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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앤 키스
3화
“위협? 내 손동작을 오해하나 본데…….”
“너를 산에 묻는 그런 번거로운 짓은 안 해.”
“……!”
남자는 자신의 손 모양을 보고 그것이 욕이 아님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산’을 의미하는 수화 동작을 욕이라고 했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즉, 이 남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거나 기본적인 수화를 안다는 소리였다.
“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이…….”
나현은 일단 협조하는 척 나긋하게 구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당황한 목소리가 나현의 말을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가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현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피어났다.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을 것이다. 지대가 꽤 높은 곳이고 거리가 있어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이렌의 현란한 불빛이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병호야…….”
차의 주인은 나현과 통화를 했던, 형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병호였다. 미친 듯이 납골당 쪽으로 달려오는 병호의 차를 보며 나현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 너희들 큰일 났다’ 하는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나현은 순간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으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줄 모르는 두 남자와 달리 루카라는 남자는 느긋한 얼굴로 병호의 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
나현은 루카라는 남자의 눈길이 자신에게 박히자 움찔했다. 마치 이 골칫덩이를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분위기라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 했다. 더 나아가 남자가 피식 웃기까지 해 뭔가 어벙한 기분이 들었다.
“……철수해.”
입을 굳게 닫고 있던 루카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지시를 내리고 뒤돌아섰다.
“루카 님, 우리 그냥 가?”
이름에는 ‘님’을 붙이면서 대화는 반말로 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어를 쓰지만 영어권에 사는 것이 아닌 듯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니 저렇게 어설픈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것이겠지.
“형님, 이 여자는…….”
먼저 등 돌린 루카를 쳐다보던 남자가 미련이 남는다는 듯 굴자 나현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여기서 끌려가지 않으려면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미친년 한 번 되는 건 일도 아닌데 갑자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도하기는 아직 이른데 너무 빨리 긴장을 푼 탓인 듯했다.
“차에 태울까요?”
“……!”
남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대 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금은 그나마 도망갈 구멍도 있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병호가 턱밑에 도달해 있으니 짧은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것이다.
“버려.”
“네?”
“……뭐!”
나현은 그냥 둬, 도 아니고 버려, 라고 말한 루카를 기가 찬다는 듯 쳐다봤다. 사람에게 버려, 라는 단어를 쓰는 저놈은 악랄한 놈이거나 감정이 없는 놈일 것이다.
“가자.”
“그냥 가?”
한 명이 루카를 따라 몸을 돌리자 한국어가 서툰 남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앞서가던 남자가 팔을 확 끌어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한순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이들을 나현은 멍한 눈길로 쳐다봤다.
“앗!”
나현은 번뜩 든 생각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도망치는 이들을 잡으려면 저 남자들이 탄 차를 막아야 했다. 지금 차를 막을 수 있는 건 병호뿐이었다.
“내 휴대폰!”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던 나현은 그제야 그들이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갔음을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렸다. 이미 차에 탔을 것이라 생각했던 루카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다 까딱하는 폼이 마치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 * *
“선배님, 진짜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는 거 맞죠?”
나현은 걱정에 호들갑을 떠는 병호를 멍하게 쳐다보다 진하게 내려진 커피를 마셨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들었다. 오후 내내 경찰서에서 진술서 아닌 진술서를 작성하고 나온 길이라 머리가 멍했다.
“아, 살 것 같다.”
뜨거운 커피가 목을 자극하고 들어가자 뻣뻣했던 뒷목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선배! 괜찮으냐고요?”
병호가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현은 그런 병호 때문에 귀가 따갑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다 입을 열었다.
“다친 데 없고 보다시피 멀쩡해. 그보다 해킹이 무슨 말이야.”
나현에게 진술서 받는 일에만 급급했지 그 누구도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 그게……. 사이버 수사대에서 항상 해킹에 대한 방어벽을 가동시키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을 찾아냈고, 그 해커가 범죄심리연구소를 뒤진 흔적이 나왔나 봐요.”
“그래서?”
“선배님 이름이 특이하잖아요.”
