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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앤 키스
5화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여기 있는데.”
나현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봤다면 마치 치정 싸움 같았을 것이다.
“더 시선을 끌지 않을 거면 나가지.”
명령하듯 말하는 루카를 향해 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텐더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는 다른 고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내가 왜?”
나현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루카에게 눈을 치떴다.
“마저 마실 건가. 칵테일은 시간 끌면 맛없는데.”
나현은 루카의 말에 자신이 쥐고 있던 칵테일 잔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려서 그런지 잔에 담긴 칵테일이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현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 갑자기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은 범죄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떨 수는 있겠지만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에게 불만이 일었다.
“……너 뭐야?”
직설적인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것인지 루카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는 듯 입술 끝에 미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
몸을 기울여 다가온 루카의 행동에 움찔 놀란 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같이 나가야지.”
귀에 입술을 붙이고 은밀하게 말하는 루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나현이 느끼기에는 시베리아 겨울바람보다 차가웠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현은 순간 의식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해 손가락을 힘껏 말아 쥐었지만 나른한 기운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
나현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접었음을 알렸다. 고로 네가 누구든, 네 부탁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시간을 끌어 손해나는 건 내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납골당 앞에서 했던 말을 루카가 다시 한번 인지시키자 나현은 인상을 구겼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멍해지지 시작했다.
“시간을 자꾸 끌어서 내 인내심이 바닥을 긁으면…….”
진짜 인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낮게 읊조리는 루카의 목소리는 꽤 위협적이었다. 나현은 멍해지는 의식을 잡으려 고개를 몇 번 흔들었지만 의식이 아까보다 더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몸이 왜 이러지.
“어디 불편한가?”
남자의 말이 물속에서 퍼지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현은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힘겹게 깜빡였다.
“어지러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나현은 자신의 몸이 이상함을 알리고 싶지 않아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이 짓이겨져 아팠지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긴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난 협박은 싫지만.”
루카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병호에게 손대게 만들지는 마.”
“……!”
나현은 커다래진 눈으로 루카를 노려봤다. 이들은 병호를 들먹여서라도 자신을 움직이게 만들 모양인 듯했다. 그만큼 자신이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말이었다.
“병호는…… 하, 건드리지 마.”
“그럼 부탁은?”
“알았……!”
“이런!”
벌떡 일어나려던 나현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가 그대로 의식을 놓쳤다.
* * *
“몸이 생각보다 약한데요?”
안개를 걷어 내듯 갑자기 의식을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건 칵테일 잔에 뭔가를 넣었기 때문임을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인지하고 있었다. 병호와 저녁을 먹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문제는 칵테일이라는 소리였다.
이들을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고 자신이 먹은 것은 칵테일 한 잔뿐이었다. 그것도 겨우 몇 모금 홀짝인 것이 다였다.
‘바텐더도 한패였구나.’
나현은 속으로 탄식 같은 말을 내뱉으며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들이 그냥 위험한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나현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뭘 마신 거지?”
“피나콜라다를 마시긴 했는데.”
나현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의문을 안은 루카의 목소리와 의아하다는 듯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현은 혼란스러움이 일었다.
“독하지도 않은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다른 손을 탄 것 같은데……. 들켰을까요?”
루카가 미심쩍다는 듯 던지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 의외였다. 이들 말고 다른 위협적인 존재들이 또 있다는 소리였다. 나현은 이쯤 되니 이들이 왜 이토록 자신에게 접근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울까요?”
여자가 다가오는지 아까와 달리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왜 그러세요?”
다가오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인지 목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청각 장애인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현은 소리의 울림에 꽤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장난을 친다고 어머니 뒤로 다가가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루의 진동으로 누가 다가오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자도록 깨우지 말…….”
“이미 깨어 있잖아.”
“네?”
조심스럽게 묻는 여자의 말을 파고든 루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현은 속으로 한탄 같은 탄식을 내뱉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남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어떤 성분의 약인지도 모르면서 눈치로 때려잡은 것일까. 아니면 마신 칵테일의 양으로 추측한 것일까.
“깼네요.”
입술 끝에 진한 미소를 건 여자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긴…….”
