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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몇 달 안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아직은 성인이 아니었다. 공부만 강요하던 고등학교를 벗어나면 성인인 척 할 짓 못할 짓 다 해 대느라 신나게들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아직은 미성년자인 스물. 만으로 스무 살, 즉 스물한 살 생일이 되어야 정식 성인으로 인정되니 저 까만 아가씨는 아직 1년은 넘게 있어야 성인이 된다. 전조는 1년은 넘게 있어야―에 대해 자꾸만 집착하는 자신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12월. 대입이 다 끝나지 않은 시기다. 대학에는 가나? 가든 안 가든 저 꼬맹이 아가씨도 성인이랍시고 흥청망청 그러려나? 직장을 가졌으니 벌써 그러고 다닐지도…….
생각이 그쯤에 이르렀을 때 추위가 느껴졌다. 꽤나 갑작스런 그것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잦아들었던 불쾌함까지 일깨웠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 그런가? 무슨 짓을 하든 저 작은 여자애 마음이겠지만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면 어쩐지 못마땅할 듯했다. 그것도 상당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별채의 불빛을 마지막으로 일별하고 돌아서는 그의 미간은 벌써부터 찌푸려진 채였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다. 내가 저 여자애한테 뭐라도 되나? 라는 최소한의 이성적인 질문조차 튀어나와 주지 않았지만 전조는 이제 이상스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 개들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것에 대해 시작된 대화가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는 것도.
“계단 조심하고 얼른 댕겨 와라, 동희야.”
이런 난감할 데가.
다음 날은 일요일로 햇살이 좋았다. 사장님께 팬티를 내 보였다는 창피함에 밤새 이불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다음 날 해가 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린 동희가 민망해할 정도로 12월치고 온화한 날씨였다. 정원에서 차를 마셔도 될 만큼 말이다.
아직 어둠이 물러가기 전의 새벽 6시.
널따란 주방 옆에 딸린, 작지만 생전 처음 가져 본 자신만의 방에서 나올 때부터 고슴도치처럼 한껏 고개를 움츠린 채였던 동희는 자꾸만 사장님 근처에 가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신경 쓰여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오셨다는 사모님의 아드님은 무슨 큰 회사의 대표라고 헀다. 그분을 아주머니들이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동희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어젯밤의 부끄러웠던 상황 이후로는 사장님이 아니라,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주방에서 얻은 북어대가리를 개들에게 먹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는데 이젠 그걸 못 할 것 같은 데다가 민망한 자세까지. 이게 무슨 창피한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제 앞에 크게 솟아 있던 남자의 실루엣과 슬쩍 웃던 순간 선명하게 드러났던 하얗고 고른 치아의 이미지가 자꾸만 떠올라서 더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점심 식사 뒤에 거실로 나오시던 큰 사모님께서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고 하셨고 사모님과 사장님까지 정원으로 나가신 터였다.
차와 과일이 담긴 쟁반을 챙겨 든 주방 아주머니 뒤를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사모님들께 드릴 무릎 담요를 챙겨 들고 나갔다 온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아주머니가 큰 사모님께서 드시는 약사발을 들고 또 나가 보라는 것이다.
아, 정말. 안 그래도 어젯밤 이후로 아침, 점심도 모자라 조금 전 정원까지 몇 번이나 사장님 근처에 가야 했고 그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죽을 뻔했는데.
공동생활을 하는 보육원에서 말귀를 알아듣게 된 이후부터 몸가짐에 대해 누누이 교육을 받았건만 어젯밤은 대체 무슨 추태였는지. 어두워서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치마를 별로 입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어쨌거나 창피해서 사장님 얼굴을 볼 수 없을 지경이라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고개가 부러지는 줄 알았건만, 또 가라니.
게다가 어젯밤뿐만이 아니다. 아침 식사에도 그랬고 조금 전 점심 식사에서도 사장님 앞에서 자꾸만 실수를 저질러서 미칠 지경인데.
저택의 주방에서 문 하나를 지나면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된 12인용 식탁이 놓인 식당이 있다. 상석에는 큰 사모님이, 그 옆으로 사모님이 앉으셨다.
다른 식구들은 없다고 들었는데 12인용이라니. 보육원 아이들이 10명은 족히 누워 잘 수 있는 크기의 테이블은 볼 때마다 거대하게만 보였다. 식사 내내 주방 쪽 문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것은 이 집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동희의 몫이었다. 며칠 지켜보던 주방 아주머니가 그 정도면 됐다고 전에 있던 영주 언니 대신 바로 그 일을 맡겼던 것이다. 몸놀림이 재고 눈치가 빠르다고 다들 칭찬하시더라고 영주 언니가 결혼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날 싱긋 웃으며 말했었다.
