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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출러가의 남매



그날 오후 자수 시간은 정해진 1시간을 훌쩍 넘겨야만 했다. 나는 펠리체 영애에게 가장 기초적인 자수 교육을 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아야 했는데 나와는 반대로 펠리체 영애는 내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자수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일어나 이렇다 하는 말 없이 작은 응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펠리체 영애의 하녀 로사가 자수 바구니를 급히 정리하고 나를 향해 꾸벅 인사하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 보라 눈짓했다. 하녀 로사가 급히 펠리체 영애를 따라 나갔다.

“영애와 친해지긴 어렵겠어…….”

그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일과가 모두 끝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작은 식당으로 가려는데, 집사가 찾아왔다. 금일 텔론 백작이 방문하여 갖는 테일스 영식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도 참석해 달라는 용건이었다. 후작 부부와 펠리체 영애는 출타 중으로, 지인인 공작가에서 저녁 식사 후 돌아온다고 하였다.

참석에 대해 긍정적 답변을 집사에게 주었다. 데리안을 본다는 생각에 나는 후작 영식을 본다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답을 하였다. 그러나 1층 주 식당에 내려갈 준비를 하며 거울을 보자 갑자기 떠오른 어젯밤 일로 기분이 금세 우울해졌다. 내 잠옷 입은 모습을 본 테일스 영식을 봐야 하는 것이 못내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탓이었다.

“언제라도 마주쳐야 하잖아. 혹시 말을 꺼내면 실수라고 얘기하면 될 거야. 그가 신사라면 굳이 어젯밤 일을 꺼내지 않겠지만…….”

머리를 정돈하면서 다시 마음을 잡았다. 언제고 마주쳐야 한다면 빠른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언제 왔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테일스 영식과 데리안이 내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출러 후작 영식, 텔론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로인 영애.”

데리안의 눈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다. 둘에게 예의 있게 인사하고 집사가 빼 주는 의자에 앉았다. 괜찮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도통 테일스 영식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부끄러웠던 어젯밤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았다. 테일스 영식에겐 미안하지만 데리안의 얼굴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인들이 우리 시중을 위해 곳곳에 배치되었다.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데리안이 내게 물었다.

“로인 영애, 저희 어머니께서 로인 영애를 위해 추천장을 써 주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후작가의 가정 교사가 되어 무척 기쁩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내게 존대하는 데리안의 모습이 생경하고 우스워서 얼굴 한가득 크게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모두 편하게 잘 대해 주십니다, 텔론 백작님.”

“좋은 소식이군요.”

데리안이 밝게 웃으며 환한 미소를 보였다.

“흠, 흠…….”

테일스 영식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소리를 따라 무심코 눈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과 마주하자 내 얼굴은 급격하게 붉어졌지만 그는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가 어젯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기에 내가 오히려 예민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테일스 영식이 나를 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로인 남작가에서 한 달 뒤 출발하는 상단을 꾸리느라 많이 바쁘다 들었습니다. 고즐튼 후작가를 돕는 가문이니 꽤 바쁘겠군요.”

“네. 그 일로 남작가가 무척 바쁠 거예요. 상단을 꾸리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요. 하마터면 저도 상단을 따라갈 뻔했는데 때가 잘 맞아 합류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뭐?”

“상단을 따라가다니요?”

두 남자가 행동을 맞춘 듯이 동시에 되물었다. 한순간 급랭한 공기가 식탁 주변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부르기 전까진 방해하지 말도록.”

테일스 영식이 우리 주위에 있던 하인들을 급히 물러나게 했다.

“제스, 무슨 일이야? 어쩐지 선대 남작님께서 돌아가시고 통 밖에 나오지 않더니 그 사람들이 널 어찌 하려 한 거야?”

데리안이 흥분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데리안, 마음을 좀 가라앉혀. 고즐튼 후작님과 후작 영식이 다른 일로 남작가에 오셨다가 나를 보고는 즉흥적으로 한 제안이었어. 그래서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다행히 시출러 후작가와 연이 닿아서 그 일을 거절할 수 있었어.”

“감히 남자 귀족도 아니고 귀족 여인에게 말입니까?”

“여인이 따라가는 의미는 너도 알잖아.”

두 남자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또다시 동시에 말했다.

“알지. 그래서 나왔잖아. 그리고 말 그대로 즉흥적인 일이었어. 사실 나는 남작의 조카잖아. 이름뿐인 귀족. 어딜 가도 내세우기 쉽겠다 단순히 생각했겠지. 평민도 아닌 귀족 여인이니 타국인들의 호기심을 많이 자극할 테고.”

