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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팬미팅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선우가 태식이 건네는 물을 받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수는?”
“실장님 아까 나가셔서 안 들어오셨어요.”
태식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답했다. 선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태식을 돌아봤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고?”
“네.”
태식이 건네주는 휴대폰을 받아 든 선우가 대기실을 나섰다. 철수에게 전화를 걸며 복도로 나왔다. 신호음이 가고 한참 뒤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우야.
“어디야?”
-차에 있어. 주차장으로 와.
철수의 말에 선우가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화를 끊은 선우가 빠르게 걸어 주차장으로 나왔다. 검은 세단으로 가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무슨 일이 있는지 철수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데.”
“여기, 네가 부탁했던 거. 난 뒷정리하러 갈 테니까 천천히 봐.”
노란 서류 봉투를 건넨 철수가 차에서 내렸다.
차 안에 홀로 남은 선우가 봉투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이 얇은 봉투 안에 그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꺼내야 하는데 쉽게 봉투를 열 수가 없었다. 철수에겐 당장이라도 만날 것처럼 말했는데 이깟 종이 하나 읽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그는 한 시간 동안 봉투도 열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봉투 끝만 만지던 선우가 봉투 안으로 손을 넣었다. 불과 몇 장 되지 않는 종이가 손끝에 느껴졌다. 맨 윗줄에 새겨진 이수연이라는 이름에 선우의 눈이 질끈 감겼다.
‘헤어지자.’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응?’
‘미안하다고 말 안 해. 어차피 평생 나쁜 년일 테니까.’
‘제발, 제발 가지 마. 나 너 없이 못 살아. 너 없인 하루도, 하루도 못 산다고.’
‘그냥 잊어.’
눈을 감았는데도, 10년 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분노와 그날의 무력감과 그날의 좌절감으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반쯤 구겨진 종이를 쥐고 있던 선우가 눈을 떠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이수연, 서른 살.
“선연동 다빈치 학원?”
구겨진 종이를 탈탈 털어 폈다. 하지만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듯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서 근무. 하…….”
허탈함의 탄식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손에 들어갔던 힘도 빠져 종이가 무릎에 떨어졌다.
수연은 예선예고 피아노과에서도 늘 상위권이었다.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되면 한국 아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연주해 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꿈은 10년 전, 선우의 꿈이기도 했다.
다시 종이를 들어 읽어 내려가던 선우가 다시 시선을 위로 뒀다.
“선연동이면…….”
입술을 질끈 깨문 선우가 조수석에서 내려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곤 액셀을 세게 밟았다. 차는 주차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검은 세단이 다빈치 피아노 미술 학원 앞에 섰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내렸다. 다행히 시간 탓인지 도로엔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상가 건물 2층을 올려다봤다. 유치한 구름 모양과 음표 모양의 스티커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잠깐 창문을 쳐다보던 선우가 걸음을 옮겼다. 큰길을 지나 수연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하네.”
10년 전과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길은 그대로였다. 고등학생 때 매일같이 수연을 데려다주던 그 길이었다. 천천히 발을 뗐다.
‘업어 줄까?’
‘됐어. 넘어지면 다친단 말이야.’
‘안 넘어지거든? 얼른 업혀.’
걸을수록 짙게 떠오르는 기억들에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곤욕이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가둬 두었던 것들이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 나와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웠다.
영겁의 시간 같은 몇 분을 지나 초록색 철문 앞에 도착하자 고등학생 때와 같은 풍경이 선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변한 거라곤 전보다 칠이 더 벗겨진 문뿐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철문 앞에 섰다. 철문 사이로 평상이 자리한 마당이 보였다. 아찔하고 짜릿했던 첫 키스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사실, 이 집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 선우와 수연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그런 곳에 아직도 네가 살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매몰차게 버리고 떠났으면서.
주체 못할 감정으로 이를 꽉 문 선우가 철문을 두드렸다. 집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선우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집 안에서 나온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장지문 여는 소리까지.
“누구세요?”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
너무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적당한 목소리.
매일 밤, 들었던 그 목소리.
곧 철문까지 열리고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던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강선우……?”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급하게 나왔는지 얇은 카디건 차림의 수연은 10년 전보다 훨씬 왜소해 보였다.
이런 꼴로 살려고.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절 매몰차게 버리고 떠났으면서 훨씬 더 초라해진 수연의 상황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간 선우가 수연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차라리 네가 성공했다면 화라도 안 났을까.”
“…….”
“내가,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며.”
“…….”