칭찬을 들었으니 더 잘해야 하는 건데……!
원래 식사하시는 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사항들을 기민하게 캐치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동희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안 계시던 사장님이 식탁에 자리하신 탓이었다. 작은 사모님 맞은편에 앉으신 그분이 어젯밤에 제 팬티를 보셨으니 불편하고 고개를 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내내 푹 숙이고 있으니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숭늉을 달라시는 큰 사모님의 눈짓을 놓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흰 니트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오셨던 사장님은 잔뜩 긴장했던 동희가 멋쩍어질 정도로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식사를 마치셨다. 저 혼자 괜히 불편해한 꼴이 됐는데 그게 또 너무 창피한 것이다.
그러다 점심시간. 이번엔 잘하나 싶었는데…….
시중드는 입장에서 이리저리 살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장님의 단정한 수저질이나 점잖게 음식을 씹는 입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때부터 문제는 생겼다. 어떻게 남자가 얼굴도 하얗고 손도 하얄 수가 있느냔 말이지. 자신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생각하다 보니 정말 부럽고 멋있어 보이는 거였다.
그렇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와중 갑자기 사장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버버…… 얼굴이 확확 붉어졌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는 거지? 설마 어젯밤 얘기를 하시려고?
어리고 당황한 동희는 다른 어른들이 계신 자리에서 아랫사람의 단순한 해프닝에 대해 떠들 만큼 사장님이 지각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사장님의 입이 열리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둥둥 울리는 바람에 뭐라고 하셨는지 듣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동희야?”
사모님의 부름에 화들짝 눈을 떴더니, 저를 돌아보고 계시는 사모님의 얼굴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다. 어리벙벙하게 둘러보니 큰 사모님까지 의아하게 쳐다보고 계셨다. 아침 식사 때는 그저 실수려니 하시더니, 못마땅한 표정이시다. 반복된 실수는 원래 용납지 않으신다 했는데.
마지막으로 가장 멀리 앉아 계신 사장님께 시선을 돌렸더니 검지로 국그릇을 가리키셨다. 아!
“예, 예.”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허겁지겁 다가가 국그릇을 집어 드니 ‘조금만 더 갖다줘요.’라고 하신다. 아, 정말 바보 같으니.
헌데 거기까지면 좋게? 주방에 가 채워 온 국그릇을, 사장님 앞에 가져다 놓고 손을 떼다가는 너무 긴장해 그 손으로 다시 그릇을 치는 바람에 조금 엎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으앗! 나 정말 왜 이러니!
그런데, 그런 사장님 근처에 또 가라니. 똥 씹은 표정이 된 줄 모르고 광주댁 아주머니는 얼른 다녀와서 김장거리 다듬는 걸 도와 달라신다. 또 사고 치면 어쩌지?
약이 식기 전에 가져다드리라는 말에 하는 수 없이 주방을 나서긴 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사장님을 피해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사장님은 주방 아주머니들 말대로 점잖으신 분이긴 했다. 아까 국을 엎었을 때도 얼음처럼 얼어붙은 그녀가 손 하나 까딱 못 하는 동안 다른 어른들께서 눈치 못 채시게 무릎에 놓았던 냅킨을 들어 슬쩍 테이블을 닦아 내시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기까지 하셨으니까.
문제는 자꾸 사고를 치는 자신이었다. 손이 여물다는 소리깨나 들어 놓고는 국그릇 하나 제대로 못 놓다니. 사장님은 어젯밤 일은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꼴이 속상하고 자신에 대해 짜증까지 일어, 아랫입술 안쪽을 피 맛이 날 정도로 베어 물었다.
정신 차리자, 박동희!
현관 옆에 걸린 대형 거울 앞에 잠시 멈춰 서서는, 풀 먹인 흰 블라우스와 검은 플레어스커트의 매무새가 단정한지 확인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기합까지 넣고는 현관문을 밀었다.
하지만 5분 뒤 주방 옆 제 방으로 뛰어든 동희는 어젯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놀라고 당황한 모양새였다. 태양의 위력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
또, 또 팬티를 보이고 말았다!
이불 속에 숨어서는 두 번 다시 방에서 나가기 싫었다. 정말, 정말, 정말로!
