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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과 세입자 6화
9. 왕자 찾기 게임 (2)
마지막 순간, 반이 급하게 검을 거두었다. 암굴왕이 그대로 지팡이를 휘둘렀다면 갈비뼈 두어 대는 부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굴왕은 빠르게 무기를 거뒀고 맨몸으로 자신과 부딪혔다. 아마 그 충격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분명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반은 굳이 호기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궁금증보다는 암굴왕과 상종하기 싫은 마음이 비교 불가능하게 컸다.
암굴왕이 긴 외투 자락을 살짝 들며 바닥에 붙어 있는 건달들을 넘어왔다. 반에게 성큼 다가온 그는 다짜고짜 지팡이를 내질렀다. 반의 귓가에 파공음이 들리더니 담벼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암굴왕이 지팡이를 잡은 손을 미끄러트리며 반에게 바짝 붙었다. 가면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에서 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직도 암굴에서 나가지 않으셨더군요.”
“내가 나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가야 할 자들은 내가 아니라 암굴 사람들이지.”
“당신이 사랑하는 여왕의 명령인데도 말입니까, 브라운 씨?”
“이슈타르의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어. 여왕 폐하도 강제하지 못하신다네. 그리고 난 반 다이크 브라운이 아니야.”
“전 반 다이크 브라운이라고 부른 적 없습니다.”
반은 녹색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암굴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반이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 암굴왕. 내 땅에서 그대의 부하들과 함께 나가 주겠어?”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서를 냈습니까?”
“연무장을 말하는 건가? 후음……. 내가 내 땅을 되찾으려면 뭐든 못할까.”
“그들에겐 암굴이 삶의 터전입니다.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산 사람들을 비정하게 내쫓을 생각입니까? 여왕의 무기라더니 동정심은 전장에 버려두고 오셨나 봅니다.”
조금 응해 주다가 왕자를 찾으러 가려던 반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반이 신참내기 기사였을 때 반을 시기하던 선배 기사들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괜찮다 생각했지만 유달리 아프게 찔러 오는 말에 반의 정신이 흔들렸다.
분명 반은 여왕과 친하게 지냈던 잘난 아버지를 가졌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전장에 보내져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봤다. 여왕이 반에게 가진 감정이 친구의 아들에 대한 호감인지 아니면, 정말로 손에 쥔 강한 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다손 이런 모욕을 참고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누가 누구보고 비정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반은 차갑게 분노했다.
“비정한 건 네놈이지.”
반은 땅에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 땅은 내 삶을 전부 쏟아부어서 겨우 가진 내 재산이야. 빌어먹을 내 불운한 운명 좀 바꿔 보려고 전쟁도 버티고 근근이 살아남아 마련한 내 미래라고. 그걸 네가 무너뜨렸는데 복수를 못할망정 순순히 물러나야겠어? 난 이 땅도 내 미래도 돌려받을 거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집과 땅을 사고, 여왕과 아버지에게서 자유로워지면, 그 후에는 찾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반에게 있어서 이 땅은 삶을 바꿀 유일한 기회였다.
반의 말을 들은 암굴왕이 한쪽 입매를 말아 올렸다. 순간 반은 그가 암굴왕에게 말려든 걸 알고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전법은 말려들수록 자신의 손해였다. 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암굴왕이 손을 들어 반의 볼을 매만졌다. 얼핏 다정해 보였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목을 잡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왕자님을 찾고 있지요? 제안서를 파기하신다면 제가 왕자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암굴은 넓고 사람은 많지요. 당신 혼자서 그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작은 호의일 뿐이잖습니까? 그러니 내 도움을 받아요, 란트.”
반을 향해 고개를 숙인 암굴왕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암굴왕은 손에 싸구려 사탕을 들고도 그것이 매우 달콤할 것이라 상대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안서는 곧 반려될 것이고 왕자님은 찾지 않아도 알아서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암굴왕과의 거래는 반에게 필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혹될 일도 없었다. 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감싼 손을 떼어 냈다.
