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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의 호구 1화
1. 호구가 좋아하는 사람 (1)
발아래에 있는 돌멩이가 보였다. 사람들이 발로 차고, 차고, 또 차서 모서리가 둥글어진 돌멩이. 선호는 그 돌멩이를 발로 차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한참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어른이 되면 하늘이 바뀌고 나 자신이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사람들 발에 치이고 치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바뀐 건 전혀 없었다.
“야!! 선호구! 여기 있었냐!!”
누군가 다가와 선호의 어깨를 잡아챘다. 작고 위축된 선호의 어깨가 그의 힘으로 흔들렸다. 동우, 선호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우는 자신의 이름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선호구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언젠가 한번, 이야기를 한 적 있었는데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동우는 그 후로도 계속 자신을 선호구라고 불렀다.
선호가 큰 안경을 한번 치켜올리고 동우를 바라봤다. 그는 재잘재잘 떠들며 이번 과제가 무척이나 어렵다느니, 얼마나 귀찮다느니,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다른 동기 애들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나, 변한 건 없구나. 선호는 그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선호의 시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쟤가 선하준이지? 존나 세상 혼자 산다 진짜.”
“쟤 잘생겼다고, 말 존나 많잖아. 저렇게 생긴 애들이 좋나, 여자애들은? 기생오라비 같잖아.”
“하긴, 그렇긴 해?”
선호의 귀에는 시샘과 질투가 섞인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선호는 그저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선하준.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커다란 키와 연예인처럼 잘생긴 외모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임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웃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원하고 있었다.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선호조차,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선호는 한참을 그를 바라봤다. 마치 그의 몸에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눈을 깜박여도, 그는 선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선호는 하준을 짝사랑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함부로 말도 걸지 못하는 이 지독한 짝사랑은, 어쩌면 금방 끝날 거라고 예상했던 선호의 이 마음은 대학교 1학년이 끝나고 군대에 가서도 여전했다.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선호는 하준을 사랑하는 걸 선택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호의 이유 없는 삶에 이유라는 게 필요했으니까.
***
몇 년 후.
하준이 시끌벅적한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젖은 우산을 가게 근처에 두고 물기 묻은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하준이 등장하자마자 각자 술을 마시던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야, 선하준! 오랜만이다!”
“여기로 와, 하준아.”
하준이 좀 더 테이블 가까이에 다가서자 몇몇 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자신의 옆으로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웃는 얼굴로, 그러나 약간은 쌀쌀맞게, 하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얼굴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야, 이 새끼!!”
주혁이 하준을 보자마자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뱉고 하준을 향해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째 군대 가기 전에나 갔다 와서나 주혁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호들갑스럽고, 더럽고. 하준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주혁은 열심히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군대 간다고 잠수 타기냐? 연락 하나 없고!”
“지금 얼굴 보잖아.”
“재수 없는 새끼.”
어깨를 으쓱이고는 싱긋 웃으며 하는 하준의 말에 주혁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저 새끼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둘 다 서로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준이 넌 군대 갔다 오니까 더 잘생겨진 것 같다.”
“하, 하.”
하준의 앞에 앉은 동기가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여나가 하, 하 하고 의식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하준은 그런 여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하준에게만 보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뭘 처웃어, 개또라이 새끼야.’
입 모양으로는 그렇게 살벌한 말을 내뱉으면서 여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준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여나에게만 보이도록 말했다.
‘좆까.’
“너네 둘은 변한 게 없냐.”
주혁이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치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개와 고양이처럼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 입 모양으로 쌍욕 하기 바빴다. 물론 두 사람이 친남매나 다름없이 가까운 사촌 관계라는 걸 아는 주혁에게만 둘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 보였지만, 그걸 모르는 다른 애들은 그저 두 사람이 누구보다 사이좋은 동기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야, 선호구 왔다.”
“헐, 선호구?”
잠시 후 주변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비웃는 듯한 웃음도 섞여 있었다. 선호구? 사람 이름이 호구일 수가 있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애가, 우리 과에 있었다고? 하준은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가게 문 근처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선호구~~!! 우리 호구!!”
답답할 정도로 까만 머리에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안경, 아직 9월이기는 해도 더운 날씨인데 목 끝까지 꽉 잠근 긴팔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가 젖은 우산을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눈과 하준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약간 발그레하고 상기되어 있었다. 저런 애가 있었나? 더우면 반팔을 입으면 될 것을 왜 굳이 긴팔을 입었지? 하준이 한쪽 손에 턱을 괴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주혁에게 물었다.