정원의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인 흰 테이블에 세 분 어른들께서 앉아 계셨다. 자신이 다가감에 따라 담소가 잦아들었다. 다시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분들이 보수를 주는 피고용인 앞에서 대화를 멈추는 것은 당연했지만 말이다.
어쩐지 마치 자신이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 같았고 그건 자신이 그분들과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자각을 수시로 일깨웠다.
조심스레 큰 사모님 앞에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을 들이켜시는 동안 정원 저쪽에서 뛰어놀던 개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 활발한 모습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해맑은 모습에 맞은편에 앉은 전조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움직임을 멈췄고 그런 그의 모습이 약사발을 내려놓던 조모의 눈에 띄었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지라, 사업 이외에는 사물이건 사람이건 여타의 관심을 두지 않는 손자의 행동을 기민하게 알아챈 것이다. 그래도 설마 해서 부러 투덜대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이 들어 약 챙겨 먹는 것도 욕먹을 짓이야.”
약이 쓴 건지, 말씀대로 욕을 먹을까 신경 쓰이셔서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시는 큰 사모님 앞에 생강편 그릇을 내려놓고는 빈 약사발만 담긴 쟁반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주방으로 돌아가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는 찰나.
동희는 혼비백산했다. 며칠 새 정이 듬뿍 든 개들이 그사이 겅중겅중 뛰어와서는 돌아서던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처음엔 데면데면 굴던 녀석들이 한번 친해진 뒤로는 혀를 빼물고 반가운 척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항상 울타리를 사이에 둔 채였다!
두 발을 치켜들고 서니 동희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녀석들이 두 마리나 달려들었으니 어떻게 됐겠는가. 혼비백산 놀라서는 쟁반도 내던지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마도 사모님의 것인 듯한 ‘어머어머.’ 소리가 귓가를 스쳐 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매무새를 가다듬을 새도 없었다. 기막힌 건 개들의 억센 힘 때문에 핑그르르 돌다 나동그라졌는데 그 맞은편에 사장님이 앉아 계셨다는 것이다! 벌떡 일어난 사장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젯밤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사장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 아래라니…….
세운 무릎 아래로 치켜 올라간 검은색 스커트 아래 뭐가 있겠는가! 아앗!
몇 달 안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아직은 성인이 아니었다. 공부만 강요하던 고등학교를 벗어나면 성인인 척 할 짓 못할 짓 다 해 대느라 신나게들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아직은 미성년자인 스물. 만으로 스무 살, 즉 스물한 살 생일이 되어야 정식 성인으로 인정되니 저 까만 아가씨는 아직 1년은 넘게 있어야 성인이 된다. 전조는 1년은 넘게 있어야―에 대해 자꾸만 집착하는 자신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12월. 대입이 다 끝나지 않은 시기다. 대학에는 가나? 가든 안 가든 저 꼬맹이 아가씨도 성인이랍시고 흥청망청 그러려나? 직장을 가졌으니 벌써 그러고 다닐지도…….
생각이 그쯤에 이르렀을 때 추위가 느껴졌다. 꽤나 갑작스런 그것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으로 모자라 잦아들었던 불쾌함까지 일깨웠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 그런가? 무슨 짓을 하든 저 작은 여자애 마음이겠지만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면 어쩐지 못마땅할 듯했다. 그것도 상당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별채의 불빛을 마지막으로 일별하고 돌아서는 그의 미간은 벌써부터 찌푸려진 채였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다. 내가 저 여자애한테 뭐라도 되나? 라는 최소한의 이성적인 질문조차 튀어나와 주지 않았지만 전조는 이제 이상스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 개들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것에 대해 시작된 대화가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는 것도.
“계단 조심하고 얼른 댕겨 와라, 동희야.”
이런 난감할 데가.
다음 날은 일요일로 햇살이 좋았다. 사장님께 팬티를 내 보였다는 창피함에 밤새 이불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다음 날 해가 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린 동희가 민망해할 정도로 12월치고 온화한 날씨였다. 정원에서 차를 마셔도 될 만큼 말이다.
아직 어둠이 물러가기 전의 새벽 6시.
