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Prologue




거친 안개 속 사이로 희미하지만 강렬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헤어지자.’

‘미안하다고 말 안 해. 어차피 평생 나쁜 년일 테니까.’

‘그냥 잊어.’

뿌연 안개에 뒤덮인 여자의 고운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일방적인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잡고 싶었지만 얼어붙기라도 한 건지 다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사이 여자의 형상은 안개 사이로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안 돼!”

“손님, 괜찮으십니까?”

제 어깨에 내려앉은 승무원의 음성에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반듯한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도르르 흘러내렸다.

점차 평소의 호흡으로 돌아온 선우는 길쭉한 손을 들어 이마를 쓸어내렸다. 곧 손에 차가운 땀방울이 묻어나자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 여기…….”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긋한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승무원 쪽으로 향했다. 양 뺨을 발그레 붉히며 냅킨을 건네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던 것과 다른 젠틀한 미소를 장착했다.

“감사합니다.”

오롯이 저만을 향한 미소에 인사 멘트도 잊은 승무원이 허둥지둥 사라지자 그의 다정한 미소 또한 금세 자취를 감췄다.

“후우.”

냅킨을 내려 둔 채 손으로 땀을 닦아 낸 그가 제 다리를 번갈아들어 올렸다. 다행히 평소처럼 잘 움직이는 다리에 한숨을 내쉰 그가 옆자리에서 무아지경 잠에 빠진 매니저, 철수를 쳐다봤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호들갑을 떨며 제 옆을 지키겠다던 철수는 비행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숙면 중이었다.

태평하게 자는 모습이 왠지 얄밉게 느껴진 그는 엄지와 검지로 철수의 코를 잡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야!”

잠에 취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철수에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어? 어. 왜? 무슨 일이야?”

퉁퉁 부은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철수에 그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꿈을 꿨어.”

그의 대답에 철수의 안색이 파래졌다. 미국에서 한국까지의 장시간 비행으로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 버렸다.

“승무원이 깨워 주더라.”

“저, 저기, 선우야. 내가…….”

“내가 꼴사나운 모습 보일 동안 잠을 자?”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선우의 눈매는 순식간에 날카로운 선으로 뒤바뀌며 서늘함을 자아냈다.

“서, 선우야. 내가 미안해! 내가 진짜 안 자려고 했는데! 아니, 지금부터는 눈 부릅뜨고 있을…….”

“목소리 낮춰.”

다급함에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줄도 모르고 떠드는 철수에 앞만 주시하던 그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잘 테니까 약이나 줘.”

“또?”

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수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뭐 해. 얼른 줘.”

손바닥을 내미는 그에 반쯤 입술을 깨문 철수가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꼭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줘?”

다시 한번 손바닥을 내밀어 봤지만 철수는 약통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냥 자는 게 어때?”

“김철수.”

“타기 전에도 이미 먹었잖아. 곧 있으면 도착이래. 내가 이번엔 꼭 지키고 있을게.”

손바닥을 꼭 부여잡고 말하는 모습에 선우는 눈을 꾹 감고 의자 헤드에 머리를 댔다.

“……이번엔 자지 마. 도착하면 푹 쉬게 해 줄 테니까.”

“알았어. 절대 안 잘게.”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철수가 담요를 펴 조심스럽게 덮어 주었다.

제발 단 한 시간이라도 편하게 잠이 들길 바라면서.

1화



인천공항 입국장 앞, 경호원에 둘러싸인 강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정 진에 검은 맨투맨을 입은 그는 편안한 차림임에도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고성이 오가고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지는데도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선우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팬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이쪽으로.”

뒤따라온 철수가 길을 가리키자 선우가 발을 뗐다. 동시에 그를 기다린 팬들과 기자들도 함께 움직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공항에 경호팀이 선우에게 바짝 붙었다.

공항 출입문을 나와 미리 주차된 차에 오를 때까지 선우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겨우 조용해질 정도였다.

“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네.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차에 탄 뒤 시작된 통화는 인천국제공항 IC를 통과하고 나서야 끊어졌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철수가 몸을 돌려 뒤쪽을 쳐다봤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았던 피곤했는지 선우는 이미 눈을 감고 시트에 기대어 있었다.

