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집주인과 세입자 3화
5. 코코아와 마시멜로
반이 궁에서 나오는데 붉은 머리를 짧게 친 젊은 기사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단장님! 드디어 정상 근무이십니까?”
환하게 웃는 그는 흑기사단의 부단장 오스틴이었다. 반의 휴가 기간 동안 오스틴이 기사단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기사단장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오스틴 경의 눈 밑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단장이 왔으니 고된 서류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자유다!’
오스틴은 기뻐했다. 반은 딱딱한 얼굴로 그의 부관과 마주 섰다.
“오스틴 경.”
“네!”
“3개월간 흑기사단을 부탁하지.”
“네! 네……?”
“나는 그 3개월간 정직이야.”
“어째서……!”
오스틴은 자칫 상관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는 어깨를 잡고 반을 흔들었다.
“단장님이 왜요! 뭘 잘못했다고요!”
반은 어깨에서 오스틴의 손을 한쪽씩 떼어 냈다. 오스틴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하얗게 굳었다.
“설마……. 왕자님께 칼부림이라도 하셨습니까?”
반은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오스틴은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지난 한 달간의 왕자님의 행적을 재잘거렸다. 궁 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요, 최근에는 가출까지 한다는 그의 말에 반이 잠시 오스틴 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땐 그러지 않았는데.’
반은 다섯 살 때의 왕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국경이 변하는데 사람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부관은 반의 반응을 보고 이 사태의 원흉이 말썽꾸러기 왕자님이라고 생각하고 왕자가 최근에 백금 기사들에게 한 만행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다. 반은 수다스러운 부관을 기사단장 집무실에 친히 넣어 주고 문을 닫았다.
***
기분이 한없이 저조한 반은 집에 돌아오면서 큰길이 아닌 암굴 쪽 골목을 택했다. 누군가 시비라도 걸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대낮의 암굴 외곽 지역은 조용하고 한산하기만 했다.
‘집엔 오웰이 있겠지.’
라스퍼 베가스에서 경호하기로 했으니 오웰의 신변 걱정은 덜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떴다. 이 시간 즈음엔 오웰은 자고 있겠다 싶었다. 서로 생활시간이 어긋나지만 아침과 저녁 땐 꼭 말을 걸어오는 그를 생각하고 반은 슬며시 웃었다. 새싹 같은 눈을 반짝이는데 꼭 갈색 털을 가진 강아지 같았다.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아진 반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
골목 저편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반이 눈을 끔뻑였다. 오웰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커먼 사내들이 반의 앞을 지나쳐 뛰어갔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반은 골목을 돌아 남자들을 쫒아 달렸다.
“헉, 헉…….”
오웰은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다. 문이 달린 높은 철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오래 쫓겼는지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고, 목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봐, 이제 포기하고 이리 오지?”
“순하게 생긴 게 맛있어 보여~”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우락부락한 남자, 그리고 그와 대조되게 뼈만 남아 눈을 부라리는 칼을 든 남자. 그 뒤로 그들의 부하로 보이는 이들까지 오웰을 노리고 있었다. 오웰은 뒤돌아 두꺼운 책을 꼭 끌어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났다. 등 뒤에 철창이 닿았다. 철창을 잡고 흔들어 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웰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바투 잡았다.
“낄낄! 도련님~ 여기서 도망갈 수 있을 거 같아? 왜, 그 책으로 때리려고?”
사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더니 안색을 싹 바꾼 마른 남자가 칼을 고쳐 잡았다.
“잡아.”
부하로 보이는 세 사람이 오웰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웰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책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오웰을 덮쳤다.
빠악!
오웰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홉뜨인 눈에 흩날리는 검은 망토와, 거기에 새겨진 금빛 늑대 문양이 가득 들어찼다.
오웰도, 쫓는 놈들도 발이 빨랐다. 반은 자신이 도착하기 전 오웰이 다칠까 봐 무서웠다. 한 번도 자신이 굼뜨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답답했다. 그는 담을 넘고 주택의 벽을 타면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사내들에게 덮쳐지는 오웰을 보고 반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 검을 검집째 휘두르니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 놈의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하고, 그대로 목을 잡아 옆 놈에게 강하게 밀어붙였다. 동료와 박아 쓰러진 놈의 배를 강하게 차 기절시킨 반은 오웰을 등지고 섰다.
