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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3화

에스테일 (2)





레오는 허둥거리면서도 에스테일이 떠맡긴 산더미 같은 옷가지를 착착 개어 정리했다. 그리고 에스테일이 내어 준 배낭에 옷을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메어 보니 무게가 꽤 되었다.

“이것만 지고 다니면 됩니까?”

“급하게 꺼낼 일이 제일 많은 물건은 옷이라서.”

“아, 그렇습니까?”

“도망칠 때 서둘러서 갈아입어야 하잖아.”

태연하게 그렇게 말해 놓고는 에스테일은 거울을 꺼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저… 에스테일 님.”

“응.”

“레미는 에스테일 님이 ‘아픔을 먹는 자’라고 했고, 어머니께선 아마도 그분의 제자거나 제자의 제자가 아니겠냐고 하셨습니다.”

“레미 말이 맞아.”

“정체를 숨기시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지. 사실, 내가 나라고 말해 봤자 대부분은 믿지도 않고 웃어넘기긴 하겠지만.”

“숨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레오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에스테일을 보았다. 에스테일은 웃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귀찮으니까.”

“…눈에 띄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지. 말 잘 알아듣네.”

“그, 그러면….”

레오의 낯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짙어졌다. 에스테일은 레오를 빤히 보았다. 레오의 시선이 에스테일의 손을, 정확히 말해 에스테일이 손가락에 빙빙 감고 있는 칠흑색의 머리카락을 향했다. 에스테일의 머리카락은 윤기 나는 커튼처럼 드리워져 그의 몸을 거의 허벅지까지 덮고 있었다.

“그…. 눈에 띄지 않으려면 그런 머리카락은… 불리하지 않습니까? 더 짧은, 눈에 덜 띄는 머리 모양을 하시는 게….”

에스테일이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뭘 모르네. 이건 눈에 띄니까 편한 거야.”

“예?”

“이러고 다니면 언제 누구를 만나든 ‘머리가 긴 남자’라는 것만 인상에 남는다구. 그러니까 잠적할 때는 머리카락만 잘라 버리면 추적을 따돌리기가 훨씬 편해진다는 말씀.”

태연스레 말하는 에스테일을 레오는 다시 한번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밥 먹듯이 도망을 다니길래 모든 행동의 전제에 ‘도망치기 편한가’가 깔려 있는 걸까? 한편으론 지금 머리카락이 이렇게 긴 걸 보면 마지막으로 머리를 자르고 도망쳤던 때로부터 제법 시간이 지나긴 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이 마법사하고 같이 다닌다고 해서 나까지 추적의 대상이 되는 일은 없겠지? 예전 일은 예전에 지나갔고 이제는 별일 없겠지? …하고, 레오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은 이제 뭘 합니까? 에스테일 님.”

“내일은 축제 시기에 맞게 돈을 벌 거다. 오늘은….”

에스테일은 느긋하게 목제 침상에 걸터앉아 레오를 바라보았다.

“뭘 할까? 레오.”

“예?”

“내일은 적당히 물약을 대량 생산해다가 약품상에 대어 주고 대금을 받을 건데, 오늘은 할 일이 없거든. 뭘 할까, 레오.”

“그, 그럼 오늘 약품상에 들러도 되지 않습니까?”

“오늘은 일하기 싫어.”

“그, 그렇습니까….”

레오는 잠시 머리를 굴리며 궁리했다.

“그러면 마을을 한번 돌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올릴 만한 장소가 있는지도 보고 싶고요.”

“오, 신실하구나, 레오.”

“신실하다기보다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들어서 기도를 올리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뿐입니다. 여신께 기도하다 보면 어머니 생각도 나고요.”

“그래?”

“네. 어머니는 정말 신실하거든요. 기도를 올리다 보면,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기도하시는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편해져요.”

에스테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을 보았다.