“이름이 호구야? 독특하네.”
“아니, 너 구선호 몰라?”
“어.”
“으휴, 동기한테 관심 좀 가져라 새끼야. 벌써 군대까지 하면 입학한 지 3년인데 저렇게 무관심해서야.”
군대까지 하면 주혁의 말대로 입학한 지 3년이 맞기는 하지만 군대를 빼면 1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준은 1학년이 끝나자마자 바로 군대로 갔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동기가 있는 건, 주혁의 타박과 반대로 하준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저 애가 그만큼 존재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하준이 무관심한 것도 맞긴 하지만.
“쟤네는 아직도 쟬 저렇게 부르네.”
주혁이 앞에 놓인 맥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하준의 빤한 시선에 주혁이 하준을 제 어깨로 툭 치며 말했다.
“쟤가 1학년 때부터 우리 과에서 호구라고 유명하거든. 뭐든 다 들어준다고.”
뭐든 다 들어준다고? 진짜 별명 그대로, 호구 같은 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답답해 보이는 인상도, 호구라는 별명도. 이상하게도 그를 보니까 자꾸만 누군가가 연상이 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는 게 짜증이 났다.
“됐다, 우린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자. 건배!”
주혁이 하준의 시선을 환기시키며 잔을 들어 올렸다. 하준도 주혁을 따라 잔을 들어 부딪히고는 목울대로 맥주를 넘겼다. 신경 끄자. 누가 호구 짓을 하든, 사실 내 알바는 아니지.
“호구 호구, 우리 호구!! 내가 그동안 우리 호구 없어서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선호라는 답답한 인상의 그 애가 간 테이블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호구 소리를 듣고도 별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그쪽 테이블이 신이 나서 아주 왁자지껄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준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아예 떼고, 신경도 끈 채 앞에 있는 동기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앞에 놓인 맥주잔에 술이 몇 번을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하고, 시끌벅적한 술집 안도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하준의 머릿속에도 선호라는 아이가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들어갈 거라니까….”
-넌 대체 걱정하는 내 생각은 전혀 안 해?
잠깐 하준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이, 하준의 애인 윤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벌써 몇 통의 문자, 몇 통의 전화인지 세기도 귀찮았다. 하준은 제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가져가며 대충 말을 이었다. 얼른 끊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나한테 먼저 연락한 적 없잖아.
“…….”
-왜 항상 나만 너 보고 싶어 하고, 궁금해하는 거야? 우리 사귀는 거 맞긴 해?
윤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이내 훌쩍이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하준은 그 소리를 듣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윤아가 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숨기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들어 주길 바랐다. 제 이 답답한 마음을.
하준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어서 전화를 끊고 싶다. 귀찮다. 윤아가 울어서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그만 끊자.
하준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울음을 멈추고 답답한 듯한 목소리로 윤아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하준이 전화를 끊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그제야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눈을 감았다. 귀찮아, 다. 시끄러운 소음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제가 이 공간에 있는 것 자체도. 하준의 온몸을 권태라는 구름이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안녕.”
건물 문 앞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하준의 앞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눈을 살짝 뜨고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호구라고 불리던, 아까 그 아이. 구선호였다. 얼굴 전체를 다 가리는 커다란 안경, 길게 내려와 답답해 보이는 앞머리, 목 끝까지 꽉 잠근 셔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온통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하준은 자신보다 10cm는 더 작아 보이는 선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얘가 나한테 인사한 건가? 내가 얘랑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가? 물론 과 동기니까 어느 정도 얼굴을 아는 건 당연하지만, 하준은 선호를 오늘 처음 보았다. 선호라는 애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일이다.
“그… 자, 잘 지냈어?”
“…….”
“…….”
거의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한 선호의 인사에도 하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선호의 얼굴이 마치 신호등의 빨간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저 빵빵거리는 차의 소음,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만 들려와 더욱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안 답답해?”
“…응?”
어색한 정적을 깨고 하준이 말했다. 선호가 그 말에 빨갛게 달아오른 고개를 올려 하준을 봤다. 하준이 선호의 목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는 내가 다 답답한데, 좀 풀지.”
“……아.”
선호의 손이 우물쭈물 셔츠 목 부근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고는 하준의 말대로 단추 하나를 풀었다.
“나 들어간다.”
