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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꿀 같은 잠이었다. 에드윈의 방에 깔린 러그는 우리 집에 있는 짚으로 채워진 볼품없는 침대보다도 푹신하고 따뜻했다.

아니다. 러그가 아니라 정말 침대 위였다.

“……엘렉트라.”

꿈인가.

나는 눈을 떴다. 눈 바로 앞에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빛나고 있었다.

보기 좋게 잡힌 복근과 넓은 어깨가 한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꿈이지. 난 바닥에서 잠들었으니까. 에드윈의 침대가 워낙 넓고 폭신해 보여서 거기에서 자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꿈에까지 나오나. 게다가 이런 서비스까지 더해서.

진짜 나는, 잘생긴 남자가 고팠던 걸까.

“괜찮아?”

이건 꿈이 확실하다. 그가 나에게 다정하긴 했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감싸면서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볼 리가 없었다. 괜찮냐, 라는 안부의 인사는 애초에 에드윈과 어울리지 않았다.

“에드윈…… 볼테르…….”

꿈이니까.

원래부터 에드윈은 내 차애였다. 얼굴 한번 만져 보는 거, 꿈이니까 이 정도는 용납이 되겠지.

손을 뻗자 그의 보드라운 피부가 내 손에 감겨 왔다. 아파서 그런가 안 그래도 수척한 얼굴이 좀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붉은빛이 도는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잘생겼다. 진짜…….”

실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그의 면전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에드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꿈답게 에드윈이 자신의 캐릭터와 맞지 않는 감정 표현을 하고 있었다. 내 안의 에드윈은 이런 이미지였던가.

“네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뭐를?”

“나를 유혹한 거.”

에드윈이 천천히 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찰랑이는 머리칼이 내 얼굴이 닿았다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두웠다.

어두운 와중에 입술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약간은 건조한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포개졌다.

이런 꿈이라면 환영이다. 꿈이니까 내 욕망 정도는 펼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손을 들어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드윈이 살짝 놀란 듯하는 게 몸으로 전해졌지만 그것조차 귀여웠다.

그의 입맞춤은 느릿느릿하고 뻣뻣했지만, 곧잘 나를 따라왔다. 숨이 점점 뜨거워지고, 손과 손이 스쳤다.



✎ ✎ ✎



어마어마한 꿈이었다. 정말. 살면서 한 번도 꾸지 못할 꿈이었다.

그렇게 강렬하다니, 내 마음 속의 음험함이 꽤 거대한 모양이었다. 이런 놀라운 일이 그저 꿈이라니 애석할 지경이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몸이 영 뻐근했다.

얼마나 잔 거지. 러그가 아무리 푹신해도 바닥에서 웅크려 잤으면 몸이 안 좋을 만도…….

어라.

이상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에드윈 방에 뚫린 천장의 창문이 아니었다. 그냥 낯선 천장이었다.

무언가 단단한 게 내 옆에 있었고, 그냥 바닥이라기엔 지나치게 따뜻한 온기와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커다란 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어.”

“일어났군. 엘렉트라.”

왜 당신이 제 옆에 누워 있지요?

어두운 암막 커튼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에드윈의 아름다운 나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제가 왜 침대에서……. 분명 바닥에서…….”

조각과 같은 근육이 잡힌 남자의 상체가 보였다. 내가 3일 밤을 꼬박 새우며 치료해 놓은 상처에 덕지덕지 붙은 거즈도 보였다.

그랬다. 나는 에드윈 볼테르의 방에서…….

“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들었다. 하지만 바닥에서였고, 그를 치료하는 목적이었으니 죄송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감히 이 세계 최고의 악역이자 내 상사인 에드윈의 침대에서 잠들 수가 있단 말인가. 뼛속까지 일개미 근성이 박힌 나로서는 백번 절하며 사과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지?”

“제, 제가 여기에 왜. 저 분명 바닥에서 잤는데.”

나는 당황하며 에드윈에게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그의 팔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아니, 맨날 마법만 시전해야 할 마법사가 왜 이렇게 몸이 좋은 걸까?

그의 팔은 여태까지 살면서 본 어느 남자의 것보다 단단했다. 맨날 지하 연구실에서 맥주나 마시며 노는 하급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최고의 마법사가 되려면 몸도 좋아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각상도 이보다는 더 완벽한 몸을 가지지 못할 것 같았다. 몸에 와 닿는 매끄러운 피부 밑에 자리 잡은 옹골찬 근육이 괜히 마음을 수런거리게 했다.