“흑, 흑기사단……?”
“흑기사단이 왜 암굴에 있어! 왕이 분명 불가침 조약이라고 했어! 저놈은 가짜다!”
망설이는 부하들을 향해 마른 남자가 소리쳤다. 그들의 말에서 뜻밖에 얻은 정보에 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암굴왕과 여왕 폐하가 계약을 했다고?’
흑기사단의 문양과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도 못 믿다니 반은 기가 찼다. 잔당들도 암굴왕의 말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꼴을 보아하니 왕국 내에서 암굴왕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한 모양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그를 생각하고 기분이 매우 나빠진 반은 살기를 뿌리며 불한당들에게 다가갔다. 오웰은 살며시 반의 외투 끝을 잡아당겼다. 그 약한 힘에 반은 오웰에게 몸을 돌렸다. 오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망쳐요.”
“전 괜찮습니다.”
반은 적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기세에 눌린 적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익, 꺼져라, 가짜!”
마른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반에게 달려들었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한 반은 폼멜로 명치를 가격했다. 적을 깔끔하게 기절시킨 반은 놈의 뒷덜미를 잡아 남은 놈들에게 던져 줬다.
“다음?”
반이 여유롭게 적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정답을 찾아냈다. 진짜 흑기사단의 단장, 아슈엘 백작이 맞다.
“으아아악!”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료를 챙겨 빠르게 달아났다. 건달들치곤 의리가 있다고 생각한 반은 뒤돌아 오웰에게 다가갔다.
책을 힘껏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인 오웰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귀가 빨개진 그를 보고 반이 한숨을 쉬었다. 일반인이 암굴에서 이런 일을 당했으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망토를 벗어 조심스럽게 오웰의 어깨 위를 덮었다.
“오웰.”
“네……?”
“이제 괜찮습니다.”
“…….”
오웰이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붉어진 목덜미에 그가 우는가 싶어 반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려고 했다. 그때 오웰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그대로 반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익숙한 초록색 눈동자에 반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웰이 새빨개진 채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반은 그사이 머릿속을 휘젓는 혼란을 잠재워야 했다. 암굴왕과 눈이 닮았다. 부끄러워서 이제 아예 손으로 눈을 가려 버린 저이가 그와 닮았다니, 말도 안 됐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날려 버리며 반은 오웰을 불렀다. 오웰은 여전히 새빨간 토마토가 된 채 반의 팔을 잡아 왔다.
“……무서우니까 잡고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오웰은 귀족 여인들처럼 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에 돌아갔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오웰을 응접실 소파에 앉히고 반은 3층까지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보송보송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웰의 어깨에 꼼꼼하게 담요를 둘러 준 반은 바로 벽난로로 달려가 부싯돌로 불을 지폈다. 금방 불이 올라왔다. 장작을 넣은 반은 다시 주방에 가 찬장에서 코코아 가루를 꺼냈다. 고민하던 반은 라스퍼가 준 마시멜로가 든 깡통을 꺼냈다.
한 손에 코코아를 들고 응접실로 나온 반은 담요에 고개를 박고 있는 오웰을 보았다.
‘우는 걸까.’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운 적이 없던 반으로서는 우는 상대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반은 조용히 오웰 앞 테이블에 코코아 잔을 내려놨다. 오웰은 그제야 얼굴을 들고 반과 코코아를 번갈아 보았다. 반은 가져온 토끼 모양 마시멜로를 띄어 주었다. 그걸 본 오웰의 얼굴이 또 화르륵 달아올랐다. 오웰의 맞은편에 앉은 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그에 오웰이 눈을 굴렸다. 아래를 보고 고민하던 오웰이 우물쭈물 답했다.
“……좋은 냄새가 나서…….”
“네……?”
“해, 햇살 같은 냄새가 나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여전히 빨간 오웰을 두고 반이 생각했다.
