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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난데없이 퍼져오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퍽이나 거슬렸다. 마지막 미팅 시공업체 관계자로 보이는 남자가 수아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넨 것. 태주는 순간적으로 분노를 경험했다. 흡사 가드를 쳐둔 제 공간 안에 침입자가 들어온 느낌이랄까. 거기다 그 분노 게이지는 수아의 다음 말 때문에 맥스를 찍었다.

“응, 오빠.”

수줍은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여자가 지금 누구 앞에서 뭐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 수아를 끌어 오고 싶은 걸 정신력으로 근근이 참으며 버텼다. 덕분에 머리를 짓이기는 듯한 기분 나쁜 두통이 시작됐다.

태주는 미팅을 하는 내내 수아가 남자를 향해 밝게 웃어 주던 모습이 아른거려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제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환한 웃음.

퇴근하고 뭐 먹을지 생각해 두라니 그럼 퇴근하고 같이 밥을 먹기로 한 건가.

단둘이서?

근데 이 남자가 분명히 ‘수아야.’ 하고 불렀다. ‘수아 씨.’라던가 ‘이 비서님.’이 아니라 당당하게 ‘수아야.’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란 건데 도대체 뭐하는 자식이야!

EZ토탈 인테리어 대표 한주호.

태주는 그가 내민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상무님?”

태주는 주호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가 내민 인테리어 기획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부분 이런 미팅에는 시공사 측의 담당 부서 직원이 참석하는 게 일반적인데 EZ토탈에서는 대표님께서 직접 오셨군요.”

“제가 담당자니까요.”

주호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그는 덩치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보이는 구릿빛 피부와 선명하게 드러나는 힘줄이 그의 남성미를 부각시켰다.

“저희 EZ토탈은 모든 직원들이 수평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각자 맡은 업무에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고, 그 외적 업무는 철저히 지양합니다. 물론 직원 간 상호 연대는 가지면서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에요. 결국 저를 수식하고 있는 대표이사는 대외적인 업무활동과 계약 체결이란 업무를 가진 일반 사원인 거죠.”

“상당히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혹시 외국에서 생활하셨습니까?”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이라고?

하시엔다하이츠. LA 외곽에 있는 소도시로 수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언젠가 수아에게서 들었던 그 생소한 외국 도시가 어렵지 않게 태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디서 생활하셨습니까?”

태주가 낮게 물었다.

“하시엔다하이츠요.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 생소하실 겁니다. LA에서 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동양인들이나 멕시칸들이 많이 살죠.”

“이 비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군요.”

그 말에 주호가 반색하며 말을 덧붙인다.

“아시는군요. 우리 수아가 상무님께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우리 수아?”

태주가 주호의 말을 짚었다. 우리 수아라니. 등장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니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언짢다. 덕분에 태주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됐다. 적의가 느껴질 정도로 불쾌감이 잔뜩 담겨진 음성이라 싸움을 거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 수아와는 어릴 때부터 아주 가까웠습니다.”

부연 설명을 곁들이는 주호의 표정이 퍽 여유롭다. 태주의 튀는 목소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래서 서로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답니다.”

딱히 적개심을 드러내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도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태주를 자극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다 알 수야 있겠습니까.”

발끈한 태주가 굳이 주호의 말을 정정하고 나섰지만 주호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걸었다.

“다 알죠.”

짧지만 확실한 한마디에 태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기 싸움으로는 절대 지지 않는 태주였지만 어쩐지 자꾸만 밀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상무님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나 말입니까?”

“네.”

떳떳하지 못한 관계 때문이었을까. 태주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반대로 주호의 어깨는 한없이 당당해 보인다.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군요. 이 비서가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닌데.”

풉.

크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주호가 분명 코웃음을 쳤다. 덕분에 태주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아, 죄송합니다. 수아가 수다스럽지 않다는 말이 너무 웃겨서요.”

주호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랑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말을 안 끊어서 전 한마디도 못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 수아가 수다스럽지 않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주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무님과는 많이 안 친한가 봅니다. 하긴, 친한 게 더 이상할 수도 있겠네요.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그저 직장 상사일뿐이니까.”

그저 직장 상사라.

주호의 마지막 말이 퍽 도전처럼 느껴졌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기분도 상했지만 그렇다고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태주와 수아가 침대 위에서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이긴 하나 그건 말 그대로 은밀한 관계일 뿐, 공식적으론 상사와 비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쁘지 않은 관계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통탄할 정도로 마음에 차지 않는 관계였다. 태주는 제 씁쓸한 마음을 담아 마른 입술을 쓸었다.

