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프롤로그
“하흡.”
“하아, 하아.”
뱉어 내는 호흡이 거칠다. 적나라한 나신이 틈이라곤 하나 없이 마주 보고 있는 통에 호흡마저 섞인다. 누구의 숨소리인지, 누구의 날숨인지 분별이 어렵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등허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이내 어깨를 끌어당겨 고개를 묻었다. 남자의 몸은 절정의 순간을 간직한 채 흘러내리는 땀투성이었지만 조금도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향기로웠다. 수컷의 냄새가 아찔하게 퍼진다.
“흐으음.”
남자의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양손으로 끌어모아 어딘가에 박제라도 해 두고 싶을 정도로.
“위험한데.”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여자의 입술 사이를 갈랐다. 달아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남자의 관자놀이에 솟아오른 힘줄이 선연하다. 조그마한 입술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갔다. 가지런한 치열을 훑고, 말캉한 혀를 지분거리더니 이내 목구멍 끝까지 들어간다.
살짝 버겁다. 남자는 손가락마저 너무 크다.
“이런 얼굴인가.”
“으으…….”
“미친 듯이 빨아 댈 땐 위에선 얼굴이 잘 안 보여. 그저 동그란 이마밖에는.”
남자가 손가락을 뺐다. 기다랗게 늘어지는 타액이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따라 나온다.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또 하나 늘었다.
여자의 입이 오랜만에 자유를 만났다. 굵직한 남자의 손가락이 입 안을 가득 채우다가 사라지니 허전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한껏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기엔 알맞았다.
하지만 입술에게 허락된 순간은 너무 짧다.
“으흡!”
여자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안을 파고 들어오는 야한 혀가 뱀이라도 되듯 여자의 입 안을 옭아맸다. 타액이 섞이더니 이내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든다. 남자가 그걸 모를 리 없고.
남자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허리 짓도 빨라졌다.
“아, 아흣! 아흑.”
커다란 진동을 맞은 듯 여자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호흡도 다시금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듯 두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천천히요. 제발 조금만 천천히.”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으흣.”
“니 안에만 들어가면 미친놈이 돼 버리니까.”
여자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극강의 쾌락이 온몸을 파고 들어오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간간이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박아 대는 것 말고는.
가녀린 여체가 남자의 아래에서 사정없이 짓이겨진다. 치대는 움직임은 끝을 모르는 듯 이어졌고 동시에 울리는 심장 소리마저 야하게 들린다.
쿵쿵쿵쿵쿵.
끊임없는 추삽질에 그마저도 멈추지를 않는다. 발가락이 둥글게 모아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한다. 남자의 어깨를 파고드는 여자의 손톱이 깊은 자국을 남기고 만다.
***
“아기를 가졌어요.”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만큼이나 간결하고 묵직한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태주가 꼬았던 다리를 느리게 풀고 자세를 고쳤다.
태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수아도 그의 움직임이 잦아들자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아기의 아빠가 되어 주세요.”
당황할 법도 하건만 태주의 얼굴엔 놀라는 기색 하나 없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저 덤덤하게 사실 관계를 되물을 뿐이다.
“내 아기입니까?”
당당하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수아가 태주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내 아기냐고 물었습니다.”
사정을 봐주지 않으려는 듯 재차 물어 오는 태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수아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태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상무님의 아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책임져 주세요.”
당돌한 대답 때문이었을까. 지금껏 단조로웠던 태주의 잘난 얼굴에도 변화가 생겼다. 살짝 휘어진 눈썹과 좁아진 미간은 그가 꽤나 당황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강태주.
그는 전 세계 50개가 넘는 체인을 가지고 있는 로얄펠리스 호텔의 수장 강일규의 손자로 호텔의 유일한 차기 승계권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185센티가 넘는 큰 키와 여배우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수려한 외모까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연 설명 따윈 없어도 누구보다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의 직속 비서 이수아다.
