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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해찬과 백도희.
서로의 머릿속에 각인된 ‘처음’의 기억은 각각 다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탁인데, 알은척하지 마.’
그럴 만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던 원인 모를 질척거림과 집착.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모든 행동들은 충동적이었고, 가벼웠는데.
‘보통은 즐기지 않나. 그런 거.’
얽혔다.
‘나는 싫어.’
‘진짜 이상하네.’
헤어 나올 수 없게 빠져 버렸다.
‘그렇게 싫으면 무시하고 지나치면 될 텐데, 하나하나 다 받아 주고 있잖아요. 새삼 상냥하게.’
단 1평의 여유도 내어 주지 못할 나에게 불쑥 찾아온 너는. 어쩌면 작은 변덕일 수도, 바람 불면 휙 날아갈 헛된 꿈이었을 수도 있다.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어제 너랑 나. 잤니?’
그때 멈췄어야 했다.
‘잤으면.’
무조건.
‘어떻게 되는데요?’
도망쳤어야 했다.
* * *
7년 전.
스물넷. 그 시절 도희는 돈 한 푼이 급한 처지였다.
1학기 종강 날, 남들은 온몸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도희는 간신히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무더운 뙤약볕이 아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하며.
“선생님. 다음 주부턴 저희 집에 오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네?”
예상치 못한 학부모의 일방적인 통보에 도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학부모는 난감한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어렵게 입을 떼어 냈다.
“그게……, 아휴. 죄송하게 됐어요. 선생님 딱한 사정이야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사정을 누구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얌생이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학 개인 과외와 편의점,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동안 몇 번이고 의도치 않게 학생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말하지 말아 달라 그렇게 부탁했건만.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우리 애 이제 고3인 거. 이제부턴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매번 말도 없이 당일 날에 과외 시간 미루는 것도 정도가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과외 당일 날만 되면 집안 사정 때문에 과외 시간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단 문자를 통보한 것은 학생 쪽이었다.
과외 날이 뒤로 밀리다 보니 횟수가 부족해 과외비를 받는 날도 애매해졌고, 대학교 강의나 다른 아르바이트 시간에 차질이 생겨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물론, 학부모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지만.
급한 마음에 덜컥 시작한 것이 실수였다. 과외 알바는 필시 학생의 인성에 따라 심사숙고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선미의 조언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무엇보다 주희 성적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요.”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미 성적으론 가망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잘릴 마당에 전부 사실대로 불어 버릴까 했지만 관뒀다.
돌아올 말은 뻔했으니까.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우리 애는 안 그래요.’
그래. 매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것도, 한참 어린 풋내기 주제에 제 말 한마디면 당장 잘라 버릴 수 있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꼴을 참아 주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알겠습니다. 과외비는 오늘 것까지 해서 내일 안으로 송금해 주세요.”
쉬운 수긍에 학부모는 짐짓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도희는 미련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싸가지. 잘됐다. 키득거리는 학생의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괜찮아. 다시 구하면. 다시 구하면…….”
된다는 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후련해야 하는데 더 막막했다.
종강 시기에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심지어 잦은 결석과 휴학으로 계절 학기를 들어야 하는 판이라 시간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소한으로 최대한을 바랄 수 있는 일자리는 시간 조율이 가능한 과외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과외보단 인기 강사를 찾아 강남으로 떠나는 추세라 그마저도 어찌 될지 확언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오랜 친구이자 같은 대학 동기인 선미였다.
― 백도희! 과외 끝났어?
“응.”
― 내일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종강 총회. 잊고 있었다.
“아……, 내일은.”
― 안 된단 말 넣어 둬. 며칠 전부터 말했잖아. 꼭 와야 해. 꼭!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저 급한 성격은 여전했다.
선미와 단둘이서 만나는 자리였다면 개의치 않고 약속 장소로 향했을 테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선미는 워낙에 붙임성이 좋은 성격인 데다가 술과 모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반면 도희는 그 정반대였다.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를 질색했다. 성격이라도 무난했다면 모를까 사람들에게 살가운 편도 아니었고 친절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다.
