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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여관에 도착했을 때엔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여관의 문을 열었다.

“배를 구해 주세요!”

“또 왔네.”

까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서는 융숭한 대접이라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됐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니?”

“뱃삯이 얼마랬죠?

“5000골드.”

내가 쓰지 않고,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모은 돈이 4000골드 정도 됐다. 1000골드가 모자라다.

나는 퉁명스레 대답한 중년 여자의 팔을 꽉 잡았다.

“저 진짜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또 그 소리니?”

“4000골드를 모았어요. 1000골드는 나중에 보내 드리면 안 될까요?”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서 꿈에 젖은 여자애들이란.”

여자는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간절한 표정을 짓고서 그녀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혹시 다른 물품 거래도 하시나요?”

“……무슨 물품?”

여자는 내가 마탑에서 일하는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눈빛을 보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그럴걸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

“그건 그쪽이 쳐주는 거에 따라.”

나는 조심스레 딜을 건넸다.

여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뒤돌아 서랍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내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기 싸움에서 패를 보이는 건 초보 도박꾼조차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명해.”

“네?”

“배편은 물론, 에베스의 조용한 시골 마을까지 가는 교통편도 마련할 수 있는 서류야.”

진작 훔칠걸.

아무리 그래도 횡령은 옳지 않다는, 전생에서부터 지켜 온 얄팍한 소신과 최소한의 양심 때문에 자제했었다.

근데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죽게 생겼는데.

하급 스크롤 정도야 훔쳐 봤자 누가 안다고. 그냥 내가 옮겨 적은 거 한두 개 훔치면 되는 건데.

죽음 앞에서 양심은 무의미했다.

여태까지 계속 냉랭하게만 굴던 선박 중개업자가 순순히 내 거래에 응하는 모습을 보자 이제야 배가 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할 거야. 일단 대륙의 끝까지 이동해야 하니, 마차를 마련해 둘게.”

“물건은 그때 넘길게요.”

“……그래.”

이쪽에서도 그녀를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내가 건 조건에 그녀는 순순히 부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관을 빠져 나왔다.

역시, 세 달 전부터 미리 배편을 찾아 두고 살길을 도모한 보람이 있었다.

집에 가자마자 짐부터 싸고, 스크롤을 꼭 품에 안고 다시 여기로 와야지. 좀 성급한 것 같기도 하지만 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나는 여유롭게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몸은 좀 힘들겠지만 내일부터는 밝은 미래가…….



“이상하지.”

그래. 이상하다.

나는 열심히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 마탑에서 벗어나고, 저 악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대체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걸까.

집으로 가던 숲길, 갑자기 에드윈이 나타났다.

기절할 뻔했다. 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에드윈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이 이 세계에서도 전설로 치부되는 마왕의 현신이라도 되는 듯해서.

“한 사람의 마력 냄새가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이 나는 게 좀 이상해서 말이야.”

“……그거야, 제가 여기에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에드윈에게 웃어 보였다. 부하 직원에겐 웃음이 필수였다.

“사람에게서 나는 마력의 냄새와, 그 사람이 만든 도구에서 나는 냄새는 조금 달라. 웬만한 마법사들은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던데. 아니, 아예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 같더군.”

그걸 누가 알아요. 세상에서 대체 누가 마력의 냄새를 맡을 수가 있나요.

차라리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가방 속의 스크롤을 당장 태워 버릴 순 없을까? 이걸 보면, 에드윈이 내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걸 알고 나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까. 감히 네가 나를 거부하고 피하려고 해? 그런 대사를 내뱉으며 말이다.

벌써 그의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살벌하게 박혀 오는 듯했다.

“엘렉트라. 맞지?”

“네, 네에. 딸꾹.”

딸꾹질이 났다. 나도 놀라긴 놀란 모양이었다.

에드윈이 피식 웃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죽을지도 몰라. 저 웃음은 사신의 웃음이다.

마왕, 피의 사신. 그의 별명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느낀 공포와는 한참 거리가 먼,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 내 머리칼을 넘겼다.

“이번뿐이야. 엘렉트라. 다음은 없어.”

“……네.”

이다지도 달콤한 목소리로 저렇게 무서운 말을 하다니.

에드윈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일 보지. 엘렉트라.”

네…….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앞에 있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눈을 떠 보니 허공만 남아 있었다.

방금 꿈이었나?

아니, 꿈이라기엔 내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쉽게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서 쉬이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명실상부 최고의 마법사고, 내가 어디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으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나를 쉽게 놓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 ✎ ✎



이제 처형대에 오를 시간이다.

잠도 못 자고 밤새도록 생각했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보자.

내가 고친 설계도가 그의 마음에 들었던 거면, 그 아래에서 일하는 게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 나쁘다.

어쨌든 나는 세계의 반이 멸망하는 그 엔딩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일을 더럽게 못해서 잘리는 것. 그것뿐이리라.

최상층에 도달했다. 방은 두 개였다. 하나는 연구실장들이 머무는 방, 하나는 에드윈의 방.

“왔군.”

뭇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최종 보스처럼 어두침침한 방에서 한 줄기 빛을 받고 있는 그는 무서우면서도 신성해 보였다. 잘생긴 게 죄지. 저런 악인이 신성해 보일 수도 있다니.