“칸텐, 칸텐에서 기도를 올릴 만한 곳이라…. 그새 신전이 생기진 않았을 테고, 여관방에서 하기도 분위기가 안 살고…. 아하, 유적이 한 군데 있는데.”

“어떤 유적입니까?”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살아난 유적이지. 죽은 게 나쁜 쪽이고 살아난 게 착한 쪽이니까 교훈적인 장소라고나 할까. 여신의 가호에 힘입어 일어난 사건이었으니 신앙심을 키우기에 좋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알쏭달쏭한 에스테일의 말에 레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한번 고쳐 메었다.

“마음에 들어? 좋아, 가자.”



***



두 사람은 우선 마을의 번화가부터 둘러보았다. 술집, 빵집, 푸줏간에 치즈 숙성소, 건어물점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며 머무는 동안 먹을 수 있을 식량을 구경했다. 포물점을 지나면서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의 품질을 감상하기도 하고, 소품점에서는 기분이 좋아진 에스테일이 레오에게 질 좋은 염색으로 물들인 손수건을 한 장 사 주기도 했다. 축제가 다가오는 시기의 활기를 잠시 맛보고, 두 사람은 점포 거리를 벗어나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맞다, 여기에 나무가 심겼지.”

목표 지점에 도착해 에스테일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령이 100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시원시원한 느릅나무 세 그루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깜박하고 있었네. 원래는 여기가 돌만 굴러다니는 공터였거든.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심어 뒀다는 걸 알면서도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뭐, 분위기 있어서 좋지.”

레오도 에스테일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 그루의 느릅나무. 여신의 가호에 따라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남은 자리. 과거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에스테일은 어떻게 그 사연을 알게 된 것일까.

“어이구, ‘세 마법사 나무’에 기도하러 온 거요? 외지 사람들이 여길 어떻게 알고, 기특하기도 하지, 그것도 젊은 처녀 총각이.”

목소리가 들려 레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에스테일과 레오에게 말을 건 사람은 마을 주민인 듯한 흰머리 가득한 할머니였다. 아마도 눈이 침침한 모양이었다. ‘처녀 총각’이라는 말을 듣자 하니 자신과 에스테일이 어떤 사이로 오해받은 것인지 알 만했지만, 레오는 굳이 할머니의 착각을 지적하지 않고 상냥하게 답했다.

“예, 여행 중인데 이곳에 명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도하러 왔습니다.”

“기특해라, 기특해. 이 나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아우?”

“아뇨, 막 도착한 참이라 아직 그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잘 모르지. 외지 총각이면 모르고도 남고말고. 큼큼, 이 나무가 어떤 나무냐면….”

약간 귀도 어두운지, 할머니는 쩌렁쩌렁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내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에, 아주 잔악한 왕이 있었다는 거야. 백성들의 고혈을 짜 먹어서 아주 사시사철 나무껍질밖에 먹을 게 없었다지. 참다못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그중에 아주 용맹한 세 마법사가 있었거든.”

레오는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그 셋이서 함께 왕궁을 무너뜨리고 왕을 죽이기로 맹세했지. 그런데 막상 전날이 되니까, 실행을 하기 전날이 되니까, 겁이 났던 거라. 아무리 용맹한 마법사들이라도 겁이 났던 거거든. 그래 돼서 비겁한 두 마법사가 변심을 했지. 보아하니 저 한 놈은 끝까지 마음을 바꿀 것 같지가 않은데, 이대로면 우리도 한패라 같이 역적으로 잡혀 죽으니, 우리가 저놈을 죽여서 영영 입을 막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자. 그래 놓고 우리만 입을 닫으면 영영 아무도 모른다.”

레오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밝고 셋이서 이 고개를 지나다가 두 놈이 기회를 봐서 이때다 하고 한 놈을 죽이려고 들었지. 마법은 두 놈이 훨씬 셌거든. 그러니 그 용감하고 올곧은 마법사는 눈앞이 캄캄해져서는 어머니 여신님께 기도를 올린 거라. 어머니, 나를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어머니, 내가 왕의 눈앞까지 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기도를 올렸지.”