그런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태주의 작품도 아닌 제 배 속 아기를 책임지라고 하는 걸까.
“하나, 현재 이 비서가 임신을 했습니다. 둘, 내 아기는 아닙니다. 셋, 이 비서는 내가 그 아기를 책임지길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한 건데, 맞습니까?”
보고서 발표를 마친 직원이 해당 내용을 갈무리하듯 태주는 요점만 정리했다. 덤덤히 말을 하곤 있으나 정리한 말은 사실 꽤 기가 막힌 내용. 그러나 태주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고 그런 그의 안색을 바꿀 요량인지 수아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기의 아빠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아빠라…… 정확하게 원하는 게 뭡니까.”
거칠 것 없던 당당함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상념이 깊어지는 건지 앙 다문 두 입술은 열리는 방법을 모르는 듯 좀처럼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수아의 시선도 태주의 시선도 정면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둘의 시선은 교차되지 않고 교묘히 서로를 벗어났다. 그저 넓은 공간 속 묵직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비단 두 사람만은 아니었다. 지독한 침묵도 함께였다.
토도독 내리던 빗줄기가 순식간에 성을 내는 폭포수처럼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 울리는 소리는 그게 전부였다.
답답했으나 태주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가벼운 내용도 아닌지라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수아도 제 마음을 결정했는지 스르르 입술을 열었다.
“결혼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순간 태주의 눈썹이 하늘로 튀었다.
“결혼?”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들이민 건 수아인데 어째 조급해 보이는 건 태주다.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드레스 입고 걸어가다가 마지막에 단체 사진 찍는 그 결혼 말하는 겁니까.”
수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주는 기가 막힌 제 심사를 드러내듯 다급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왜? 내가 왜 그걸 이 비서랑 합니까.”
“약속하셨잖아요.”
“…….”
“그날 밤에…….”
[프롤로그 끝]
01. 창립기념일
봄비인 줄 알았던 비가 어느덧 여름을 알리는 지독한 장마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온종일 내리는 비로 인해 더운 바람은 가셨지만 그보다 축축하고 눅눅해진 공기가 남았다.
“많이도 오는군.”
그래서일까. 창가에 서서 비로 젖어 가는 바깥 속 풍경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뱉는 태주의 표정이 썩 밝지가 않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그때, 태주의 등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상무님.”
늘 듣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좋았던 건 창밖의 비로 인해 소리의 공명이 조금 줄어든 것이리라.
누구도 보지 못할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몸을 돌리자 저를 빤히 쳐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수아.
168센티의 키에 훌륭한 몸매까지 겸비한 그녀는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블랙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빨간 하이힐은 그야말로 비단 위의 꽃이다.
항상 단정했던 수아의 옷차림이 과감해지는 건 1년에 딱 하루, 오늘뿐이다.
감상이라도 하듯 노골적인 시선으로 수아를 보던 태주가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제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쑥스러워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 비서는 비 오는 날 좋아합니까?”
태주의 음성이 평소보다 굵직하게 떨어졌다. 빗소리를 이기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나 보다.
“네. 좋아합니다.”
태주가 코를 살짝 찡그린다. 내심 수아도 저처럼 비를 싫어한다고 말하길 기대했었던 듯하다.
“왜죠?”
태주의 음성에 심술이 묻어났다. 얼굴도 골이 난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불퉁해졌다. 거기다 곧이어 들려오는 수아의 대답에 곧게 뻗은 눈썹마저 삐뚜름해졌다.
“상무님께서 비 오는 날을 싫어하시니까요.”
“내가 싫어하니까?”
곧바로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자연스레 시선을 들어 살핀 수아의 얼굴은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심드렁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제 말에 대꾸조차 않는 건방진 부하 직원이었지만 불쾌하긴커녕 더 안달만 난다.
