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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복수(그의 사랑 개정판)



1화: 프롤로그 - 부정하고 싶은 현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그 강렬한 눈빛은 연아의 시야 속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선 속에 그대로 갇혀 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 눈빛을 무시하는 것은 유리병 안에 갇힌 가련한 나비의 부질없는 날갯짓에 불과했다.

단숨에 투명한 액체를 들이켰다.

맞은편 상대에게 한껏 우아한 미소를 짓는 순간에도 그녀 안의 불편한 마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바싹 목이 타들어 간다.

이미 몇 번이나 목을 축였는데도 그 갈증은 그 밤 내내 연아를 괴롭혔다.

마른침을 삼키며 깊은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여지없이 날아와 꽂히는 날카로운 눈빛이 날이 선 신경을 낚아챘다.

숨이 탁 막혀 오자 그녀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를 미친 듯 의식하며 평소의 자신을 유지하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그 자신의 존재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남자.

물론 그도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이 바로 그 증거였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 반듯한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에서부터 우아하게 뻗은 코, 세상을 조롱하듯 살짝 비틀린 붉은 입술, 건장한 장신의 몸을 감싼 윤기 흐르는 검은 턱시도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고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연아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가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서도혁.

단순히 TK의 막강한 우두머리라는 이유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서른넷의 나이에 그만의 탄탄한 캐리어를 구축한 상태였고 섹시한 남성적 매력까지 덧붙여져 그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중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의 주변을 맴도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연아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치 않아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쓴 물이 밀려온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 이 순간을 외면하고 싶었다.

“당신은 도망칠 수 없어.”

낮게 깔린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몸은 금세 얼어붙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형식적인 미소마저 사라졌다.

도혁의 등장에 지금까지 그녀 주변을 맴돌던 젊은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사라졌다. 결국, 이 남자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가련한 신세.

“언제쯤 그 사실을 깨달을 거지?”

언제쯤…… 그래, 언제쯤 난 그런 일이 가능해질까?

매정한 현실에 그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게 될 때가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약자의 고통을 잘 알면서도 그의 잔인한 말이 비수를 꽂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조롱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유치한 놀이는 그만하지?”

유치한 놀이?

하긴 그의 입장이라면 그렇게도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 숨 쉬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아니, 유치한 반항이라고 해도 그녀가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그가 분명히 알길 바랐다.

다시 투명한 잔에 담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쓴 기운이 혈관을 따라 흐르면서 온몸을 달군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홀짝거렸던 알코올이 이제야 효과를 발휘하나 보다.

우습게도 살짝 밀려오는 취기가 고맙기까지 했다. 평소엔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이렇게 술에 의지하는 자신을 보니, 정말 아이러니한 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조롱하듯 도혁이 한쪽 눈썹을 찡긋 올리며 혀를 찼다.

“저런, 술에 취해 보시겠다? 그런다고 결과가 달라지나?”

“자신이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남자라는 것이나 잊지 말아요.”

술기운 때문일까. 오늘 밤은 좀처럼 분노를 가누기가 쉽지 않다.

역시나 남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배어 들었다.

물론 진짜 미소와는 거리가 먼 한기 어린 냉소.

그가 생생하게 빛나는 검은 눈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 내린다.

심장이 종잇조각처럼 바싹 구겨졌다. 반사적으로 깊은 심호흡을 했다.

얇은 실크 공단 위의 모양 좋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자 그의 시선이 뒤따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노골적인 의미를 깨닫자 몸이 굳어졌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구석으로 몰며 잔인한 자극을 이어 가고 있다.

“약자? 지금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해?”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시죠.”

“그거 재미있군.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거든. 당신은 절대 약자가 아니야, 한연아. 오히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도망치려는 겁쟁이라면 몰라도.”

“왜 하필 여기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죠?”

“안 될 이유는 또 뭔데? 우리에게 지극히 필요한 대화 아닌가? 혹시나 당신이 잊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이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당신의 동의하에 이뤄진 거야.”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연아는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무시하며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크리스털 잔을 낚아챘다.

도혁이 입술을 비틀며 나직이 웃었다.

“계속 반항하고 싶나 보군.”

“남이사.”

“경고하는데 그 정도 해 둬. 괜한 허세로 나중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경고? 흥, 당신의 경고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연아는 보란 듯이 잔을 기울여 벌컥 들이켰다.

윽! 불같은 기운이 퍼지며 식도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녀는 숙맥처럼 캑캑, 마른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다시 잔을 보았다.

당연히 마일드한 샴페인쯤으로 생각했는데 독한 위스키였던 거다.

그 강렬한 위력 때문인지 갑자기 머리가 띵 하게 울리며 알딸딸해진다. 한편으론 그를 맨정신에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은근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술 취한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야.”

물론 그러시겠지.

“그래서 내가 상관해야 하나요?”