레오는 문득 생각했다. 살아남은 그 한 명의 마법사는 누굴까.

“그때 번쩍 하고, 하늘이 시커매지더니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우레가 웅웅 울고서는 번쩍 하고 벼락이 친 거야. 응, 외지 총각, 알아듣겠수? 마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그 착한 마법사가 든 지팡이에서 요란하게 벼락이 쳐서는 못된 마법사들을 시커멓게 태워 버린 거야. 순식간에 사람이 숯덩이가 되도록 태워 버리고는 금세 하늘이 또 개었다지. 그렇게 해서 착한 마법사는 목숨을 구해서 왕궁으로 쳐들어갔고, 간악한 왕을 없애고 어진 새 왕을 옥좌에 앉혀서 아주 오래오래 태평성대를 열었고. 그러고서 이 마을로 돌아와서 이 자리에 이 느릅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우.”

이야기를 흥겹게 풀어놓은 할머니는 뿌듯해 보였다. 젊은이들이 늙은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줘서 기분이 좋은 듯도 했다.

“응, 그러니까 총각, 어머니 여신님께서는 항상 굽어살펴 보시는 게야. 총각도 여기서 기도 자알 올리고 가. 여신님께 기도드리고 늘 바르게 살면은 여신님께서 항상 지켜 주셔서 몸도 건강하고 하는 일도 잘 풀리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태어나서 쑥쑥 자랄 테니까….”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할머니는 내 정신 좀 봐, 하고는 며느리한테 음식을 가져다주던 도중인 걸 잊었다면서 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져 갔다. 여신의 가호.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레오는 세 그루의 느릅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높이 솟은 느릅나무들을 올려다보자니 뒷목이 당겨 왔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중인지 낮은 곳을 들여다보는 중인지도 구분이 가질 않으면서 순간 어지럼증이 일었다. 가볍게 휘청이는 레오를 에스테일이 잡았다.

“느릅나무가 근사하지.”

에스테일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마주하며 레오는 문득 생각했다. 살아남은 마법사는 행복했을까. 믿었던 두 동료에게 배신당하고서 상처 입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불타 숯덩이가 되어 버린 동료들의 시신을 보며 서글프고 참담하지 않았을까. 왕의 시해가 성공하고 나서, 그는 행복했을까.

그런 레오의 마음을 읽은 듯이 에스테일이 말했다.

“살아남은 마법사의 이름은 세이오드. 그 녀석은 그 후로도 많은 동료를 만들면서 존경받으며 살았다. 저술도 풍부하게 남기고 말년에는 가정을 이루어 아이도 낳았지. 그 녀석이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녀석만큼 좋은 삶을 산 마법사도 드물 거야.”

레오는 가만히 에스테일을 보았다. 머뭇거리다가 에스테일은 씨익 웃었다.

“번개를 맞으면 당연히 사람의 몸은 타 버리지만, 음, 뭐…. 마법사란 건 몸이 타 버린다고 해서 꼭 죽는 건 아니잖아?”

웃음 짓던 에스테일의 얼굴이 곧 생기 잃은 무표정으로 가라앉았다. 태연스러운 얼굴과 침통한 얼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에스테일은 이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선량한 마법사의 이름은 세이오드. 세이오드를 배신한 두 마법사의 이름은 제르에트와 유리스티스… 그러니까, 나지.”

스르르.

느릅나무에 바람이 일었다. 선선한 바람이 이파리를 흔들며 가볍게 찰랑이는 소리를 냈다. 공기가 맑았다. 이를 데 없이 쾌청한 오후였다. 레오는 가만히 에스테일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 말고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지 레오는 알지 못했다.

“세이오드는….”

에스테일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하고 거의 동시에 나는 의식을 잃었던 것 같아. 죽는다고 생각했지. 육체가 그만한 타격을 입는데 소생의 마법을 걸어 줄 사람도 없으면 죽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나를 살려 준 사람은 세이오드였지.”

