팀장. 세련된 마스크에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게다가 소문으로는 우리 회사 고위층의 아들이라는 얘기도 있고, 재벌설도 있다.
그 때문일까. 은근 사내 여직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데다가 그 역시 여자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 애인이 있지만 아직은 결혼 전이기에 그 자리를 노리는 여직원 또한 있는 것도 같고.
자유연애 시대에 애인 있는 게 뭐 대수라고.
간혹 화장실이나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기분이 씁쓸해진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고. 애인도 부익부 빈익빈인가.
“이번 전반기 실적 현황이랑 지난번 브리핑한 자료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나한테 가져와요.”
“오늘 중으로요?”
각 지점별로 실적 현황을 파악하는 데만 해도 며칠은 걸리는데.
“저, 팀장님. 오늘 중으로는 무리입니다.”
“내가 말한 오늘 중은 윤서라 씨 퇴근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럼 또 야근?
서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 달에 20일 이상 야근이라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항상 이런 식이라는 거.
“팀장님.”
“윤서라 씨, 나도 오늘 남아서 늦게까지 일할 생각이니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요. 어차피 야근 수당 꼬박꼬박 나오고 나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뭔가요?”
그가 얼굴을 들어 서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묘한 눈빛이다. 여자들은 그의 저런 표정을 보고 섹시하다고들 한다. 대체 섹시하다라는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딘지 사심이 가득 들어가 있는 눈빛이다. 먼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대놓고 상대를 유혹하는 얼굴.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기에.
“끝나고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하죠.”
“네?”
“나랑 술이나 한잔하자고요. 또 거절할 겁니까?”
차건우 팀장 밑에서 2년을 일했다. 처음 1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다른 상사들처럼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큰 갑질도 없었다. 오히려 팀 내 직원들에게 다정하고 살뜰하기까지 했다. 뭐, 그런 점이 오히려 더 부담은 되었지만 그래도 매일 소리 지르고 화나면 막말해 대는 상사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그녀의 직속 상사는 화를 조절 못하는 분노 조절 장애자였다. 전혀 화를 낼 상황이 아닌데도 직원들에게 윽박지르고 서류를 집어 던지기 일쑤였다. 회장실에 한번 불려 갔다 오면 화가 극에 달해 본인 화를 감당 못 하고 쓰러지기를 여러 번.
결국 또다시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걸 부하 직원들이 부축해 119에 신고하고 난리를 한바탕 치른 후에 그는 자동 퇴사 처리 되었다.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으므로 사회생활 부적응과 회사 내에서 자주 소란을 일으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이 강제 퇴사 사유였다.
그 후에 부임한 상사가 차건우 팀장이었다. 그는 전임 팀장과는 180도 다른 인물이었다. 일은 물론, 감정 조절을 잘하는 것을 넘어 항상 여유 넘치고 위트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능글능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직원들마저 얼마나 잘 챙기는지. 마치 풍족한 집에서 잘 자라 인생이 잘 풀린 금수저 같은 분위기랄까?
그에게는 일도, 여자관계도 어려움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일을 지시할 때도, 야근을 시킬 때도, 심지어 회식을 청할 때도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경직되지 않고, 인간관계를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보는 시각부터가 이미 다른 상사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웬걸. 애인이 있으면서 그녀에게 들이대다니.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남자가 저러니 더 의아할 뿐이었다.
‘팀장님, 저 좋아하세요?’라고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임자 있는 남자와 괜한 구설수에 올랐다가 회사에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혹여 이상하게 엮여 잘리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매달 나가는 집 대출금과, 생활비에, 밀린 대출금 이자에, 묵은 이자에 이자까지 생각한다면 꼬박꼬박 돈 나오는 회사에서 기필코,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녀는 양 주먹을 암팡지게 불끈 쥐었다.
게다가 한 시간 전 산부인과에서 음주와 흡연을 삼가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저, 술 마시면 안 돼요. 팀장님,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술 한잔하자는 것도 거절이네요. 윤서라 씨?”
“마지막이라고요?”
차 팀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면서 말했다.
“우리 회사가 2년마다 부서 이동이 있다는 건 알 겁니다. 곧 공식 발표가 나겠지만 다음 주 중으로 새 팀장이 올 거예요. 이번엔 윗선에서 갑자기 그렇게 결정을 하는 바람에.”
서라는 뭔가 집히는 게 있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팀장님, 혹시 결혼하세요?”
그가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몸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내 결혼에 관심 있었는지는 몰랐는데요. 아닙니다, 결혼.”
잠시 서라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던 차 팀장이 꽤 사무적으로 말했다.
“나한테 약혼녀가 있는 건 맞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경영 지원 팀으로 발령이 난 상태인데…… 나름 만족해요. 부사장 직속이라서요.”
그가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차건우 팀장은 일명 바람둥이로 유명한걸. 게다가 저 헷갈리는 행동이라니.
“술 마시면 안 된다. 그래서 거절인가요? 마지막까지?”
그의 시선이 다시 서라를 향해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윤서라 씨는 참…….”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잡힌다. 차 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빈틈이 없어요. 항상 뻣뻣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얼굴은 참 예쁜데.”
그가 앉은 자리에서 뚫어질 듯 서라를 응시했다.
“내 말이 틀린가요?”
“저, 팀장님.”
“그 예쁜 얼굴, 나한테 좀 오래 보여 주면 안 될까 싶은데…… 정말, 안되겠어요?”
그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훑자, 서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지막인데 무슨 말을 못 할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고.
“윤서라 씨…….”
“조금만 더 나가시면 성희롱입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웃었다. 살짝 어이가 없다는 듯.
“아하…… 성희롱.”
“가 봐도 될까요?”
“가 보는 건 괜찮은데, 성희롱이란 말은 매우 언짢네요.”
“죄송합니다.”
“가 보세요!”
서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양아치 새끼! 하지만 이제 해방이다.
완전히 해방이야.
하지만 그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다음 팀장이 과연 어떤 사람일지.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녀로서는 당연한 염려일지도 모른다. 직속 상사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직장 생활의 희비가 갈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