“글쎄. 왤까.”

“저기, 탑주님. 저기.”

“에드윈 님.”

“네, 에드윈 님. 저기.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이렇게 침대에 붙어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잡아 냈다.

그래, 정신 놓지 마. 엘렉트라.

그가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다만 지금 이 상황은 미래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경고일지도 몰랐다.

“그럼 할까. 결혼.”

에드윈이 속삭였다.

나는 펄쩍 뛰었다. 너무 펄쩍 뛰어서 에드윈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멀어져 벽까지 엉덩이로 걷듯 물러섰다.

에드윈은 굳이 나를 끌어당기거나 강제로 가두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후광처럼 받으며.

아니, 저거 진짜 후광인가? 잘생겨서 빛이 나는 걸까?

“에, 에드윈 님. 무슨 농담을.”

“……그래, 농담이다.”

그는 딱딱한 얼굴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함부로 치료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침대에 기어 들어온 건가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에드윈 님과 한 침대에서 이렇게 남사스럽게…….”

“흠.”

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마냥 짙은 검은색인 줄 알았던 눈동자에는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이 맴돌았다.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눈동자 색이었다.

설마, 꿈이 아니었다든가……?

“난 좋은데.”

“네?”

“어제는 그렇게 좋아해 놓고, 엘렉트라.”

“예……?”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조금 슬픈데.”

에드윈이 살풋 웃었다. 꿈에서 본 그 해사한 웃음과 같았다.

세상에, 나 정말로?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몸을 봤다.

다행히 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진정으로 안심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렉트라.”

그의 부름에 순간 긴장했다.

그의 체향은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것 같은 매혹적인 향기였다. 그가 핏줄이 선 손을 뻗어 이불을 가져와 내 몸에 둘러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새어 들어오는 빛이 그의 팔에 선 힘줄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섹시했다.

“이 방이 조금 추워서. 따뜻하게 있는 게 좋을 거야.”

왜 이렇게 친절하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삼켜 냈다.

꾸물대며 움직여 이불을 잘 덮은 나는 몸의 뻐근함이 여상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거겠지. 하하. 나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부정하려 애썼다.

“엘렉트라. 네 집이 어디지?”

“왜, 왜요?”

나도 모르게 경계하며 물었다.

“궁금해서.”

그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 눈을 예쁘게 뜨며 물었다.

분명 이 침대가 있는 공간은 어두운데도 그의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이게 자체 발광이라는 걸까?

“……여, 여기에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있는 작은 오두막이에요.”

꿈에서도 그의 얼굴에 넘어가 놓고, 오늘도 나는 그의 얼굴에 넘어가고 말았다. 에드윈 앞에서라면 자꾸 모든 걸 술술 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에드윈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나신이 그대로 보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이사해.”

“네?”

“집이 너무 멀군.”

“제, 제가 돈이 없는데.”

“그래?”

“네.”

“그럼 여기에 살아도 되겠군.”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암막 커튼을 걷었다. 그제야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그의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잔 거지?

“이미 3일하고도, 이틀을 더 묵었으니 몸은 여기에 더 익숙할 거야.”

“……제가 이틀이나 잤어요?”

그렇게나 오래 자다니.

게다가 아픈 사람을 두고 그런 꿈을 꿨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도 연애는 한참 전이었고, 빙의한 다음에도 일하느라 바빴다.

그래……. 연애를 너무 오래 안 해서 이런 꿈을 꾼 것 같았다.

내가 청소년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지. 원래부터 미남이나 잘생긴 남자, 남자의 몸매에 정신 팔려 보는 사람이긴 했지만 이건 과했다. 나 정말 쓰레기가 아닐까.

나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짐을 다 옮겨 와야겠어.”

“하하. 무슨 말씀을.”

“진심이다.”

“예?”

“앞으로 24시간 내내 내 옆에 붙어 있어. 물론, 잘 때에도.”

신이시여.

도망치려고 했더니 왜 갑자기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하나이까.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설마 꿈이 아니었다거나…….

하하. 아니야.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난 옷도 다 입고 있고……. 상처 치료 때문에라도 에드윈은 원래부터 나신이었고…….

그냥,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내가 쓰레기일 뿐이지.

그는 내가 지난밤 꾼 꿈에 대해 얼마나 절망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산뜻하게 웃었다. 그러고 침대 위로 다시 올라와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달콤하고도 시원한 향기가 났다.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싸 쥐고도 남았다.

“그렇게, 해 줄 거라 믿는다.”