내겐 다 지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참으로 태연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두 남자는 굳어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테일스 영식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즉흥적이고 뭐고 간에 귀족의 여인에게 그런 제안이라니 기가 차는군.”

무겁고 시린 테일스 영식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데리안만큼이나 화가 난 듯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했다.

‘데리안은 알겠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타 귀족의 일이니 상관없다 치부할 것 같아 테일스 영식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영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나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엄숙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내가 데리안을 보며 말했다.

“데리안, 걱정을 끼치려 한 말은 아니었어. 그저 인연이 좋게 닿아 지금 후작가에 오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 한 거야.”

데리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제스. 이제 여기 있으니 됐어. 후작님과 부인은 정말 좋으신 분들이라 내가 마음이 놓여.”

“그래.”

데리안을 안심시킨 뒤, 이어 테일스 영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일스 영식, 저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후작 부인과 후작가에요. 백작가 이상의 가문에서 더 나은 지위의 교사를 채용할 수도 있었던 것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저 같은 사람을 고용해 주셔서, 그래서 더 감사드려요.”

“어머니의 인정을 받으신 것이니 영애의 능력으로 얻은 자리입니다.”

그의 짧은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

무뚝뚝한 표정임에도 테일스 영식의 말이 따뜻한 칭찬처럼 들렸다. 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그를 나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자, 이제 좀 밝은 얘기를 해 볼까?”

데리안이 정적을 깼다. 우리는 곧 식사 시간을 즐기기로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말 타?”

데리안이 새로운 대화 주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그것도 옛날이야. 가끔 타 보고 싶긴 한데, 참을 만해. 그리고 다 큰 여인이 말 타는 것은 사냥 대회를 제외하곤 하기 힘들잖아.”

“검은? 너 여검사가 꿈이었잖아.”

“열세 살 때 마지막으로 검을 잡고 안 잡았어. 이젠 잡는 법도 잘 기억나지 않아.”

쓰게 웃으며 데리안을 보다 문득 테일스 영식이 묵묵히 듣고만 있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우리끼리 대화한 것 같아 데리안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 눈짓을 본 데리안이 테일스 영식에게 말을 걸었다.

“테일스, 자네 당분간 황궁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며?”

“아버님을 돕던 일이 끝나서 당분간 집에서 후작령에 관한 집무만 볼 것 같아.”

테일스 영식이 황궁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제 메인 요리를 들이게.”

테일스 영식이 비어진 내 애피타이저 접시를 보고 조금 큰 소리로 문 쪽을 향해 말했다. 곧이어 하인과 하녀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녁 정찬을 마치고 말을 타고 돌아가는 데리안에게 현관 앞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데리안은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내 손짓에 화답하다 돌아갔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던 내가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서 있는 테일스 후작 영식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테일스 영식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사실 그는 더 이상 내게 존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귀족 영애라 하더라도 이젠 이곳에 고용된 가정 교사였고 고용인이 사용인에게 존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법이었다. 이 집의 고용인은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후계자인 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후작을 제외한 후작 부인과 테일스 영식은 내게 존대해 주었고, 이번 정찬에서도 예를 갖추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정찬. 그리고 존대는 이제 안 하셔도 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말끔하게 웃으며 말하는 나와는 다르게 어두운 표정을 한 테일스 영식은 어딘가 무척 불편하고 거북해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즐튼 영식을 조심하시오.”

내 걱정을 아직도 하고 있던 것인지 그는 단 한마디를 남기고 로비로 걸음을 옮기고 내게서 멀어졌다.

‘이젠 후작가에 있는데, 뭘…….’

나는 그가 괜한 걱정을 한다 생각하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방으로 돌아갔다.



*



제국력 895년 8월 3일.

2주가 지났다.

여전히 진행되는 펠리체 영애와의 기 싸움은 날 지치게도 했지만 강한 오기를 심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수업을 안 하겠다 뛰쳐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 후작 부인의 말이 무섭긴 한가 싶었다. 그녀와의 수업은 매일매일 피를 말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제자는 제자인데 나보다 지체 높은 제자…….

이것만으로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지 답은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꺾이지 않고 있었다. 나도 이곳이 아니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펠리체 영애와 로사가 응접실에 들어오자 평소처럼 영애에게 인사하고 첼사 앞에 앉았다. 영애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예의 없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스나 영애는 드레스가 그런 것밖에 없나요?”

“네?”

그 말에 내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엔 자신이 말해 놓고 더 당황한 표정을 짓던 펠리체 영애가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곤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한 대여섯 벌 갖고 돌려 입는 것 같은데……. 가난은 정말 티가 나는구나…….”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응접실 저쪽으로 당혹스러워하는 로사의 표정이 보였다. 갈라진 목소리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다른 악보를 가져와서요.”