눈길만 돌려 주변을 살피던 나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곳은 자신의 은신 겸 휴가를 위해 짐을 푼 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침대에 태평하게 누워 있었다. 사실 의식을 잃은 자신에게서 룸 열쇠를 꺼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자, 이제 의식을 찾았으니 부탁을…….”
“싫은데?”
나현은 괜한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그의 말대로 호락호락하게 굴기 싫었다. 부탁을 들어주기 전에 이유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여자가 난처한 얼굴로 루카를 돌아봤다. 여자가 시선 주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루카가 나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다가왔다.
“우리 구면인데.”
한쪽 입술 끝에 걸고 있는 미소가 이상하게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초면에는 하는 게 아니라며.”
자신의 임기응변을 조롱하는 말에 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카라는 남자가 다가오자 여자는 멀찍이 떨어지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그냥 밖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태도였다. 밖을 주시하던 그녀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다시 다가왔다.
“이거…….”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게 먼저지.”
“난 크로마. 여긴 루카.”
누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냐고, 쯧.
나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봤다. 밝은 노랑으로 염색을 한 탓에 금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만 여자는 동양인이었다.
“다시 협박을 해야 하나?”
“하아…….”
루카가 싸늘한 어투로 말하자 나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읽을 수 있겠어?”
루카가 여자에게 건네받아 내민 것은 태블릿으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현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다 태블릿을 받아 쥐었다. 병호의 안위까지 걸린 일이다 보니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판단했다.
영상에서는 어떤 남자가 주변을 세밀하게 살피더니 보관함에 작은 봉투를 넣고는 CCTV를 올곧게 쳐다봤다. 그러고는 말을 걸 듯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요 없는 말들을 나열하듯 생각나는 단어를 다 말하는 듯했다. 나현은 영상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듯했지만 차츰 그 많은 단어 중에 반복되는 말이 있었다.
백. 찾아야 해, 그들을 모두. ……백. 풀 수 있지?
남자가 보관함을 한 번 돌아보다 다시 화면을 쳐다보는 순간 영상이 정지되었다. 영상은 더 볼 것 없이 거기서 끝이 났다. 영상 속의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무척 불안해 보였다.
“읽었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카를 본 나현은 그의 눈빛에 찔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알려 줘야 하느냐고 뻗대려던 나현은 적당히 알려 주고 빨리 이 일에서 빠지는 것이 신상에 좋음을 깨달았다.
“백이라고 했어.”
이런 영상이라면 굳이 자신을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독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이 아니니 다른 이를 찾아가도 되는 일이었다.
“많은 단어를 나열했지만 그건 속임수 같아.”
얼핏 끝말잇기를 하듯 무수한 단어를 말했지만 실상 끝말잇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반복되는 단어가 백이야.”
“그다음엔.”
“찾아야 해, 그들을 모두. 라고 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영상을 보던 루카가 다시 태블릿을 내밀었다. 나현은 뚱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받아 쥐었다.
“다시 제대로 읽어.”
“제대로 읽……!”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나현은 영상을 보다 멈칫했다. 영상 속에 있는 남자도 동양인으로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갓 스물 살을 넘겼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는 ‘백’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약간은 어눌한 발음을 구사하는 듯 보였다.
“찾았어?”
나현이 영상의 한 구간을 반복해서 돌려 보자 루카가 재촉하듯 물어 왔다.
“……찾은 거 같아.”
남자가 말하는 ‘백’이라는 단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발음이 다르듯 그것을 상세하게 읽어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현은 그제야 이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독화를 하는 사람들이 자국어만 읽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외국어는 어려웠다. 어머니 조엘은 영국에서 자랐지만 고향은 미국이었다. 그러니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조엘의 밑에서 독화를 터득한 나현은 그 미묘한 차이를 감각적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나현은 아버지 때문에 한국어 독화 또한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그 모든 부분을 염두에 두고 찾아온 것 같았다.
“이 남자가 말하는 백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백이야. B. A. C. K.”
“Back?”
“마지막에 딱 한 번 ‘풀 수 있지?’라고 묻고 있어.”
“크로마.”
“네.”
뒤에 서 있던 크로마가 무슨 지시를 받은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나현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루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왜 안 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자신을 조용히 내버려 둘 차례지 않은가 말이다.
5화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여기 있는데.”
나현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봤다면 마치 치정 싸움 같았을 것이다.
