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제1화
“엘렉트라. 이거 500골드짜린데. 네가 해 주면 100골드는 나눠 줄게.”
재수 없게 아침부터 데니로를 마주쳤다. 실실 웃으며 나에게 복잡한 마법 스크롤을 내미는 데니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적어도 300골드는 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우리 신입. 당차군. 좋아, 내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 그렇게 해 주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500골드는 개뿔이. 다 하면 2000골드는 챙길 것같이 생겼구만.
나는 2000골드짜리 일을 하고 300골드를 챙기기 위해 밤새 일해야 했다.
데니로가 나에게 스크롤을 넘겨주고 어깨를 툭툭 치더니 사라졌다. 나는 묵직한 스크롤을 끌어안고 연구실로 향했다.
이 생활도 벌써 세 달째였다.
기왕 책 속에 빙의할 거면 여자 주인공이나, 평생 조용히 놀고먹을 수 있는 대귀족집 아가씨가 좋았을 텐데. 내가 빙의한 건 엑스트라1, 그것도 마탑에서 괴롭힘이나 당하는 가엾은 조무래기 마법사였다.
나는 양피지를 쭉 펼쳐 복잡한 스크롤을 베끼기 시작했다.
이건 마탑 일원들의 주요한 수입을 담당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하급 마법사라면 더더욱 이 일에 매달렸다. 이미 개발된 스크롤을 한 땀 한 땀 베끼고 마력을 불어넣어 팔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거였다.
스크롤 하나의 가격은 기본이 1000골드부터 시작했으니, 베끼기만 해도 우리에게 떨어지는 돈이 꽤 됐다.
“하아…….”
누군가가 여기까지 들었다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직접 2000골드짜리 일을 맡으면 되는데, 겨우 흥정해 300골드를 받으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내 처지가 이해되지 않겠지.
그래. 2000골드짜리 일 맡기, 말은 쉽다.
문제는 내가…….
“엘렉트라. 버틸 만하냐? 쓰러질 것 같으면 집에 돌아가도 좋아.”
“왜, 생리 휴가라는 것도 있잖아. 우리 마탑 복지 참 좋아.”
여자라는 거였다.
마탑의 하급 마법사 중에서도 막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여자라서 ‘부정 탄다고’ 스크롤 작업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어떻게든 받아 내서 해야 하는 거였다.
“걱정 감사합니다, 선배님!”
마탑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조직이다. 무슨 말을 들어도 손아래 사람이라면 활짝 웃고 허리를 깊이 숙여야 했다.
그야말로 선배라는 이름의 놈팡이들이 나를 괴롭히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도…… 네가 얼굴이 조금만 어긋나 있었으면 국물도 없었다. 나름 이 지하 연구실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라 좀 더 잘 참을 수 있었다.
사실 더럽고 치사해서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 볼까도 했었는데, 마법 스크롤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내 적성에 꽤 맞았다. 원래 몸의 주인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는지, 마법 지식은 내 머릿속에 금방 술술 들어왔다.
게다가 다른 직업은 밤을 샌다 해도 하루에 300골드는 벌지 못했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에베스’에 건너가 살 것이다.
책을 내거나 마법 연구를 해 내는 것도 좋겠지. 여윳돈이 많으면 적게 벌어도 아끼면서 살 수 있으니 마을 여관 같은 데에서 일해도 살 만할 거야. 잡화점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내 마음속에 꿈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쨌든 1년 뒤면 이 마탑과도 안녕이다. 1년 동안 매일 100골드 이상만 벌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테니.
그래. 안전하게.
“곧 탑주님이 돌아오신다며?”
“이번엔 전쟁터의 반을 한 번에 쓸어 버리셨다는데.”
이 마탑의 수장이자 내가 빙의한 소설, <절벽 위의 꽃>의 악역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년이다.
손만 대도 사람의 숨을 끊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실력자. 열네 살에 이전 마탑주를 이기고 마탑을 꿀꺽, 삼켜 버린 천재.
원래는 제국의 산하에 있던 마탑을 독립적인 기관으로 만든 개혁자. 각국의 의뢰 중 가장 잔혹한 것과 돈이 되는 것, 흥미가 가는 것만 골라 일을 맡는 남자.
‘피의 사신’, ‘마왕’ 에드윈 볼테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던 그는 여자 주인공에게 반해, 그녀를 얻기 위해 현재 우리가 속한 대륙을 멸망시킬 전쟁을 일으킨다.
