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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 주세요>
3. 우리 관계도 끝낼 생각인가?
“두 달 남았어요.”
“무슨 말입니까.”
알면서도 되물었다. 혹시나 모르는 척을 하면 넘어가 줄까 싶어서. 하지만 수아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살짝 인상을 썼다. 그래서일까. 태주는 제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저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았다구요.”
“아…….”
탄식 같은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태주가 말이 없다. 그리고 그런 태주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건지 수아도 그 이상 말을 이어 가진 않았다.
며칠째 내리는 비와 함께 불어 대는 바람이 창을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방음이 꽤 잘 되는 사무실이었지만 한쪽 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탓에 세찬 바람이 불어닥칠 때면 그 바람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태주가 갑갑함을 느꼈는지 셔츠의 위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데스크 위의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 온도도 낮췄다.
매년 반갑지 않은 장마는 항상 공간을 눅눅하게 만들고 습도를 높였는데, 장마가 높이는 건 비단 습도만이 아니었던 걸까.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는 태주의 얼굴에 불청객처럼 불안과 못마땅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 장마 때문이다.
비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는 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이 망할 장마 때문이다. 결코 제 앞에 있는 저 여자가 나를 떠나겠다고 말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이렇듯 태주의 버라이어티한 행동과 표정에도 수아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제 다음 할 말을 내질렀다.
“9월까지 출근할게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양 태주의 입이 벌어졌다. 어처구니가 없고 어이도 없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올 생각을 안했지만 근근이 집 나간 정신을 불러들이며 이성을 챙겼다.
그리곤 이미 자신의 패가 다 드러났다는 것도 모르고 침착한 척 애를 썼다.
“계약 연장합시다. 지금 연봉에서 20프로 인상하겠습니다.”
일규의 비서로 1년, 태주의 비서로 2년 10개월. 수아가 로얄펠리스 호텔에서 근무한 시간이다. 신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근무연차가 만 4년이 되지 않은 직원에게 제안하는 내용치고는 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파격적인 제안에도 수아는 대답이 없다. 심지어 표정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태주를 쳐다보기만 할뿐.
결국 제풀에 지친 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20프로가 부족합니까? 그럼 30프로…….”
“상무님.”
수아가 태주의 말을 잘랐다.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수아는 항상 태주의 뒤에서 또는 옆에서 그를 보좌할 뿐, 단 한 번도 그보다 앞서 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이 있어도 항상 태주의 말 다음이었다.
그런 수아였다.
그런데 이번엔 수아가 태주보다 먼저 움직인다. 태주에게 줄 시간 따위는 없다는 듯 내지르는 말소리엔 급박함마저 서렸다.
“저는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비서…….”
“처음부터 3년이었고, 3년 동안만 일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신 건 상무님이셨습니다. 이제 그 3년까지 두 달 남았구요. 내일 오전 중으로 후임 비서 관련 채용 공지 올리겠습니다.”
휘몰아치는 말에 태주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갑작스레 변한 수아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다가도 제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게 있진 않을까 머리를 굴렸다. 실수를 했다면 사과할 것이고, 화가 났다면 풀어 줄 생각이다.
그러다 문득 태주는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 함께 지내 온 수아에게 있는 고질병을 잘 아는지라.
수아는 쉽게 타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대쪽 같은 성격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이 없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만다. 그만두겠다는 게 허투루 던지는 말이 아니라면 번복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태주의 손에 힘이 빠졌다. 수아를 바라보는 시선도 갈 곳을 잃었다.
보내 줘야 하는 건가.
애초에 3년이라는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건 태주 본인이었으니 더 우기기도 애매한 상황.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태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세차게 내리는 비는 좀체 그치지를 않는다. 비가 내리다 못해 퍼붓고 있다. 이 망할 놈의 비는 항상 거슬린다.
왠지 올해 장마는 다른 해보다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알겠습니다.”
잔뜩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수아에겐 조금 다르게 들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답에 미련 따위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눈빛도 흔들렸다.
줄곧 조그만 여지조차 없던 수아였으나 태주의 알겠다는 말 한마디에 처음으로 동요했다.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수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상무실로 들어온 내내 무미건조했던 수아의 행동들로 볼 땐 꽤 큰 변화였으나 태주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 보지 못한 듯했다.
“이 비서 마음이 확고한데 내가 더 우긴다면 무례한 행동이 되는 걸 테고.”
“……그렇지 않습니다.”
수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긴장한 듯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 떨림을 눈치챘는지 태주가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그땐 이미 수아가 감정 정리를 끝낸 후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아의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생겼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을 정도다.
