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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취(개정판)
<일러두기>
음력 5월 13일은 죽취일(竹醉日)이라 하여 특별히 대를 옮겨 심는 날이다.
이날은 대가 취해서 어미 대에서 새끼 대를 잘라 내도 어미가 새끼를 잃는 슬픔을 알지 못하고, 자식 또한 어미 곁을 떠나는 아픔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취함이 희미해진 뒤에는 어찌 되는 걸까?
<1부>
1화
1. Prologue
따라랑.
마법의 성처럼 꾸며진 장난감 가게 내부로 여자가 들어서자, 도어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흰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주인장이 단골인 여자를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미즈 박.”
“예, 안녕하세요. 주문한 물건이 도착했다고 전화 주셔서요.”
“예, 낮에 우리 직원이 전화드렸죠.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이어 주인이 테이블 위에 케이스를 올려놓았고 그 안쪽에서는 아가일 프린트 카디건에 붉은 베레모를 쓴 동양인 얼굴의 바비 인형이 수줍게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그것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인은 여자에게서 탄성이나 기쁨을 기대했지만 여자는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카드를 꺼내 들었다.
“포장해 주세요. 예쁘게요.”
“그럼요. 꼬마 아가씨들은 예쁜 포장의 선물을 볼 때부터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법이죠, 하하.”
예의상 엷은 미소를 떠올렸던 여자는 점차 포장지 안으로 사라져 이제는 보이지 않는 인형의 눈시울을 다시금 떠올렸다. 까만 눈동자에 긴 눈시울은 역시나 그 사람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카탈로그를 보고 바로 주문했던 것이다.
특별히 제작된 인형이라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었지만 이제 그 정도는 개의치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 오래전,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어도 감정은 충만했는데 지금은…… 여자의 눈시울에 음영이 드리웠다.
“따님이 무척 좋아할 것 같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역시나 환한 웃음으로 배웅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익숙해진 이국의 땅에 또다시 봄이 찾아오고 있었지만 밤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며 아파트로 향하는 여자에게 계절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서 딸의 방에 선물을 놓아 주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크다 싶은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를 향해 걷는 동안 시선은 내내 저 앞의 바닥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이유가 없어서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눈에 익은 곳도 아닌 곳에서의 생활이 벌써 5년이 넘어가지만, 그녀의 고개 숙인 걸음은 늘 한결같았다.
그래서 며칠 전처럼 같은 자리에 차를 세운 채 사진을 찍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혀를 차는 것도 알지 못했고. 한 번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봐 달라는, 그래서 자신이 들켜도 좋으니 제대로 된 얼굴 사진 한 장 찍고 싶다는 바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2. 8년 전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아, 사모님.”
주방 한쪽에서 열심히 감자를 까던 동희가, 마침 들어선 김 여사를 보고 미소를 띠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까 김 여사가 도착했을 때에 동희는 꼬맹이들을 씻기느라 정신없더니 어느새 주방 일을 돕고 있다.
어릴 땐 곧잘 곁에서 안 떨어지고 재롱도 떨고 그러더니 점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눈치가 는 건지, 김 여사가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주방 일이며 청소 등을 돕느라 제대로 눈 맞출 시간도 없어지더니만 오늘도 마찬가지다.
카레가 점심 메뉴라더니, 옆에는 다듬어야 할 당근과 양파까지 수두룩하다.
“몇 달 안 남았잖아. 갈 곳은 정해졌니?”
거듭된 질문에 동희의 미소가 옅어졌다. 급기야 작은 입을 꾹 닫고 감자로 시선을 내린다. 시원스럽게 움직이는 감자칼의 놀림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하긴. 입양도 되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커 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 정도에 놀랄까.