한 번 터진 반항은 좀처럼 움츠러들 기세가 없었다.

아니면 현실 도피일까?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안간힘?

아무렴 어떻겠는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이렇게라도 망가져 버리는 게 그에 대한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또 웨이터가 지나가자 다시 손을 뻗어 새 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남자의 단단한 손이 단번에 가는 손목을 움켜잡았다.

헉, 그 뜨거운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손목을 비틀었지만, 그의 손아귀 힘은 수갑처럼 단단했다.

“놔요.”

“왜 같은 말을 하게 하지?”

“놓으라고 했어요.”

“유치한 장난 그만해. 이젠 떠날 거야. 임무를 완수했으니 더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

그가 가뿐히 손을 잡아끌자 연아는 고집 센 늙은 노새처럼 발끝에 힘을 주며 버텼다.

“파티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요. 난 지금도…….”

“난 떠난다고 했고, 당신은 따라오면 그만이야.”

그가 가는 잇새로 내뱉었다.

이미 많이 참고 있으니 더는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따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더 강한 반발로 굳어졌다. 이대로 이 남자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싶었다.

“어머, 도혁 씨, 설마 벌써 떠나려는 건 아니죠?”

그의 강한 손길에 발끝이 거의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구원군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화려한 붉은색 새틴 드레스 차림의 유서은이었다.

예상대로 도혁의 검은 눈썹이 위를 향해 솟는다. 누군가의 방해가 거슬린다는 뜻이었다.

우습게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 간절한 마음이 이뤄진 것 같아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도혁의 표정과 상관없이 서은이 번쩍거리는 큐빅으로 치장한 긴 손톱으로 턱시도의 매끈한 어깨 단을 쓸어내렸다.

다시 미세하게 인상을 구기는 도혁이다.

어떻게든 떼어내려 해도 도통 포기하지 않은 채 끈질긴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서은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긴 파티에 도착한 순간부터 연아를 깔끔히 무시하고서 대놓고 도혁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진 여자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저렇게 뻔뻔스러운 것을 보면 멘탈도 장난은 아닌 듯싶고.

정계의 막강한 집안의 외동딸이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여배우라는 사실이 이 여자의 자만심에 한껏 날개를 달아 주었으리라.

서도혁에 뒤지지 않은,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믿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

여자는 빼어난 미모와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사회적 지위나 외적인 모습으로 보나 서도혁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파트너라고 할까?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날아와 꽂혔다.

호기심이었다.

그들이 파티에 등장한 순간부터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순간을 기다려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마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주 동안 서도혁과 유서은의 스캔들로 대한민국 전체가 뜨거웠다.

송년 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서은을 도혁이 부축했고 그 순간의 사진이 우연히 찍히면서 젊은 선남선녀에 대한 맹목적인 로망으로까지 더해졌다. 몰래 사귀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다 그 뒤로는 진짜 연인인 양 연일 모든 연예 기사의 헤드라이트를 장식했다. 급기야는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파파라치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물론 도혁은 그 모든 기사에 그 어떤 응답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열기가 조금 사그라드나 싶었는데 그 상황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이다. 한 장소에서 해후했다는 것만도 흥미로운데 서도혁이 뜻밖의 새 파트너를 동반하고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호기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 뒤에 일어날 즐거운(?) 일을 은근 기대하면서.

‘서도혁의 새 도자기 인형.’

아까 휴게실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었다.

그녀를 지칭하는…… 서도혁의 파트너로 온 그녀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잣대였다.

연아는 부정할 수 없는 이 현실이 죽기보다 끔찍했다.

“파티의 재미는 이제부터라고요. 이렇게 도혁 씨가 가 버리면…….”

“좀 비켜 주지?”

여배우의 말을 뚝 끊으며 도혁이 매정하게 내뱉었다.

그 아찔한 냉소에 서은이 잠시 허를 찔린 사이, 그가 어깨에 머문 손까지 가뿐히 밀어내더니 연아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는 것으로 여배우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겨 버렸다.

서은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띌 만큼 굳어지는 동안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취기로 멍한 와중에서도 연아는 진심으로 서은을 동정했다.

여배우라는 프라이드에 재력까지 갖춘 그녀가 이런 식의 모욕을 받고 결코 유쾌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서도혁에게 최소한의 예의가 없다는 걸 모르는 유서은이 불쌍한 거지.

“아직도 더 말이 필요하나?”

도혁이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앙다무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조만간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칠 것 같은 예감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웬걸. 도혁이 다시 한번 매서운 눈빛을 내쏘자 오히려 그 옆에 서 있는 연아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몸을 홱 돌려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한순간에 공기가 스르르 빠지는 것처럼 맥없는 결말이었다.

“안 갈 건가?”

도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재촉했다.

아, 그녀는 힘겹게 정신을 차리며 걸음을 뗐다.

그들이 움직이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길을 터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