선호가 단추 몇 개를 풀자마자 하준이 선호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뒤쪽에서 선호가 뭔가 자신을 향해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하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애초에 쟤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한테 말을 걸었나 궁금했지만 뭐 대충은 쓸데없는 이야기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준에게 쓸데없는 말로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애들은 선호 말고도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선호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지, 잘 지냈냐고 친한 척 인사를 건넸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준은 애초에 선호 같은 답답한 유형의 사람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오늘 만나.]
윤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제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하준은 윤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윤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준은 윤아가 오늘 만나서 할 얘기를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저녁에 시간 비워 놔라.]
윤아의 연락 다음에, 하준은 아버지로부터 온 문자를 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답장도 없이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녕하세요,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진행할 박준찬 교수입니다. 반가워요.”
그사이 강의실 안으로 교수가 들어오고, 앞으로 진행될 강의의 방향과 흐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문자에서 신경을 끄고 교수의 말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듣는 강의에 약간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매주 두 사람씩 팀을 만들어 보고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그냥 인터넷에서 쳐서 긁어 오는 게 아니라 매주 하루는 만나서 직접 생각하는 장소에 가 보고, 각자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공통 보고서를 작성하셔야 해요.”
아아…. 강의실에 탄식 소리가 울렸다. 매주 보고서. 귀찮게 됐네. 이미 정정 기간도 지나서 취소를 할 수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간대가 적당하다고 수업을 넣은 하준의 잘못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수강생의 남녀 비율이 맞지 않으니까 공평하게 제가 짝을 지어 드릴 테니, 그분과 한 학기를 함께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의 자료실에 제가 팀 목록을 업로드 해 놓을 테니, 다들 확인하세요. 당장 다음 주부터 과제를 시작하셔야 하니까 오늘 미리 안면을 터 두는 게 좋을 거예요.”
하준은 교수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 강의 자료실을 확인했다. 선하준, 선하준…. 교수가 올려놓은 팀 목록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준의 이름 옆에는 낯설지 않은, 어제도 들었던 그 이름, 구선호가 있었다.
“…….”
하준은 그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선호. 어제와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듯한 셔츠를 입은, 어제의 하준의 말을 의식한 건지 오늘은 셔츠 단추가 하나 풀린 상태의 선호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몇 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선호가 하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준은 시선을 다시 교수에게 돌렸다. 약간은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번호 줘.”
강의가 끝나자마자 하준은 짐을 싸는 선호의 근처에 있는 책상에 살짝 걸터앉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선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핸드폰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선호는 하준이 볼 때마다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하준은 선호가 얼굴이 빨간 게 더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긴팔을 입고 있으니까 더울 만도 하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다.
선호가 조심스럽게 하준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 번호를 적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제 번호를 하준의 핸드폰에 찍고 있었다. 그 모든 동작이 느리고 답답해서 하준은 그냥 보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휴대폰을 누르던 선호가 다시 하준에게 핸드폰을 내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혼자 해도 괜찮은데.”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하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엄연히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과제를 해야 하는 수업인데 혼자 한다고? 아무리 호구라고는 해도 호구 짓을 하라고 시키지도 않은 사람한테까지 이렇게 자처해서 호구 짓을 하려는 애는 처음이었다.
“뭔 소리야, 너 혼자 하는 과제 아니잖아.”
“음… 바쁘고, 귀찮으면, 혼자 해도 괜찮아. 내가 너한테 전달해 주면…….”
“구선호.”
하준이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선호의 이름을 불렀다. 선호가 천천히 말을 잇다가 들리는 자신의 이름의 멈칫해서 말을 멈추고 하준을 바라봤다. 어딘가 얼빠진 듯한 시선이었다.
“너랑 나랑 같이하는 과제야. 혼자 하는 거 아니고.”
“……응.”
“…연락할게.”
선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하준은 딱히 위로를 해 줄 마음은 없어서 그저 몸을 돌려 강의실에서 나왔다.
물론 하준이 다른 애들처럼 편하게 선호를 부려 먹을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저런 얘기를 꺼냈다는 건 그동안 팀 과제에서 호구인 선호를 이용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준은 애초에 그럴 성격도 못 되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은 걱정이 되긴 했다. 어떻게 쟤랑 한 학기 동안 팀 과제를 같이하지? 의견이라는 걸 낼 수는 있긴 할까? ‘사랑의 심리학’이라는 강의 제목처럼 매주 만나서 데이트 비슷한 걸 해야만 하는데.