주변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도희가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다들 화가 난 것이라며 오해를 했다.
싸가지 없는 애. 재수 없는 애.
늘 뒷담화의 표적이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매번 억지를 부리는 건지. 선미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예고치 않게 시간이 비었다. 집은 싫은데. 어쩌지.
돌아갈 곳이 없는 것보다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도서관이나 가자.”
찜통 같은 더위를 피할 곳이 간절했던 도희는 집으로 가는 길 반대편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희는 다음 날 약속 장소에 나온 것을 절실히 후회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백구 아니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야간 타임 알바생이 늦게 와서.”
“요즘 얼굴 한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데. 백구, 우리 백구.”
취했다. 단단히 취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그런다.”
누가 오든 말든 관심도 없는데 선미 혼자 신이 났다.
경영학과 학생 대부분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다. 테이블을 장악하고 있는 술병이 몇 병인지 눈으로 셀 수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개판에 가까운 성황.
“……나 다시 가도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선미는 냅다 도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도희는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빈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박선미. 너 진짜 괜찮아?”
“응. 맞다. 술. 우리 백구 오랜만에 만난 건데 내가 또 술 한잔 따라 줘야지.”
빈 잔에 술을 따르는 모양새가 위태롭다.
“내가 따를게. 그러다 쏟겠다.”
도희가 잽싸게 술병을 가로채며 물었다.
“선준이는. 오라고 연락했어?”
“엥? 오라고 올 놈도 아니지만 이 신성한 자리에 걔를 왜 불러.”
“동생이잖아. 너 지금 많이 취한 상태고. 집은 어떻게 가게.”
“아서라. 혼자 택시 타고 갈 거야.”
갈수록 태산이다.
선미는 도희의 속도 모르고 넉살 좋게 잔을 부딪쳐 왔다. 주량도 낮은 편인데 피곤한 상태에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다음을 기약하며 술잔을 옆으로 몰래 치워 버렸다.
대신 물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라스 잔을 집어 들었다.
갈증이 나서 별다른 의심 없이 손목을 꺾었다.
하지만 물이라기엔 이거 뭔가.
“푸흡!”
입에 담겨 있던 액체를 그대로 바닥에 뿜어 버렸지만 이미 반 정도는 식도를 타고 넘어간 뒤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글라스 잔에 소주를 한가득 채워 넣은 건지.
도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가에 묻은 액체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냈다.
“아, 진짜…….”
글라스 잔을 던지듯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 도희는 묵직한 숨을 흘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체력 하난 대단하네.”
늦은 시간에도 술집 안은 과부하 상태였다.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1학기 종강 시즌인 만큼 다른 테이블도 비슷한 명분으로 모인 듯했다.
한참 동안 의미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저 멀리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어…….”
“도희 누나?”
선미의 남동생 선준이었다. 같은 대학 체육학과에 재학 중인.
종목이 수구였던가.
“누나. 쟤 왜 저래요?”
선준은 벌레 보듯 선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 마신 것 같아.”
네가 이 술집에 있는 것도 모를 만큼 말이지.
선준은 기함했다. 도희는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너도 종총 때문에 왔어?”
“아뇨. 곧 올림픽이잖아요. 출전하는 애들 출국하기 전에 겸사겸사 모였어요. 누나는 괜찮으세요?”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지겹도록 떠들어 대던 기억이 난다.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이 앞으로 일주일 남았다고. 그 중요한 시기에 술이라니. 미친 건지, 그만큼 자신 있는 건지. 뭐가 됐든 알 바 아니었다.
“응. 나는 방금 왔는데, 뭘.”
한참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선미가 소주병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선준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 박선미! 너 진짜 미쳤냐? 당장 그거 안 내려놔?”
한편으론 부러웠다. 저렇게라도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게.
그래도 한시름 놨다. 선미를 챙겨 줄 사람이 있으니 마음 편히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남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도희는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선준의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은 단연 눈에 띄었다.