“그래 놓고 넌 왜 이 모양이야! 왜!”
서류를 읽을 때부터 치솟았던 분노가 폭발해 나온 거친 목소리는 고스란히 수연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수연은 별다른 대꾸조차 없었다. 처음의 보였던 놀란 기색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저 묵묵히 선우의 화를 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선우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렇게 매몰차게 버렸으면 성공을 하든지!”
“…….”
“아니면 내가 부러워 미칠 만큼 잘난 놈하고 살기라도 하든지!”
“…….”
“왜 아직도 이딴 곳에서 살고 있어! 왜!”
“……이딴 곳?”
수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추위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뭔데 내 집을 이딴 곳이래.”
날이 잔뜩 선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싸했다. 선우를 보고 놀라 동그랗게 커진 수연의 눈은 어느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꺼져.”
“이수연!”
뒤를 돌아 들어가려는 수연을 막으려 팔을 잡아챘다. 하지만 선우의 손은 수연에 의해 매섭게 내쳐졌다.
“10년 전에 끝났잖아. 너랑 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다가서려던 선우의 발이 족쇄라도 묶인 양 멈춰 버렸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수연은 잡을 새도 없이 초록색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선우가 급히 문을 두드렸다.
“이수연!”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문 사이를 쳐다봤지만, 집 안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선우는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곤 그대로 철문에 머리를 기댔다.
바보같이! 또!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내가 아닌데, 또 잡지 못했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에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잘 살았고, 끝까지 버텨 냈다고.
“……너도.”
잘살고 있었냐고.
하지만 냉정한 목소리를 내는 수연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뱉은 냉정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기에.
“젠장!”
잘 손질된 머리를 헤집은 선우가 철문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다란 마찰음과 함께 손등에 빨갛게 피가 비췄다. 동시에 차가운 볼 위로 이유 모를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선우를 두고 쌩하니 들어온 수연은 거실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밖에선 저를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며 기어가듯 움직여 거실의 불을 껐다.
시간이 좀 지나니 소란스러웠던 밖이 잠잠했다. 갔나 싶어 마루로 나가려는데 굉음과 함께 철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수연은 그대로 장지문을 닫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피아노, 딱 하나만 가지고 할머니가 사는 이곳으로 왔었다. 좁은 방, 침대보다도 큰 피아노는 여전히 수연의 유일한 친구였다. 수연이 건반을 누르듯 피아노 덮개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못됐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더불어 선우와의 추억도 함께 묻힌 집이다. 그걸 제일 잘 알면서도 모진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만큼 미워했겠지.”
격양된 목소리로 절 버렸다고 말하던 선우의 눈에 원망이 서려 있었다. 분명 더 잘생겨졌고 높은 위치까지 올랐는데도 그 눈은 10년 전 비가 내리던 날의 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못할 정도면 난 여전히 너에게.
“나쁜 년이겠구나…….”
일정하게 덮개를 두드리던 수연이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가슴 가운데를 꾹 눌렀다. 갑자기 명치끝이 아렸다.
제가 말했던 건데. 평생 나쁜 년일 거라고.
그렇게 저만 바라보고 있던 그 선한 눈동자에 원망과 절망을 남겨 줬다. 그래 놓고 이제야 너를 걱정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시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난 나쁜 년이다. 난 나쁜 년이다…….”
주문을 걸듯이 되새겼다. 그에게 난 평생 나쁜 년이어야 하니까.
***
집에 도착한 선우는 신경질적으로 도어록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널찍한 냉장고엔 물병 몇 개와 철수가 넣어 놓은 캔 맥주가 보였다. 습관적으로 물병에 손을 뻗던 선우가 방향을 틀어 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대로 따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목구멍을 따라 맥주의 탄산이 답답했던 가슴을 뚫듯 내려갔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물이 아닌 술이 먹고 싶었다. 먹먹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면서도 짜증이 솟구치는 이 마음을 잠재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알코올은 그것에 제격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 캔들을 모조리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뒀다. 자리에 앉아 반쯤 마신 캔을 비워 냈다.
‘10년 전에 끝났잖아. 너랑 나.’
저를 돌아보던 냉정한 두 눈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빈 캔은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나쁜 년하고 싶다더니 소원 이뤘네.”
낮게 중얼거린 선우가 새로운 캔으로 손을 뻗었다. 단숨에 캔을 딴 뒤 맥주를 들이켰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다시 떠오른 싸늘한 목소리에 선우가 들고 있던 캔을 집어 던졌다. 캔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뽀글뽀글 기포가 터지며 자취를 감췄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해. 나를 보고도 미동 없던 네 얼굴이, 네 눈이. 나는 이만큼이나 아팠는데, 네가 남긴 상처가 이렇게나 커 점점 미쳐 가는데 정작 넌 아무렇지도 않다니.