암굴왕을 밀쳐 버리려는 순간 그는 왕궁에서처럼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암굴왕과 누군가를 겹쳐 보고 있었다. 하얀 가면은 때 묻은 붕대가 되었고, 녹색 눈동자 색이 언젠가 만났던 이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이번에는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너 혹시?”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다니고, 암굴왕과 비슷한 녹색 눈동자를 지녔다. 오래 굶었는지 또래에 훨씬 못 미치는 작은 체구에, 잘 먹지 못해 등이 휜 아이였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적군 손에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더 빠르겠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앙상한 팔이 건장한 반이 건드리면 부러질까 봐 감히 잡지도 못했었다. 눈이 닮았지만 그 소년은 눈앞의 건장한 청년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무슨 엉뚱한 소릴…….”
암굴왕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덕분에 반은 녹색 호수 가운데 박힌 검은 동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검은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암굴왕은 당황하고 있었다. 반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암굴왕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반은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답을 듣는 대신에 암굴왕을 밀어 냈다.
“제 도움 없인 왕자님 털끝 하나도 찾지 못할 겁니다!”
빠르게 멀어지는 반을 향해 암굴왕이 소리쳤다. 반은 대답 대신 어깨 위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도망치듯 빠르게 걷던 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아침 그 아이를 떠올리고 암굴왕을 만나 착각한 것이다. 그저 눈이 닮았을 뿐이다. 그 아이가 암굴왕일 리 없다. 착각한 것이다. 반이 그 아이의 외모도 몰라볼 정도로 아이를 잊어버렸나 고민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 속엔 때 묻은 붕대와 녹색 눈동자만이 남아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반은 옷 속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반짝이는 파란 보석을 보며 반이 중얼거렸다.
“네가 커서 그가 되었다면, 나는 무척 슬플 거야…….”
그저 반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펜던트를 한번 쓰다듬고는 다시 옷 속에 넣었다.
***
그 후로 해가 질 때까지 반은 유명한 유곽을 샅샅이 조사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왕자 머리털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곽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반은 적기사단 소속 기사를 발견했다. 놀러 온 것이냐, 임무로 온 것이냐 물었지만 적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놀러 왔다면 왕실 기사단 일원으로서 근무 태만이요, 임무라면 적기사단 특성상 발설 금지였기 때문에 불쌍한 기사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악랄한 흑기사단의 단장인 반은 그의 사정을 알면서도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기사도 왕자의 행방을 몰랐다. 제일 큰 유곽에 들어간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말에 반은 이마를 짚었다.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반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수습하며 광장으로 나갔다. 암굴의 중심부인 로스터 광장에서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골목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암굴 사람들은 그 광장을 로스터(roaster)라고 불렀다.
낮 동안 조용하기만 했던 로스터 광장은 어느새 마석으로 만든 등이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고,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형형색색의 천막이 세워졌고, 광장 가운데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췄다. 물 흐르듯 유연한 몸짓과 손에 든 하늘하늘한 천이 동양에서 말하는 하늘 세계의 풍경 같았다. 하얗게 빛나는 가루가 안개처럼 뿌려졌다.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온 인파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반은 왕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암굴왕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나 반은 그의 눈이 휘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왕자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제 도움 없인 왕자님 털끝 하나도 찾지 못할 겁니다!’
이건 다른 말로, 자신이 아니면 절대 못 찾을 것이며, 암굴왕이 왕자를 숨겼다는 의미인 것이다. 암굴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자이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반의 눈앞에서 왕자를 빼돌릴 수 있을 터였다.
반은 광장에 몰려드는 군중들 사이에 서서 암굴왕을 노려봤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이 공연 또한 그의 방해 공작이었다. 얼굴을 가린 몇몇이 반을 알아보고 놀라 소곤거렸다. 아마 내일 즈음 정직되었다던 흑기사단장이 암굴에 있더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질 것이다.