총 두 개의 대륙이 있는 이 세계에서, ‘반드’ 대륙이 지도에서 지워지게 된다. 남자 주인공이 겨우 그를 제지하고 ‘반드’에는 데하노 제국만이 남는다.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내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캐릭터, ‘차’애가 에드윈이었다. 외모 묘사도 내 취향이었고, 그가 내뱉는 시니컬한 말들은 묘하게 외로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마음이 갔다.
하지만 차애가 내 미래를 파괴할 예정이라면?
그건 더 이상 차애가 아니다. 파멸자일 뿐이다.
내 기억으로는 반드가 멸망하고 대륙 하나가 남는데, 그 대륙의 이름이 ‘에베스’다. 반드에서 일주일 정도 배를 타고 가면 있는 먼 곳. 에드윈이 미쳐 날뛰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다.
에베스에 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외지인인 내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기 위해서도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다행히 에베스는 반드보다 남녀 차별이 훨씬 덜하다고 들었다. 성격에 안 맞게 살아야 하는 이곳보다, 당연히 나에게는 에베스가 훨씬 더 좋은 세상으로 느껴졌다.
에드윈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에베스에 가고 싶었다. 이 마탑에서 겪은 일은 반드에선 흔한 일이었다. 여자라서 무시당하는 일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마법 스크롤 베끼는 일에 열중해야 했다.
깃펜에 마력이 담긴 잉크를 묻히고 자세를 잡았다.
“말조심해. 잘못하면 우리도 목 날아가니까.”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다. 어이, 엘렉트라. 이 연구실 싹 치워 놔.”
“예! 선배님.”
펜을 양피지에 가져다 대 보기도 전에 나는 일어나야 했다.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 수입들마저 사라질 게 뻔하니까.
망할 조직, 망할 인간들. 맥주 한잔하자며 연구실을 나가 버리는 남자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오늘은 내일 아침 해를 보며 퇴근할 것 같았다. 나는 연구실 사람들이 엉망으로 던져 놓은 양피지와 설계도들을 하나하나 말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새로 개발 중인 것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었으며, 앞으로 베껴야 할 것들도 있었다. 이 하급 연구실의 인간들은 정리라는 걸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나도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법사의 기본 실력은 정리 방식에서 쉽게 보였다. 재료나 지식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필요할 때 제대로 마법을 사용하는 법이었다.
머릿속도, 연구실도, 다 그 마법사의 역량을 보여 주는 법이거늘. 쯧쯧.
“……어라.”
한참 설계서를 정리하던 나는 이 연구실에서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이런 게 있었나?”
조무래기에 잡일 처리 담당인 만큼 이 연구실에 대한 건 내가 전부 꿰고 있었다. 낯설 정도로 고급스럽고 거대한 독피지가 손에 잡혔다.
펼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독피지에는 이 연구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잡한 설계와 마법 수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마법 공부를 좋아하는 탓일까. 순식간에 매혹적인 숫자와 글자들에 빠져들어 갔다.
“어, 여기 잘못됐네.”
한참 읽어 내려가던 나는 고민하다가 잉크와 깃펜을 가져왔다. 어차피 누가 한지도 모를 텐데, 잘못된 건 고쳐 주는 게 좋았다. 엑스트라1의 무존재감은 이럴 때 편한 법이었다.
누가 나를 신경 쓰겠어?
섬세한 작업이었다. 넓은 바닥에 내 몸보다 커다란 설계도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올라가 하나하나 덧대어 그렸다. 마력이 담긴 잉크는 지워지는 잉크라, 잘못된 숫자를 감쪽같이 지울 수 있었다.
완전 범죄가 이뤄지도록 글씨체까지 흉내를 냈다. 글씨체 흉내는 자신 있었다. 선배들의 스크롤을 대신 만들었다는 것이 티 나지 않도록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따라 그려야 했으니까.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었다.
“……엘렉트라. 너 진짜 미쳤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한눈을 팔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깔끔히 수정된 도면을 정리해 한쪽으로 치웠다.
미쳤다 싶으면서도, 밤새 펼쳐 나갔던 마법들이 즐거워서 슬쩍 미소 지었다.
“에휴. 오늘 퇴근하긴 글렀네.”
나는 다시 연구실 탁자 앞에 앉아, 어제 데니로가 맡겼던 마법 스크롤을 베끼기 시작했다.
밤을 새는 건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체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게, 사무직이 천직인 듯했다.
✎ ✎ ✎
“냄새나는군.”