태주는 잠시 제가 예민했던 거라 여기고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바로 공지 올리고 신규 채용 진행하죠. 신입 비서에게 인수인계까지 마치려면 서둘러야겠군요. 마지막까지 이 비서가 수고가 많겠습니다.”
“제 일인데요. 상무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럽시다. 이 비서가 서류 심사해서 면접 일정 정해지면 알려 주고.”
“네. 상무님.”
대답을 마친 수아가 데스크에서 일정표를 집고 뒤돌아섰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태주가 인상을 썼다.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으니까.
“후회 안 합니까.”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움직여 걸어 나가던 수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강풍을 만난 파도 마냥 세차게 요동치는 마음을 억지로 짓이기며 항상 연습했던 환한 미소까지 띠며 돌아봤다.
“후회라니요. 부족함이 많은 비서라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분이 오시리라 생각하니 기쁠 뿐입니다.”
그녀의 언사에 기가 찬다. 못마땅해 죽겠다. 저는 열불이 나는데 그녀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명분이야 파트너지만 서로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는데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싶어 심통이 난다.
“나랑 안 보는 게 그렇게 기쁠 일인가.”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불편한 속내를 비쳤지만 수아는 태연하기만 하다. 심지어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리더니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다급해진 태주가 서둘러 수아를 잡아 세웠다.
“우리 관계도 끝낼 생각인가?”
이러니저러니 빙빙 돌리지 않고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함께 나눴던 열정 가득한 그 밤도 모두 끝나는 거냐고.
수아가 다시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고 태주는 온몸이 긴장이 되는지 괜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이 바싹 말라 와 마른침도 꿀꺽 삼켰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웠는지.
“상무님께서는 어떤 생각이세요?”
당연히 끝낼 생각이 없다. 나는 지금 우리 관계가 아주 좋으니까.
하지만 태주는 말을 아꼈다. 자존심인지 아님 저를 떠나겠다고 요망한 말을 뱉은 수아에 대한 심술인지는 모르겠다.
“글쎄.”
애매모호한 대답에 수아가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건 그저 태주의 착각일까. 태주는 수아의 마음이 궁금했는지라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이 비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민을 해 보겠다라. 만족할만한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대답도 아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만큼이나 이 관계가 싫지 않은 거지. 끝내기가 아쉬운 거잖아.
“얼마나?”
“……이번 주까지 말씀드릴게요.”
***
태주는 오전부터 연속해서 있는 미팅에 지쳐 갔다. 호텔 객실 레노베이션 준비 때문에 공사를 맡길 시공사 담당자들과의 릴레이 미팅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태주는 항상 제 사무실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동선의 불편함도 있었지만 태주가 진행하는 업무들이 한두 건이 아니라는 게 더 컸다. 수시로 그에게 결재를 받으러 오는 각 부처의 직원들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어려웠으니까.
따라서 태주는 시공사들과 미팅을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는 다른 업무들도 보는지라 피로가 쌓였다. 5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데스크 위에 차곡차곡 쌓여진 각 시공사들의 프레젠테이션 복사본들과 내부 설계 도안 등 재검토해야 할 서류만 어림잡아 수백 장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아직 태주가 만나야 할 시공사가 한 군데 더 남아 있다.
태주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쉼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눈이 뻑뻑해졌다.
인공 눈물이 어디 있더라…… 아 어제 다 썼지. 이 비서에게 새로 사다 놓으라고 얘기해야겠다.
몇 달 전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태주가 서랍을 뒤져 담배를 꺼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곤 다시 집어넣었다. 이 비서가 본다면 또 잔소리를 해 댈게 분명하니까.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더 할까. 아 벌써 두 잔 마셨구나. 이 비서가 하루에 두 잔만 마시라고 했지.
태주는 제 앞에 놓인 짙은 갈색의 루이보스티를 쳐다봤다.
아까 점심시간에 수아가 마시는 걸 보고 저도 달라고 했는데 맛이 영 제 스타일은 아니다. 카페인이 없어서 임산부도 마실 수 있는 차라나 뭐라나. 이수아는 임산부도 아니면서 향 좋은 커피나 마실 것이지 왜 이런 걸 마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똑똑똑.
그때 들리는 노크 소리.
“네.”
태주가 대답하자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수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상무님. 마지막 미팅 업체 담당자 님 도착하셨어요.”
“네. 시작하죠.”
태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아의 안내에 따라 시공업체 담당자가 움직이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시작될 업무가 벌써부터 고단한지 태주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눌렀다. 그리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며 앞에 놓인 루이보스티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수아야. 나중에 퇴근하고 뭐 먹을지 생각해 둬.”
3. 우리 관계도 끝낼 생각인가?
“두 달 남았어요.”