형형색색 가면을 쓴 이들을 해치고 광장 가장자리까지 가자 누군가 급히 반의 팔을 잡았다. 그자의 손목을 낚아채며 돌아서니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안을 다시 생각해 봤나요?”
“그게 제안이 아니라 강제라는 걸 방금 깨달은 참이다.”
반이 으르렁대자 암굴왕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암굴은 암굴왕의 손에 있지요. 그러니 허무맹랑한 계획 따위 포기하시는 편이 서로 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반의 얼굴이 일그러진 만큼 암굴왕의 미소가 진해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에 암굴왕의 가면이 화려하게 빛났다.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빛 때문에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생기지도 않을 연무장을 포기하고 현재의 이득을 취해도 괜찮았다. 그는 암굴왕의 팔을 잡고 좁고 어두운 골목에 집어넣었다. 사람 하나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공간이었다. 반은 암굴왕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암굴왕은 그런 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얄궂게 웃었다.
“여전히 저에 대해 불만이 많으시군요.”
“당신과 내가 불만 없을 사이는 아니지. 그래서 왕자님, 어디 있어?”
반의 물음에 암굴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이 왕자의 안전 때문에 차마 그의 멱살을 잡지 못하고 얄궂은 얼굴 옆에 손을 짚었다. 암굴왕은 닿을 듯 가까운 반과 잠시 눈을 바라보더니 그의 양 볼에 손을 얹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에 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피하지 못하게 손에 힘을 준 암굴왕은 연인에게 하듯 엄지손가락으로 다정하게 살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마, 첫 번째 제안을 거부해 놓고 같은 조건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하나 더 받아 가겠습니다.”
“말해.”
“흐음……. 뭐로 할까요…….”
반의 얼굴을 한참이나 주물거리던 암굴왕은 입매를 축 늘어뜨렸다. 그가 손을 거두자 따뜻한 공기가 볼에 닿았다. 사라지지 않는 한기에 반이 볼을 문지르며 벽에 기대고 암굴왕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민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반.”
가면 뒤에서 눈을 접은 그는 반을 슬쩍 밀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평행을 이루던 양팔 저울이 암굴왕 쪽으로 기울었고, 반은 기울어진 작은 쇠그릇 위에 매달린 느낌이 들었다. 주도권이 완전히 암굴왕에게 넘어가 버렸다. 암굴왕의 등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기운에 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그가 뒤돌아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안 오십니까?”
반은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
왕자는 의외로 찾기 쉬운 곳에 있었고, 동시에 반이 찾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반이 처음 찾아갔던 가장 큰 유곽이었다. 향초를 피워 놓은 화려한 복도를 걸으며 몇 개의 커다란 홀을 지났다. 눈을 반짝이며 남녀 구분 없이 아름다운 이들이 문과 복도로 몰려들었다. 전과는 다르게 그들은 달려들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흑기사단장과 암굴왕이 함께 있는 광경이라니. 과연 그들 일생에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반은 호기심 어린 그들의 눈빛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암굴왕이 복도 기둥과 기둥 사이, 붉은 휘장이 걸린 벽 앞에 멈췄다. 그는 한 손으로 휘장을 걷었다. 평범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휘장을 내렸다가 걷었을 때 그 뒤에는 전에 없었던 복도가 나타났다. 물 흐르듯 지나간 장면에 반은 눈을 껌뻑이며 입을 벌렸다.
마법은 익숙했으나, 암굴왕이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암굴을 밝히는 등이 모두 마석이었던 걸 보고 바로 알아챘어야 했다. 지팡이의 보석이 반짝이는 걸 보니, 아마도 화려한 보석들은 하나하나가 다 마법석인 모양이었다. 반은 그 ‘돈지랄’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암굴 안에는 비싸고 귀한 마석이 넘쳐흘렀고, 그 모든 마석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마법사도 분명히 존재했다.