웅크리고 앉아 있는 좁다란 어깨를 내려다보던 김 여사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봄이 오면 고등학교도 졸업할 텐데, 키가 150은 넘으려나. 요즘은 입양할 아이를 고를 때에도 키가 크고 늘씬한 서구형 체형을 가진 아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한데 이 아이는 먹는 것이 부실한지 아니면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않고 보육원 일을 돕느라 살찔 새가 없어 그런지 빼빼 마른 데다 피부도 가무잡잡하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갓 중학교에 입학한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숫기 없는 아이라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런저런 이유들이 모여 열아홉 살이 되도록 입양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2주에 한 번 봉사활동을 오는 김 여사의 눈에는 이상스럽게 동희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게 벌써 10년도 넘었다. 말없이 한쪽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누가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게 눈치 빠르게 행동하고. 보육원 입장에서는 입양되었더라면 오히려 손해일 뻔한 아이였다.
그렇게 수더분할 뿐만 아니라 공부 또한 잘한다 했다. 서울 근교의 그다지 학군이 좋지 않은 고등학교라 해도 상위권의 레벨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지금껏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했다.
처음 봤을 때 누구나 홀딱 반하게 예쁘진 않았지만, 오목조목 균형 잡힌 영리해 보이는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베어 물 때면 김 여사는 내게 저런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물론 김 여사는 동희의 싹싹함이나 영리함,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돌볼 때 배어 나오는 다정한 면들을 두루 아는 터라 더욱 정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흙 속의 진주 같은 아이였다.
아마 시어머니만 아니라면 진즉에 입양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한번 운을 떼었다가 어디 근본도 모를 핏줄을 집안에 들이느냐고 경을 친 이후로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무심한 남편 강정환 사장의 반응에 포기해 버렸지만 속으로는 늘 딸처럼 여겨 왔다.
그런 아이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보육원을 떠나야 할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 방학에 들어가면 얼마간의 정착금을 쥐고 사회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벌써부터 비슷한 또래끼리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거처를 알아보고도 남았을 텐데 아이에게는 그런 주변머리가 없다. 또래들은 얌전한 척한다거나 세상 물정 따위 모른다고 터부시할지 모르지만 김 여사가 그런 동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을 눈치챈 원장이 은근히 후원을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김 여사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입양은 불가능하니 수능이나 본 뒤에 후원을 해 주려던 계획이었는데. 조금 전 보육원 원장과 이야기를 하다 어쩌나 놀랐던지. 저 속 맑은 것이 제 처지를 알아 그런지 수능을 치르지도 않았다는 게 아닌가. 성적이 좋아서 대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닌다 쳐도 생활비라는 걸 무시할 순 없다는 말에 그냥 포기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저릿했다.
미리 말을 해 뒀어야 하는데. 자신이 갤러리 리뉴얼 문제로 얼마간 바쁜 틈에 그런 결정을 했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다급하고 절박한 지경에 처해 본 적 없던 자신의 안이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이렇게 하자.”
자신을 향하는 작고 까만 얼굴엔 늘 그렇듯 세상 다 산 늙은이의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더 이상 그걸 봐줄 수 없다고 생각한 김 여사의 다음 말은 단호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일주일 후. 방학 다음 날인 12월 20일. 사모님께서 보내 주신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동희는 휙휙 스쳐 가는 서울의 높은 건물이며 큰 도로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무릎 위로 움켜쥐고 있던 손을 다시 한 번 청바지에 문질렀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막연함과 긴장 때문에 자꾸 땀이 나는 것이다.
주방 일을 도와줄 이가 필요하시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있던 이가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어 지방으로 떠난다고.
하얀 피부에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사모님은 오실 때마다 동희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웃어 주시곤 했다. 그래서 그분께 입양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그런 허무맹랑한 꿈은 버렸고 이렇게라도 그분 댁으로 가게 될 수 있다니 정말 기뻤다.
물론 입양된 딸과 주방 일을 도와주는 여자애의 입장은 천지 차이겠지만 동희는 이제 동화 속 신데렐라를 꿈꾸는 어린애가 아닌 만큼 이마저도 감지덕지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갈 곳이 없던 것에 비하면 이게 어딘가. 거처할 곳이 없는 경우 직장을 얻을 때까지 여성 쉼터라는 곳에서 최소 6개월은 지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작년에 졸업과 동시에 독립해 나간 혜미 언니의 소식을 들은 탓이었다.