두껍고 커다란 책상 앞에 서 있는 그의 뒤로 계단이 보였다. 단 위에는 다섯 사람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네, 네. 탑주님.”

“에드윈 님이라고 불러.”

“네?”

“‘탑주님’이란 말 싫어하니까.”

에드윈은 무심하게 말하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이 방에는 천장에 붙은 유리창 말고 따로 빛을 들이는 구멍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마법도 그렇게 잘하면서, 빛 마법 좀 쓰지.

“네, 에드윈 님.”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네, 넵.”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질문을 알고 있었다.

‘왜 나를 알지?’

혹은

‘왜 스크롤을 훔쳤지?’

거기에 대한 건 확실하게 준비했다. 소설 안의 정보를 끌어와서 대충 끼워 맞췄다.

에드윈은 제국의 수도와 가까운 꽤 큰 도시 출신이었다. 가족의 사랑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학대라면 학대였지. 결국 자연히 잔인한 성품으로 자라났다.

일상에 피로를 느낀 어린 소년은 가출해서 마탑에 들어왔다.

마탑에 들어온 직후의 에드윈은 상급 마법사였고, 탑주가 된 후엔 전쟁터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사람이라 연결고리가 없었다. 나는 쭉 하급 마법사 나부랭이로 살아왔으니까.

차마 내가 전쟁터를 누볐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가 믿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사실은 예전에 에드윈 님을 실제로 뵌 적이 있어요. 에드윈 님이 열세 살에 마탑에 들어오시기 전에 살던 마을을 기억하세요? 전 거기 출신이에요. 아버지께서 초를 만드는 업자라 자작 댁에 상납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답니다. 에드윈 님의 소식도 당연히 들었고요. 호호호. 정말 놀라운 인연이죠?

억지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귀족 집에 드나드는 업자나 그의 가족은 수없이 많았다. 자작은 부자가 아니었으므로 평민이 만드는 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스크롤을 훔쳤냐는 질문에는 그저 집에서 연구하고 싶었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은 노력하는 사람과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적당히 넘어갈 게 분명했다.

제발 내가 아는 정보와, 내 감이 맞기를.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레아의 수식을 공부했나?”

“사실은 예전에 에드윈 님을……. 네? 수식이요?”

앵무새처럼 외운 말을 뱉으려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드네르의 마법서도 본 모양이고. 무기 설계도까지 꿴 모양이군.”

그건 그냥…….

이 세계에 떨어진 나는 실력이 부족했고, 당장 주어진 건 마탑의 일이었다. 굶어 죽지 않고 한 사람의 몫을 하려면 공부해야 했다.

마탑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외우고 연습했다. 전생에서 공부 하나는 지지리도 오래 했으니, 앉아서 읽어 내려가고 암기하는 건 자신이 있었다. 이 몸의 주인도 공부에는 꽤나 소질이 있었으니 몸이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발전했고, 그 망할 선배들도 나에게 그나마 일감을 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예 주지도 않았던 듯했다. 원래 몸의 주인이 꽤나 꼿꼿한 사람이었던 건지…….

“병법서도 읽었나? 혹시 자카테노의 것도?”

“읽었습니다만…….”

“4장은 뭘 다루지?”

“성벽에 설치된 대포와 포수의 역할입니다.”

“그래.”

에드윈이 짧게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내 코앞까지 와 있었다. 거기서 내 꼬불거리는 머리칼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앗.”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손이 내 흐트러진 잔머리를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다정? 다저어어엉?

에드윈 볼테르가?

슬프게도 그의 미모 앞에 선 나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소름이 끼쳐도 모자랄 순간인데 심장이 체통도 없이 쿵, 쿵, 뛰었다. 에드윈의 잘생긴 얼굴은 정말이지 반칙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며 연애와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나로서는 에드윈이 하는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았다.

“엘렉트라. 나는 멍청하지 않은 사람을 좋아해.”

알다마다요. 여자 주인공한테 반한 것도 그녀가 똑똑하기 때문이었잖습니까.

“아무도 네가 잡은 설계도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했어.”

그 설계도의 오류를 아무도 잡아내지 못했다고? 그렇지만 그건…….

“하지만 그건 레아의 수식을 배운 사람이라면…….”

“그래. 그렇지.”

앗차. 실수했다. 알수록 아는 척하고 싶어지는 건 사람의 본능인 모양이다.

그가 어둠 속에서 싱긋 웃는 게 보였다.

“이제 괜찮아. 네가 잡아냈고, 나는 널 찾아냈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이거 진짜 사망 플래그로 직행하는 길인 것 같은데.

유능해 보이거나 똑똑하게 굴어선 안 된다. 무능해 보여야 해, 엘렉트라.

“하하. 제, 제가 설계도의 오류를 찾은 건 우연인 것 같습니다. 에드윈 님.”

“내가 지시해 개발한 수식과 설계도를 우연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여기에서 ‘네’라고 했다간 죽을 게 분명하다.

“제, 제 방은 저 옆이죠?”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서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리고 다른 연구실장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하고, 최대한 치밀하게 잘 튈 작전을 세워야 했다.

“아니. 여긴데.”

에드윈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여기……라면, 에드윈 님의 방…… 말인가요?”

“응. 여기.”

그의 대답에 나는 약간 휘청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냈다.

대체……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