널따란 주방 옆에 딸린, 작지만 생전 처음 가져 본 자신만의 방에서 나올 때부터 고슴도치처럼 한껏 고개를 움츠린 채였던 동희는 자꾸만 사장님 근처에 가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신경 쓰여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오셨다는 사모님의 아드님은 무슨 큰 회사의 대표라고 헀다. 그분을 아주머니들이 사장님이라고 불러서 동희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어젯밤의 부끄러웠던 상황 이후로는 사장님이 아니라,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주방에서 얻은 북어대가리를 개들에게 먹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는데 이젠 그걸 못 할 것 같은 데다가 민망한 자세까지. 이게 무슨 창피한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제 앞에 크게 솟아 있던 남자의 실루엣과 슬쩍 웃던 순간 선명하게 드러났던 하얗고 고른 치아의 이미지가 자꾸만 떠올라서 더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 점심 식사 뒤에 거실로 나오시던 큰 사모님께서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고 하셨고 사모님과 사장님까지 정원으로 나가신 터였다.
차와 과일이 담긴 쟁반을 챙겨 든 주방 아주머니 뒤를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사모님들께 드릴 무릎 담요를 챙겨 들고 나갔다 온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아주머니가 큰 사모님께서 드시는 약사발을 들고 또 나가 보라는 것이다.
아, 정말. 안 그래도 어젯밤 이후로 아침, 점심도 모자라 조금 전 정원까지 몇 번이나 사장님 근처에 가야 했고 그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죽을 뻔했는데.
공동생활을 하는 보육원에서 말귀를 알아듣게 된 이후부터 몸가짐에 대해 누누이 교육을 받았건만 어젯밤은 대체 무슨 추태였는지. 어두워서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치마를 별로 입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어쨌거나 창피해서 사장님 얼굴을 볼 수 없을 지경이라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고개가 부러지는 줄 알았건만, 또 가라니.
게다가 어젯밤뿐만이 아니다. 아침 식사에도 그랬고 조금 전 점심 식사에서도 사장님 앞에서 자꾸만 실수를 저질러서 미칠 지경인데.
저택의 주방에서 문 하나를 지나면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된 12인용 식탁이 놓인 식당이 있다. 상석에는 큰 사모님이, 그 옆으로 사모님이 앉으셨다.
다른 식구들은 없다고 들었는데 12인용이라니. 보육원 아이들이 10명은 족히 누워 잘 수 있는 크기의 테이블은 볼 때마다 거대하게만 보였다. 식사 내내 주방 쪽 문 옆에 서서 시중을 드는 것은 이 집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동희의 몫이었다. 며칠 지켜보던 주방 아주머니가 그 정도면 됐다고 전에 있던 영주 언니 대신 바로 그 일을 맡겼던 것이다. 몸놀림이 재고 눈치가 빠르다고 다들 칭찬하시더라고 영주 언니가 결혼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날 싱긋 웃으며 말했었다.
칭찬을 들었으니 더 잘해야 하는 건데……!
원래 식사하시는 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사항들을 기민하게 캐치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동희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안 계시던 사장님이 식탁에 자리하신 탓이었다. 작은 사모님 맞은편에 앉으신 그분이 어젯밤에 제 팬티를 보셨으니 불편하고 고개를 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내내 푹 숙이고 있으니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숭늉을 달라시는 큰 사모님의 눈짓을 놓친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있었는데 흰 니트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오셨던 사장님은 잔뜩 긴장했던 동희가 멋쩍어질 정도로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식사를 마치셨다. 저 혼자 괜히 불편해한 꼴이 됐는데 그게 또 너무 창피한 것이다.
그러다 점심시간. 이번엔 잘하나 싶었는데…….
시중드는 입장에서 이리저리 살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장님의 단정한 수저질이나 점잖게 음식을 씹는 입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때부터 문제는 생겼다. 어떻게 남자가 얼굴도 하얗고 손도 하얄 수가 있느냔 말이지. 자신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생각하다 보니 정말 부럽고 멋있어 보이는 거였다.
그렇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와중 갑자기 사장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버버…… 얼굴이 확확 붉어졌다. 피하고 싶으면서도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는 거지? 설마 어젯밤 얘기를 하시려고?
어리고 당황한 동희는 다른 어른들이 계신 자리에서 아랫사람의 단순한 해프닝에 대해 떠들 만큼 사장님이 지각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사장님의 입이 열리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둥둥 울리는 바람에 뭐라고 하셨는지 듣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동희야?”
사모님의 부름에 화들짝 눈을 떴더니, 저를 돌아보고 계시는 사모님의 얼굴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왔다. 어리벙벙하게 둘러보니 큰 사모님까지 의아하게 쳐다보고 계셨다. 아침 식사 때는 그저 실수려니 하시더니, 못마땅한 표정이시다. 반복된 실수는 원래 용납지 않으신다 했는데.
마지막으로 가장 멀리 앉아 계신 사장님께 시선을 돌렸더니 검지로 국그릇을 가리키셨다. 아!
