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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우연일까?
[6일 전, 대학가 근처 레스토랑]
“저 남자가 서도혁이라고?”
“정말 몰라?”
지현이 마치 외계인을 만난 듯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를 모를 수 있는지,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냐는 핀잔 같았다.
“그래, 몰라. 왜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야 하는데?”
그녀의 톡 쏘듯 되받는 물음에 그제야 좀 무안한지 얼굴을 살짝 물들이는 친구다.
그 와중에도 몇 미터 떨어진 오른쪽 테이블 쪽을 은밀히 곁눈질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 문제의 자리에서는 요즘 한창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서도혁이라는 남자가 어떤 중년의 남자와 저녁 식사 중이었다.
“그 말이 꼭 틀린 건 아닌데 솔직히 요즘 서도혁만큼 핫한 남자가 또 누가 있니? 유서은이랑 스캔들 나서도 그가 더 유명해졌잖아.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실검에 오르락거리고. 막강한 TK의 떠오르는 샛별에다 배우 뺨치는 비주얼에 환상의 몸매까지, 어떤 여자가 미치지 않겠어?”
널 포함해서? 제발, 그 범위에서 난 빼줘…… 라는 말을 간신히 삼킨 연아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서도혁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현의 말대로 최근 서도혁이라는 이름 석 자는 거의 매일 실검 순위를 점령했다. 모든 이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며 톱스타 못지않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미 대중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그를 모르는 것은 무리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연아는 지현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를 알았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그가 얼마나 유명한 남자이든 아무 관심 없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지독한 냉혈한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그 문제의 남자를, 고작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우선 도혁 정도 되는 거물 사업가라면 이런 대학가의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특급 호텔 레스토랑이 더 어울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웠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그의 존재가 빛나는 걸까?
넓은 식당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체발광이라는 단어를 몸소 증명한 남자였다.
단언컨대 이곳의 여자들 90% 이상이 식사까지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는 것에 그녀의 손목을 걸 수도 있었다. 지금만 해도 지현만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여자가 구석진 테이블 쪽을 힐끔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여자들의 과한 관심을 받은 당사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처연한 모습이었지만.
“부자겠다, 섹시하겠다, 남자답겠다, 저런 완벽한 남자가 내 애인이기만 하다면…….”
진심 어린 간절한 눈빛에 연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로맨티시스트인 친구이지만 다 큰 성인이 단순히 외적인 조건만으로 이렇게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이미 냉정한 현실에 눈을 떠 버린 그녀로서는 사심 없이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재엽 씨가 지금 네 모습 보면 뭐라 할지 궁금하네. 사진이라도 찍어 보낼까?”
“야, 한연아. 하필 지금 그 자식 이름은 왜 꺼내는데?”
그래도 내심 미안했던지 시선을 내리깐 채 죄 없는 스테이크만 꾹꾹 쑤시는 지현이다.
“현실을 깨우쳐 주었을 뿐이야.”
“못 말리는 현실주의자.”
“그래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어련하시겠어, 하며 입술을 삐쭉이던 지현이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우리의 도도한 한연아 양께서 웬일로 남자한테 관심을 보이실까?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설마 저런 스타일이 네 타입인 거야?”
“내 타입?”
하, 사람이 기가 차면 할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농담도 적당히 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끔찍해?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난 저런 타입은 딱 질색이거든.”
“모든 여자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를? 왜? 서도혁이 너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했어?”
해코지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했지.
“그렇잖아. 네가 언제 남한테 독한 말 한마디 하는 애니? 어쩔 땐 숙맥처럼 매번 참기만 해서 나까지 속 터지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냐고. 그런 네가 웬일로 그렇게 독소를 내뿜는데?”
“아, 그거야…….”
연아는 말을 흐리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라, 이젠 얼굴까지 붉히고. 수상해. 정말 냄새가 난다니까.”
“계속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 할래?”
갑자기 입맛이 가셨다.