반은 암굴왕에 대한 평가를 소폭 수정했다. 얄미운 암굴왕에서 마법까지 쓰는 치사한 암굴왕으로. 처음부터 반은 혼자서는 왕자를 절대 찾지 못할 운명이었다.
“뭘 그리 악당 보듯이 보십니까? 먼저 치사하게 군 분은 당신이지 않습니까? 건물주, 땅 주인이라고 횡포를 부렸으면서…….”
명백히 비웃는 말이었지만 반은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굳은 얼굴로 암굴왕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암굴왕은 그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조차 반에겐 익숙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반은 전처럼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은 그리워하는 건가, 아니면 그가 예전의 그 소년이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반은 암굴왕이 자신이 생각한 이가 아니길 바랐다. 속이 복잡해진 반은 빠르게 걸어가 암굴왕이 가리키는 방문을 열었다.
“이번엔 누구를……! 아, 사랑하는 반 형님!”
침대에서 나신의 남녀 여럿과 엉켜 있던 왕자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여왕을 닮은 하얀 머리카락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는 그에 창기들이 목소리를 높여 꺄르륵 웃었다. 왕자의 백옥처럼 하얀 나신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라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 있을 눈매도 반쯤 풀려 있었다. 반은 달려오는 그를 훑어보고 외상이 없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술이라도 잔뜩 먹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잘도 반의 품 안을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달라붙는 놈들이 많군.’
반이 한숨을 쉬자 왕자는 반의 어깨에 턱을 얹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푸흐흐. 반 형아…….”
반은 왕자에게 자신의 레인코트를 벗어 입혀 주었다. 코트는 겨우 왕자의 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길이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방싯방싯 웃는 왕자의 어깨를 잡아 세운 반은 그에게 물었다.
“미치셨습니까? 대체 뭘 드신 겁니까!”
“아하하하! 조금 마셨어. 약한 과일주였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 반, 네가 너무 사랑스럽…….”
반은 더 듣지 못하고 감히 왕자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술을 마셨다는데 냄새는 나지 않았다. 반이 매섭게 창기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재빨리 문으로 달려 나갔다. 암굴왕은 문가에 서서 반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은 진득하게 달라붙는 왕자를 달고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을 들었다. 코를 대고 향을 맡아 보니 과일주라더니 평범한 주스였다.
“…….”
반이 고개를 들어 살기 어린 눈으로 암굴왕을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천천히 다가온 그는 반의 손에서 우아하게 잔을 빼앗더니 입을 댔다.
“흠. 독 섞인 최음제로군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간이 크군요. 감히 암굴에서 왕자님을 암살하려고 하다니.”
와인을 음미하듯 생각에 잠긴 그를 보다가 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암굴왕의 손을 쳤다. 유리잔이 바닥에 내팽겨져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어 올랐다. 반도 암굴왕도 순간 놀라 몸을 굳혔다. 특히 반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암굴왕은 방금까지 잔을 쥐었던 손을 털었다.
“아프잖습니까.”
“미련하게 독을 마시니까……!”
“무슨 독인지 알아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혀에 대기만 해도 죽는 독은 없습니다!”
“왜 싸워……? 싸우디망…….”
반과 암굴왕 사이에 왕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혀 짧은 소리에 반이 기가 막혀 왕자를 떼어 내려는데 그에게서 힘이 쭉 빠지며 반의 몸으로 무게가 쏠렸다.
“……왕자님? 에버렛……?”
반은 재빨리 그를 침대에 눕혔다. 하얗고 앳된 얼굴이 열이 심하게 올라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은 당황한 얼굴로 암굴왕을 돌아봤다.
“해독제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로 드리진 않을 겁니다. 부탁 하나 말고 세 개.”
반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덥석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였다. 비록 사고를 치고 다니기는 했지만 왕국에서 여왕 다음으로 기사들이 지켜야 하는 고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동생같이 느껴지는 어린 왕자에게 반은 책임감을 느꼈다.