하긴 ‘모’씨 성이 아주 독특하기는 하지. 고등학생 때 만난 한국 친구들이 자신의 성씨 때문에 모나미라고 부르고는 했으니까. 볼펜 만드는 모나미 회사를 그때는 참 미워했었는데. 게다가 자신이 그들과 달리 생겼다는 이유로 못난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른 곳을 뒤진 흔적은 있는데 그건 페이크처럼 보였다고 해요.”
“내 정보가 필요했다는 소리네.”
나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자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콕 찍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말이었다.
“네. 그러니깐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말고…….”
“알았어.”
나현은 군소리 붙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을 놔두고 떠돌이가 되어 버린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당장 씻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고 자신의 포근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한 건 없어요?”
그들은 부탁한다는 말만 했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부탁이 뭔지도 모르면서 전하게 되면 피곤한 것은 자신이었다. 모르는데 캐묻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없어.”
나현은 그들의 부탁이 뭐였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아까는 동조하기 싫어 뻗댔으면서 지금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정보를 뒤진 흔적뿐이야?”
“네?”
“다른 정보를 심은 건 없고?”
“선배님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을 한 것 같아요.”
“위치 추적?”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 그들과 맞닥트렸을 땐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는 얼굴을 몰랐다가 후에 연락을 받고 뒤따라 나왔던 것일까.
“아, 선배. 이거.”
나현은 병호가 내민 휴대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2G폰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단 연락은 돼야 하니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요.”
“아, 그래. 고마워.”
나현은 사양하지 않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저기 혹시 그들을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겠어요?”
“어?”
나현은 멀뚱해진 눈으로 병호를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못 봤다고 하며 기억나는 하관만 말했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려 보겠다는 말에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완성된 몽타주에 그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선글라스를 쓴 하관만 드러난 얼굴이었지만.
“……글쎄.”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당분간 제가 선배 뒤를 따라다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냐. 너도 바쁠 텐데.”
나현은 루카라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다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살벌한 눈빛이었지만 그 살벌함만 좀 거두면 인상이 다르게 비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의 눈이 어떻게 생겼고 눈빛이 어떠했는지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경찰서에서는 선글라스를 써서 모르겠다고 답변했을까.
그의 눈빛에 담긴 사나운 절박함을 알아 버려서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망설인 것일까.
“아니에요. 반장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김석현 반장님이?”
“네.”
나현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루카라는 남자의 몸에 밴 여유가 무섭도록 뇌리에 박혀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억지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지도 않았고 낭패를 봤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남자지.
“루카…….”
“네?”
“어?”
눈을 껌뻑거리며 쳐다보는 병호를 향해 나현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병호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나현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상체를 가까이 기울여 왔다.
“아니, 아무 말도.”
나현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정보를 병호한테 알리면 위험할 것 같았다. 병호가 천지를 모르고 날뛰면 다치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병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루카가 그 남자의 이름인지 닉네임인지도 알 수 없었다.
* * *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랐겠네.”
집에도 못 가고 호텔에서 범죄심리연구소로 바로 출근한 나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는 낮에 일어난 일을 혼자 분석하고 생각하다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다.
분명 루카라는 남자와 처음 만나 대면한 사인인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을 언제 또 가졌던 것인지 되짚어 봤지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이 푸르스름한 빛을 담기 시작했을 때 나현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몇 시간 잠을 청했다.
“휴가를…… 그러니까 사실 피해를 본 것은 없지만 개인 신상을 해킹당했으니 심적 위로 차원으로 휴가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한데.”
“아…… 네에.”
“얼마 정도면 될까?”
휴가를 며칠 동안 쓸 건지 묻는 말에 짧게 쓰라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삼 아니, 일주일 쓰겠습니다.”
“일주일?”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로 보아 소장이 예상한 기간을 초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현은 이참에 푹 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아버지를 만나러 영국에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흠흠. 그, 그럼 처리하라고 할 테니 그만 나가서 일 봐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온 나현은 소장실 문을 닫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병호와 같은 형사과에 있는 정주민 경사에게 사이버 수사대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냐고 물어봤지만 아직 건진 것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대답만 들었다.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건가.”
나현은 고개를 갸웃하다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유령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없다. 늘 그렇게 단정 짓고 있던 나현의 확고한 믿음이 깨지고 있었다.
3화
“위협? 내 손동작을 오해하나 본데…….”
“너를 산에 묻는 그런 번거로운 짓은 안 해.”