그런 태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그저 제 임무에만 집중하며 태주를 채근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회장님보다 먼저 도착해 계셔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태주가 반응이 없자 좀 더 그를 재촉하려는 요량으로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런 수아의 움직임을 좇던 태주의 눈에 감정이 실렸다.
사실 수아의 드레스는 살짝 옆트임이 있는 디자인이라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허벅지 속살이 은근하게 보였는데 그게 꽤 아찔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그녀를 가지고 싶은 욕망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수아도 저를 향한 태주의 시선을 느꼈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파티장으로 이동해야 하는지라 지금으로선 그를 받아 줄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저 상무실 문을 활짝 열고 태주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어서 움직이라는 무언의 압박.
오랜 시간 함께한 두 사람이었기에 태주는 제 비서의 눈빛이 말하는 속뜻 정도는 가뿐하게 알아차렸다. 그리곤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갑시다.”
***
로얄펠리스 호텔 1층 연회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끔한 턱시도와 우아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단정한 캐주얼 차림의 사람도 꽤 있었다. 이들은 주로 호텔 투숙객들.
잔치에는 사람이 북적북적해야 한다는 강일규 회장의 오랜 고집과 신념으로 당일 호텔 투숙객에 한해 창립기념일 파티 초대권이 제공된다. 큰 규모로 진행되는 파티이다 보니 일부러 이날을 맞춰 투숙하는 고객이 있을 정도였다.
태주와 수아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블랙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춘 선남선녀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연인 같았으니까. 두 사람을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는 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잠시 후 오늘 파티의 주최자이며 호텔의 오너인 강일규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일규 회장의 기념 축사를 시작으로 창 밖에 대형 폭죽이 터지며 파티의 흥을 돋구었다.
뒤이어 등장한 인기 걸 그룹이 무대를 꾸미자 파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저기에서 신난 박수 소리와 함성까지 더해져 이날의 행사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리기도 했다.
모두가 파티에 녹아 즐기고 있을 때 태주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홀로 서 있었다.
항상 태주 곁을 지키는 수아도 이때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는 수아의 눈빛에 걱정스러움이 한가득 담겼다.
왜 또 그런 표정으로 있는 거야. 안아 주려고 해도 거절할 거면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삼키려는지 수아가 힘을 주며 양 손을 그러쥐려고 할 때였다.
“또 검은색이구나.”
언제 다가온 건지 일규가 수아의 바로 옆에 서서 말을 걸어왔다.
“오셨어요. 회장님.”
수아는 퍼뜩 허리를 숙여 일규에게 인사했다.
“너까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을 건 또 뭐냐.”
매년 창립기념일만 되면 태주는 파티복으로 검은색 슈트를 입었다. 그래서 수아도 작년부터 그를 따라 검은색 드레스로 통일했는데 일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초상집이라고 어디 광고라도 하려는 건지…….”
일규가 혀를 차며 언짢은 기색을 풍겼지만 수아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일규도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태주 놈은 어때.”
안 좋아요. 또 샴페인만 마시고 있고요. 온몸 가득 난 우울하다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겠어요.
속에서 맴도는 솔직한 대답이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일규도 그 사정을 모르지 않으니까.
“평소와 같으세요.”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거짓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형식적인 대답이었다.
“제 애미 애비 보낸 날에 파티라니 우스운 일이지. 저놈은 아직도 내가 원망스러울 거야.”
일규는 시선을 옮겨 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하는 놈이야. 그저 속으로만 삼키는 게 내 손주지만 독해.”
“상무님도 알고 있으니까요.”
수아의 대답에 일규가 태주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눈빛으로 물었다.
뭘 알아?
“오늘은 상무님이 부모님을 잃은 날이기도 하지만 회장님께서도 생떼 같은 아들과 며느리를 떠나보낸 날이기도 하다는 걸요.”
일규가 탄식하며 수아의 말을 받았다.