“불공평하지, 참.”
너도 나만큼 아팠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겠지만 내가 힘들었던 만큼 너도 힘들었으면 했다. 나를 보며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싶었다. 미안했다고, 너에게 상처 준 만큼 나도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고,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건 모두 자신의 바람일 뿐이다. 여전히 잘난 이수연은 되레 내게 화를 내고. 강선우는 또 상처받고.
새로운 캔을 따 들이붓듯 맥주를 마셨다. 쓰린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마음이 알코올로 소독이라도 됐으면 싶어서. 그렇게 한 캔, 두 캔, 식탁 위 빈 캔이 점점 늘어나고 선우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찬 겨울바람이 부는 그 사이로 수연이 나타났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왜소한 어깨, 덜덜 떨리는 손을 한 수연에 한달음에 다가섰다. 너무나도 추워 보이는 모습에 안아 주려 했지만, 수연은 뒤로 물러났다.
‘당장 꺼져.’
‘다신 보고 싶지 않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에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소리에 선우가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았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선우야, 강선우!”
“헉-”
두 눈을 번쩍 뜬 선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어?”
익숙한 철수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꿈이었어? 식탁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자 머리를 강타하는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아? 많이 아파?”
철수의 거듭된 질문에 두통이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 울려. 그만 말해.”
“그러게 술을 왜 마셔서. 너 술은 안 마셨잖아. 약이랑 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줄줄 말을 잇는 철수의 말이 듣기 싫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서자마자 휘청거리는 선우의 몸 때문에 철수가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선우야?”
선우가 철수의 손을 떼어 내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몸이 자꾸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에 전해지는 통증까지 더 심해져 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벽이 아닌 허공을 짚은 손에 선우가 그대로 넘어졌다.
“강선우!”
철수의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눈앞에 섬광이 비췄다.
팬미팅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선우가 태식이 건네는 물을 받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수는?”
“실장님 아까 나가셔서 안 들어오셨어요.”
태식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답했다. 선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태식을 돌아봤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고?”
“네.”
태식이 건네주는 휴대폰을 받아 든 선우가 대기실을 나섰다. 철수에게 전화를 걸며 복도로 나왔다. 신호음이 가고 한참 뒤 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선우야.
“어디야?”
-차에 있어. 주차장으로 와.
철수의 말에 선우가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화를 끊은 선우가 빠르게 걸어 주차장으로 나왔다. 검은 세단으로 가 조수석 문을 열고 탔다. 무슨 일이 있는지 철수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데.”
“여기, 네가 부탁했던 거. 난 뒷정리하러 갈 테니까 천천히 봐.”
노란 서류 봉투를 건넨 철수가 차에서 내렸다.
차 안에 홀로 남은 선우가 봉투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이 얇은 봉투 안에 그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꺼내야 하는데 쉽게 봉투를 열 수가 없었다. 철수에겐 당장이라도 만날 것처럼 말했는데 이깟 종이 하나 읽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그는 한 시간 동안 봉투도 열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봉투 끝만 만지던 선우가 봉투 안으로 손을 넣었다. 불과 몇 장 되지 않는 종이가 손끝에 느껴졌다. 맨 윗줄에 새겨진 이수연이라는 이름에 선우의 눈이 질끈 감겼다.
‘헤어지자.’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응?’
‘미안하다고 말 안 해. 어차피 평생 나쁜 년일 테니까.’
‘제발, 제발 가지 마. 나 너 없이 못 살아. 너 없인 하루도, 하루도 못 산다고.’
‘그냥 잊어.’
눈을 감았는데도, 10년 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분노와 그날의 무력감과 그날의 좌절감으로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반쯤 구겨진 종이를 쥐고 있던 선우가 눈을 떠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이수연, 서른 살.
“선연동 다빈치 학원?”
구겨진 종이를 탈탈 털어 폈다. 하지만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듯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서 근무. 하…….”
허탈함의 탄식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손에 들어갔던 힘도 빠져 종이가 무릎에 떨어졌다.
수연은 예선예고 피아노과에서도 늘 상위권이었다.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되면 한국 아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연주해 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꿈은 10년 전, 선우의 꿈이기도 했다.
다시 종이를 들어 읽어 내려가던 선우가 다시 시선을 위로 뒀다.