“더 시선을 끌지 않을 거면 나가지.”
명령하듯 말하는 루카를 향해 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텐더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이는 다른 고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내가 왜?”
나현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로 루카에게 눈을 치떴다.
“마저 마실 건가. 칵테일은 시간 끌면 맛없는데.”
나현은 루카의 말에 자신이 쥐고 있던 칵테일 잔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려서 그런지 잔에 담긴 칵테일이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현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 갑자기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은 범죄 심리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떨 수는 있겠지만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에게 불만이 일었다.
“……너 뭐야?”
직설적인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것인지 루카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는 듯 입술 끝에 미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
몸을 기울여 다가온 루카의 행동에 움찔 놀란 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같이 나가야지.”
귀에 입술을 붙이고 은밀하게 말하는 루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나현이 느끼기에는 시베리아 겨울바람보다 차가웠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현은 순간 의식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해 손가락을 힘껏 말아 쥐었지만 나른한 기운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
나현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접었음을 알렸다. 고로 네가 누구든, 네 부탁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시간을 끌어 손해나는 건 내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납골당 앞에서 했던 말을 루카가 다시 한번 인지시키자 나현은 인상을 구겼다. 이상하게 머릿속이 멍해지지 시작했다.
“시간을 자꾸 끌어서 내 인내심이 바닥을 긁으면…….”
진짜 인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낮게 읊조리는 루카의 목소리는 꽤 위협적이었다. 나현은 멍해지는 의식을 잡으려 고개를 몇 번 흔들었지만 의식이 아까보다 더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몸이 왜 이러지.
“어디 불편한가?”
남자의 말이 물속에서 퍼지는 것처럼 들려왔다. 나현은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힘겹게 깜빡였다.
“어지러운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나현은 자신의 몸이 이상함을 알리고 싶지 않아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살이 짓이겨져 아팠지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긴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난 협박은 싫지만.”
루카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병호에게 손대게 만들지는 마.”
“……!”
나현은 커다래진 눈으로 루카를 노려봤다. 이들은 병호를 들먹여서라도 자신을 움직이게 만들 모양인 듯했다. 그만큼 자신이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말이었다.
“병호는…… 하, 건드리지 마.”
“그럼 부탁은?”
“알았……!”
“이런!”
벌떡 일어나려던 나현은 머리가 핑 도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가 그대로 의식을 놓쳤다.
* * *
“몸이 생각보다 약한데요?”
안개를 걷어 내듯 갑자기 의식을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건 칵테일 잔에 뭔가를 넣었기 때문임을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인지하고 있었다. 병호와 저녁을 먹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문제는 칵테일이라는 소리였다.
이들을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났고 자신이 먹은 것은 칵테일 한 잔뿐이었다. 그것도 겨우 몇 모금 홀짝인 것이 다였다.
‘바텐더도 한패였구나.’
나현은 속으로 탄식 같은 말을 내뱉으며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들이 그냥 위험한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나현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뭘 마신 거지?”
“피나콜라다를 마시긴 했는데.”
나현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의문을 안은 루카의 목소리와 의아하다는 듯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나현은 혼란스러움이 일었다.
“독하지도 않은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다른 손을 탄 것 같은데……. 들켰을까요?”
루카가 미심쩍다는 듯 던지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 의외였다. 이들 말고 다른 위협적인 존재들이 또 있다는 소리였다. 나현은 이쯤 되니 이들이 왜 이토록 자신에게 접근하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울까요?”
여자가 다가오는지 아까와 달리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왜 그러세요?”
다가오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인지 목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청각 장애인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현은 소리의 울림에 꽤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한 번은 장난을 친다고 어머니 뒤로 다가가 눈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루의 진동으로 누가 다가오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자도록 깨우지 말…….”
“이미 깨어 있잖아.”
“네?”
조심스럽게 묻는 여자의 말을 파고든 루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현은 속으로 한탄 같은 탄식을 내뱉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남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어떤 성분의 약인지도 모르면서 눈치로 때려잡은 것일까. 아니면 마신 칵테일의 양으로 추측한 것일까.
“깼네요.”
입술 끝에 진한 미소를 건 여자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긴…….”