9. 왕자 찾기 게임 (2)
마지막 순간, 반이 급하게 검을 거두었다. 암굴왕이 그대로 지팡이를 휘둘렀다면 갈비뼈 두어 대는 부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굴왕은 빠르게 무기를 거뒀고 맨몸으로 자신과 부딪혔다. 아마 그 충격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분명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반은 굳이 호기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궁금증보다는 암굴왕과 상종하기 싫은 마음이 비교 불가능하게 컸다.
암굴왕이 긴 외투 자락을 살짝 들며 바닥에 붙어 있는 건달들을 넘어왔다. 반에게 성큼 다가온 그는 다짜고짜 지팡이를 내질렀다. 반의 귓가에 파공음이 들리더니 담벼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암굴왕이 지팡이를 잡은 손을 미끄러트리며 반에게 바짝 붙었다. 가면이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에서 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직도 암굴에서 나가지 않으셨더군요.”
“내가 나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가야 할 자들은 내가 아니라 암굴 사람들이지.”
“당신이 사랑하는 여왕의 명령인데도 말입니까, 브라운 씨?”
“이슈타르의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어. 여왕 폐하도 강제하지 못하신다네. 그리고 난 반 다이크 브라운이 아니야.”
“전 반 다이크 브라운이라고 부른 적 없습니다.”
반은 녹색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암굴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반이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 암굴왕. 내 땅에서 그대의 부하들과 함께 나가 주겠어?”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서를 냈습니까?”
“연무장을 말하는 건가? 후음……. 내가 내 땅을 되찾으려면 뭐든 못할까.”
“그들에겐 암굴이 삶의 터전입니다.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산 사람들을 비정하게 내쫓을 생각입니까? 여왕의 무기라더니 동정심은 전장에 버려두고 오셨나 봅니다.”
조금 응해 주다가 왕자를 찾으러 가려던 반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반이 신참내기 기사였을 때 반을 시기하던 선배 기사들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괜찮다 생각했지만 유달리 아프게 찔러 오는 말에 반의 정신이 흔들렸다.
분명 반은 여왕과 친하게 지냈던 잘난 아버지를 가졌지만, 그와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전장에 보내져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봤다. 여왕이 반에게 가진 감정이 친구의 아들에 대한 호감인지 아니면, 정말로 손에 쥔 강한 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다손 이런 모욕을 참고 넘어갈 이유가 없었다. 누가 누구보고 비정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반은 차갑게 분노했다.
“비정한 건 네놈이지.”
반은 땅에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 땅은 내 삶을 전부 쏟아부어서 겨우 가진 내 재산이야. 빌어먹을 내 불운한 운명 좀 바꿔 보려고 전쟁도 버티고 근근이 살아남아 마련한 내 미래라고. 그걸 네가 무너뜨렸는데 복수를 못할망정 순순히 물러나야겠어? 난 이 땅도 내 미래도 돌려받을 거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집과 땅을 사고, 여왕과 아버지에게서 자유로워지면, 그 후에는 찾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반에게 있어서 이 땅은 삶을 바꿀 유일한 기회였다.
반의 말을 들은 암굴왕이 한쪽 입매를 말아 올렸다. 순간 반은 그가 암굴왕에게 말려든 걸 알고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전법은 말려들수록 자신의 손해였다. 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암굴왕이 손을 들어 반의 볼을 매만졌다. 얼핏 다정해 보였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목을 잡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왕자님을 찾고 있지요? 제안서를 파기하신다면 제가 왕자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암굴은 넓고 사람은 많지요. 당신 혼자서 그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작은 호의일 뿐이잖습니까? 그러니 내 도움을 받아요, 란트.”
반을 향해 고개를 숙인 암굴왕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암굴왕은 손에 싸구려 사탕을 들고도 그것이 매우 달콤할 것이라 상대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안서는 곧 반려될 것이고 왕자님은 찾지 않아도 알아서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암굴왕과의 거래는 반에게 필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혹될 일도 없었다. 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볼을 감싼 손을 떼어 냈다.