수치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작은 응접실을 벗어났다. 2층의 내 방에 도착하자 문을 닫고 침대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괜찮아. 아직 어린애야. 철이 없어 하는 말이야.”

평소 첼로의 빈정거림에도 아무렇지 않던 나였으나 영애의 그 몇 마디는 금세라도 나를 무너뜨릴 것 같았다. 어린 영애의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말은 나를 상처 주기에 충분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 풍족하게 드레스를 가져 본 적이 없었고, 특별한 날 아니면 옷을 사 입어 보지도 못했다. 당연히 신분에 맞는 격식을 갖추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안 그래도 이번 월급으로는 드레스를 몇 벌 사리라 다짐했던 차에 들은 펠리체 영애의 말은 빈곤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어 더 치욕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곧 마음을 다잡고 악보를 갖고 다시 응접실로 내려가 침착하게 수업을 끝냈다.



*



점심을 먹지 못할 것 같아 수업을 끝내고 올라오며 만난 하녀에게 나의 점심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전해 달라고 했다. 침대에 잠시 눈을 감고 몸을 눕히자 피로감이 급격히 밀려와 눈이 조금씩 감겼다.

꿈인 듯 현실 같은 곳에서 일곱 살 정도의 어린 소녀인 나를 보았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웃고 떠들다가 아버지를 보고 달려갔다. 아버지가 다이크 왕국에서 샀다며 멋진 장난감 검을 나에게 주었다. 어린 나는 갖은 폼을 잡고 검을 휘두른 뒤, 어머니 아버지를 보며 웃었다.

아버지는 나를 향해 언젠간 다이크 왕국에 데려가 다이크 왕국만이 가지고 있는 여기사들을 만나게 해 준다 약속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내 마음에 가득했다. 마냥 행복했다. 나에겐 아직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고 나를 공주님이라 불러 주는 나만의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두 분을 꼭 껴안았다. 그들에게서 늘 나던 향기가 나지 않아 더욱 꼭 껴안고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눈물이 나는지 일곱 살의 나는 몹시 의아했다.

눈이 번쩍 떠졌다. 눈물이 언제부터 흐른 것인지 모르게 양 옆으로 얼굴 곡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꾼 부모님 꿈이었다. 더 꾸고 싶은 달콤한 꿈이어서 퍼뜩 눈을 뜬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시간을 보았다. 곧 자수 수업 시간이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다시 외모를 정리한 나는 작은 응접실로 빠르게 내려갔다.



*



모든 수업을 마치고 산책하러 나왔다. 기분 전환을 하고 다시 힘을 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정원과 그 옆에 화원을 차례로 둘러보려고 하다 연무장에서 나는 소리에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 앞에서 전에 만났던 젊은 기사들을 만났다. 그중 론 경이 나를 보며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로인 영애, 단장님 보러 오셨어요? 지금 린드 단장님은 출타 중이신데…….”

“아니에요. 그냥 산책하던 참이에요.”

내가 웃으며 답하자 제트가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럼 저희 훈련하는 것 보고 가세요. 안에 한쪽 벽으로 관람석처럼 계단석이 있어요. 가끔 마님도 보고 가시고 아가씨도 보고 가세요. 다른 기사단에서 방문할 만큼 실력이 좋아요.”

“그리고 아가씨가 오시면 다른 기사들도 훈련하는 데 힘을 더 낼 거예요.”

넉살 좋게 디센이 말하자 나는 못 이기는 척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연무장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무척 크고 깨끗했다. 제트 말대로 한쪽 벽에 큰 계단석들이 관람석처럼 되어 있어 훈련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드레스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 계단석에 올리고 그 위에 앉았다. 훈련 중인 기사들의 기합 소리와 무기 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는 검을 제법 잘 다뤘고 다이크 왕국에서의 여기사를 꿈꾸기도 했다.

‘제스, 나의 사랑 제스. 다이크 왕국은 여자도 기사가 될 수 있단다. 귀족 위도 이어받을 수 있고. 제국과는 많이 다르지. 나중에 네가 열네 살이 되면 다이크 왕국의 자랑 다이크 왕립 검술학교에 입학시켜 주마.’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나의 열네 살은 끝내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옆에 있는 나의 열네 살은 영원히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펠리체 영애가 나의 눈물샘을 꼭꼭 막았던 코르크 마개를 뽑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몇 년간 눈물 한 번 흘리지 않던 내가 이렇게 자주 울컥할 순 없었다.

‘왜 이래, 제스나. 너답지 않게 온종일……. 내가 울면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거야……. 그러니 제발…… 참아 줘.’

두투둑……투둑…….

갑자기 밖에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흐르려는 눈물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는 듯 뛰어 빠르게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