어떻게 서도혁 같은 남자를 그녀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년간 그가 아버지의 인생을 제멋대로 휘저은 걸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당연히 자신을 알 거라고 믿는 저 거만한 태도부터 맘에 들지 않아. 대체 자기가 뭐라고? 중세의 왕이라도 된대? 인간적인 온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연아는 최근 인터넷 기사 어디에서 보았던 도혁과 여자들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의 주변에는 일정한 기간을 두고 꽤 많은 여자가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단 며칠에서 한두 달, 길어야 석 달이 전부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드러낸 섹시한 미녀들뿐이었다.
“서도혁 같은 남자에게 여자가 어떤 존재일 거 같니? 그중에 과연 단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가 있을까? 아니, 서도혁은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모른다, 에 내 명예를 걸겠어. 상대의 인격 존중은 고사하고 저 남자에게 여자는 성적 욕구를 채우고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존재일 뿐이야. 저런 거만한 에고이스트가 내 타입이라고? 아, 지현아,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 설령 만나 달라 무릎 꿇고 애원한다 해도…….”
연아는 아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의 놀란 표정에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탓이었다.
“지금 한 말은 그냥 잊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
“당신을 만나려면 무릎까지 꿇어야 합니까?”
불현듯 끼어든 낯선 음성이었다.
지현과 연아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정말 믿을 수 없었지만, 아니,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테이블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방금까지 그녀가 미친 듯 성토했던 바로 그 서도혁이었다.
이런, 절로 입술을 깨문 연아였다.
이 순간이 꿈이길 바라지만 상대의 매서운 눈빛은 정확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요동친다.
이제 그가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일 수 있지? 왜 하필 지금…….
“서도혁 씨!”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지현이 포크까지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도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마치 오랜 시간 마음에 품은 우상을 만난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도혁이 지현 쪽을 힐끗 보며 부드러운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연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차가운 눈빛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두고 언제 먹을까 입맛을 다시는 잔인한 포식자 같았다.
새까만 동공이 카메라 셔터처럼 찰칵 닫혔다가 다시 열리며 번쩍 빛났다.
흠칫, 연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두 분 모두 날 아주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성함이…….”
그가 다시 지현을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를 던지자 친구의 볼이 아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지현이에요. 이쪽은 한…….”
“아, 잠깐, 기억났습니다. 한연아 씨, 한때 꽤 유명한 모델이었던 걸로 아는데, 맞나요?”
무엇이 더 놀라울까? 서도혁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아니면 그가 이미 내 이름만이 아니라 과거의 짧은 모델 경력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
아버지를 조사하면서 내 과거 경력까지 찾아낸 걸까?
충격 이상의 거친 불안이 무섭게 피어올랐다.
마치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낭패감이었다.
이제 도혁은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연아를 주시했다.
“날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겁니까, 한연아 씨?”
정중하지만 그 안에 깔린 조소는 확연했다.
연아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주제에 이제 와 변명하는 것도 우스웠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남의 말을 몰래 엿듣는 것도 잘한 건 아니죠.”
“이 모든 게 내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가 되물었다.
“터무니없는 비난에도 속없는 인간처럼 너그럽게 웃으며 지나가야 했나요?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의 성인이 아니라서. 특히 비뚤어진 선입관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여자의 판단이라면 더욱.”
그녀의 볼이 화끈거렸다.
무슨 말이든 받아쳐야 했지만,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에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돌연 도혁이 희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왠지 모를 불안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직 싱글? 애인 있어요?”
갑자기 저런 질문을 왜 하는 거지?
당혹감에 입술만 뻐금거리는 연아를 태연히 응시하던 남자가 시선을 내려 반지가 없는 그녀의 왼손을 확인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빼 테이블 아래쪽으로 숨겼다.
이전의 불안이 막대한 형태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때요? 내가 만나 달라고 애원하면 만나 줄 겁니까?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나 같은 에고이스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건가?”
그가 교묘하게 그녀의 말을 상기시키며 조롱했다.
연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말은 잠잠하던 분노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저런 모습이 남자답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아니, 그럴수록 그가 얼마나 최악의 남자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뿐이다.
“아까 들으셨으니 아셨을 텐데요. 그쪽이 내 타입 아니라는 거.”
“연아야!”
연아의 직선적인 표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지현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자신의 타입에 확실한 기준을 가졌나 보군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매끈한 턱선을 쓸며 싱긋 웃었다.