“…….”

“세이오드는, 나를 살려 줬어.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 ‘유리스티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세이오드의 마력과 수명이 다할 때까지 나는 시궁쥐처럼 숨어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세이오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

“…유언장이 발표되는 것을 들었다. 거기엔 재산의 배분과 가족에게 건네는 당부와 함께 나를 용서한다는 말도 들어 있었고… 나는… 계속 살아오고 있지. 그런데 아마 세이오드가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도 나는 계속 살아왔을 것 같아.”

에스테일은 눈을 내리깔았다. 제르에트는 육체와 마력의 손상이 너무 심해 소생하지 못했고 세이오드가 살려 낸 것은 자기뿐이었다는 부연 설명인지 뭔지 모를 얘기를 작게 덧붙였다. 그런 작은 덧붙임과는 상관없이, 레오는 희미한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희미한 분노 역시 느꼈다.

“왜… 그랬습니까, 에스테일 님.”

“…….”

“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들었습니까. 그것도 왜 둘이서 한 사람에게 덤볐습니까. 이런 얘기를 왜 저한테 합니까. 흥미로운 옛날이야기 하듯이….”

눈앞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모습이 반투명한 잔상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레오는 그 모습을 지우려 애썼다. 레오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은 에스테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에스테일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따라다니고 싶다고 말한 것은 레오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레오, 집으로 가는 텔레포트 스크롤은 언제든 써도 좋아.”

레오는 주먹을 꾹 쥐었다. 에스테일이 그려 주었던 작은 텔레포트 스크롤은 레오의 셔츠 가슴 주머니에 잘 들어 있었다. 레오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쓰지 않겠습니다. …동요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에스테일은 안도인지 심란함인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볍게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맷자락이 살짝 흘러내려 에스테일의 하얀 손목이 드러났다. 왜인지 순간 레오는 에스테일이 620년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작은 손목으로 에스테일은 620년을 살아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너 머릿결이 좋구나.”

“…….”

“새끼 산양 만져 본 적 있어? 새끼 산양 같아.”

에스테일은 레오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느릅나무를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조용히 가슴에 얹고, 경건한 모습으로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여신의 가호에 의해 벼락을 맞고 불에 탔던 악한 마법사는 여신에게 어떤 기도를 올릴까.

알 수 없는 채로, 레오는 다만 에스테일의 옆에서 에스테일을 따라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평화와, 일한 만큼 돌아오는 수확과, 보호를 위해 기도했다. 무고한 우리를 보호하소서. 소리 없이 그렇게 기도하다가 레오는 문구를 고쳐 다시 기도했다. 무고하지 않아도, 부디 우리를 보호하소서.

“이 나무는 세이오드가 심은 게 아냐.”

에스테일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심었지. 사연을 듣고는 유적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했나 봐.”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내가 말했지. 내가…. 달리 누가 말했겠어. 제르에트는 죽었다. 세이오드는 아무에게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을 거야. 세이오드의 수명이 다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이곳으로 왔었는데… 울었던 것도 같고,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를 했던 것도 같고…. 나중에 다시 와 보니 느릅나무가 심어져 있더군. 시간이 흐르니 어느새 세이오드가 심은 나무로 통하기 시작했고….”

“…….”

“그런데 만약 세이오드가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면 그건 느릅나무였을 거야. 느릅나무를 좋아했거든. 그러니 세이오드가 심은 나무라는 말도 크게 틀리진 않은 셈 아닌가….”

에스테일은 땅에 떨어진 느릅나무 가지를 하나 집었다.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가지 끝을 다듬고는 레오의 손목을 쥐었다.

“모처럼이니 보호의 문양을 하나 그려 주지.”