나름 명문이라 칭송받는 가운대의 체육학과 학생들인 만큼 전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유망주들이라고 언젠가 선미에게 건너 들었던 적이 있다.
운동선수답게 전부 체격 하난 월등했다.
슬슬 일어날까. 도희가 눈길을 거두려는 찰나였다.
“…….”
누군가와 허공에서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상대는 눈을 마주쳐 놓고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꽤 오래전부터 지켜본 것처럼 도희를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직시하고 있었다.
“아…….”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선미네 집에 놀러 갈 때면 가끔씩 부딪친 적 있는 남자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번 식사도 함께했었다, 단지 따로 오가는 대화가 없었을 뿐이지.
선미 말로는 워낙에 말수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입에 풀칠하기 바쁜 현실에 치여 사느라 그쪽으론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어떻고 얼굴이 어떻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네, 어쩌네. 귀에 농이 찰 정도로 노래를 불러 대던 선미 덕분에 기본적인 경력 정도만 알고 있었다.
선준이와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다고 했다. 수영밖에 모르는 애. 최연소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걸출한 외모와 괴물 같은 실력으로 스타덤에 오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수영 국가 대표 선수, 라고.
그 유명세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왜 여태 눈치채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저곳에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고, 힐긋힐긋 그를 훔쳐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림픽의 여파가 아니더라도 시선을 끄는 외모인 것은 분명했다. 운동선수라기엔 지나치게 곱고 심각하리만큼 출중하다.
주변 일에 감흥을 느껴 본 적 없는 자신조차 매번 넋을 잃고 유심히 뜯어볼 정도였으니까.
근데. 이제 어쩌지. 애매했다. 인사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결론은 쉬웠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자.
시선을 거두려는 때였다. 가만히 눈을 맞춰 오던 그 애가 먼저 슬쩍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인사였다.
아, 생각났다.
“고해찬.”
도희는 건조한 해찬의 눈을 마주 보며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댔다.
고해찬과 백도희.
서로의 머릿속에 각인된 ‘처음’의 기억은 각각 다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부탁인데, 알은척하지 마.’
그럴 만한 이유도 명분도 없었던 원인 모를 질척거림과 집착.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모든 행동들은 충동적이었고, 가벼웠는데.
‘보통은 즐기지 않나. 그런 거.’
얽혔다.
‘나는 싫어.’
‘진짜 이상하네.’
헤어 나올 수 없게 빠져 버렸다.
‘그렇게 싫으면 무시하고 지나치면 될 텐데, 하나하나 다 받아 주고 있잖아요. 새삼 상냥하게.’
단 1평의 여유도 내어 주지 못할 나에게 불쑥 찾아온 너는. 어쩌면 작은 변덕일 수도, 바람 불면 휙 날아갈 헛된 꿈이었을 수도 있다.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어제 너랑 나. 잤니?’
그때 멈췄어야 했다.
‘잤으면.’
무조건.
‘어떻게 되는데요?’
도망쳤어야 했다.
* * *
7년 전.
스물넷. 그 시절 도희는 돈 한 푼이 급한 처지였다.
1학기 종강 날, 남들은 온몸으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도희는 간신히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무더운 뙤약볕이 아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하며.
“선생님. 다음 주부턴 저희 집에 오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네?”
예상치 못한 학부모의 일방적인 통보에 도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학부모는 난감한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어렵게 입을 떼어 냈다.
“그게……, 아휴. 죄송하게 됐어요. 선생님 딱한 사정이야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사정을 누구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걸까.
그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얌생이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학 개인 과외와 편의점,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동안 몇 번이고 의도치 않게 학생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말하지 말아 달라 그렇게 부탁했건만.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우리 애 이제 고3인 거. 이제부턴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매번 말도 없이 당일 날에 과외 시간 미루는 것도 정도가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과외 당일 날만 되면 집안 사정 때문에 과외 시간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단 문자를 통보한 것은 학생 쪽이었다.
과외 날이 뒤로 밀리다 보니 횟수가 부족해 과외비를 받는 날도 애매해졌고, 대학교 강의나 다른 아르바이트 시간에 차질이 생겨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물론, 학부모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지만.