눈길만 돌려 주변을 살피던 나현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곳은 자신의 은신 겸 휴가를 위해 짐을 푼 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침대에 태평하게 누워 있었다. 사실 의식을 잃은 자신에게서 룸 열쇠를 꺼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자, 이제 의식을 찾았으니 부탁을…….”
“싫은데?”
나현은 괜한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그의 말대로 호락호락하게 굴기 싫었다. 부탁을 들어주기 전에 이유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여자가 난처한 얼굴로 루카를 돌아봤다. 여자가 시선 주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루카가 나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다가왔다.
“우리 구면인데.”
한쪽 입술 끝에 걸고 있는 미소가 이상하게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초면에는 하는 게 아니라며.”
자신의 임기응변을 조롱하는 말에 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카라는 남자가 다가오자 여자는 멀찍이 떨어지며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그냥 밖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태도였다. 밖을 주시하던 그녀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다시 다가왔다.
“이거…….”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게 먼저지.”
“난 크로마. 여긴 루카.”
누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냐고, 쯧.
나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봤다. 밝은 노랑으로 염색을 한 탓에 금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만 여자는 동양인이었다.
“다시 협박을 해야 하나?”
“하아…….”
루카가 싸늘한 어투로 말하자 나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읽을 수 있겠어?”
루카가 여자에게 건네받아 내민 것은 태블릿으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현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다 태블릿을 받아 쥐었다. 병호의 안위까지 걸린 일이다 보니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판단했다.
영상에서는 어떤 남자가 주변을 세밀하게 살피더니 보관함에 작은 봉투를 넣고는 CCTV를 올곧게 쳐다봤다. 그러고는 말을 걸 듯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요 없는 말들을 나열하듯 생각나는 단어를 다 말하는 듯했다. 나현은 영상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는 듯했지만 차츰 그 많은 단어 중에 반복되는 말이 있었다.
백. 찾아야 해, 그들을 모두. ……백. 풀 수 있지?
남자가 보관함을 한 번 돌아보다 다시 화면을 쳐다보는 순간 영상이 정지되었다. 영상은 더 볼 것 없이 거기서 끝이 났다. 영상 속의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무척 불안해 보였다.
“읽었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카를 본 나현은 그의 눈빛에 찔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알려 줘야 하느냐고 뻗대려던 나현은 적당히 알려 주고 빨리 이 일에서 빠지는 것이 신상에 좋음을 깨달았다.
“백이라고 했어.”
이런 영상이라면 굳이 자신을 찾아올 필요가 없었다. 독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이 아니니 다른 이를 찾아가도 되는 일이었다.
“많은 단어를 나열했지만 그건 속임수 같아.”
얼핏 끝말잇기를 하듯 무수한 단어를 말했지만 실상 끝말잇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반복되는 단어가 백이야.”
“그다음엔.”
“찾아야 해, 그들을 모두. 라고 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영상을 보던 루카가 다시 태블릿을 내밀었다. 나현은 뚱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받아 쥐었다.
“다시 제대로 읽어.”
“제대로 읽……!”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나현은 영상을 보다 멈칫했다. 영상 속에 있는 남자도 동양인으로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갓 스물 살을 넘겼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는 ‘백’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어를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약간은 어눌한 발음을 구사하는 듯 보였다.
“찾았어?”
나현이 영상의 한 구간을 반복해서 돌려 보자 루카가 재촉하듯 물어 왔다.
“……찾은 거 같아.”
남자가 말하는 ‘백’이라는 단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발음이 다르듯 그것을 상세하게 읽어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나현은 그제야 이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독화를 하는 사람들이 자국어만 읽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외국어는 어려웠다. 어머니 조엘은 영국에서 자랐지만 고향은 미국이었다. 그러니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조엘의 밑에서 독화를 터득한 나현은 그 미묘한 차이를 감각적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나현은 아버지 때문에 한국어 독화 또한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그 모든 부분을 염두에 두고 찾아온 것 같았다.
“이 남자가 말하는 백은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백이야. B. A. C. K.”
“Back?”
“마지막에 딱 한 번 ‘풀 수 있지?’라고 묻고 있어.”
“크로마.”
“네.”
뒤에 서 있던 크로마가 무슨 지시를 받은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나현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루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왜 안 나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자신을 조용히 내버려 둘 차례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