정확히 3일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작은 연구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난생처음 보는 장신의 미남이 내 키보다 더 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 들어온 탓이었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소설을 읽었으니까.
에드윈 볼테르는 나에게 직진해 걸어왔다.
나에게?
……왜, 나에게?
근데…… 진짜 잘생겼다. 나는 멍하니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네가 한 건가?”
“……네, 네에?”
칠흑같이 어두운 검정 머리가 길게 늘어져 찰랑거렸다. 과연, 남자는 짧은 머리가 최고라고 외치던 나의 취향을 부수고 내 차애가 된 사람다웠다.
대체 뭘 발랐는지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늘하고 남성적인 얼굴인데도 긴 머리가 어울렸다. 그야말로 미인이었다.
반칙이다.
난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매일 질끈 묶고 다니는 것 말고는 치장이라는 걸 할 게 없었다. 마탑에서 일하다 보니 편한 옷이 좋았고, 차별받는 게 지겨워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가끔 남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특징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나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범한 나로서는 이 빛나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소설에서 묘사만 읽었을 때에는, 미남인데도 불구하고 서늘한 분위기와 위협적인 눈매 때문에 대부분 겁을 먹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한 번은 직접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내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정작 마주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얼굴이다. 지하 연구실의 잘생긴 남자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네가 한 거냐고 물었다.”
정신 차려, 엘렉트라! 나는 내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 눌렀다.
에드윈이 내민 건 3일 전 밤새 고쳐 두었던 설계도였다. 그 고급스러운 설계도가 에드윈의 것이었다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미소는 볼에 걸리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들어 갔다. 걸리면 죽는다.
이제야 조금 그가 무서워졌다.
진짜 죽는다.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고 말겠다는 내 꿈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엘렉트라. 그게 네 이름이군.”
“예, 예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좋아. 엘렉트라.”
내 머릿속에는 잔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 목이 마탑 벽에 내걸릴까? 감히 상사의 설계도를, 실력도 없는 엑스트라1이 건드렸으니까.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성조차 없이 이름만 있는 가난한 소시민이다. 내 목숨 따위 에드윈에게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그는 아무래도 내 소행임을 확실시하는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비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흑화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자비가 조금이라도 있길.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너, 승진이야.”
“네, 죽을죄를 지었……. 네?”
승진……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엘렉트라. 이거 500골드짜린데. 네가 해 주면 100골드는 나눠 줄게.”
재수 없게 아침부터 데니로를 마주쳤다. 실실 웃으며 나에게 복잡한 마법 스크롤을 내미는 데니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적어도 300골드는 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우리 신입. 당차군. 좋아, 내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 그렇게 해 주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500골드는 개뿔이. 다 하면 2000골드는 챙길 것같이 생겼구만.
나는 2000골드짜리 일을 하고 300골드를 챙기기 위해 밤새 일해야 했다.
데니로가 나에게 스크롤을 넘겨주고 어깨를 툭툭 치더니 사라졌다. 나는 묵직한 스크롤을 끌어안고 연구실로 향했다.
이 생활도 벌써 세 달째였다.
기왕 책 속에 빙의할 거면 여자 주인공이나, 평생 조용히 놀고먹을 수 있는 대귀족집 아가씨가 좋았을 텐데. 내가 빙의한 건 엑스트라1, 그것도 마탑에서 괴롭힘이나 당하는 가엾은 조무래기 마법사였다.
나는 양피지를 쭉 펼쳐 복잡한 스크롤을 베끼기 시작했다.
이건 마탑 일원들의 주요한 수입을 담당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하급 마법사라면 더더욱 이 일에 매달렸다. 이미 개발된 스크롤을 한 땀 한 땀 베끼고 마력을 불어넣어 팔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거였다.
스크롤 하나의 가격은 기본이 1000골드부터 시작했으니, 베끼기만 해도 우리에게 떨어지는 돈이 꽤 됐다.
“하아…….”
누군가가 여기까지 들었다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직접 2000골드짜리 일을 맡으면 되는데, 겨우 흥정해 300골드를 받으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내 처지가 이해되지 않겠지.
그래. 2000골드짜리 일 맡기, 말은 쉽다.
문제는 내가…….
“엘렉트라. 버틸 만하냐? 쓰러질 것 같으면 집에 돌아가도 좋아.”
“왜, 생리 휴가라는 것도 있잖아. 우리 마탑 복지 참 좋아.”
여자라는 거였다.
마탑의 하급 마법사 중에서도 막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여자라서 ‘부정 탄다고’ 스크롤 작업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어떻게든 받아 내서 해야 하는 거였다.