예쁜 얼굴이 애원했다. 홀릴 것 같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꼴깍. 나는 침을 삼켰다.

정신 차려, 엘렉트라. 사람이 미에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집을 두고 왜 여기에서 살아? 야근에 깔려 죽을 일 있어?

“네가, 내가 좋다고 했으니까.”



‘좋아요. 에드윈.’



꿈속에서의 내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얼굴이 절로 화끈거리고 몸에 소름이 끼쳤다.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설마 잠꼬대로 좋다고 한 건가? 그걸 육성으로 말한 건가?

에드윈은 여전히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저. 에드윈 님. 여기에 사는 건 아무래도…….”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여기에서 살다가는 에드윈에게 발목 잡힐 것 같았다. 저 잘생긴 얼굴과 절륜함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르지. 내가 언젠가 그를 덮칠지도…….

나는 엑스트라1이다. 언제든 내 목숨 같은 건 가볍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위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에드윈에게 찍힌 지금, 적당히 지내다가 에드윈의 감시가 허술해졌을 때, 혹은 여자 주인공이 등장했을 때에 도망치는 게 좋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제임스인가 버러지인가 하는 멍청이는 내가 처리했다. 아, 죽이진 않았어.”

“제임스요……?”

“너에게 일을 자주 맡겼다고 하더군. 너는 돈을 흥정했고.”

설마 데니로를 말하는 걸까?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일을 자주 맡겼다는 단서 하나에 자연스레 데니로가 떠올랐다.

“설마 데니로 말인가요?”

“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군.”

“그, 그 사람을 처리하셨어요?”

“그래.”

“왜요?”

“널 건드렸으니까.”

에드윈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말이야.’라던 그의 말은 정말 진심이었나 보다.

솔직히 통쾌했다. 가능하면 오크 밀집 던전에 떨어지길. 자기와 닮은 종족이니까.

“그보다 돈을 흥정했다면…… 지금 넌 돈이 필요한 건가?”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안 한다고요.’라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

“기존 연구실장 월급에서 다섯 배 인상.”

“저,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사는 건 좀…….”

“50배.”

그의 제안이 지나치게 달콤했기 때문이다.

“하겠습니다.”

그래. 한 달만 벌어도 평생 먹고살 돈이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무슨 일부터 하면 되죠? 설계도를 주세요. 체력엔 자신 있으니까요.”

“일단 피곤할 테니 씻으러 가지.”

“예?”

“하루 종일 침대에 있는 것도 꽤 달콤하겠지만, 난 지금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으니까 일단 일어나 볼까.”

“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하루 종일 침대에 있는 게 달콤하다니. 그 말은 연인에게나 할 법한 말이었다. 그걸 악역인 에드윈이 할 수 있는 거야? 그것도 나에게?

“농담 같은가?”

“……그게.”

“씻고 나오면 옷도 갈아입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원한다면 좋아하는 책이나, 장신구도 사 줄 수 있다.”

“……저…… 일을 하는 게 아닌가요?”

“네가 해야 할 건.”

그가 나에게 확,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이 방에서 나가지 않는 거야.”

나는 순간 깨달았다.

아, 그 밤은 꿈이 아니었구나.

에드윈의 목소리가 나에게 속삭이는 방식이, 그의 말이 나에게 집요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나를 일깨워 주었다. 애써 외면했던 몸의 뻐근함도 나를 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저, 저는…….”

“어제는 그렇게 좋아해 놓고, 엘렉트라.”

“예……?”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조금 슬픈데.”

에드윈이 살풋 웃었다. 꿈에서 본 그 해사한 웃음과 같았다. 약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드윈 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요…….”

“말 편하게 해, 엘렉트라.”

“제 옷은…….”

“내가 입혔지.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입혔다는 건 벗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 관계였다. 에드윈은 신기한 질문을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렉트라가 많이 피곤한가?’

묻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하나 다 보였다. 에드윈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씨, 씻으러 가겠습니다.”

“빨리 다녀와. 보고 싶으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는 나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아비판을 하기에도 바쁜데, 에드윈이 뇌쇄적으로 누워 건네는 말들은 자꾸만 내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저렇게 섹시하게 나를 쳐다보기 있나? 응?

“기다리고 있을게, 엘렉트라.”

두 발로 침대 바깥에 서자 다리가 후들거려 왔다. 그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무 신이나 듣고 계신다면,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목숨의 위협이 되는 이 잘생긴 존재를 제 앞에서 치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