“선연동이면…….”
입술을 질끈 깨문 선우가 조수석에서 내려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곤 액셀을 세게 밟았다. 차는 주차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검은 세단이 다빈치 피아노 미술 학원 앞에 섰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내렸다. 다행히 시간 탓인지 도로엔 차 한 대 지나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상가 건물 2층을 올려다봤다. 유치한 구름 모양과 음표 모양의 스티커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잠깐 창문을 쳐다보던 선우가 걸음을 옮겼다. 큰길을 지나 수연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하네.”
10년 전과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길은 그대로였다. 고등학생 때 매일같이 수연을 데려다주던 그 길이었다. 천천히 발을 뗐다.
‘업어 줄까?’
‘됐어. 넘어지면 다친단 말이야.’
‘안 넘어지거든? 얼른 업혀.’
걸을수록 짙게 떠오르는 기억들에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곤욕이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꽁꽁 가둬 두었던 것들이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 나와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웠다.
영겁의 시간 같은 몇 분을 지나 초록색 철문 앞에 도착하자 고등학생 때와 같은 풍경이 선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변한 거라곤 전보다 칠이 더 벗겨진 문뿐이었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철문 앞에 섰다. 철문 사이로 평상이 자리한 마당이 보였다. 아찔하고 짜릿했던 첫 키스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사실, 이 집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 선우와 수연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그런 곳에 아직도 네가 살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매몰차게 버리고 떠났으면서.
주체 못할 감정으로 이를 꽉 문 선우가 철문을 두드렸다. 집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선우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집 안에서 나온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장지문 여는 소리까지.
“누구세요?”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
너무 높지도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적당한 목소리.
매일 밤, 들었던 그 목소리.
곧 철문까지 열리고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던 수연의 얼굴이 보였다.
“강선우……?”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급하게 나왔는지 얇은 카디건 차림의 수연은 10년 전보다 훨씬 왜소해 보였다.
이런 꼴로 살려고.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절 매몰차게 버리고 떠났으면서 훨씬 더 초라해진 수연의 상황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간 선우가 수연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차라리 네가 성공했다면 화라도 안 났을까.”
“…….”
“내가, 네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며.”
“…….”
“그래 놓고 넌 왜 이 모양이야! 왜!”
서류를 읽을 때부터 치솟았던 분노가 폭발해 나온 거친 목소리는 고스란히 수연에게로 쏟아졌다. 하지만 수연은 별다른 대꾸조차 없었다. 처음의 보였던 놀란 기색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저 묵묵히 선우의 화를 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선우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렇게 매몰차게 버렸으면 성공을 하든지!”
“…….”
“아니면 내가 부러워 미칠 만큼 잘난 놈하고 살기라도 하든지!”
“…….”
“왜 아직도 이딴 곳에서 살고 있어! 왜!”
“……이딴 곳?”
수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추위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뭔데 내 집을 이딴 곳이래.”
날이 잔뜩 선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싸했다. 선우를 보고 놀라 동그랗게 커진 수연의 눈은 어느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꺼져.”
“이수연!”
뒤를 돌아 들어가려는 수연을 막으려 팔을 잡아챘다. 하지만 선우의 손은 수연에 의해 매섭게 내쳐졌다.
“10년 전에 끝났잖아. 너랑 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다가서려던 선우의 발이 족쇄라도 묶인 양 멈춰 버렸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수연은 잡을 새도 없이 초록색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선우가 급히 문을 두드렸다.
“이수연!”
하지만 몇 번을 불러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문 사이를 쳐다봤지만, 집 안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선우는 그제야 문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곤 그대로 철문에 머리를 기댔다.
바보같이! 또!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내가 아닌데, 또 잡지 못했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에 제대로 이야기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잘 살았고, 끝까지 버텨 냈다고.
“……너도.”
잘살고 있었냐고.
하지만 냉정한 목소리를 내는 수연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내뱉은 냉정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기에.
“젠장!”
잘 손질된 머리를 헤집은 선우가 철문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다란 마찰음과 함께 손등에 빨갛게 피가 비췄다. 동시에 차가운 볼 위로 이유 모를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선우를 두고 쌩하니 들어온 수연은 거실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밖에선 저를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며 기어가듯 움직여 거실의 불을 껐다.