일러바치거나 편들어 줄 부모가 없는 고아 여자애는 남자들이 한 번씩 집적대기 좋은 대상임은 분명했다. 숫기 없고 배짱도 없는 사회 초년생인 혜미 언니에게 그런 세상은 더 혹독했고.
여름이 지나기 전 찾아온 언니는 배가 부른 채 기미가 새까맣게 낀 얼굴이었다. 그러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희의 손을 잡고 꼭 대학에 가라고, 넌 공부를 잘하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너무 무섭고 끔찍한 곳이라고, 그런 곳에서 가진 것 없는 여자애가 살아남을 길이라고는 배우는 것뿐이라고 재차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그런 당부를 하는 언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가진 것 없는 고아 여자애가 어떻게 대학을 가겠는가. 당장 다음 달부터 먹고 잘 곳조차 없는데.
동희는 어설픈 꿈 따위 꾸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시험이라도 보라며 원서비를 내주셨지만 정작 수능 당일에는 고사장에 가는 대신 추운 공원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점수가 잘 나오면 욕심이 날까 봐였다. 어찌나 춥던지. 해마다 수능 보는 당일은 꼭 춥다는 우려 섞인 말에 고개가 갸웃해질 정도였다. 따뜻한 교실에 앉아 시험을 치르는데 추운 게 무슨 대수인가.
그런 동희에게 평창동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일단 올해 수능을 치르지 않았으니, 내년 시험은 꼭 보라고. 사모님 댁에서 주방 일을 도우면서 먹고 자고 하면 대학 학비를 대 주겠노라고. 투자하겠노라고.
그 말씀에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날 이후로 세상도 달라진 것 같았다. 햇빛도 좀 더 밝아진 듯했고 잿빛인 겨울 하늘도 좀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이윽고 주택가로 들어섰다. 2, 3층은 될 법한 높은 담들 위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며 지붕 위로 솟은 채광창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다른 세상이었다. 무섭고 두렵지만 어떻게든 맞닥뜨려야 할 세상이다. 떨리는 손가락을 잡아 비튼 동희는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일러두기>
음력 5월 13일은 죽취일(竹醉日)이라 하여 특별히 대를 옮겨 심는 날이다.
이날은 대가 취해서 어미 대에서 새끼 대를 잘라 내도 어미가 새끼를 잃는 슬픔을 알지 못하고, 자식 또한 어미 곁을 떠나는 아픔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취함이 희미해진 뒤에는 어찌 되는 걸까?
<1부>
1화
1. Prologue
따라랑.
마법의 성처럼 꾸며진 장난감 가게 내부로 여자가 들어서자, 도어벨이 경쾌하게 울렸다. 흰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주인장이 단골인 여자를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미즈 박.”
“예, 안녕하세요. 주문한 물건이 도착했다고 전화 주셔서요.”
“예, 낮에 우리 직원이 전화드렸죠.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이어 주인이 테이블 위에 케이스를 올려놓았고 그 안쪽에서는 아가일 프린트 카디건에 붉은 베레모를 쓴 동양인 얼굴의 바비 인형이 수줍게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그것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인은 여자에게서 탄성이나 기쁨을 기대했지만 여자는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카드를 꺼내 들었다.
“포장해 주세요. 예쁘게요.”
“그럼요. 꼬마 아가씨들은 예쁜 포장의 선물을 볼 때부터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법이죠, 하하.”
예의상 엷은 미소를 떠올렸던 여자는 점차 포장지 안으로 사라져 이제는 보이지 않는 인형의 눈시울을 다시금 떠올렸다. 까만 눈동자에 긴 눈시울은 역시나 그 사람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카탈로그를 보고 바로 주문했던 것이다.
특별히 제작된 인형이라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었지만 이제 그 정도는 개의치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 오래전,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어도 감정은 충만했는데 지금은…… 여자의 눈시울에 음영이 드리웠다.
“따님이 무척 좋아할 것 같네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역시나 환한 웃음으로 배웅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익숙해진 이국의 땅에 또다시 봄이 찾아오고 있었지만 밤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며 아파트로 향하는 여자에게 계절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서 딸의 방에 선물을 놓아 주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크다 싶은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를 향해 걷는 동안 시선은 내내 저 앞의 바닥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이유가 없어서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눈에 익은 곳도 아닌 곳에서의 생활이 벌써 5년이 넘어가지만, 그녀의 고개 숙인 걸음은 늘 한결같았다.