살짝 주름이 잡히면서 반달 형의 눈가에 감질날 만큼 매력적인 웃음기가 번진다. 여자들이 저 모습에 얼마나 애타 하는지 분명히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눈가에도 미치지 않은 가짜 미소라는 것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럼 결과를 한 번 지켜볼까요?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난 누구의 도전이든 쉽게 포기하는 남자가 아닌지라.”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연아의 섬세한 얼굴에 이어 보라색 니트에 감싸인 상체를 훑었다.
움찔, 그 무례한 시선에 피부가 바늘에 찔리듯 따끔거렸다. 무섭게 치미는 분노와 함께.
그녀는 이를 앙다물며 당당히 시선을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언의 치열한 기 싸움을 하듯, 공기 중에 엄청난 스파크가 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외로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도혁이었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여전히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지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볼 날을 기대하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도혁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들의 테이블을 떠났다. 그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과 합석하다 떠나는 사람 같았다.
그 뒤로도 몇 초 동안 두 여자는 각자 멍한 충격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성적인 연아였다.
그녀는 충격에 젖은 지현의 얼굴 앞에 한 손을 흔들었다.
“정신 차려.”
“세상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도혁이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최후의 승자? 도전을 뭐해? 와우, 완전 대박!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지나다가 우리 얘길 엿들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너한테 한 말을 생각하면…….”
지현은 멍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다시 번쩍 정신을 차리며 연아를 쳐다보는 친구다.
“아무래도 저 남자,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관심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 거야.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정말 그렇게 믿어?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고. 너한테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잖아.”
“이지현! 과장 좀 그만해. 정말 몰라? 그건 관심이 아니라 상처 난 자존심을 숨기려는 교묘한 수작에 불과해. 우연히 우리 얘길 엿듣고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열 받아서 반응한 것뿐이라고.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소리였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 말은 친구가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 한 말이었다.
정말로 단순히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길,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희미한 불안의 조짐이 단순히 기우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6일 전, 대학가 근처 레스토랑]
“저 남자가 서도혁이라고?”
“정말 몰라?”
지현이 마치 외계인을 만난 듯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를 모를 수 있는지,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냐는 핀잔 같았다.
“그래, 몰라. 왜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야 하는데?”
그녀의 톡 쏘듯 되받는 물음에 그제야 좀 무안한지 얼굴을 살짝 물들이는 친구다.
그 와중에도 몇 미터 떨어진 오른쪽 테이블 쪽을 은밀히 곁눈질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 문제의 자리에서는 요즘 한창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서도혁이라는 남자가 어떤 중년의 남자와 저녁 식사 중이었다.
“그 말이 꼭 틀린 건 아닌데 솔직히 요즘 서도혁만큼 핫한 남자가 또 누가 있니? 유서은이랑 스캔들 나서도 그가 더 유명해졌잖아.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실검에 오르락거리고. 막강한 TK의 떠오르는 샛별에다 배우 뺨치는 비주얼에 환상의 몸매까지, 어떤 여자가 미치지 않겠어?”
널 포함해서? 제발, 그 범위에서 난 빼줘…… 라는 말을 간신히 삼킨 연아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서도혁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현의 말대로 최근 서도혁이라는 이름 석 자는 거의 매일 실검 순위를 점령했다. 모든 이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며 톱스타 못지않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미 대중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그를 모르는 것은 무리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연아는 지현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를 알았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그가 얼마나 유명한 남자이든 아무 관심 없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지독한 냉혈한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그 문제의 남자를, 고작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우선 도혁 정도 되는 거물 사업가라면 이런 대학가의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특급 호텔 레스토랑이 더 어울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웠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그의 존재가 빛나는 걸까?
넓은 식당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체발광이라는 단어를 몸소 증명한 남자였다.
단언컨대 이곳의 여자들 90% 이상이 식사까지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는 것에 그녀의 손목을 걸 수도 있었다. 지금만 해도 지현만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여자가 구석진 테이블 쪽을 힐끔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여자들의 과한 관심을 받은 당사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처연한 모습이었지만.
“부자겠다, 섹시하겠다, 남자답겠다, 저런 완벽한 남자가 내 애인이기만 하다면…….”