‘오웰이 담요 냄새를 맡았다는 건가? 나 봤자 쾌쾌한 기사단장 냄새밖에 나지 않을 것을.’
“……?”
설마 자신의 냄새인가 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엄한 생각을 했단 생각에 같이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침묵이 응접실 안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기운을 내뿜으며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벽난로 때문이라며 반은 괜히 손에 들린 따뜻한 코코아 잔을 만지작거렸다. 유채도 아직 피지 않은, 겨울 끝과 봄 사이의 어드메인 계절인데도 집 안은 후끈하기만 했다. 침묵을 참지 못한 오웰이 잔을 내려놨다. 그의 어깨에서 담요가 흘러내렸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웰에게 담요를 다시 꼼꼼히 싸매 주었다.
“그런데 원래 이 시간엔 궁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 그게.”
반은 괜히 담요의 주름을 펴 주며 여왕 앞에서 칼부림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정직당한 사연을 말하자니 한없이 부끄러워져 반은 답을 망설였다. 그런 그를 오웰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그때 현관문이 거세게 열리고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반! 정직 먹었다며!”
긴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라스퍼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딱딱하게 굳어진 두 사람을 보더니 양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내가 방해한 거야?”
반은 그런 라스퍼를 보고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버릇처럼 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고 라스퍼는 재빨리 달려와 반의 어깨를 잡았다.
“연애는 그렇다 치고, 나랑 둘이서 얘기 좀 하자!”
***
“안녕하십니까, 반의 친구인 라스퍼라고 합니다. 연락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방에 올라가겠습니다.”
오웰이 잔을 들고 일어나자 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오웰이 따뜻한 곳에 편하게 있기를 바란 그는 라스퍼를 데리고 자신의 방에 갈 생각이었다.
“난데없이 온 제 친구이니 저희가 올라가겠습니다.”
반이 라스퍼에게 고갯짓을 했지만 라스퍼는 정작 오웰의 손에 들린 코코아 잔을 보고 있었다. 오웰에게 다가간 그는 코코아 위에 떠 있는, 갈색 피를 흘리고 있는 마시멜로 토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야, 반! 이거 너만 먹으라고 했잖아. 너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고 준 거야?”
“드디어 네가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순식간에 야차같이 변한 반은 망설이지 않고 라스퍼의 멱살을 잡았다. 반은 라스퍼를 놓지 않은 채 오웰을 살폈다. 그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목이 졸린 라스퍼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아냐, 아냐! 독 아냐! 내가 내 친구한테 독을 줬겠냐!”
“…….”
순간 반은 정말 독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1차 전쟁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친구라고 여긴 어떤 이는 대부호의 아들인 반을 떠보기 위해 다가왔고, 아버지와 좋은 관계가 아닌 것을 알자 반을 조롱하면서 떠났다. 어떤 이는 반을 사랑하는 척 다가왔다가 죽이려고 했었고, 또 어떤 이는 반을 친구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믿지 않았고 멋대로 죽어 버렸다.
그 이후로 사람들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던 반이지만, 그래도 수도를 떠나기 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저를 위해 기사가 되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라스퍼만큼은 굳게 믿었다. 그는 반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라스퍼, 너마저도……. 믿었는데…….”
라스퍼는 침통해진 반을 보고 정색하며 반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정말 독 아니야.”
그는 진중한 얼굴로 오웰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 마시멜로엔 반의 부족한 인류애를 키워 줄 ‘사랑의 묘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말에 사기꾼이 사기를 치는 줄 알게 된 반이 라스퍼의 발을 콱 밟으려고 했다. 라스퍼는 익숙하게 보지도 않고 피했고, 그 바람에 반은 발꿈치에 징 하게 울리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반이 살기를 담아 상대를 노려봤다. 라스퍼가 진지한 얼굴일 때 하는 말은 대부분 사기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반의 집 세입자에게 사기를 칠 이유가 없었다. 반이 의심을 가득 담아 라스퍼를 흘겼다. 정작 오웰은 흥미가 돋았는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마시면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그 사랑의 묘약이요?”