급한 마음에 덜컥 시작한 것이 실수였다. 과외 알바는 필시 학생의 인성에 따라 심사숙고하여 선택해야 한다는 선미의 조언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무엇보다 주희 성적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요.”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미 성적으론 가망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잘릴 마당에 전부 사실대로 불어 버릴까 했지만 관뒀다.
돌아올 말은 뻔했으니까.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우리 애는 안 그래요.’
그래. 매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는 것도, 한참 어린 풋내기 주제에 제 말 한마디면 당장 잘라 버릴 수 있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꼴을 참아 주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알겠습니다. 과외비는 오늘 것까지 해서 내일 안으로 송금해 주세요.”
쉬운 수긍에 학부모는 짐짓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도희는 미련 없이 고개를 숙였다.
싸가지. 잘됐다. 키득거리는 학생의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괜찮아. 다시 구하면. 다시 구하면…….”
된다는 소리가 차마 나오지 않았다. 후련해야 하는데 더 막막했다.
종강 시기에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심지어 잦은 결석과 휴학으로 계절 학기를 들어야 하는 판이라 시간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소한으로 최대한을 바랄 수 있는 일자리는 시간 조율이 가능한 과외뿐이다. 하지만 요즘은 과외보단 인기 강사를 찾아 강남으로 떠나는 추세라 그마저도 어찌 될지 확언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오랜 친구이자 같은 대학 동기인 선미였다.
― 백도희! 과외 끝났어?
“응.”
― 내일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종강 총회. 잊고 있었다.
“아……, 내일은.”
― 안 된단 말 넣어 둬. 며칠 전부터 말했잖아. 꼭 와야 해. 꼭!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 버리는 저 급한 성격은 여전했다.
선미와 단둘이서 만나는 자리였다면 개의치 않고 약속 장소로 향했을 테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선미는 워낙에 붙임성이 좋은 성격인 데다가 술과 모임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반면 도희는 그 정반대였다.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를 질색했다. 성격이라도 무난했다면 모를까 사람들에게 살가운 편도 아니었고 친절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거다.
주변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도희가 무관심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다들 화가 난 것이라며 오해를 했다.
싸가지 없는 애. 재수 없는 애.
늘 뒷담화의 표적이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매번 억지를 부리는 건지. 선미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예고치 않게 시간이 비었다. 집은 싫은데. 어쩌지.
돌아갈 곳이 없는 것보다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
“도서관이나 가자.”
찜통 같은 더위를 피할 곳이 간절했던 도희는 집으로 가는 길 반대편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희는 다음 날 약속 장소에 나온 것을 절실히 후회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백구 아니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야간 타임 알바생이 늦게 와서.”
“요즘 얼굴 한번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데. 백구, 우리 백구.”
취했다. 단단히 취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그런다.”
누가 오든 말든 관심도 없는데 선미 혼자 신이 났다.
경영학과 학생 대부분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다. 테이블을 장악하고 있는 술병이 몇 병인지 눈으로 셀 수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개판에 가까운 성황.
“……나 다시 가도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선미는 냅다 도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도희는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빈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박선미. 너 진짜 괜찮아?”
“응. 맞다. 술. 우리 백구 오랜만에 만난 건데 내가 또 술 한잔 따라 줘야지.”
빈 잔에 술을 따르는 모양새가 위태롭다.
“내가 따를게. 그러다 쏟겠다.”
도희가 잽싸게 술병을 가로채며 물었다.
“선준이는. 오라고 연락했어?”
“엥? 오라고 올 놈도 아니지만 이 신성한 자리에 걔를 왜 불러.”
“동생이잖아. 너 지금 많이 취한 상태고. 집은 어떻게 가게.”
“아서라. 혼자 택시 타고 갈 거야.”
갈수록 태산이다.
선미는 도희의 속도 모르고 넉살 좋게 잔을 부딪쳐 왔다. 주량도 낮은 편인데 피곤한 상태에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다음을 기약하며 술잔을 옆으로 몰래 치워 버렸다.