“……!”
남자는 자신의 손 모양을 보고 그것이 욕이 아님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산’을 의미하는 수화 동작을 욕이라고 했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즉, 이 남자는 수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거나 기본적인 수화를 안다는 소리였다.
“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이…….”
나현은 일단 협조하는 척 나긋하게 구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당황한 목소리가 나현의 말을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가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현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피어났다.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을 것이다. 지대가 꽤 높은 곳이고 거리가 있어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이렌의 현란한 불빛이 맹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병호야…….”
차의 주인은 나현과 통화를 했던, 형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병호였다. 미친 듯이 납골당 쪽으로 달려오는 병호의 차를 보며 나현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 너희들 큰일 났다’ 하는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나현은 순간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으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줄 모르는 두 남자와 달리 루카라는 남자는 느긋한 얼굴로 병호의 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
나현은 루카라는 남자의 눈길이 자신에게 박히자 움찔했다. 마치 이 골칫덩이를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분위기라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 했다. 더 나아가 남자가 피식 웃기까지 해 뭔가 어벙한 기분이 들었다.
“……철수해.”
입을 굳게 닫고 있던 루카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지시를 내리고 뒤돌아섰다.
“루카 님, 우리 그냥 가?”
이름에는 ‘님’을 붙이면서 대화는 반말로 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어를 쓰지만 영어권에 사는 것이 아닌 듯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니 저렇게 어설픈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것이겠지.
“형님, 이 여자는…….”
먼저 등 돌린 루카를 쳐다보던 남자가 미련이 남는다는 듯 굴자 나현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여기서 끌려가지 않으려면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미친년 한 번 되는 건 일도 아닌데 갑자기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도하기는 아직 이른데 너무 빨리 긴장을 푼 탓인 듯했다.
“차에 태울까요?”
“……!”
남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대 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금은 그나마 도망갈 구멍도 있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미 병호가 턱밑에 도달해 있으니 짧은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것이다.
“버려.”
“네?”
“……뭐!”
나현은 그냥 둬, 도 아니고 버려, 라고 말한 루카를 기가 찬다는 듯 쳐다봤다. 사람에게 버려, 라는 단어를 쓰는 저놈은 악랄한 놈이거나 감정이 없는 놈일 것이다.
“가자.”
“그냥 가?”
한 명이 루카를 따라 몸을 돌리자 한국어가 서툰 남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앞서가던 남자가 팔을 확 끌어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한순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이들을 나현은 멍한 눈길로 쳐다봤다.
“앗!”
나현은 번뜩 든 생각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도망치는 이들을 잡으려면 저 남자들이 탄 차를 막아야 했다. 지금 차를 막을 수 있는 건 병호뿐이었다.
“내 휴대폰!”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던 나현은 그제야 그들이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갔음을 깨닫고 고개를 휙 돌렸다. 이미 차에 탔을 것이라 생각했던 루카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다 까딱하는 폼이 마치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 * *
“선배님, 진짜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는 거 맞죠?”
나현은 걱정에 호들갑을 떠는 병호를 멍하게 쳐다보다 진하게 내려진 커피를 마셨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 들었다. 오후 내내 경찰서에서 진술서 아닌 진술서를 작성하고 나온 길이라 머리가 멍했다.
“아, 살 것 같다.”
뜨거운 커피가 목을 자극하고 들어가자 뻣뻣했던 뒷목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선배! 괜찮으냐고요?”
병호가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현은 그런 병호 때문에 귀가 따갑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다 입을 열었다.
“다친 데 없고 보다시피 멀쩡해. 그보다 해킹이 무슨 말이야.”
나현에게 진술서 받는 일에만 급급했지 그 누구도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 그게……. 사이버 수사대에서 항상 해킹에 대한 방어벽을 가동시키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을 찾아냈고, 그 해커가 범죄심리연구소를 뒤진 흔적이 나왔나 봐요.”
“그래서?”
“선배님 이름이 특이하잖아요.”
하긴 ‘모’씨 성이 아주 독특하기는 하지. 고등학생 때 만난 한국 친구들이 자신의 성씨 때문에 모나미라고 부르고는 했으니까. 볼펜 만드는 모나미 회사를 그때는 참 미워했었는데. 게다가 자신이 그들과 달리 생겼다는 이유로 못난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른 곳을 뒤진 흔적은 있는데 그건 페이크처럼 보였다고 해요.”