“그렇습니다. 혹시 반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빨개지고, 같이 있고 싶다가도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라스퍼의 말에 오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정색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도 그런데 어떡하죠…….”
“……네?”
라스퍼도 반도 쩡하니 얼어붙었다. 오웰은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기사단장님은 멋있고, 다정하기까지 하잖습니까? 좋은 분이라 호감이 갑니다.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봄볕처럼 웃는 그를 관찰하던 라스퍼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툭, 던져 보고 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던 그는 오히려 역공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라스퍼는 곧 각이 멋지게 선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실례하였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반이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런, 지어낸 이야기라니. 진실이었어도 좋았을 텐데. 제가 반을 사랑한다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요.”
오웰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라스퍼는 아연해졌다. 장난기 가득한 녹색 눈동자가 코코아 잔에 가려졌다.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오웰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라스퍼의 감이 오웰은 타고난 사기꾼이라 외치고 있었다. 허둥대는 라스퍼를 보며 반이 한숨을 쉬었다.
“오웰……. 라스퍼한테 그렇게 말하면 진짜인 줄 압니다.”
오웰이 소년처럼 맑게 웃었고, 위험 신호를 읽은 라스퍼는 반의 등을 밀며 계단을 향했다.
“그,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후다닥 3층으로 올라가는 둘을 보며 오웰이 순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웃었다. 오웰은 코코아 잔을 내려놓고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꼭 잡았다. 3층 문 닫는 소리가 나자 재빨리 화장실에 들어간 그는 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들키는 줄 알았네…….”
거울에 비친 그의 이마 가운데에 혹이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멍 들겠는데…….”
다시 응접실로 돌아간 그는 서랍장에서 약품 상자를 꺼냈다. 일부러 티가 나게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다.
다시 소파에 앉은 그는 팔걸이에 팔을 걸고 턱을 괴었다. 괴한에게 쫓겨 겁을 먹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웰의 반달처럼 휘어진 눈은 코코아를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았다.
“그래……. 급할 것 없어.”
새싹 같았던 눈동자가 비 온 뒤의 숲처럼 어두운 빛으로 변했다. 오웰은 담요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달콤한 사랑에 빠진다 하여도 반의 체취처럼 마약 같지는 않으리라.
6. 반격 (1)
2층과 3층에는 작은 서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공중에 떠도는 먼지들이 반짝였다.
‘제가 반을 사랑한다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요.’
반의 머릿속에 오웰의 말이 동동 떠다녔다.
‘그는 사랑을 쉽게 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빈말로 한 말인가?’
자신 있게 말하던 오웰. 그의 눈동자는 눈을 녹이고 고개를 드는 새싹 같았다. 태양의 축복을 받아 반짝이는 작고 여린 존재는 그 자체로도 경이로웠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세상이 멀어지고 오직 오웰 한 사람만이 빛났다.
라스퍼는 완전히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반, 정신 차려.”
“……그래.”
반이 세입자인 오웰을 어떻게 한 줄 알았더니, 반대로 오웰이 반을 홀렸다고 라스퍼는 속으로 한탄했다. 라스퍼는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하나 고민했다. 익숙하게 회전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라스퍼의 못 미더워하는 눈빛에 반은 뒷목을 한번 쓸고 스툴을 가져와 앉았다.
‘취조당하는 느낌이야.’
“반, 진짜 중요한 문제야. 너 세입자랑 무슨 관계야?”
“집주인과 세입자지. 당연한 걸 물어?”
“넋을 놓은 거 같아서 물어봤다. 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반이 고개를 저었다. 라스퍼도 그가 오웰이라는 사람과 어떤 접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반의 집에 세입자가 든 순간 오웰의 과거를 낱낱이 조사했다. 왕실 아카데미 이슈타르단 출신이라니 신분은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스퍼는 뒷세계에서 살아남게 해 준 자신의 감을 믿었다.
5. 코코아와 마시멜로
반이 궁에서 나오는데 붉은 머리를 짧게 친 젊은 기사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단장님! 드디어 정상 근무이십니까?”