“내가 왜 오늘 제사는커녕 이 파티를 하는지 아느냐. 창립기념일 행사야 다른 날로 미뤄도 그만인데.”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규가 수아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위로겠죠.”
일규는 수아의 칼날 같은 분석에 그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같은 날 혼자 미련스럽게 있는 게 뭐 좋아. 사람들 만나며 이리저리 부대끼면 조금은 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영 힘든 모양이야.”
“상무님도 회장님 마음 아실 거예요.”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까지 품기란 힘든 법이지. 더 바라면 욕심일 테고…… 이 비서가 태주 놈 잘 좀 챙겨.”
“네. 회장님.”
말을 마친 일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태주를 바라봤다. 태주를 담은 일규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젖어 있는 듯 했다.
***
다음 날 아침, 너른 킹사이즈 침대에 덩그러니 엎드린 채 누워 있는 태주가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얼굴을 한가득 찌푸린 인상은 정도가 꽤 고통스럽다는 반증.
태주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죽겠네 진짜.”
기분 나쁜 이 두통이 지난밤 마신 샴페인 때문인 건지, 밤새 틀어 놓은 에어컨 바람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지독한 갈증까지 겹쳐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태주가 제 잘난 얼굴을 찌푸리고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윽.
찌릿 하는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태주의 발바닥을 찔렀다. 서둘러 발을 들어 확인하자, 바닥에는 제 주인을 찾아 달라는 듯 작은 귀걸이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숙인 태주가 작은 귀걸이를 집어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익숙한 귀걸이.
태주는 제 손 위에 있는 귀걸이의 주인이 수아라는 걸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수아의 생일날 제가 선물한 거였으니까.
“데려다주다가 떨어뜨린 건가…….”
그러나 낮게 뱉어 낸 혼잣말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태주가 또다시 인상을 쓰며 제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밤을 떠올려 보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흡.”
“하아, 하아.”
뱉어 내는 호흡이 거칠다. 적나라한 나신이 틈이라곤 하나 없이 마주 보고 있는 통에 호흡마저 섞인다. 누구의 숨소리인지, 누구의 날숨인지 분별이 어렵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등허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이내 어깨를 끌어당겨 고개를 묻었다. 남자의 몸은 절정의 순간을 간직한 채 흘러내리는 땀투성이었지만 조금도 역하지 않았다. 오히려 향기로웠다. 수컷의 냄새가 아찔하게 퍼진다.
“흐으음.”
남자의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양손으로 끌어모아 어딘가에 박제라도 해 두고 싶을 정도로.
“위험한데.”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여자의 입술 사이를 갈랐다. 달아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남자의 관자놀이에 솟아오른 힘줄이 선연하다. 조그마한 입술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갔다. 가지런한 치열을 훑고, 말캉한 혀를 지분거리더니 이내 목구멍 끝까지 들어간다.
살짝 버겁다. 남자는 손가락마저 너무 크다.
“이런 얼굴인가.”
“으으…….”
“미친 듯이 빨아 댈 땐 위에선 얼굴이 잘 안 보여. 그저 동그란 이마밖에는.”
남자가 손가락을 뺐다. 기다랗게 늘어지는 타액이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따라 나온다.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또 하나 늘었다.
여자의 입이 오랜만에 자유를 만났다. 굵직한 남자의 손가락이 입 안을 가득 채우다가 사라지니 허전한 마음까지 들었지만 한껏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기엔 알맞았다.
하지만 입술에게 허락된 순간은 너무 짧다.
“으흡!”
여자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안을 파고 들어오는 야한 혀가 뱀이라도 되듯 여자의 입 안을 옭아맸다. 타액이 섞이더니 이내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든다. 남자가 그걸 모를 리 없고.
남자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허리 짓도 빨라졌다.
“아, 아흣! 아흑.”
커다란 진동을 맞은 듯 여자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호흡도 다시금 가빠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짜내듯 두 손을 들어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천천히요. 제발 조금만 천천히.”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으흣.”