“내 정보가 필요했다는 소리네.”
나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자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콕 찍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말이었다.
“네. 그러니깐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말고…….”
“알았어.”
나현은 군소리 붙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을 놔두고 떠돌이가 되어 버린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당장 씻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고 자신의 포근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한 건 없어요?”
그들은 부탁한다는 말만 했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부탁이 뭔지도 모르면서 전하게 되면 피곤한 것은 자신이었다. 모르는데 캐묻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없어.”
나현은 그들의 부탁이 뭐였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아까는 동조하기 싫어 뻗댔으면서 지금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정보를 뒤진 흔적뿐이야?”
“네?”
“다른 정보를 심은 건 없고?”
“선배님 휴대폰으로 위치 추적을 한 것 같아요.”
“위치 추적?”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 그들과 맞닥트렸을 땐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는 얼굴을 몰랐다가 후에 연락을 받고 뒤따라 나왔던 것일까.
“아, 선배. 이거.”
나현은 병호가 내민 휴대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2G폰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단 연락은 돼야 하니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요.”
“아, 그래. 고마워.”
나현은 사양하지 않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저기 혹시 그들을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겠어요?”
“어?”
나현은 멀뚱해진 눈으로 병호를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못 봤다고 하며 기억나는 하관만 말했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그려 보겠다는 말에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완성된 몽타주에 그들이 담겨 있었다. 물론 선글라스를 쓴 하관만 드러난 얼굴이었지만.
“……글쎄.”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당분간 제가 선배 뒤를 따라다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냐. 너도 바쁠 텐데.”
나현은 루카라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다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살벌한 눈빛이었지만 그 살벌함만 좀 거두면 인상이 다르게 비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의 눈이 어떻게 생겼고 눈빛이 어떠했는지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경찰서에서는 선글라스를 써서 모르겠다고 답변했을까.
그의 눈빛에 담긴 사나운 절박함을 알아 버려서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망설인 것일까.
“아니에요. 반장님이 허락해 주셨어요.”
“김석현 반장님이?”
“네.”
나현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루카라는 남자의 몸에 밴 여유가 무섭도록 뇌리에 박혀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억지로 자신을 데려가려 하지도 않았고 낭패를 봤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남자지.
“루카…….”
“네?”
“어?”
눈을 껌뻑거리며 쳐다보는 병호를 향해 나현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병호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나현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상체를 가까이 기울여 왔다.
“아니, 아무 말도.”
나현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남자의 정보를 병호한테 알리면 위험할 것 같았다. 병호가 천지를 모르고 날뛰면 다치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병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루카가 그 남자의 이름인지 닉네임인지도 알 수 없었다.
* * *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서 많이 놀랐겠네.”
집에도 못 가고 호텔에서 범죄심리연구소로 바로 출근한 나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는 낮에 일어난 일을 혼자 분석하고 생각하다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다.
분명 루카라는 남자와 처음 만나 대면한 사인인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을 언제 또 가졌던 것인지 되짚어 봤지만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이 푸르스름한 빛을 담기 시작했을 때 나현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억지로 몇 시간 잠을 청했다.
“휴가를…… 그러니까 사실 피해를 본 것은 없지만 개인 신상을 해킹당했으니 심적 위로 차원으로 휴가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한데.”
“아…… 네에.”
“얼마 정도면 될까?”
휴가를 며칠 동안 쓸 건지 묻는 말에 짧게 쓰라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삼 아니, 일주일 쓰겠습니다.”
“일주일?”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로 보아 소장이 예상한 기간을 초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현은 이참에 푹 쉬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아버지를 만나러 영국에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흠흠. 그, 그럼 처리하라고 할 테니 그만 나가서 일 봐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온 나현은 소장실 문을 닫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병호와 같은 형사과에 있는 정주민 경사에게 사이버 수사대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냐고 물어봤지만 아직 건진 것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대답만 들었다.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건가.”
나현은 고개를 갸웃하다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유령처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없다. 늘 그렇게 단정 짓고 있던 나현의 확고한 믿음이 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