어째 복학하고 나서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1. 호구가 좋아하는 사람 (1)
발아래에 있는 돌멩이가 보였다. 사람들이 발로 차고, 차고, 또 차서 모서리가 둥글어진 돌멩이. 선호는 그 돌멩이를 발로 차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한참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어른이 되면 하늘이 바뀌고 나 자신이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사람들 발에 치이고 치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였다. 바뀐 건 전혀 없었다.
“야!! 선호구! 여기 있었냐!!”
누군가 다가와 선호의 어깨를 잡아챘다. 작고 위축된 선호의 어깨가 그의 힘으로 흔들렸다. 동우, 선호는 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우는 자신의 이름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선호구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언젠가 한번, 이야기를 한 적 있었는데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동우는 그 후로도 계속 자신을 선호구라고 불렀다.
선호가 큰 안경을 한번 치켜올리고 동우를 바라봤다. 그는 재잘재잘 떠들며 이번 과제가 무척이나 어렵다느니, 얼마나 귀찮다느니,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다른 동기 애들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나, 변한 건 없구나. 선호는 그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선호의 시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쟤가 선하준이지? 존나 세상 혼자 산다 진짜.”
“쟤 잘생겼다고, 말 존나 많잖아. 저렇게 생긴 애들이 좋나, 여자애들은? 기생오라비 같잖아.”
“하긴, 그렇긴 해?”
선호의 귀에는 시샘과 질투가 섞인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선호는 그저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선하준.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커다란 키와 연예인처럼 잘생긴 외모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임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웃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원하고 있었다.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선호조차,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선호는 한참을 그를 바라봤다. 마치 그의 몸에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눈을 깜박여도, 그는 선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선호는 하준을 짝사랑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함부로 말도 걸지 못하는 이 지독한 짝사랑은, 어쩌면 금방 끝날 거라고 예상했던 선호의 이 마음은 대학교 1학년이 끝나고 군대에 가서도 여전했다.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선호는 하준을 사랑하는 걸 선택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호의 이유 없는 삶에 이유라는 게 필요했으니까.
***
몇 년 후.
하준이 시끌벅적한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젖은 우산을 가게 근처에 두고 물기 묻은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하준이 등장하자마자 각자 술을 마시던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야, 선하준! 오랜만이다!”
“여기로 와, 하준아.”
하준이 좀 더 테이블 가까이에 다가서자 몇몇 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자신의 옆으로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웃는 얼굴로, 그러나 약간은 쌀쌀맞게, 하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얼굴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야, 이 새끼!!”
주혁이 하준을 보자마자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뱉고 하준을 향해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째 군대 가기 전에나 갔다 와서나 주혁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호들갑스럽고, 더럽고. 하준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주혁은 열심히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군대 간다고 잠수 타기냐? 연락 하나 없고!”
“지금 얼굴 보잖아.”
“재수 없는 새끼.”
어깨를 으쓱이고는 싱긋 웃으며 하는 하준의 말에 주혁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저 새끼는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둘 다 서로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준이 넌 군대 갔다 오니까 더 잘생겨진 것 같다.”
“하, 하.”
하준의 앞에 앉은 동기가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여나가 하, 하 하고 의식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하준은 그런 여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하준에게만 보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뭘 처웃어, 개또라이 새끼야.’
입 모양으로는 그렇게 살벌한 말을 내뱉으면서 여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준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여나에게만 보이도록 말했다.
‘좆까.’
“너네 둘은 변한 게 없냐.”
주혁이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치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개와 고양이처럼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 입 모양으로 쌍욕 하기 바빴다. 물론 두 사람이 친남매나 다름없이 가까운 사촌 관계라는 걸 아는 주혁에게만 둘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 보였지만, 그걸 모르는 다른 애들은 그저 두 사람이 누구보다 사이좋은 동기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야, 선호구 왔다.”
“헐, 선호구?”
잠시 후 주변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비웃는 듯한 웃음도 섞여 있었다. 선호구? 사람 이름이 호구일 수가 있나?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애가, 우리 과에 있었다고? 하준은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가게 문 근처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선호구~~!! 우리 호구!!”
답답할 정도로 까만 머리에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안경, 아직 9월이기는 해도 더운 날씨인데 목 끝까지 꽉 잠근 긴팔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가 젖은 우산을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눈과 하준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약간 발그레하고 상기되어 있었다. 저런 애가 있었나? 더우면 반팔을 입으면 될 것을 왜 굳이 긴팔을 입었지? 하준이 한쪽 손에 턱을 괴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주혁에게 물었다.
“이름이 호구야? 독특하네.”
“아니, 너 구선호 몰라?”