날카롭게 깎인 느릅나무 가지가 레오의 손등에 가벼운 상처를 남겼다. 피가 나지 않을 만큼, 살껍질이 살짝 벗겨질 만큼만 피부를 긁은 상처였다. 원 안에 불규칙한 다각형이 어지럽게 그려진 문양을 레오의 손등에 새기고서 에스테일은 그 문양의 중심에 검지 끝을 얹었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공간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에스테일이 새긴 문양이 순간 빛났다. 뜨거운 바람을 쪼인 것처럼 손등이 화끈하더니 이내 진정되어 가라앉았다. 레오는 에스테일이 마력을 주입해 보호의 문양을 활성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초적인 문양이지만, 기초가 중요한 거야.”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와 제르에트가 동시에 세이오드를 향해 공격을 쏘았을 때, 두 공격이 충돌하면서 세이오드의 지팡이 끝에 있던 보호의 문양이 그걸 반사했던 것 같아. 서로의 속성이 간섭하면서 원래의 공격에는 없었던 전뇌 속성의 반격이 생성되어 나와 제르에트를 덮친 거지.”

“…….”

“어떻게 그리도 절묘하게 두 공격이 충돌해서 문양에 의해 동시에 반사되었나 하면, 그런 우연은, 역시 여신의 가호라고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레오는 에스테일이 활성화시킨 보호의 문양을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말랑한 손등의 감촉이었다.

“그게 작동할 일은 없을 거야. 넌 나하고 같이 다니니까. 그런 상황까지 가게 두진 않을 거다. 다만…. 뭐, 모처럼, 생각난 김에.”

“…감사합니다.”

“하하.”

에스테일은 웃었다.

“기도드릴 시간은 충분했나, 레오.”

“…예, 충분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마을을 좀 더 둘러보고 싶습니다.”

“좋아. 천천히 둘러보고서 저녁을 먹자. 아주 맛있는 걸로.”



***



두 사람이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여관 1층의 식당 겸 술집에는 에스테일이 미리 시켜 놓은 거위 통구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날개와 다리는 탐스럽게 기름이 돌았고 가슴살도 담백하면서도 촉촉했다. 곁들인 야채절임에 양념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서야 둘은 빈 접시를 주방으로 돌려보냈다.

“스무 살이라고?”

에스테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오를 보았다.

“스무 살입니다.”

레오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술 마셔 보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마법으로 들여다보시면 거짓이 아니란 건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마법이 어디 있어. 마음을 들여다보는 마법이 있었으면 너도나도 썼겠지.”

“그렇습니까.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여하튼 스무 살입니다.”

“심장을 걸고 맹세해 봐.”

“심장을 걸고 맹세하는데 스무 살입니다.”

“좋아. 맥주 사 줄게.”

값싼 맥주 두 잔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말없이 각자 몇 모금 자기 잔을 홀짝였다. 에스테일은 약간 멍해 보였다. 새삼스레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레오는 머뭇거리다 에스테일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저… 혼자 계실 때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에스테일은 화들짝 놀랐다.

“아아, 맞다, 너도 있었지.”

“…….”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마저도 잊은 에스테일의 반응이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혼자 지내는 세월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이 든 마법사를 졸라 같이 다니게 해 달라고 한 사람은 자기였기에, 레오는 별다른 말 없이 서운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저, 잠시 생각에 빠지느라. 질문이 뭐였지?”

“저…. 혼자 계실 땐 어떻게 지내시는지.”

“자고. 생각하고. 걷고. 먹고.”

“…….”

“아주 오래 자기도 해.”

“…….”

“요샌 잠이 많이 늘었어. 10년 정도 내리 잔 적도 있고.”

“그렇군요.”

“실망했어? 뭐, 젊은이들이 동경할 만한 흥미진진한 인생은 아니야.”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상 밖이었을 뿐입니다.”

“상상 밖이라니, 뭐가.”

“그, 뭐랄까, 뭐랄까….”

레오는 가볍게 집중하듯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에스테일 님은 말하는 방식이 근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