진심 어린 간절한 눈빛에 연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로맨티시스트인 친구이지만 다 큰 성인이 단순히 외적인 조건만으로 이렇게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이미 냉정한 현실에 눈을 떠 버린 그녀로서는 사심 없이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재엽 씨가 지금 네 모습 보면 뭐라 할지 궁금하네. 사진이라도 찍어 보낼까?”
“야, 한연아. 하필 지금 그 자식 이름은 왜 꺼내는데?”
그래도 내심 미안했던지 시선을 내리깐 채 죄 없는 스테이크만 꾹꾹 쑤시는 지현이다.
“현실을 깨우쳐 주었을 뿐이야.”
“못 말리는 현실주의자.”
“그래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어련하시겠어, 하며 입술을 삐쭉이던 지현이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우리의 도도한 한연아 양께서 웬일로 남자한테 관심을 보이실까? 직접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설마 저런 스타일이 네 타입인 거야?”
“내 타입?”
하, 사람이 기가 차면 할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농담도 적당히 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끔찍해?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난 저런 타입은 딱 질색이거든.”
“모든 여자가 갖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를? 왜? 서도혁이 너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했어?”
해코지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 했지.
“그렇잖아. 네가 언제 남한테 독한 말 한마디 하는 애니? 어쩔 땐 숙맥처럼 매번 참기만 해서 나까지 속 터지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냐고. 그런 네가 웬일로 그렇게 독소를 내뿜는데?”
“아, 그거야…….”
연아는 말을 흐리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라, 이젠 얼굴까지 붉히고. 수상해. 정말 냄새가 난다니까.”
“계속 그렇게 이상한 소리만 할래?”
갑자기 입맛이 가셨다.
어떻게 서도혁 같은 남자를 그녀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난 몇 년간 그가 아버지의 인생을 제멋대로 휘저은 걸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당연히 자신을 알 거라고 믿는 저 거만한 태도부터 맘에 들지 않아. 대체 자기가 뭐라고? 중세의 왕이라도 된대? 인간적인 온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연아는 최근 인터넷 기사 어디에서 보았던 도혁과 여자들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의 주변에는 일정한 기간을 두고 꽤 많은 여자가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단 며칠에서 한두 달, 길어야 석 달이 전부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드러낸 섹시한 미녀들뿐이었다.
“서도혁 같은 남자에게 여자가 어떤 존재일 거 같니? 그중에 과연 단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가 있을까? 아니, 서도혁은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모른다, 에 내 명예를 걸겠어. 상대의 인격 존중은 고사하고 저 남자에게 여자는 성적 욕구를 채우고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존재일 뿐이야. 저런 거만한 에고이스트가 내 타입이라고? 아, 지현아,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 설령 만나 달라 무릎 꿇고 애원한다 해도…….”
연아는 아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의 놀란 표정에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탓이었다.
“지금 한 말은 그냥 잊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
“당신을 만나려면 무릎까지 꿇어야 합니까?”
불현듯 끼어든 낯선 음성이었다.
지현과 연아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헉,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정말 믿을 수 없었지만, 아니,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테이블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방금까지 그녀가 미친 듯 성토했던 바로 그 서도혁이었다.
이런, 절로 입술을 깨문 연아였다.
이 순간이 꿈이길 바라지만 상대의 매서운 눈빛은 정확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요동친다.
이제 그가 두 사람의 말을 다 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으로 꼬일 수 있지? 왜 하필 지금…….
“서도혁 씨!”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지현이 포크까지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면서도 도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마치 오랜 시간 마음에 품은 우상을 만난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도혁이 지현 쪽을 힐끗 보며 부드러운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연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차가운 눈빛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두고 언제 먹을까 입맛을 다시는 잔인한 포식자 같았다.
새까만 동공이 카메라 셔터처럼 찰칵 닫혔다가 다시 열리며 번쩍 빛났다.
흠칫, 연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긴장했다.
“두 분 모두 날 아주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성함이…….”
그가 다시 지현을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를 던지자 친구의 볼이 아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지현이에요. 이쪽은 한…….”
“아, 잠깐, 기억났습니다. 한연아 씨, 한때 꽤 유명한 모델이었던 걸로 아는데, 맞나요?”