환하게 웃는 그는 흑기사단의 부단장 오스틴이었다. 반의 휴가 기간 동안 오스틴이 기사단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기사단장이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오스틴 경의 눈 밑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단장이 왔으니 고된 서류 업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자유다!’
오스틴은 기뻐했다. 반은 딱딱한 얼굴로 그의 부관과 마주 섰다.
“오스틴 경.”
“네!”
“3개월간 흑기사단을 부탁하지.”
“네! 네……?”
“나는 그 3개월간 정직이야.”
“어째서……!”
오스틴은 자칫 상관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는 어깨를 잡고 반을 흔들었다.
“단장님이 왜요! 뭘 잘못했다고요!”
반은 어깨에서 오스틴의 손을 한쪽씩 떼어 냈다. 오스틴은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하얗게 굳었다.
“설마……. 왕자님께 칼부림이라도 하셨습니까?”
반은 한숨을 쉬고 걸음을 옮겼다. 오스틴은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지난 한 달간의 왕자님의 행적을 재잘거렸다. 궁 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요, 최근에는 가출까지 한다는 그의 말에 반이 잠시 오스틴 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릴 땐 그러지 않았는데.’
반은 다섯 살 때의 왕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국경이 변하는데 사람이 바뀔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부관은 반의 반응을 보고 이 사태의 원흉이 말썽꾸러기 왕자님이라고 생각하고 왕자가 최근에 백금 기사들에게 한 만행들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놨다. 반은 수다스러운 부관을 기사단장 집무실에 친히 넣어 주고 문을 닫았다.
***
기분이 한없이 저조한 반은 집에 돌아오면서 큰길이 아닌 암굴 쪽 골목을 택했다. 누군가 시비라도 걸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대낮의 암굴 외곽 지역은 조용하고 한산하기만 했다.
‘집엔 오웰이 있겠지.’
라스퍼 베가스에서 경호하기로 했으니 오웰의 신변 걱정은 덜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떴다. 이 시간 즈음엔 오웰은 자고 있겠다 싶었다. 서로 생활시간이 어긋나지만 아침과 저녁 땐 꼭 말을 걸어오는 그를 생각하고 반은 슬며시 웃었다. 새싹 같은 눈을 반짝이는데 꼭 갈색 털을 가진 강아지 같았다.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아진 반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
골목 저편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반이 눈을 끔뻑였다. 오웰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커먼 사내들이 반의 앞을 지나쳐 뛰어갔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반은 골목을 돌아 남자들을 쫒아 달렸다.
“헉, 헉…….”
오웰은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다. 문이 달린 높은 철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오래 쫓겼는지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고, 목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봐, 이제 포기하고 이리 오지?”
“순하게 생긴 게 맛있어 보여~”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우락부락한 남자, 그리고 그와 대조되게 뼈만 남아 눈을 부라리는 칼을 든 남자. 그 뒤로 그들의 부하로 보이는 이들까지 오웰을 노리고 있었다. 오웰은 뒤돌아 두꺼운 책을 꼭 끌어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났다. 등 뒤에 철창이 닿았다. 철창을 잡고 흔들어 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웰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바투 잡았다.
“낄낄! 도련님~ 여기서 도망갈 수 있을 거 같아? 왜, 그 책으로 때리려고?”
사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더니 안색을 싹 바꾼 마른 남자가 칼을 고쳐 잡았다.
“잡아.”
부하로 보이는 세 사람이 오웰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웰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책을 높게 들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오웰을 덮쳤다.
빠악!
오웰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홉뜨인 눈에 흩날리는 검은 망토와, 거기에 새겨진 금빛 늑대 문양이 가득 들어찼다.
오웰도, 쫓는 놈들도 발이 빨랐다. 반은 자신이 도착하기 전 오웰이 다칠까 봐 무서웠다. 한 번도 자신이 굼뜨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답답했다. 그는 담을 넘고 주택의 벽을 타면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사내들에게 덮쳐지는 오웰을 보고 반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 검을 검집째 휘두르니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음 놈의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하고, 그대로 목을 잡아 옆 놈에게 강하게 밀어붙였다. 동료와 박아 쓰러진 놈의 배를 강하게 차 기절시킨 반은 오웰을 등지고 섰다.