“어.”
“으휴, 동기한테 관심 좀 가져라 새끼야. 벌써 군대까지 하면 입학한 지 3년인데 저렇게 무관심해서야.”
군대까지 하면 주혁의 말대로 입학한 지 3년이 맞기는 하지만 군대를 빼면 1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준은 1학년이 끝나자마자 바로 군대로 갔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동기가 있는 건, 주혁의 타박과 반대로 하준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저 애가 그만큼 존재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하준이 무관심한 것도 맞긴 하지만.
“쟤네는 아직도 쟬 저렇게 부르네.”
주혁이 앞에 놓인 맥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하준의 빤한 시선에 주혁이 하준을 제 어깨로 툭 치며 말했다.
“쟤가 1학년 때부터 우리 과에서 호구라고 유명하거든. 뭐든 다 들어준다고.”
뭐든 다 들어준다고? 진짜 별명 그대로, 호구 같은 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답답해 보이는 인상도, 호구라는 별명도. 이상하게도 그를 보니까 자꾸만 누군가가 연상이 되는데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는 게 짜증이 났다.
“됐다, 우린 우리끼리 술이나 마시자. 건배!”
주혁이 하준의 시선을 환기시키며 잔을 들어 올렸다. 하준도 주혁을 따라 잔을 들어 부딪히고는 목울대로 맥주를 넘겼다. 신경 끄자. 누가 호구 짓을 하든, 사실 내 알바는 아니지.
“호구 호구, 우리 호구!! 내가 그동안 우리 호구 없어서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선호라는 답답한 인상의 그 애가 간 테이블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호구 소리를 듣고도 별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그쪽 테이블이 신이 나서 아주 왁자지껄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준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아예 떼고, 신경도 끈 채 앞에 있는 동기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앞에 놓인 맥주잔에 술이 몇 번을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하고, 시끌벅적한 술집 안도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하준의 머릿속에도 선호라는 아이가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들어갈 거라니까….”
-넌 대체 걱정하는 내 생각은 전혀 안 해?
잠깐 하준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이, 하준의 애인 윤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벌써 몇 통의 문자, 몇 통의 전화인지 세기도 귀찮았다. 하준은 제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가져가며 대충 말을 이었다. 얼른 끊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나한테 먼저 연락한 적 없잖아.
“…….”
-왜 항상 나만 너 보고 싶어 하고, 궁금해하는 거야? 우리 사귀는 거 맞긴 해?
윤아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이내 훌쩍이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하준은 그 소리를 듣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윤아가 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숨기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들어 주길 바랐다. 제 이 답답한 마음을.
하준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어서 전화를 끊고 싶다. 귀찮다. 윤아가 울어서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건 전혀 없었다.
-그만 끊자.
하준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울음을 멈추고 답답한 듯한 목소리로 윤아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하준이 전화를 끊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그제야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눈을 감았다. 귀찮아, 다. 시끄러운 소음이 귀에 들어오는 것도, 제가 이 공간에 있는 것 자체도. 하준의 온몸을 권태라는 구름이 감싸고 있는 느낌이었다.
“…안녕.”
건물 문 앞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하준의 앞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눈을 살짝 뜨고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호구라고 불리던, 아까 그 아이. 구선호였다. 얼굴 전체를 다 가리는 커다란 안경, 길게 내려와 답답해 보이는 앞머리, 목 끝까지 꽉 잠근 셔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온통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하준은 자신보다 10cm는 더 작아 보이는 선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얘가 나한테 인사한 건가? 내가 얘랑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가? 물론 과 동기니까 어느 정도 얼굴을 아는 건 당연하지만, 하준은 선호를 오늘 처음 보았다. 선호라는 애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일이다.
“그… 자, 잘 지냈어?”
“…….”
“…….”
거의 기어 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한 선호의 인사에도 하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선호의 얼굴이 마치 신호등의 빨간불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저 빵빵거리는 차의 소음, 사람들의 시끄러운 말소리만 들려와 더욱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안 답답해?”
“…응?”
어색한 정적을 깨고 하준이 말했다. 선호가 그 말에 빨갛게 달아오른 고개를 올려 하준을 봤다. 하준이 선호의 목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는 내가 다 답답한데, 좀 풀지.”
“……아.”
선호의 손이 우물쭈물 셔츠 목 부근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고는 하준의 말대로 단추 하나를 풀었다.
“나 들어간다.”