암굴왕을 밀쳐 버리려는 순간 그는 왕궁에서처럼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암굴왕과 누군가를 겹쳐 보고 있었다. 하얀 가면은 때 묻은 붕대가 되었고, 녹색 눈동자 색이 언젠가 만났던 이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이번에는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너 혹시?”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다니고, 암굴왕과 비슷한 녹색 눈동자를 지녔다. 오래 굶었는지 또래에 훨씬 못 미치는 작은 체구에, 잘 먹지 못해 등이 휜 아이였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적군 손에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더 빠르겠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앙상한 팔이 건장한 반이 건드리면 부러질까 봐 감히 잡지도 못했었다. 눈이 닮았지만 그 소년은 눈앞의 건장한 청년은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무슨 엉뚱한 소릴…….”
암굴왕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덕분에 반은 녹색 호수 가운데 박힌 검은 동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검은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암굴왕은 당황하고 있었다. 반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암굴왕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반은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답을 듣는 대신에 암굴왕을 밀어 냈다.
“제 도움 없인 왕자님 털끝 하나도 찾지 못할 겁니다!”
빠르게 멀어지는 반을 향해 암굴왕이 소리쳤다. 반은 대답 대신 어깨 위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도망치듯 빠르게 걷던 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아침 그 아이를 떠올리고 암굴왕을 만나 착각한 것이다. 그저 눈이 닮았을 뿐이다. 그 아이가 암굴왕일 리 없다. 착각한 것이다. 반이 그 아이의 외모도 몰라볼 정도로 아이를 잊어버렸나 고민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 속엔 때 묻은 붕대와 녹색 눈동자만이 남아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반은 옷 속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반짝이는 파란 보석을 보며 반이 중얼거렸다.
“네가 커서 그가 되었다면, 나는 무척 슬플 거야…….”
그저 반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펜던트를 한번 쓰다듬고는 다시 옷 속에 넣었다.
***
그 후로 해가 질 때까지 반은 유명한 유곽을 샅샅이 조사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왕자 머리털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곽의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반은 적기사단 소속 기사를 발견했다. 놀러 온 것이냐, 임무로 온 것이냐 물었지만 적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놀러 왔다면 왕실 기사단 일원으로서 근무 태만이요, 임무라면 적기사단 특성상 발설 금지였기 때문에 불쌍한 기사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악랄한 흑기사단의 단장인 반은 그의 사정을 알면서도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 기사도 왕자의 행방을 몰랐다. 제일 큰 유곽에 들어간 후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말에 반은 이마를 짚었다.
결국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반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수습하며 광장으로 나갔다. 암굴의 중심부인 로스터 광장에서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골목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암굴 사람들은 그 광장을 로스터(roaster)라고 불렀다.
낮 동안 조용하기만 했던 로스터 광장은 어느새 마석으로 만든 등이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고,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형형색색의 천막이 세워졌고, 광장 가운데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췄다. 물 흐르듯 유연한 몸짓과 손에 든 하늘하늘한 천이 동양에서 말하는 하늘 세계의 풍경 같았다. 하얗게 빛나는 가루가 안개처럼 뿌려졌다.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온 인파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반은 왕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암굴왕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나 반은 그의 눈이 휘어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왕자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제 도움 없인 왕자님 털끝 하나도 찾지 못할 겁니다!’
이건 다른 말로, 자신이 아니면 절대 못 찾을 것이며, 암굴왕이 왕자를 숨겼다는 의미인 것이다. 암굴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자이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반의 눈앞에서 왕자를 빼돌릴 수 있을 터였다.
반은 광장에 몰려드는 군중들 사이에 서서 암굴왕을 노려봤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이 공연 또한 그의 방해 공작이었다. 얼굴을 가린 몇몇이 반을 알아보고 놀라 소곤거렸다. 아마 내일 즈음 정직되었다던 흑기사단장이 암굴에 있더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질 것이다.