“수고했다.”

“…….”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좀 쉬고 있어.”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선우를 살핀 철수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시켰다.

“이 주소로 가 줘.”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선 검은색 세단이 비상등을 켠 채 멈췄다. 곧 맞은편 주택의 차고가 열리자 세단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 왔다.”

주차를 마친 철수가 시동을 끄며 말했다. 뒷좌석에 있던 선우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떠 선글라스를 썼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차고 한편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부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W’s 클리닉’이라는 명패와 함께 데스크가 보였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의 말에 철수가 선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상담 잘 받고 오란 뜻이었다.

선우는 앞장서는 직원을 따라 걸었다. 벽마다 걸린 명화들을 지나자 연두색 문이 나타났다. 여자가 노크하자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자가 돌아서자 선글라스를 벗은 선우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당황했는지 잠시 멈칫했다.

미국에 있던 상담실과 똑같았다. 벽지와 바닥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마치 미국의 상담실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똑같아서 놀랐나 봅니다.”

마호가니 원목 책상에서 일어난 우준국 교수가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이군요, 케이. 아니, 여긴 한국이니 강선우 씨라고 불러야 할까요?”

제 앞으로 내민 손을 잡자 다시금 우 교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우 교수를 만났을 땐 그의 웃음소리조차 싫었는데 어느새 익숙해진 걸 보니 시간이 꽤 흘렀나 싶다.

“자, 앉으세요.”

우 교수가 권한 자리에 앉자 언제나 그랬듯 김이 나는 차가 앞에 놓였다. 상담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선우는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젠 잠깐 졸 때조차 악몽을 꿉니다.”

우 교수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지금 복용하는 약으론 소용없습니다. 더 강한 것으로 부탁드려요.”

그 말에 우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우의 눈썹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럼 평생 이 고통 속에 살란 말입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을게요. 그게 낫겠어요.”

선우의 입꼬리가 비틀리게 올라갔다. 차게 식은 눈동자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보이지 않았다.

우 교수는 미국에 있을 때보다 심해진 선우의 상태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

“꼬인 매듭 자체를 없애라고 했던 말.”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게 답입니다.”

“만나면 뭐가 달라집니까? 만나기만 하면 이 끔찍한 악몽이 사라진답니까?”

데시벨이 높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게 지독한 상처를 준 그 여자가 답이라니! 믿을 수 없다.

“항상 꿈에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반복되는 겁니다. 미련이 남아서, 아직 가슴속에 쌓인 분노가 남아서. 그분을 만나서 그때 못했던 말과 행동 모든 걸 풀어내셔야만 끝날 겁니다.”

상담을 받으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처음 상담을 받은 날에도 우 교수는 이런 말을 했었다, 거의 한 달째 제대로 된 잠을 못 자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버린 날에도 우 교수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는 욱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선우는 그 자리에서 우 교수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했었다. 물론 정신이 되돌아온 후에 정식으로 정중하게 사죄를 드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교수는 끊임없이 그에게 그녀와 만나라는 이야기를 해 왔다.

하지만 선우는 단 한 번도 알겠다는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다.

“가장 효과 센 약이나 처방해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다음 상담 때 뵙겠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선우의 귀에 우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은 이제 한계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속는 셈 치고 제 말, 믿어 보십시오.”



***



선우는 새벽이 돼서야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는데 집 안쪽에서부터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얼굴이 벌게진 철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야, 강선우!”

“약. 설마, 안 받아 온 건 아니겠지.”

한층 낮게 깔린 목소리에 철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쭤봤는데 여기서 약을 더 먹으면…….”

“설교는 됐고 약이나 줘.”

“야, 강선우!”

철수가 소리를 질렀지만, 선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강선우인 거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이름 그만 부르고 약이나 내놔.”

선우가 잔소리하는 철수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너 문 안 열어!”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피곤함에 절로 눈이 감겼지만, 어차피 악몽이 찾아오면 깰 것을 알기에 잠이 드는 것조차 무서웠다.

“……자고 싶다.”