“흑, 흑기사단……?”
“흑기사단이 왜 암굴에 있어! 왕이 분명 불가침 조약이라고 했어! 저놈은 가짜다!”
망설이는 부하들을 향해 마른 남자가 소리쳤다. 그들의 말에서 뜻밖에 얻은 정보에 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암굴왕과 여왕 폐하가 계약을 했다고?’
흑기사단의 문양과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도 못 믿다니 반은 기가 찼다. 잔당들도 암굴왕의 말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꼴을 보아하니 왕국 내에서 암굴왕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강한 모양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그를 생각하고 기분이 매우 나빠진 반은 살기를 뿌리며 불한당들에게 다가갔다. 오웰은 살며시 반의 외투 끝을 잡아당겼다. 그 약한 힘에 반은 오웰에게 몸을 돌렸다. 오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망쳐요.”
“전 괜찮습니다.”
반은 적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기세에 눌린 적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익, 꺼져라, 가짜!”
마른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반에게 달려들었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한 반은 폼멜로 명치를 가격했다. 적을 깔끔하게 기절시킨 반은 놈의 뒷덜미를 잡아 남은 놈들에게 던져 줬다.
“다음?”
반이 여유롭게 적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정답을 찾아냈다. 진짜 흑기사단의 단장, 아슈엘 백작이 맞다.
“으아아악!”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료를 챙겨 빠르게 달아났다. 건달들치곤 의리가 있다고 생각한 반은 뒤돌아 오웰에게 다가갔다.
책을 힘껏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인 오웰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귀가 빨개진 그를 보고 반이 한숨을 쉬었다. 일반인이 암굴에서 이런 일을 당했으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망토를 벗어 조심스럽게 오웰의 어깨 위를 덮었다.
“오웰.”
“네……?”
“이제 괜찮습니다.”
“…….”
오웰이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붉어진 목덜미에 그가 우는가 싶어 반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려고 했다. 그때 오웰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그대로 반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익숙한 초록색 눈동자에 반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웰이 새빨개진 채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반은 그사이 머릿속을 휘젓는 혼란을 잠재워야 했다. 암굴왕과 눈이 닮았다. 부끄러워서 이제 아예 손으로 눈을 가려 버린 저이가 그와 닮았다니, 말도 안 됐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날려 버리며 반은 오웰을 불렀다. 오웰은 여전히 새빨간 토마토가 된 채 반의 팔을 잡아 왔다.
“……무서우니까 잡고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오웰은 귀족 여인들처럼 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집에 돌아갔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오웰을 응접실 소파에 앉히고 반은 3층까지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보송보송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웰의 어깨에 꼼꼼하게 담요를 둘러 준 반은 바로 벽난로로 달려가 부싯돌로 불을 지폈다. 금방 불이 올라왔다. 장작을 넣은 반은 다시 주방에 가 찬장에서 코코아 가루를 꺼냈다. 고민하던 반은 라스퍼가 준 마시멜로가 든 깡통을 꺼냈다.
한 손에 코코아를 들고 응접실로 나온 반은 담요에 고개를 박고 있는 오웰을 보았다.
‘우는 걸까.’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운 적이 없던 반으로서는 우는 상대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반은 조용히 오웰 앞 테이블에 코코아 잔을 내려놨다. 오웰은 그제야 얼굴을 들고 반과 코코아를 번갈아 보았다. 반은 가져온 토끼 모양 마시멜로를 띄어 주었다. 그걸 본 오웰의 얼굴이 또 화르륵 달아올랐다. 오웰의 맞은편에 앉은 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그에 오웰이 눈을 굴렸다. 아래를 보고 고민하던 오웰이 우물쭈물 답했다.
“……좋은 냄새가 나서…….”
“네……?”
“해, 햇살 같은 냄새가 나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여전히 빨간 오웰을 두고 반이 생각했다.