대신 물이 담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라스 잔을 집어 들었다.
갈증이 나서 별다른 의심 없이 손목을 꺾었다.
하지만 물이라기엔 이거 뭔가.
“푸흡!”
입에 담겨 있던 액체를 그대로 바닥에 뿜어 버렸지만 이미 반 정도는 식도를 타고 넘어간 뒤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글라스 잔에 소주를 한가득 채워 넣은 건지.
도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가에 묻은 액체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냈다.
“아, 진짜…….”
글라스 잔을 던지듯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 도희는 묵직한 숨을 흘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체력 하난 대단하네.”
늦은 시간에도 술집 안은 과부하 상태였다.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1학기 종강 시즌인 만큼 다른 테이블도 비슷한 명분으로 모인 듯했다.
한참 동안 의미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저 멀리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어…….”
“도희 누나?”
선미의 남동생 선준이었다. 같은 대학 체육학과에 재학 중인.
종목이 수구였던가.
“누나. 쟤 왜 저래요?”
선준은 벌레 보듯 선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 마신 것 같아.”
네가 이 술집에 있는 것도 모를 만큼 말이지.
선준은 기함했다. 도희는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너도 종총 때문에 왔어?”
“아뇨. 곧 올림픽이잖아요. 출전하는 애들 출국하기 전에 겸사겸사 모였어요. 누나는 괜찮으세요?”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지겹도록 떠들어 대던 기억이 난다. 바르셀로나 하계 올림픽이 앞으로 일주일 남았다고. 그 중요한 시기에 술이라니. 미친 건지, 그만큼 자신 있는 건지. 뭐가 됐든 알 바 아니었다.
“응. 나는 방금 왔는데, 뭘.”
한참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선미가 소주병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을 목격한 선준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아, 박선미! 너 진짜 미쳤냐? 당장 그거 안 내려놔?”
한편으론 부러웠다. 저렇게라도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게.
그래도 한시름 놨다. 선미를 챙겨 줄 사람이 있으니 마음 편히 돌아가도 될 것 같다.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남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도희는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선준의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은 단연 눈에 띄었다.
나름 명문이라 칭송받는 가운대의 체육학과 학생들인 만큼 전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유망주들이라고 언젠가 선미에게 건너 들었던 적이 있다.
운동선수답게 전부 체격 하난 월등했다.
슬슬 일어날까. 도희가 눈길을 거두려는 찰나였다.
“…….”
누군가와 허공에서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상대는 눈을 마주쳐 놓고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꽤 오래전부터 지켜본 것처럼 도희를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직시하고 있었다.
“아…….”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선미네 집에 놀러 갈 때면 가끔씩 부딪친 적 있는 남자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번 식사도 함께했었다, 단지 따로 오가는 대화가 없었을 뿐이지.
선미 말로는 워낙에 말수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입에 풀칠하기 바쁜 현실에 치여 사느라 그쪽으론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어떻고 얼굴이 어떻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네, 어쩌네. 귀에 농이 찰 정도로 노래를 불러 대던 선미 덕분에 기본적인 경력 정도만 알고 있었다.
선준이와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다고 했다. 수영밖에 모르는 애. 최연소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걸출한 외모와 괴물 같은 실력으로 스타덤에 오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수영 국가 대표 선수, 라고.
그 유명세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왜 여태 눈치채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저곳에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고, 힐긋힐긋 그를 훔쳐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림픽의 여파가 아니더라도 시선을 끄는 외모인 것은 분명했다. 운동선수라기엔 지나치게 곱고 심각하리만큼 출중하다.
주변 일에 감흥을 느껴 본 적 없는 자신조차 매번 넋을 잃고 유심히 뜯어볼 정도였으니까.
근데. 이제 어쩌지. 애매했다. 인사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결론은 쉬웠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자.
시선을 거두려는 때였다. 가만히 눈을 맞춰 오던 그 애가 먼저 슬쩍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인사였다.
아, 생각났다.
“고해찬.”
도희는 건조한 해찬의 눈을 마주 보며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