그래서 며칠 전처럼 같은 자리에 차를 세운 채 사진을 찍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혀를 차는 것도 알지 못했고. 한 번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봐 달라는, 그래서 자신이 들켜도 좋으니 제대로 된 얼굴 사진 한 장 찍고 싶다는 바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2. 8년 전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아, 사모님.”
주방 한쪽에서 열심히 감자를 까던 동희가, 마침 들어선 김 여사를 보고 미소를 띠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까 김 여사가 도착했을 때에 동희는 꼬맹이들을 씻기느라 정신없더니 어느새 주방 일을 돕고 있다.
어릴 땐 곧잘 곁에서 안 떨어지고 재롱도 떨고 그러더니 점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눈치가 는 건지, 김 여사가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마다 주방 일이며 청소 등을 돕느라 제대로 눈 맞출 시간도 없어지더니만 오늘도 마찬가지다.
카레가 점심 메뉴라더니, 옆에는 다듬어야 할 당근과 양파까지 수두룩하다.
“몇 달 안 남았잖아. 갈 곳은 정해졌니?”
거듭된 질문에 동희의 미소가 옅어졌다. 급기야 작은 입을 꾹 닫고 감자로 시선을 내린다. 시원스럽게 움직이는 감자칼의 놀림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하긴. 입양도 되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커 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 정도에 놀랄까.
웅크리고 앉아 있는 좁다란 어깨를 내려다보던 김 여사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봄이 오면 고등학교도 졸업할 텐데, 키가 150은 넘으려나. 요즘은 입양할 아이를 고를 때에도 키가 크고 늘씬한 서구형 체형을 가진 아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한데 이 아이는 먹는 것이 부실한지 아니면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않고 보육원 일을 돕느라 살찔 새가 없어 그런지 빼빼 마른 데다 피부도 가무잡잡하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갓 중학교에 입학한 정도로 보였다. 게다가 숫기 없는 아이라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런저런 이유들이 모여 열아홉 살이 되도록 입양이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2주에 한 번 봉사활동을 오는 김 여사의 눈에는 이상스럽게 동희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게 벌써 10년도 넘었다. 말없이 한쪽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누가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게 눈치 빠르게 행동하고. 보육원 입장에서는 입양되었더라면 오히려 손해일 뻔한 아이였다.
그렇게 수더분할 뿐만 아니라 공부 또한 잘한다 했다. 서울 근교의 그다지 학군이 좋지 않은 고등학교라 해도 상위권의 레벨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지금껏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했다.
처음 봤을 때 누구나 홀딱 반하게 예쁘진 않았지만, 오목조목 균형 잡힌 영리해 보이는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베어 물 때면 김 여사는 내게 저런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물론 김 여사는 동희의 싹싹함이나 영리함,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돌볼 때 배어 나오는 다정한 면들을 두루 아는 터라 더욱 정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흙 속의 진주 같은 아이였다.
아마 시어머니만 아니라면 진즉에 입양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한번 운을 떼었다가 어디 근본도 모를 핏줄을 집안에 들이느냐고 경을 친 이후로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무심한 남편 강정환 사장의 반응에 포기해 버렸지만 속으로는 늘 딸처럼 여겨 왔다.
그런 아이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보육원을 떠나야 할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 방학에 들어가면 얼마간의 정착금을 쥐고 사회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벌써부터 비슷한 또래끼리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거처를 알아보고도 남았을 텐데 아이에게는 그런 주변머리가 없다. 또래들은 얌전한 척한다거나 세상 물정 따위 모른다고 터부시할지 모르지만 김 여사가 그런 동희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을 눈치챈 원장이 은근히 후원을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김 여사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입양은 불가능하니 수능이나 본 뒤에 후원을 해 주려던 계획이었는데. 조금 전 보육원 원장과 이야기를 하다 어쩌나 놀랐던지. 저 속 맑은 것이 제 처지를 알아 그런지 수능을 치르지도 않았다는 게 아닌가. 성적이 좋아서 대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닌다 쳐도 생활비라는 걸 무시할 순 없다는 말에 그냥 포기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저릿했다.