“사실 이번에 로얄펠리스에서 시공업체를 공모한다고 알려 준 것도 수아였습니다.”

“이 비서가요?”

딱히 의도를 두지는 않았다. 주호가 무슨 말만 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게 수아의 이름인지라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주호는 태주가 오해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까지 들어 보이며 결백하다는 뜻을 전했다.

“아 오해는 마세요. 수아는 공모가 있다는 것만 알려 줬을 뿐입니다. 그 외엔 어떠한 편법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하찮은 놈은 아니거든요.”

하찮은 놈이라니. 이젠 주호가 하는 말은 다 저를 지칭하는 걸로 들린다. ‘야 이 하찮은 놈아.’ 하고 소리를 지는 것만 같다. 답답한 마음은 커져 가고 태주는 속을 게워 내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 정체가 뭐야.

줄곧 여유로워 보이는 주호의 미소가 못내 거슬린다. 대화 내내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수아의 이름을 부르는 능숙함 또한 불쾌하기 짝이 없다.

태주는 알싸하게 퍼져 오는 투통을 느끼곤 서둘러 주호와의 미팅을 마무리했다.

“오늘 기획안은 잘 봤습니다. 내부 회의를 거쳐 빠른 시일 안에 결과를 알려 드리도록 하죠.”

“네.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



태주는 오늘 하루 종일 시간을 할애해 진행한 시공업체 선정 미팅을 정리하며 각각의 기획안들을 재검토하고, 우수 기획안을 선별했다.

그리고 선별된 기획안들을 가지고 또다시 내부 회의를 거친 후에 최종 시공사를 결정해야겠지만 오늘 제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다.

업무가 마무리되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알리기라도 하듯 손에 쥐고 있던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미팅 내내 거슬리던 한주호.

그가 내놓은 기획안이 형편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놈은 능력도 있었다.

젠장.

물론 이후에 호텔 실무진들과 다시 회의를 하겠지만 주호가 내민 기획안은 상위에 랭크될 게 분명해 보였다. 직권 남용을 발휘해 떨궈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영 거슬리는 한주호를 계속 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태주의 입매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순간 태주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급하게 뒤돌아서 인터폰을 눌렀다.

“고민은 다했습니까?”

-네?

“그 고민한 결과를 들어야겠는데.”

-아…… 상무님. 그건 제가 아직…….

수아가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태주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서둘러 수아의 말을 잘랐다.

“나는 오늘 들어야겠습니다.”

끊어진 인터폰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아가 고개를 들어 태주의 방문을 쳐다봤다. 뭔 상황인 건지 태주의 이상스런 행동이 낯설기만 하다.

태주는 매사 서두르는 법이 없다. 항상 계획과 일정에 맞춰 생활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꼭 양반집 자제였을 거다.

비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인간관계의 도리상 저를 잡았을 뿐, 처음의 제안사항을 상기시키자 곧바로 수긍한 그였으니까.

그런 그가 오늘따라 이상하다. 무언가 조급해 보이고 사람을 보챈다. ‘태주스럽다’의 골자가 어그러지고 있지만 상사인 그에게 가타부타 따질 수도 없는 처지라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곤 주호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두 시간 뒤로 미뤘다.



***



거실 한쪽 소파에 앉아 있는 수아의 자세가 면접을 앞둔 사람마냥 각이 졌다.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살피는 모습은 어색하기만 하다. 처음 온 건 아니지만 그동안은 태주에게 안겨 침실로 직행했던지라 집을 감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의 오피스텔은 전체가 그레이 톤으로 꾸며져 갖가지 가구들이 있었지만 공간이 워낙 넓은지라 비어 보이는 느낌이다. 거기다 빈틈 하나 없이 정돈된 소품들은 흡사 모델 하우스 같다.

수아의 시선이 거실을 넘어 주방으로 향하자 마침 주방에서 와인 한 병과 와인 잔 두 개를 손에 들고 나오는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왜 이렇게 얼었어?”

“이 집 소파에 앉아 있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봐요.”

하긴, 이 오피스텔에서 태주와 수아가 문명인으로 있었던 적은 드물었다. 태초의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수아의 말뜻을 이해한 태주가 피식 웃었다.

“긴장 풀어. 오늘은 안 할 거니까.”

“…….”

아무 대답이 없는 수아를 보자 태주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 하고 싶나?”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린 태주가 수아의 옆자리에 앉으며 놀리듯 물었다. 수아는 그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부러 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혀요. 약속 있어서 빨리 가 봐야 해요.”

그 순간 태주의 인상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간다고? 누구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