“니 안에만 들어가면 미친놈이 돼 버리니까.”
여자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극강의 쾌락이 온몸을 파고 들어오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간간이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박아 대는 것 말고는.
가녀린 여체가 남자의 아래에서 사정없이 짓이겨진다. 치대는 움직임은 끝을 모르는 듯 이어졌고 동시에 울리는 심장 소리마저 야하게 들린다.
쿵쿵쿵쿵쿵.
끊임없는 추삽질에 그마저도 멈추지를 않는다. 발가락이 둥글게 모아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한다. 남자의 어깨를 파고드는 여자의 손톱이 깊은 자국을 남기고 만다.
***
“아기를 가졌어요.”
창밖으로 내리는 빗소리만큼이나 간결하고 묵직한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태주가 꼬았던 다리를 느리게 풀고 자세를 고쳤다.
태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수아도 그의 움직임이 잦아들자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아기의 아빠가 되어 주세요.”
당황할 법도 하건만 태주의 얼굴엔 놀라는 기색 하나 없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저 덤덤하게 사실 관계를 되물을 뿐이다.
“내 아기입니까?”
당당하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간 것인지 수아가 태주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내 아기냐고 물었습니다.”
사정을 봐주지 않으려는 듯 재차 물어 오는 태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수아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태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상무님의 아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책임져 주세요.”
당돌한 대답 때문이었을까. 지금껏 단조로웠던 태주의 잘난 얼굴에도 변화가 생겼다. 살짝 휘어진 눈썹과 좁아진 미간은 그가 꽤나 당황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강태주.
그는 전 세계 50개가 넘는 체인을 가지고 있는 로얄펠리스 호텔의 수장 강일규의 손자로 호텔의 유일한 차기 승계권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185센티가 넘는 큰 키와 여배우였던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수려한 외모까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연 설명 따윈 없어도 누구보다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그의 직속 비서 이수아다.
그런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태주의 작품도 아닌 제 배 속 아기를 책임지라고 하는 걸까.
“하나, 현재 이 비서가 임신을 했습니다. 둘, 내 아기는 아닙니다. 셋, 이 비서는 내가 그 아기를 책임지길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한 건데, 맞습니까?”
보고서 발표를 마친 직원이 해당 내용을 갈무리하듯 태주는 요점만 정리했다. 덤덤히 말을 하곤 있으나 정리한 말은 사실 꽤 기가 막힌 내용. 그러나 태주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고 그런 그의 안색을 바꿀 요량인지 수아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기의 아빠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아빠라…… 정확하게 원하는 게 뭡니까.”
거칠 것 없던 당당함에 또다시 제동이 걸렸다. 상념이 깊어지는 건지 앙 다문 두 입술은 열리는 방법을 모르는 듯 좀처럼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수아의 시선도 태주의 시선도 정면을 향하고는 있었으나 둘의 시선은 교차되지 않고 교묘히 서로를 벗어났다. 그저 넓은 공간 속 묵직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비단 두 사람만은 아니었다. 지독한 침묵도 함께였다.
토도독 내리던 빗줄기가 순식간에 성을 내는 폭포수처럼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 울리는 소리는 그게 전부였다.
답답했으나 태주도 더는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가벼운 내용도 아닌지라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수아도 제 마음을 결정했는지 스르르 입술을 열었다.
“결혼해 주세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순간 태주의 눈썹이 하늘로 튀었다.
“결혼?”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들이민 건 수아인데 어째 조급해 보이는 건 태주다.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드레스 입고 걸어가다가 마지막에 단체 사진 찍는 그 결혼 말하는 겁니까.”
수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주는 기가 막힌 제 심사를 드러내듯 다급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왜? 내가 왜 그걸 이 비서랑 합니까.”
“약속하셨잖아요.”
“…….”
“그날 밤에…….”