“걱정 감사합니다, 선배님!”
마탑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조직이다. 무슨 말을 들어도 손아래 사람이라면 활짝 웃고 허리를 깊이 숙여야 했다.
그야말로 선배라는 이름의 놈팡이들이 나를 괴롭히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도…… 네가 얼굴이 조금만 어긋나 있었으면 국물도 없었다. 나름 이 지하 연구실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라 좀 더 잘 참을 수 있었다.
사실 더럽고 치사해서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 볼까도 했었는데, 마법 스크롤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내 적성에 꽤 맞았다. 원래 몸의 주인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는지, 마법 지식은 내 머릿속에 금방 술술 들어왔다.
게다가 다른 직업은 밤을 샌다 해도 하루에 300골드는 벌지 못했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에베스’에 건너가 살 것이다.
책을 내거나 마법 연구를 해 내는 것도 좋겠지. 여윳돈이 많으면 적게 벌어도 아끼면서 살 수 있으니 마을 여관 같은 데에서 일해도 살 만할 거야. 잡화점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내 마음속에 꿈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쨌든 1년 뒤면 이 마탑과도 안녕이다. 1년 동안 매일 100골드 이상만 벌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테니.
그래. 안전하게.
“곧 탑주님이 돌아오신다며?”
“이번엔 전쟁터의 반을 한 번에 쓸어 버리셨다는데.”
이 마탑의 수장이자 내가 빙의한 소설, <절벽 위의 꽃>의 악역님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년이다.
손만 대도 사람의 숨을 끊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실력자. 열네 살에 이전 마탑주를 이기고 마탑을 꿀꺽, 삼켜 버린 천재.
원래는 제국의 산하에 있던 마탑을 독립적인 기관으로 만든 개혁자. 각국의 의뢰 중 가장 잔혹한 것과 돈이 되는 것, 흥미가 가는 것만 골라 일을 맡는 남자.
‘피의 사신’, ‘마왕’ 에드윈 볼테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던 그는 여자 주인공에게 반해, 그녀를 얻기 위해 현재 우리가 속한 대륙을 멸망시킬 전쟁을 일으킨다.
총 두 개의 대륙이 있는 이 세계에서, ‘반드’ 대륙이 지도에서 지워지게 된다. 남자 주인공이 겨우 그를 제지하고 ‘반드’에는 데하노 제국만이 남는다.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내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캐릭터, ‘차’애가 에드윈이었다. 외모 묘사도 내 취향이었고, 그가 내뱉는 시니컬한 말들은 묘하게 외로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마음이 갔다.
하지만 차애가 내 미래를 파괴할 예정이라면?
그건 더 이상 차애가 아니다. 파멸자일 뿐이다.
내 기억으로는 반드가 멸망하고 대륙 하나가 남는데, 그 대륙의 이름이 ‘에베스’다. 반드에서 일주일 정도 배를 타고 가면 있는 먼 곳. 에드윈이 미쳐 날뛰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다.
에베스에 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했다. 외지인인 내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기 위해서도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다행히 에베스는 반드보다 남녀 차별이 훨씬 덜하다고 들었다. 성격에 안 맞게 살아야 하는 이곳보다, 당연히 나에게는 에베스가 훨씬 더 좋은 세상으로 느껴졌다.
에드윈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에베스에 가고 싶었다. 이 마탑에서 겪은 일은 반드에선 흔한 일이었다. 여자라서 무시당하는 일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마법 스크롤 베끼는 일에 열중해야 했다.
깃펜에 마력이 담긴 잉크를 묻히고 자세를 잡았다.
“말조심해. 잘못하면 우리도 목 날아가니까.”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다. 어이, 엘렉트라. 이 연구실 싹 치워 놔.”
“예! 선배님.”
펜을 양피지에 가져다 대 보기도 전에 나는 일어나야 했다.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 수입들마저 사라질 게 뻔하니까.
망할 조직, 망할 인간들. 맥주 한잔하자며 연구실을 나가 버리는 남자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오늘은 내일 아침 해를 보며 퇴근할 것 같았다. 나는 연구실 사람들이 엉망으로 던져 놓은 양피지와 설계도들을 하나하나 말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새로 개발 중인 것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었으며, 앞으로 베껴야 할 것들도 있었다. 이 하급 연구실의 인간들은 정리라는 걸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나도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법사의 기본 실력은 정리 방식에서 쉽게 보였다. 재료나 지식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필요할 때 제대로 마법을 사용하는 법이었다.