눈을 감으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자 익숙한 흰 병이 보였다. 지난 밤 넣어 뒀던 약병이었다. 약병을 들고 멍하니 쳐다봤다.

“이건 이제 소용없는데.”

처음엔 한 알, 다음엔 두 알, 점점 복용하는 양을 늘렸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

“다 비우면 잘 수 있을까.”

약병의 뚜껑을 열어 뒤집었다. 하얀 알약들이 비처럼 우르르 쏟아졌다. 그대로 바닥에 앉아 알약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몇 개인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선우는 그대로 알약을 입으로 욱여넣었다. 물도 없이 넣은 알약들은 한없이 썼다.

그때 철컥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문 잠그고 들어가면 내가 못 들어올 줄 알았, 야! 강선우!”

때마침 들어온 철수가 재빨리 선우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 알약을 빼냈다. 이미 반쯤 녹은 알약들이 뭉개진 채 철수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너 미쳤어? 제정신이야?”

선우의 어깨를 철수가 잡아 흔들었다. 그런 철수의 손을 떼어 냈다.

“머리 울려. 그만해.”

“당장 병원 가자. 당장.”

벌떡 일어난 철수가 선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선우를 힘으로 움직이게 할 순 없었다.

“안 일어나?”

요지부동인 선우에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몇 걸음을 걸어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오늘 갔다 왔잖아. 다음에 가.”

“너 진짜…….”

“나가. 시끄러워.”

말을 마친 선우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더는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제 눈앞의 이불 뭉치를 본 철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바닥에 흩어진 알약들을 통에 주워 담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약들 또한 휴지로 닦아 냈다. 그리곤 혹시 알약이 남아 있을까 싶어 세세하게 바닥을 훑은 뒤에야 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철수가 몇 알 남지 않은 약통을 흔들어 보이곤 방 밖으로 나왔다. 큰 한숨을 내쉬며 욕실로 향한 그는 몇 알 남지 않은 약들을 모조리 변기에 버렸다. 하얀 알약들이 둥둥 뜬 광경에 인상을 쓰며 변기 레버를 내렸다.

욕실에서 나와 거실로 가던 철수가 복도 끝, 선우의 방을 힐끗 쳐다봤다. 깊게 한숨을 내쉰 철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지잉- CCTV라도 달아 놓았는지 때맞춰 울리는 휴대폰에 철수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아직 안 잤구나? 시차 적응하기 힘들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철수가 깍듯하게 답했다. 벌써 20년은 본 것 같은데 사장님인 성혜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 선우는?

“오늘 상담 갔다 왔고 지금은…….”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까 고민됐다. 하지만 금세 물어오는 목소리에 한 박자 쉬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선우 방에 있습니다. 아마 자는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누구보다 선우를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성혜도 선우 일에는 사장이 아닌 어머니로 나설 수밖에 없으니.

“한국엔 언제쯤 들어오십니까?”

지난 10년간 단 일주일도 떨어진 적이 없던 모자(母子)였다.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진 않지만 10년 전 사고 때 바닥까지 추락한 선우를 붙들고 살려 낸 사람이 바로 성혜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며 선우를 일으켜 세웠다. 그 결과 선우는 살았지만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당장 이번 한국행만 봐도 그랬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우 교수에 선우는 저도 따라가겠다며 악을 썼고 성혜는 이제 그만 다른 의사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결국 선우가 약 기운에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성혜가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못마땅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아마 못 갈 듯싶다. 밀레가 이번 허니스타 감독 영화 주연에 캐스팅됐거든.

“정말요?”

-그래서 당분간은 스케줄이 풀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그럼 선우는 어떻게 할까요? 상담을 또 잡은 거 보면 적어도 다음 달까진 한국에 있을 모양이던데요.”

다행히 얼마 전 드라마 촬영을 끝낸 터라 큰 스케줄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국에 오래 머무는 건 선우의 위치에선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회사에 이야기해서 한국에서 진행할 수 있는 스케줄 몇 개 잡아 놓을 테니 휴가라 생각하고 지내렴. 곧 드라마 촬영 들어가니 선우도 오래 있진 못할 거다. 일에 있어선 프로잖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