“무슨 말입니까.”
알면서도 되물었다. 혹시나 모르는 척을 하면 넘어가 줄까 싶어서. 하지만 수아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 살짝 인상을 썼다. 그래서일까. 태주는 제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저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았다구요.”
“아…….”
탄식 같은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태주가 말이 없다. 그리고 그런 태주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려는 건지 수아도 그 이상 말을 이어 가진 않았다.
며칠째 내리는 비와 함께 불어 대는 바람이 창을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방음이 꽤 잘 되는 사무실이었지만 한쪽 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탓에 세찬 바람이 불어닥칠 때면 그 바람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태주가 갑갑함을 느꼈는지 셔츠의 위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데스크 위의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 온도도 낮췄다.
매년 반갑지 않은 장마는 항상 공간을 눅눅하게 만들고 습도를 높였는데, 장마가 높이는 건 비단 습도만이 아니었던 걸까.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는 태주의 얼굴에 불청객처럼 불안과 못마땅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 장마 때문이다.
비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는 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이 망할 장마 때문이다. 결코 제 앞에 있는 저 여자가 나를 떠나겠다고 말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이렇듯 태주의 버라이어티한 행동과 표정에도 수아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제 다음 할 말을 내질렀다.
“9월까지 출근할게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양 태주의 입이 벌어졌다. 어처구니가 없고 어이도 없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올 생각을 안했지만 근근이 집 나간 정신을 불러들이며 이성을 챙겼다.
그리곤 이미 자신의 패가 다 드러났다는 것도 모르고 침착한 척 애를 썼다.
“계약 연장합시다. 지금 연봉에서 20프로 인상하겠습니다.”
일규의 비서로 1년, 태주의 비서로 2년 10개월. 수아가 로얄펠리스 호텔에서 근무한 시간이다. 신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근무연차가 만 4년이 되지 않은 직원에게 제안하는 내용치고는 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파격적인 제안에도 수아는 대답이 없다. 심지어 표정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태주를 쳐다보기만 할뿐.
결국 제풀에 지친 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20프로가 부족합니까? 그럼 30프로…….”
“상무님.”
수아가 태주의 말을 잘랐다.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수아는 항상 태주의 뒤에서 또는 옆에서 그를 보좌할 뿐, 단 한 번도 그보다 앞서 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이 있어도 항상 태주의 말 다음이었다.
그런 수아였다.
그런데 이번엔 수아가 태주보다 먼저 움직인다. 태주에게 줄 시간 따위는 없다는 듯 내지르는 말소리엔 급박함마저 서렸다.
“저는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비서…….”
“처음부터 3년이었고, 3년 동안만 일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신 건 상무님이셨습니다. 이제 그 3년까지 두 달 남았구요. 내일 오전 중으로 후임 비서 관련 채용 공지 올리겠습니다.”
휘몰아치는 말에 태주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갑작스레 변한 수아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다가도 제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게 있진 않을까 머리를 굴렸다. 실수를 했다면 사과할 것이고, 화가 났다면 풀어 줄 생각이다.
그러다 문득 태주는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 함께 지내 온 수아에게 있는 고질병을 잘 아는지라.
수아는 쉽게 타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대쪽 같은 성격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이 없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야 만다. 그만두겠다는 게 허투루 던지는 말이 아니라면 번복은 없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태주의 손에 힘이 빠졌다. 수아를 바라보는 시선도 갈 곳을 잃었다.
보내 줘야 하는 건가.
애초에 3년이라는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인 건 태주 본인이었으니 더 우기기도 애매한 상황.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태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세차게 내리는 비는 좀체 그치지를 않는다. 비가 내리다 못해 퍼붓고 있다. 이 망할 놈의 비는 항상 거슬린다.
왠지 올해 장마는 다른 해보다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알겠습니다.”
잔뜩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수아에겐 조금 다르게 들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대답에 미련 따위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눈빛도 흔들렸다.
줄곧 조그만 여지조차 없던 수아였으나 태주의 알겠다는 말 한마디에 처음으로 동요했다.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수아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상무실로 들어온 내내 무미건조했던 수아의 행동들로 볼 땐 꽤 큰 변화였으나 태주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 보지 못한 듯했다.
“이 비서 마음이 확고한데 내가 더 우긴다면 무례한 행동이 되는 걸 테고.”
“……그렇지 않습니다.”
수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긴장한 듯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 떨림을 눈치챘는지 태주가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봤지만 그땐 이미 수아가 감정 정리를 끝낸 후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아의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생겼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을 정도다.
태주는 잠시 제가 예민했던 거라 여기고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바로 공지 올리고 신규 채용 진행하죠. 신입 비서에게 인수인계까지 마치려면 서둘러야겠군요. 마지막까지 이 비서가 수고가 많겠습니다.”