‘오웰이 담요 냄새를 맡았다는 건가? 나 봤자 쾌쾌한 기사단장 냄새밖에 나지 않을 것을.’
“……?”
설마 자신의 냄새인가 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엄한 생각을 했단 생각에 같이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침묵이 응접실 안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기운을 내뿜으며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벽난로 때문이라며 반은 괜히 손에 들린 따뜻한 코코아 잔을 만지작거렸다. 유채도 아직 피지 않은, 겨울 끝과 봄 사이의 어드메인 계절인데도 집 안은 후끈하기만 했다. 침묵을 참지 못한 오웰이 잔을 내려놨다. 그의 어깨에서 담요가 흘러내렸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웰에게 담요를 다시 꼼꼼히 싸매 주었다.
“그런데 원래 이 시간엔 궁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 그게.”
반은 괜히 담요의 주름을 펴 주며 여왕 앞에서 칼부림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정직당한 사연을 말하자니 한없이 부끄러워져 반은 답을 망설였다. 그런 그를 오웰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그때 현관문이 거세게 열리고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반! 정직 먹었다며!”
긴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라스퍼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딱딱하게 굳어진 두 사람을 보더니 양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내가 방해한 거야?”
반은 그런 라스퍼를 보고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렸다. 버릇처럼 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고 라스퍼는 재빨리 달려와 반의 어깨를 잡았다.
“연애는 그렇다 치고, 나랑 둘이서 얘기 좀 하자!”
***
“안녕하십니까, 반의 친구인 라스퍼라고 합니다. 연락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방에 올라가겠습니다.”
오웰이 잔을 들고 일어나자 반이 그의 팔을 잡았다. 오웰이 따뜻한 곳에 편하게 있기를 바란 그는 라스퍼를 데리고 자신의 방에 갈 생각이었다.
“난데없이 온 제 친구이니 저희가 올라가겠습니다.”
반이 라스퍼에게 고갯짓을 했지만 라스퍼는 정작 오웰의 손에 들린 코코아 잔을 보고 있었다. 오웰에게 다가간 그는 코코아 위에 떠 있는, 갈색 피를 흘리고 있는 마시멜로 토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야, 반! 이거 너만 먹으라고 했잖아. 너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고 준 거야?”
“드디어 네가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순식간에 야차같이 변한 반은 망설이지 않고 라스퍼의 멱살을 잡았다. 반은 라스퍼를 놓지 않은 채 오웰을 살폈다. 그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목이 졸린 라스퍼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아냐, 아냐! 독 아냐! 내가 내 친구한테 독을 줬겠냐!”
“…….”
순간 반은 정말 독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1차 전쟁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친구라고 여긴 어떤 이는 대부호의 아들인 반을 떠보기 위해 다가왔고, 아버지와 좋은 관계가 아닌 것을 알자 반을 조롱하면서 떠났다. 어떤 이는 반을 사랑하는 척 다가왔다가 죽이려고 했었고, 또 어떤 이는 반을 친구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믿지 않았고 멋대로 죽어 버렸다.
그 이후로 사람들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던 반이지만, 그래도 수도를 떠나기 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저를 위해 기사가 되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라스퍼만큼은 굳게 믿었다. 그는 반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라스퍼, 너마저도……. 믿었는데…….”
라스퍼는 침통해진 반을 보고 정색하며 반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정말 독 아니야.”
그는 진중한 얼굴로 오웰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 마시멜로엔 반의 부족한 인류애를 키워 줄 ‘사랑의 묘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말에 사기꾼이 사기를 치는 줄 알게 된 반이 라스퍼의 발을 콱 밟으려고 했다. 라스퍼는 익숙하게 보지도 않고 피했고, 그 바람에 반은 발꿈치에 징 하게 울리는 통증을 느껴야 했다.
반이 살기를 담아 상대를 노려봤다. 라스퍼가 진지한 얼굴일 때 하는 말은 대부분 사기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반의 집 세입자에게 사기를 칠 이유가 없었다. 반이 의심을 가득 담아 라스퍼를 흘겼다. 정작 오웰은 흥미가 돋았는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마시면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그 사랑의 묘약이요?”