“예, 예.”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허겁지겁 다가가 국그릇을 집어 드니 ‘조금만 더 갖다줘요.’라고 하신다. 아, 정말 바보 같으니.
헌데 거기까지면 좋게? 주방에 가 채워 온 국그릇을, 사장님 앞에 가져다 놓고 손을 떼다가는 너무 긴장해 그 손으로 다시 그릇을 치는 바람에 조금 엎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으앗! 나 정말 왜 이러니!
그런데, 그런 사장님 근처에 또 가라니. 똥 씹은 표정이 된 줄 모르고 광주댁 아주머니는 얼른 다녀와서 김장거리 다듬는 걸 도와 달라신다. 또 사고 치면 어쩌지?
약이 식기 전에 가져다드리라는 말에 하는 수 없이 주방을 나서긴 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사장님을 피해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사장님은 주방 아주머니들 말대로 점잖으신 분이긴 했다. 아까 국을 엎었을 때도 얼음처럼 얼어붙은 그녀가 손 하나 까딱 못 하는 동안 다른 어른들께서 눈치 못 채시게 무릎에 놓았던 냅킨을 들어 슬쩍 테이블을 닦아 내시곤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을 들기까지 하셨으니까.
문제는 자꾸 사고를 치는 자신이었다. 손이 여물다는 소리깨나 들어 놓고는 국그릇 하나 제대로 못 놓다니. 사장님은 어젯밤 일은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꼴이 속상하고 자신에 대해 짜증까지 일어, 아랫입술 안쪽을 피 맛이 날 정도로 베어 물었다.
정신 차리자, 박동희!
현관 옆에 걸린 대형 거울 앞에 잠시 멈춰 서서는, 풀 먹인 흰 블라우스와 검은 플레어스커트의 매무새가 단정한지 확인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기합까지 넣고는 현관문을 밀었다.
하지만 5분 뒤 주방 옆 제 방으로 뛰어든 동희는 어젯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놀라고 당황한 모양새였다. 태양의 위력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
또, 또 팬티를 보이고 말았다!
이불 속에 숨어서는 두 번 다시 방에서 나가기 싫었다. 정말, 정말, 정말로!
정원의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인 흰 테이블에 세 분 어른들께서 앉아 계셨다. 자신이 다가감에 따라 담소가 잦아들었다. 다시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분들이 보수를 주는 피고용인 앞에서 대화를 멈추는 것은 당연했지만 말이다.
어쩐지 마치 자신이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 같았고 그건 자신이 그분들과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자각을 수시로 일깨웠다.
조심스레 큰 사모님 앞에 약사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약을 들이켜시는 동안 정원 저쪽에서 뛰어놀던 개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 활발한 모습들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해맑은 모습에 맞은편에 앉은 전조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움직임을 멈췄고 그런 그의 모습이 약사발을 내려놓던 조모의 눈에 띄었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지라, 사업 이외에는 사물이건 사람이건 여타의 관심을 두지 않는 손자의 행동을 기민하게 알아챈 것이다. 그래도 설마 해서 부러 투덜대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이 들어 약 챙겨 먹는 것도 욕먹을 짓이야.”
약이 쓴 건지, 말씀대로 욕을 먹을까 신경 쓰이셔서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시는 큰 사모님 앞에 생강편 그릇을 내려놓고는 빈 약사발만 담긴 쟁반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주방으로 돌아가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는 찰나.
동희는 혼비백산했다. 며칠 새 정이 듬뿍 든 개들이 그사이 겅중겅중 뛰어와서는 돌아서던 그녀에게 달려든 것이다. 처음엔 데면데면 굴던 녀석들이 한번 친해진 뒤로는 혀를 빼물고 반가운 척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항상 울타리를 사이에 둔 채였다!
두 발을 치켜들고 서니 동희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녀석들이 두 마리나 달려들었으니 어떻게 됐겠는가. 혼비백산 놀라서는 쟁반도 내던지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마도 사모님의 것인 듯한 ‘어머어머.’ 소리가 귓가를 스쳐 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매무새를 가다듬을 새도 없었다. 기막힌 건 개들의 억센 힘 때문에 핑그르르 돌다 나동그라졌는데 그 맞은편에 사장님이 앉아 계셨다는 것이다! 벌떡 일어난 사장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젯밤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사장님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 아래라니…….
세운 무릎 아래로 치켜 올라간 검은색 스커트 아래 뭐가 있겠는가! 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