[프롤로그 끝]
01. 창립기념일
봄비인 줄 알았던 비가 어느덧 여름을 알리는 지독한 장마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온종일 내리는 비로 인해 더운 바람은 가셨지만 그보다 축축하고 눅눅해진 공기가 남았다.
“많이도 오는군.”
그래서일까. 창가에 서서 비로 젖어 가는 바깥 속 풍경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뱉는 태주의 표정이 썩 밝지가 않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그때, 태주의 등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상무님.”
늘 듣던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좋았던 건 창밖의 비로 인해 소리의 공명이 조금 줄어든 것이리라.
누구도 보지 못할 옅은 미소를 입가에 걸며 몸을 돌리자 저를 빤히 쳐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수아.
168센티의 키에 훌륭한 몸매까지 겸비한 그녀는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블랙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빨간 하이힐은 그야말로 비단 위의 꽃이다.
항상 단정했던 수아의 옷차림이 과감해지는 건 1년에 딱 하루, 오늘뿐이다.
감상이라도 하듯 노골적인 시선으로 수아를 보던 태주가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제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쑥스러워 아무 말이나 던졌다.
“이 비서는 비 오는 날 좋아합니까?”
태주의 음성이 평소보다 굵직하게 떨어졌다. 빗소리를 이기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나 보다.
“네. 좋아합니다.”
태주가 코를 살짝 찡그린다. 내심 수아도 저처럼 비를 싫어한다고 말하길 기대했었던 듯하다.
“왜죠?”
태주의 음성에 심술이 묻어났다. 얼굴도 골이 난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불퉁해졌다. 거기다 곧이어 들려오는 수아의 대답에 곧게 뻗은 눈썹마저 삐뚜름해졌다.
“상무님께서 비 오는 날을 싫어하시니까요.”
“내가 싫어하니까?”
곧바로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자연스레 시선을 들어 살핀 수아의 얼굴은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심드렁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제 말에 대꾸조차 않는 건방진 부하 직원이었지만 불쾌하긴커녕 더 안달만 난다.
그런 태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그저 제 임무에만 집중하며 태주를 채근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회장님보다 먼저 도착해 계셔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태주가 반응이 없자 좀 더 그를 재촉하려는 요량으로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그런 수아의 움직임을 좇던 태주의 눈에 감정이 실렸다.
사실 수아의 드레스는 살짝 옆트임이 있는 디자인이라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허벅지 속살이 은근하게 보였는데 그게 꽤 아찔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그녀를 가지고 싶은 욕망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수아도 저를 향한 태주의 시선을 느꼈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파티장으로 이동해야 하는지라 지금으로선 그를 받아 줄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저 상무실 문을 활짝 열고 태주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어서 움직이라는 무언의 압박.
오랜 시간 함께한 두 사람이었기에 태주는 제 비서의 눈빛이 말하는 속뜻 정도는 가뿐하게 알아차렸다. 그리곤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였다.
“갑시다.”
***
로얄펠리스 호텔 1층 연회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끔한 턱시도와 우아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단정한 캐주얼 차림의 사람도 꽤 있었다. 이들은 주로 호텔 투숙객들.
잔치에는 사람이 북적북적해야 한다는 강일규 회장의 오랜 고집과 신념으로 당일 호텔 투숙객에 한해 창립기념일 파티 초대권이 제공된다. 큰 규모로 진행되는 파티이다 보니 일부러 이날을 맞춰 투숙하는 고객이 있을 정도였다.
태주와 수아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블랙으로 드레스 코드를 맞춘 선남선녀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연인 같았으니까. 두 사람을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는 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잠시 후 오늘 파티의 주최자이며 호텔의 오너인 강일규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일규 회장의 기념 축사를 시작으로 창 밖에 대형 폭죽이 터지며 파티의 흥을 돋구었다.
뒤이어 등장한 인기 걸 그룹이 무대를 꾸미자 파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저기에서 신난 박수 소리와 함성까지 더해져 이날의 행사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리기도 했다.