“그렇습니다. 혹시 반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이 빨개지고, 같이 있고 싶다가도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라스퍼의 말에 오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정색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도 그런데 어떡하죠…….”
“……네?”
라스퍼도 반도 쩡하니 얼어붙었다. 오웰은 당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기사단장님은 멋있고, 다정하기까지 하잖습니까? 좋은 분이라 호감이 갑니다.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봄볕처럼 웃는 그를 관찰하던 라스퍼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툭, 던져 보고 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던 그는 오히려 역공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라스퍼는 곧 각이 멋지게 선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였다.
“실례하였습니다. 사랑의 묘약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반이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런, 지어낸 이야기라니. 진실이었어도 좋았을 텐데. 제가 반을 사랑한다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요.”
오웰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라스퍼는 아연해졌다. 장난기 가득한 녹색 눈동자가 코코아 잔에 가려졌다.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오웰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라스퍼의 감이 오웰은 타고난 사기꾼이라 외치고 있었다. 허둥대는 라스퍼를 보며 반이 한숨을 쉬었다.
“오웰……. 라스퍼한테 그렇게 말하면 진짜인 줄 압니다.”
오웰이 소년처럼 맑게 웃었고, 위험 신호를 읽은 라스퍼는 반의 등을 밀며 계단을 향했다.
“그,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후다닥 3층으로 올라가는 둘을 보며 오웰이 순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웃었다. 오웰은 코코아 잔을 내려놓고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꼭 잡았다. 3층 문 닫는 소리가 나자 재빨리 화장실에 들어간 그는 거울 앞에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들키는 줄 알았네…….”
거울에 비친 그의 이마 가운데에 혹이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멍 들겠는데…….”
다시 응접실로 돌아간 그는 서랍장에서 약품 상자를 꺼냈다. 일부러 티가 나게 이마에 반창고를 붙였다.
다시 소파에 앉은 그는 팔걸이에 팔을 걸고 턱을 괴었다. 괴한에게 쫓겨 겁을 먹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웰의 반달처럼 휘어진 눈은 코코아를 예술 작품처럼 바라보았다.
“그래……. 급할 것 없어.”
새싹 같았던 눈동자가 비 온 뒤의 숲처럼 어두운 빛으로 변했다. 오웰은 담요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사랑의 묘약 때문에 달콤한 사랑에 빠진다 하여도 반의 체취처럼 마약 같지는 않으리라.
6. 반격 (1)
2층과 3층에는 작은 서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공중에 떠도는 먼지들이 반짝였다.
‘제가 반을 사랑한다면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할 테니까요.’
반의 머릿속에 오웰의 말이 동동 떠다녔다.
‘그는 사랑을 쉽게 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빈말로 한 말인가?’
자신 있게 말하던 오웰. 그의 눈동자는 눈을 녹이고 고개를 드는 새싹 같았다. 태양의 축복을 받아 반짝이는 작고 여린 존재는 그 자체로도 경이로웠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세상이 멀어지고 오직 오웰 한 사람만이 빛났다.
라스퍼는 완전히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반, 정신 차려.”
“……그래.”
반이 세입자인 오웰을 어떻게 한 줄 알았더니, 반대로 오웰이 반을 홀렸다고 라스퍼는 속으로 한탄했다. 라스퍼는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하나 고민했다. 익숙하게 회전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라스퍼의 못 미더워하는 눈빛에 반은 뒷목을 한번 쓸고 스툴을 가져와 앉았다.
‘취조당하는 느낌이야.’
“반, 진짜 중요한 문제야. 너 세입자랑 무슨 관계야?”
“집주인과 세입자지. 당연한 걸 물어?”
“넋을 놓은 거 같아서 물어봤다. 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반이 고개를 저었다. 라스퍼도 그가 오웰이라는 사람과 어떤 접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반의 집에 세입자가 든 순간 오웰의 과거를 낱낱이 조사했다. 왕실 아카데미 이슈타르단 출신이라니 신분은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스퍼는 뒷세계에서 살아남게 해 준 자신의 감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