미리 말을 해 뒀어야 하는데. 자신이 갤러리 리뉴얼 문제로 얼마간 바쁜 틈에 그런 결정을 했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다급하고 절박한 지경에 처해 본 적 없던 자신의 안이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이렇게 하자.”
자신을 향하는 작고 까만 얼굴엔 늘 그렇듯 세상 다 산 늙은이의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더 이상 그걸 봐줄 수 없다고 생각한 김 여사의 다음 말은 단호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일주일 후. 방학 다음 날인 12월 20일. 사모님께서 보내 주신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동희는 휙휙 스쳐 가는 서울의 높은 건물이며 큰 도로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무릎 위로 움켜쥐고 있던 손을 다시 한 번 청바지에 문질렀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막연함과 긴장 때문에 자꾸 땀이 나는 것이다.
주방 일을 도와줄 이가 필요하시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있던 이가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어 지방으로 떠난다고.
하얀 피부에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사모님은 오실 때마다 동희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웃어 주시곤 했다. 그래서 그분께 입양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그런 허무맹랑한 꿈은 버렸고 이렇게라도 그분 댁으로 가게 될 수 있다니 정말 기뻤다.
물론 입양된 딸과 주방 일을 도와주는 여자애의 입장은 천지 차이겠지만 동희는 이제 동화 속 신데렐라를 꿈꾸는 어린애가 아닌 만큼 이마저도 감지덕지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갈 곳이 없던 것에 비하면 이게 어딘가. 거처할 곳이 없는 경우 직장을 얻을 때까지 여성 쉼터라는 곳에서 최소 6개월은 지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작년에 졸업과 동시에 독립해 나간 혜미 언니의 소식을 들은 탓이었다.
일러바치거나 편들어 줄 부모가 없는 고아 여자애는 남자들이 한 번씩 집적대기 좋은 대상임은 분명했다. 숫기 없고 배짱도 없는 사회 초년생인 혜미 언니에게 그런 세상은 더 혹독했고.
여름이 지나기 전 찾아온 언니는 배가 부른 채 기미가 새까맣게 낀 얼굴이었다. 그러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희의 손을 잡고 꼭 대학에 가라고, 넌 공부를 잘하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은 너무 무섭고 끔찍한 곳이라고, 그런 곳에서 가진 것 없는 여자애가 살아남을 길이라고는 배우는 것뿐이라고 재차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그런 당부를 하는 언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가진 것 없는 고아 여자애가 어떻게 대학을 가겠는가. 당장 다음 달부터 먹고 잘 곳조차 없는데.
동희는 어설픈 꿈 따위 꾸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서 시험이라도 보라며 원서비를 내주셨지만 정작 수능 당일에는 고사장에 가는 대신 추운 공원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점수가 잘 나오면 욕심이 날까 봐였다. 어찌나 춥던지. 해마다 수능 보는 당일은 꼭 춥다는 우려 섞인 말에 고개가 갸웃해질 정도였다. 따뜻한 교실에 앉아 시험을 치르는데 추운 게 무슨 대수인가.
그런 동희에게 평창동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일단 올해 수능을 치르지 않았으니, 내년 시험은 꼭 보라고. 사모님 댁에서 주방 일을 도우면서 먹고 자고 하면 대학 학비를 대 주겠노라고. 투자하겠노라고.
그 말씀에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날 이후로 세상도 달라진 것 같았다. 햇빛도 좀 더 밝아진 듯했고 잿빛인 겨울 하늘도 좀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이윽고 주택가로 들어섰다. 2, 3층은 될 법한 높은 담들 위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며 지붕 위로 솟은 채광창들이 언뜻언뜻 보였다. 다른 세상이었다. 무섭고 두렵지만 어떻게든 맞닥뜨려야 할 세상이다. 떨리는 손가락을 잡아 비튼 동희는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