모두가 파티에 녹아 즐기고 있을 때 태주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홀로 서 있었다.
항상 태주 곁을 지키는 수아도 이때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는 수아의 눈빛에 걱정스러움이 한가득 담겼다.
왜 또 그런 표정으로 있는 거야. 안아 주려고 해도 거절할 거면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삼키려는지 수아가 힘을 주며 양 손을 그러쥐려고 할 때였다.
“또 검은색이구나.”
언제 다가온 건지 일규가 수아의 바로 옆에 서서 말을 걸어왔다.
“오셨어요. 회장님.”
수아는 퍼뜩 허리를 숙여 일규에게 인사했다.
“너까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을 건 또 뭐냐.”
매년 창립기념일만 되면 태주는 파티복으로 검은색 슈트를 입었다. 그래서 수아도 작년부터 그를 따라 검은색 드레스로 통일했는데 일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초상집이라고 어디 광고라도 하려는 건지…….”
일규가 혀를 차며 언짢은 기색을 풍겼지만 수아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일규도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태주 놈은 어때.”
안 좋아요. 또 샴페인만 마시고 있고요. 온몸 가득 난 우울하다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겠어요.
속에서 맴도는 솔직한 대답이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일규도 그 사정을 모르지 않으니까.
“평소와 같으세요.”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거짓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형식적인 대답이었다.
“제 애미 애비 보낸 날에 파티라니 우스운 일이지. 저놈은 아직도 내가 원망스러울 거야.”
일규는 시선을 옮겨 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하는 놈이야. 그저 속으로만 삼키는 게 내 손주지만 독해.”
“상무님도 알고 있으니까요.”
수아의 대답에 일규가 태주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눈빛으로 물었다.
뭘 알아?
“오늘은 상무님이 부모님을 잃은 날이기도 하지만 회장님께서도 생떼 같은 아들과 며느리를 떠나보낸 날이기도 하다는 걸요.”
일규가 탄식하며 수아의 말을 받았다.
“내가 왜 오늘 제사는커녕 이 파티를 하는지 아느냐. 창립기념일 행사야 다른 날로 미뤄도 그만인데.”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규가 수아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위로겠죠.”
일규는 수아의 칼날 같은 분석에 그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같은 날 혼자 미련스럽게 있는 게 뭐 좋아. 사람들 만나며 이리저리 부대끼면 조금은 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영 힘든 모양이야.”
“상무님도 회장님 마음 아실 거예요.”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까지 품기란 힘든 법이지. 더 바라면 욕심일 테고…… 이 비서가 태주 놈 잘 좀 챙겨.”
“네. 회장님.”
말을 마친 일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태주를 바라봤다. 태주를 담은 일규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젖어 있는 듯 했다.
***
다음 날 아침, 너른 킹사이즈 침대에 덩그러니 엎드린 채 누워 있는 태주가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얼굴을 한가득 찌푸린 인상은 정도가 꽤 고통스럽다는 반증.
태주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죽겠네 진짜.”
기분 나쁜 이 두통이 지난밤 마신 샴페인 때문인 건지, 밤새 틀어 놓은 에어컨 바람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거기다 지독한 갈증까지 겹쳐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태주가 제 잘난 얼굴을 찌푸리고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윽.
찌릿 하는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태주의 발바닥을 찔렀다. 서둘러 발을 들어 확인하자, 바닥에는 제 주인을 찾아 달라는 듯 작은 귀걸이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숙인 태주가 작은 귀걸이를 집어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익숙한 귀걸이.
태주는 제 손 위에 있는 귀걸이의 주인이 수아라는 걸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수아의 생일날 제가 선물한 거였으니까.
“데려다주다가 떨어뜨린 건가…….”
그러나 낮게 뱉어 낸 혼잣말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태주가 또다시 인상을 쓰며 제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밤을 떠올려 보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