무엇이 더 놀라울까? 서도혁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아니면 그가 이미 내 이름만이 아니라 과거의 짧은 모델 경력까지 꿰뚫고 있다는 사실?
아버지를 조사하면서 내 과거 경력까지 찾아낸 걸까?
충격 이상의 거친 불안이 무섭게 피어올랐다.
마치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를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낭패감이었다.
이제 도혁은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며 연아를 주시했다.
“날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겁니까, 한연아 씨?”
정중하지만 그 안에 깔린 조소는 확연했다.
연아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주제에 이제 와 변명하는 것도 우스웠다.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남의 말을 몰래 엿듣는 것도 잘한 건 아니죠.”
“이 모든 게 내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가 되물었다.
“터무니없는 비난에도 속없는 인간처럼 너그럽게 웃으며 지나가야 했나요?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의 성인이 아니라서. 특히 비뚤어진 선입관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여자의 판단이라면 더욱.”
그녀의 볼이 화끈거렸다.
무슨 말이든 받아쳐야 했지만,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에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돌연 도혁이 희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왠지 모를 불안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직 싱글? 애인 있어요?”
갑자기 저런 질문을 왜 하는 거지?
당혹감에 입술만 뻐금거리는 연아를 태연히 응시하던 남자가 시선을 내려 반지가 없는 그녀의 왼손을 확인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잡아 빼 테이블 아래쪽으로 숨겼다.
이전의 불안이 막대한 형태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때요? 내가 만나 달라고 애원하면 만나 줄 겁니까?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나 같은 에고이스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건가?”
그가 교묘하게 그녀의 말을 상기시키며 조롱했다.
연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말은 잠잠하던 분노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저런 모습이 남자답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아니, 그럴수록 그가 얼마나 최악의 남자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뿐이다.
“아까 들으셨으니 아셨을 텐데요. 그쪽이 내 타입 아니라는 거.”
“연아야!”
연아의 직선적인 표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지현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자신의 타입에 확실한 기준을 가졌나 보군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매끈한 턱선을 쓸며 싱긋 웃었다.
살짝 주름이 잡히면서 반달 형의 눈가에 감질날 만큼 매력적인 웃음기가 번진다. 여자들이 저 모습에 얼마나 애타 하는지 분명히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눈가에도 미치지 않은 가짜 미소라는 것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럼 결과를 한 번 지켜볼까요?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난 누구의 도전이든 쉽게 포기하는 남자가 아닌지라.”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연아의 섬세한 얼굴에 이어 보라색 니트에 감싸인 상체를 훑었다.
움찔, 그 무례한 시선에 피부가 바늘에 찔리듯 따끔거렸다. 무섭게 치미는 분노와 함께.
그녀는 이를 앙다물며 당당히 시선을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언의 치열한 기 싸움을 하듯, 공기 중에 엄청난 스파크가 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외로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도혁이었다.
그가 피식 웃으면서 여전히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지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볼 날을 기대하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도혁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들의 테이블을 떠났다. 그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과 합석하다 떠나는 사람 같았다.
그 뒤로도 몇 초 동안 두 여자는 각자 멍한 충격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성적인 연아였다.
그녀는 충격에 젖은 지현의 얼굴 앞에 한 손을 흔들었다.
“정신 차려.”
“세상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도혁이 무슨 말을 한 거냐고? 최후의 승자? 도전을 뭐해? 와우, 완전 대박!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지나다가 우리 얘길 엿들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너한테 한 말을 생각하면…….”
지현은 멍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다시 번쩍 정신을 차리며 연아를 쳐다보는 친구다.
“아무래도 저 남자,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관심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한 거야.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정말 그렇게 믿어?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고. 너한테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잖아.”
“이지현! 과장 좀 그만해. 정말 몰라? 그건 관심이 아니라 상처 난 자존심을 숨기려는 교묘한 수작에 불과해. 우연히 우리 얘길 엿듣고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열 받아서 반응한 것뿐이라고.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소리였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 말은 친구가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해 한 말이었다.
정말로 단순히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길,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희미한 불안의 조짐이 단순히 기우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