시간이 좀 지나니 소란스러웠던 밖이 잠잠했다. 갔나 싶어 마루로 나가려는데 굉음과 함께 철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수연은 그대로 장지문을 닫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피아노, 딱 하나만 가지고 할머니가 사는 이곳으로 왔었다. 좁은 방, 침대보다도 큰 피아노는 여전히 수연의 유일한 친구였다. 수연이 건반을 누르듯 피아노 덮개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못됐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더불어 선우와의 추억도 함께 묻힌 집이다. 그걸 제일 잘 알면서도 모진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만큼 미워했겠지.”
격양된 목소리로 절 버렸다고 말하던 선우의 눈에 원망이 서려 있었다. 분명 더 잘생겨졌고 높은 위치까지 올랐는데도 그 눈은 10년 전 비가 내리던 날의 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못할 정도면 난 여전히 너에게.
“나쁜 년이겠구나…….”
일정하게 덮개를 두드리던 수연이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가슴 가운데를 꾹 눌렀다. 갑자기 명치끝이 아렸다.
제가 말했던 건데. 평생 나쁜 년일 거라고.
그렇게 저만 바라보고 있던 그 선한 눈동자에 원망과 절망을 남겨 줬다. 그래 놓고 이제야 너를 걱정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시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난 나쁜 년이다. 난 나쁜 년이다…….”
주문을 걸듯이 되새겼다. 그에게 난 평생 나쁜 년이어야 하니까.
***
집에 도착한 선우는 신경질적으로 도어록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널찍한 냉장고엔 물병 몇 개와 철수가 넣어 놓은 캔 맥주가 보였다. 습관적으로 물병에 손을 뻗던 선우가 방향을 틀어 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대로 따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목구멍을 따라 맥주의 탄산이 답답했던 가슴을 뚫듯 내려갔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래로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물이 아닌 술이 먹고 싶었다. 먹먹하고 답답하고 화가 나면서도 짜증이 솟구치는 이 마음을 잠재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알코올은 그것에 제격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맥주 캔들을 모조리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뒀다. 자리에 앉아 반쯤 마신 캔을 비워 냈다.
‘10년 전에 끝났잖아. 너랑 나.’
저를 돌아보던 냉정한 두 눈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빈 캔은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나쁜 년하고 싶다더니 소원 이뤘네.”
낮게 중얼거린 선우가 새로운 캔으로 손을 뻗었다. 단숨에 캔을 딴 뒤 맥주를 들이켰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다시 떠오른 싸늘한 목소리에 선우가 들고 있던 캔을 집어 던졌다. 캔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뽀글뽀글 기포가 터지며 자취를 감췄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해. 나를 보고도 미동 없던 네 얼굴이, 네 눈이. 나는 이만큼이나 아팠는데, 네가 남긴 상처가 이렇게나 커 점점 미쳐 가는데 정작 넌 아무렇지도 않다니.
“불공평하지, 참.”
너도 나만큼 아팠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겠지만 내가 힘들었던 만큼 너도 힘들었으면 했다. 나를 보며 눈물이라도 흘렸으면 싶었다. 미안했다고, 너에게 상처 준 만큼 나도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고,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건 모두 자신의 바람일 뿐이다. 여전히 잘난 이수연은 되레 내게 화를 내고. 강선우는 또 상처받고.
새로운 캔을 따 들이붓듯 맥주를 마셨다. 쓰린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마음이 알코올로 소독이라도 됐으면 싶어서. 그렇게 한 캔, 두 캔, 식탁 위 빈 캔이 점점 늘어나고 선우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찬 겨울바람이 부는 그 사이로 수연이 나타났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왜소한 어깨, 덜덜 떨리는 손을 한 수연에 한달음에 다가섰다. 너무나도 추워 보이는 모습에 안아 주려 했지만, 수연은 뒤로 물러났다.
‘당장 꺼져.’
‘다신 보고 싶지 않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에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소리에 선우가 고통스러운 듯 주저앉았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선우야, 강선우!”
“헉-”
두 눈을 번쩍 뜬 선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어?”
익숙한 철수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꿈이었어? 식탁에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자 머리를 강타하는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괜찮아? 많이 아파?”
철수의 거듭된 질문에 두통이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 울려. 그만 말해.”
“그러게 술을 왜 마셔서. 너 술은 안 마셨잖아. 약이랑 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줄줄 말을 잇는 철수의 말이 듣기 싫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서자마자 휘청거리는 선우의 몸 때문에 철수가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선우야?”
선우가 철수의 손을 떼어 내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몸이 자꾸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에 전해지는 통증까지 더 심해져 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벽이 아닌 허공을 짚은 손에 선우가 그대로 넘어졌다.
“강선우!”
철수의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눈앞에 섬광이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