“제 일인데요. 상무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럽시다. 이 비서가 서류 심사해서 면접 일정 정해지면 알려 주고.”
“네. 상무님.”
대답을 마친 수아가 데스크에서 일정표를 집고 뒤돌아섰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태주가 인상을 썼다. 주저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으니까.
“후회 안 합니까.”
곧게 뻗은 긴 다리를 움직여 걸어 나가던 수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강풍을 만난 파도 마냥 세차게 요동치는 마음을 억지로 짓이기며 항상 연습했던 환한 미소까지 띠며 돌아봤다.
“후회라니요. 부족함이 많은 비서라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분이 오시리라 생각하니 기쁠 뿐입니다.”
그녀의 언사에 기가 찬다. 못마땅해 죽겠다. 저는 열불이 나는데 그녀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명분이야 파트너지만 서로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는데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싶어 심통이 난다.
“나랑 안 보는 게 그렇게 기쁠 일인가.”
어린아이가 칭얼대듯 불편한 속내를 비쳤지만 수아는 태연하기만 하다. 심지어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리더니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다급해진 태주가 서둘러 수아를 잡아 세웠다.
“우리 관계도 끝낼 생각인가?”
이러니저러니 빙빙 돌리지 않고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지금껏 두 사람이 함께 나눴던 열정 가득한 그 밤도 모두 끝나는 거냐고.
수아가 다시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고 태주는 온몸이 긴장이 되는지 괜스레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이 바싹 말라 와 마른침도 꿀꺽 삼켰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웠는지.
“상무님께서는 어떤 생각이세요?”
당연히 끝낼 생각이 없다. 나는 지금 우리 관계가 아주 좋으니까.
하지만 태주는 말을 아꼈다. 자존심인지 아님 저를 떠나겠다고 요망한 말을 뱉은 수아에 대한 심술인지는 모르겠다.
“글쎄.”
애매모호한 대답에 수아가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건 그저 태주의 착각일까. 태주는 수아의 마음이 궁금했는지라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이 비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민을 해 보겠다라. 만족할만한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대답도 아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만큼이나 이 관계가 싫지 않은 거지. 끝내기가 아쉬운 거잖아.
“얼마나?”
“……이번 주까지 말씀드릴게요.”
***
태주는 오전부터 연속해서 있는 미팅에 지쳐 갔다. 호텔 객실 레노베이션 준비 때문에 공사를 맡길 시공사 담당자들과의 릴레이 미팅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태주는 항상 제 사무실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동선의 불편함도 있었지만 태주가 진행하는 업무들이 한두 건이 아니라는 게 더 컸다. 수시로 그에게 결재를 받으러 오는 각 부처의 직원들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어려웠으니까.
따라서 태주는 시공사들과 미팅을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는 다른 업무들도 보는지라 피로가 쌓였다. 5분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데스크 위에 차곡차곡 쌓여진 각 시공사들의 프레젠테이션 복사본들과 내부 설계 도안 등 재검토해야 할 서류만 어림잡아 수백 장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아직 태주가 만나야 할 시공사가 한 군데 더 남아 있다.
태주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쉼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눈이 뻑뻑해졌다.
인공 눈물이 어디 있더라…… 아 어제 다 썼지. 이 비서에게 새로 사다 놓으라고 얘기해야겠다.
몇 달 전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태주가 서랍을 뒤져 담배를 꺼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곤 다시 집어넣었다. 이 비서가 본다면 또 잔소리를 해 댈게 분명하니까.
그럼 커피라도 한 잔 더 할까. 아 벌써 두 잔 마셨구나. 이 비서가 하루에 두 잔만 마시라고 했지.
태주는 제 앞에 놓인 짙은 갈색의 루이보스티를 쳐다봤다.
아까 점심시간에 수아가 마시는 걸 보고 저도 달라고 했는데 맛이 영 제 스타일은 아니다. 카페인이 없어서 임산부도 마실 수 있는 차라나 뭐라나. 이수아는 임산부도 아니면서 향 좋은 커피나 마실 것이지 왜 이런 걸 마시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똑똑똑.
그때 들리는 노크 소리.
“네.”
태주가 대답하자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수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상무님. 마지막 미팅 업체 담당자 님 도착하셨어요.”
“네. 시작하죠.”
태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아의 안내에 따라 시공업체 담당자가 움직이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시작될 업무가 벌써부터 고단한지 태주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눌렀다. 그리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며 앞에 놓인 루이보스티를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수아야. 나중에 퇴근하고 뭐 먹을지 생각해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