머릿속도, 연구실도, 다 그 마법사의 역량을 보여 주는 법이거늘. 쯧쯧.
“……어라.”
한참 설계서를 정리하던 나는 이 연구실에서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이런 게 있었나?”
조무래기에 잡일 처리 담당인 만큼 이 연구실에 대한 건 내가 전부 꿰고 있었다. 낯설 정도로 고급스럽고 거대한 독피지가 손에 잡혔다.
펼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독피지에는 이 연구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잡한 설계와 마법 수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마법 공부를 좋아하는 탓일까. 순식간에 매혹적인 숫자와 글자들에 빠져들어 갔다.
“어, 여기 잘못됐네.”
한참 읽어 내려가던 나는 고민하다가 잉크와 깃펜을 가져왔다. 어차피 누가 한지도 모를 텐데, 잘못된 건 고쳐 주는 게 좋았다. 엑스트라1의 무존재감은 이럴 때 편한 법이었다.
누가 나를 신경 쓰겠어?
섬세한 작업이었다. 넓은 바닥에 내 몸보다 커다란 설계도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올라가 하나하나 덧대어 그렸다. 마력이 담긴 잉크는 지워지는 잉크라, 잘못된 숫자를 감쪽같이 지울 수 있었다.
완전 범죄가 이뤄지도록 글씨체까지 흉내를 냈다. 글씨체 흉내는 자신 있었다. 선배들의 스크롤을 대신 만들었다는 것이 티 나지 않도록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따라 그려야 했으니까.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었다.
“……엘렉트라. 너 진짜 미쳤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한눈을 팔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깔끔히 수정된 도면을 정리해 한쪽으로 치웠다.
미쳤다 싶으면서도, 밤새 펼쳐 나갔던 마법들이 즐거워서 슬쩍 미소 지었다.
“에휴. 오늘 퇴근하긴 글렀네.”
나는 다시 연구실 탁자 앞에 앉아, 어제 데니로가 맡겼던 마법 스크롤을 베끼기 시작했다.
밤을 새는 건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체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게, 사무직이 천직인 듯했다.
✎ ✎ ✎
“냄새나는군.”
정확히 3일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작은 연구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난생처음 보는 장신의 미남이 내 키보다 더 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 들어온 탓이었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소설을 읽었으니까.
에드윈 볼테르는 나에게 직진해 걸어왔다.
나에게?
……왜, 나에게?
근데…… 진짜 잘생겼다. 나는 멍하니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네가 한 건가?”
“……네, 네에?”
칠흑같이 어두운 검정 머리가 길게 늘어져 찰랑거렸다. 과연, 남자는 짧은 머리가 최고라고 외치던 나의 취향을 부수고 내 차애가 된 사람다웠다.
대체 뭘 발랐는지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늘하고 남성적인 얼굴인데도 긴 머리가 어울렸다. 그야말로 미인이었다.
반칙이다.
난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매일 질끈 묶고 다니는 것 말고는 치장이라는 걸 할 게 없었다. 마탑에서 일하다 보니 편한 옷이 좋았고, 차별받는 게 지겨워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가끔 남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특징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나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범한 나로서는 이 빛나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소설에서 묘사만 읽었을 때에는, 미남인데도 불구하고 서늘한 분위기와 위협적인 눈매 때문에 대부분 겁을 먹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한 번은 직접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내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절대 마주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정작 마주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얼굴이다. 지하 연구실의 잘생긴 남자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네가 한 거냐고 물었다.”
정신 차려, 엘렉트라! 나는 내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 눌렀다.
에드윈이 내민 건 3일 전 밤새 고쳐 두었던 설계도였다. 그 고급스러운 설계도가 에드윈의 것이었다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미소는 볼에 걸리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들어 갔다. 걸리면 죽는다.
이제야 조금 그가 무서워졌다.
진짜 죽는다.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고 말겠다는 내 꿈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엘렉트라. 그게 네 이름이군.”
“예, 예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좋아. 엘렉트라.”
내 머릿속에는 잔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 목이 마탑 벽에 내걸릴까? 감히 상사의 설계도를, 실력도 없는 엑스트라1이 건드렸으니까.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성조차 없이 이름만 있는 가난한 소시민이다. 내 목숨 따위 에드윈에게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그는 아무래도 내 소행임을 확실시하는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비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1년이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흑화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자비가 조금이라도 있길.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너, 승진이야.”
“네, 죽을죄를 지었……. 네?”
승진……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