형형색색 가면을 쓴 이들을 해치고 광장 가장자리까지 가자 누군가 급히 반의 팔을 잡았다. 그자의 손목을 낚아채며 돌아서니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제안을 다시 생각해 봤나요?”
“그게 제안이 아니라 강제라는 걸 방금 깨달은 참이다.”
반이 으르렁대자 암굴왕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암굴은 암굴왕의 손에 있지요. 그러니 허무맹랑한 계획 따위 포기하시는 편이 서로 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반의 얼굴이 일그러진 만큼 암굴왕의 미소가 진해졌다. 형형색색의 조명에 암굴왕의 가면이 화려하게 빛났다. 눈이 아플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빛 때문에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생기지도 않을 연무장을 포기하고 현재의 이득을 취해도 괜찮았다. 그는 암굴왕의 팔을 잡고 좁고 어두운 골목에 집어넣었다. 사람 하나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공간이었다. 반은 암굴왕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암굴왕은 그런 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얄궂게 웃었다.
“여전히 저에 대해 불만이 많으시군요.”
“당신과 내가 불만 없을 사이는 아니지. 그래서 왕자님, 어디 있어?”
반의 물음에 암굴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이 왕자의 안전 때문에 차마 그의 멱살을 잡지 못하고 얄궂은 얼굴 옆에 손을 짚었다. 암굴왕은 닿을 듯 가까운 반과 잠시 눈을 바라보더니 그의 양 볼에 손을 얹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에 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피하지 못하게 손에 힘을 준 암굴왕은 연인에게 하듯 엄지손가락으로 다정하게 살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설마, 첫 번째 제안을 거부해 놓고 같은 조건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하나 더 받아 가겠습니다.”
“말해.”
“흐음……. 뭐로 할까요…….”
반의 얼굴을 한참이나 주물거리던 암굴왕은 입매를 축 늘어뜨렸다. 그가 손을 거두자 따뜻한 공기가 볼에 닿았다. 사라지지 않는 한기에 반이 볼을 문지르며 벽에 기대고 암굴왕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민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반.”
가면 뒤에서 눈을 접은 그는 반을 슬쩍 밀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슬아슬하게 평행을 이루던 양팔 저울이 암굴왕 쪽으로 기울었고, 반은 기울어진 작은 쇠그릇 위에 매달린 느낌이 들었다. 주도권이 완전히 암굴왕에게 넘어가 버렸다. 암굴왕의 등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기운에 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그가 뒤돌아 녹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안 오십니까?”
반은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
왕자는 의외로 찾기 쉬운 곳에 있었고, 동시에 반이 찾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반이 처음 찾아갔던 가장 큰 유곽이었다. 향초를 피워 놓은 화려한 복도를 걸으며 몇 개의 커다란 홀을 지났다. 눈을 반짝이며 남녀 구분 없이 아름다운 이들이 문과 복도로 몰려들었다. 전과는 다르게 그들은 달려들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흑기사단장과 암굴왕이 함께 있는 광경이라니. 과연 그들 일생에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반은 호기심 어린 그들의 눈빛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암굴왕이 복도 기둥과 기둥 사이, 붉은 휘장이 걸린 벽 앞에 멈췄다. 그는 한 손으로 휘장을 걷었다. 평범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휘장을 내렸다가 걷었을 때 그 뒤에는 전에 없었던 복도가 나타났다. 물 흐르듯 지나간 장면에 반은 눈을 껌뻑이며 입을 벌렸다.
마법은 익숙했으나, 암굴왕이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암굴을 밝히는 등이 모두 마석이었던 걸 보고 바로 알아챘어야 했다. 지팡이의 보석이 반짝이는 걸 보니, 아마도 화려한 보석들은 하나하나가 다 마법석인 모양이었다. 반은 그 ‘돈지랄’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암굴 안에는 비싸고 귀한 마석이 넘쳐흘렀고, 그 모든 마석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마법사도 분명히 존재했다.