선호가 단추 몇 개를 풀자마자 하준이 선호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뒤쪽에서 선호가 뭔가 자신을 향해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하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애초에 쟤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한테 말을 걸었나 궁금했지만 뭐 대충은 쓸데없는 이야기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준에게 쓸데없는 말로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애들은 선호 말고도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선호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지, 잘 지냈냐고 친한 척 인사를 건넸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준은 애초에 선호 같은 답답한 유형의 사람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오늘 만나.]
윤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제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하준은 윤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윤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준은 윤아가 오늘 만나서 할 얘기를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저녁에 시간 비워 놔라.]
윤아의 연락 다음에, 하준은 아버지로부터 온 문자를 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답장도 없이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안녕하세요,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진행할 박준찬 교수입니다. 반가워요.”
그사이 강의실 안으로 교수가 들어오고, 앞으로 진행될 강의의 방향과 흐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문자에서 신경을 끄고 교수의 말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듣는 강의에 약간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매주 두 사람씩 팀을 만들어 보고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그냥 인터넷에서 쳐서 긁어 오는 게 아니라 매주 하루는 만나서 직접 생각하는 장소에 가 보고, 각자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공통 보고서를 작성하셔야 해요.”
아아…. 강의실에 탄식 소리가 울렸다. 매주 보고서. 귀찮게 됐네. 이미 정정 기간도 지나서 취소를 할 수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간대가 적당하다고 수업을 넣은 하준의 잘못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수강생의 남녀 비율이 맞지 않으니까 공평하게 제가 짝을 지어 드릴 테니, 그분과 한 학기를 함께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의 자료실에 제가 팀 목록을 업로드 해 놓을 테니, 다들 확인하세요. 당장 다음 주부터 과제를 시작하셔야 하니까 오늘 미리 안면을 터 두는 게 좋을 거예요.”
하준은 교수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 강의 자료실을 확인했다. 선하준, 선하준…. 교수가 올려놓은 팀 목록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준의 이름 옆에는 낯설지 않은, 어제도 들었던 그 이름, 구선호가 있었다.
“…….”
하준은 그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선호. 어제와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듯한 셔츠를 입은, 어제의 하준의 말을 의식한 건지 오늘은 셔츠 단추가 하나 풀린 상태의 선호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몇 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선호가 하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준은 시선을 다시 교수에게 돌렸다. 약간은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번호 줘.”
강의가 끝나자마자 하준은 짐을 싸는 선호의 근처에 있는 책상에 살짝 걸터앉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선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핸드폰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도 그랬지만, 선호는 하준이 볼 때마다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하준은 선호가 얼굴이 빨간 게 더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긴팔을 입고 있으니까 더울 만도 하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다.
선호가 조심스럽게 하준이 내민 휴대폰을 받아 번호를 적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제 번호를 하준의 핸드폰에 찍고 있었다. 그 모든 동작이 느리고 답답해서 하준은 그냥 보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휴대폰을 누르던 선호가 다시 하준에게 핸드폰을 내밀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혼자 해도 괜찮은데.”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하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엄연히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과제를 해야 하는 수업인데 혼자 한다고? 아무리 호구라고는 해도 호구 짓을 하라고 시키지도 않은 사람한테까지 이렇게 자처해서 호구 짓을 하려는 애는 처음이었다.
“뭔 소리야, 너 혼자 하는 과제 아니잖아.”
“음… 바쁘고, 귀찮으면, 혼자 해도 괜찮아. 내가 너한테 전달해 주면…….”
“구선호.”
하준이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선호의 이름을 불렀다. 선호가 천천히 말을 잇다가 들리는 자신의 이름의 멈칫해서 말을 멈추고 하준을 바라봤다. 어딘가 얼빠진 듯한 시선이었다.
“너랑 나랑 같이하는 과제야. 혼자 하는 거 아니고.”
“……응.”
“…연락할게.”
선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하준은 딱히 위로를 해 줄 마음은 없어서 그저 몸을 돌려 강의실에서 나왔다.
물론 하준이 다른 애들처럼 편하게 선호를 부려 먹을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저런 얘기를 꺼냈다는 건 그동안 팀 과제에서 호구인 선호를 이용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준은 애초에 그럴 성격도 못 되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은 걱정이 되긴 했다. 어떻게 쟤랑 한 학기 동안 팀 과제를 같이하지? 의견이라는 걸 낼 수는 있긴 할까? ‘사랑의 심리학’이라는 강의 제목처럼 매주 만나서 데이트 비슷한 걸 해야만 하는데.
어째 복학하고 나서 잘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