반은 암굴왕에 대한 평가를 소폭 수정했다. 얄미운 암굴왕에서 마법까지 쓰는 치사한 암굴왕으로. 처음부터 반은 혼자서는 왕자를 절대 찾지 못할 운명이었다.
“뭘 그리 악당 보듯이 보십니까? 먼저 치사하게 군 분은 당신이지 않습니까? 건물주, 땅 주인이라고 횡포를 부렸으면서…….”
명백히 비웃는 말이었지만 반은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굳은 얼굴로 암굴왕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암굴왕은 그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조차 반에겐 익숙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반은 전처럼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은 그리워하는 건가, 아니면 그가 예전의 그 소년이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반은 암굴왕이 자신이 생각한 이가 아니길 바랐다. 속이 복잡해진 반은 빠르게 걸어가 암굴왕이 가리키는 방문을 열었다.
“이번엔 누구를……! 아, 사랑하는 반 형님!”
침대에서 나신의 남녀 여럿과 엉켜 있던 왕자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여왕을 닮은 하얀 머리카락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는 그에 창기들이 목소리를 높여 꺄르륵 웃었다. 왕자의 백옥처럼 하얀 나신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라면 신경질적으로 올라가 있을 눈매도 반쯤 풀려 있었다. 반은 달려오는 그를 훑어보고 외상이 없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술이라도 잔뜩 먹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잘도 반의 품 안을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달라붙는 놈들이 많군.’
반이 한숨을 쉬자 왕자는 반의 어깨에 턱을 얹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푸흐흐. 반 형아…….”
반은 왕자에게 자신의 레인코트를 벗어 입혀 주었다. 코트는 겨우 왕자의 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길이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방싯방싯 웃는 왕자의 어깨를 잡아 세운 반은 그에게 물었다.
“미치셨습니까? 대체 뭘 드신 겁니까!”
“아하하하! 조금 마셨어. 약한 과일주였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 반, 네가 너무 사랑스럽…….”
반은 더 듣지 못하고 감히 왕자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술을 마셨다는데 냄새는 나지 않았다. 반이 매섭게 창기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재빨리 문으로 달려 나갔다. 암굴왕은 문가에 서서 반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은 진득하게 달라붙는 왕자를 달고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을 들었다. 코를 대고 향을 맡아 보니 과일주라더니 평범한 주스였다.
“…….”
반이 고개를 들어 살기 어린 눈으로 암굴왕을 노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천천히 다가온 그는 반의 손에서 우아하게 잔을 빼앗더니 입을 댔다.
“흠. 독 섞인 최음제로군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간이 크군요. 감히 암굴에서 왕자님을 암살하려고 하다니.”
와인을 음미하듯 생각에 잠긴 그를 보다가 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암굴왕의 손을 쳤다. 유리잔이 바닥에 내팽겨져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어 올랐다. 반도 암굴왕도 순간 놀라 몸을 굳혔다. 특히 반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암굴왕은 방금까지 잔을 쥐었던 손을 털었다.
“아프잖습니까.”
“미련하게 독을 마시니까……!”
“무슨 독인지 알아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혀에 대기만 해도 죽는 독은 없습니다!”
“왜 싸워……? 싸우디망…….”
반과 암굴왕 사이에 왕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혀 짧은 소리에 반이 기가 막혀 왕자를 떼어 내려는데 그에게서 힘이 쭉 빠지며 반의 몸으로 무게가 쏠렸다.
“……왕자님? 에버렛……?”
반은 재빨리 그를 침대에 눕혔다. 하얗고 앳된 얼굴이 열이 심하게 올라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은 당황한 얼굴로 암굴왕을 돌아봤다.
“해독제 있습니다. 하지만 공짜로 드리진 않을 겁니다. 부탁 하나 말고 세 개.”
반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덥석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였다. 비록 사고를 치고 다니기는 했지만 왕국에서 여왕 다음으로 기사들이 지켜야 하는 고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동생같이 느껴지는 어린 왕자에게 반은 책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