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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곡선에서 나의 모서리까지 1화
1. 공백 (1)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비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하랑은 유리창 너머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주말 오후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얼마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얼굴 가죽에 손자국이 불그스름히 더해진 것도 몰랐다.
소리 없는 하품을 하며 다리를 반대로 꼰 하랑이 왼쪽으로 손을 뻗자, 예상치도 못한 물기가 손바닥 위로 번졌다. 그제야 시선을 돌리면 잔 안에서 모가 나 있던 얼음들이 그새 형편없이 녹아 버린 모습이 보였다. 후덥지근한 숨소리를 흘리며 쥐었던 잔도 다시 내려놓은 하랑이 의자 등 뒤로 허리를 젖혔다.
“……아. 조온나 하기 싫어.”
지겨워 죽겠다는 뉘앙스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매서운 눈총이 단번에 들러붙어 왔다.
“확 조져 버리기 전에 해라. 저번처럼 일내지나 말고.”
맞은편에서 다소 공격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하랑은 말없이 인중 근처를 긁적이기만 할 뿐이었다. 달리 할 말이랄 것도 없어서였다.
사건의 발단은 바야흐로 몇 주 전, 전공 수업 조 과제 보고서 제출을 앞두고였다. 애초부터 조원들의 기대치가 낮았던 하랑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역할을 맡았다. 남들이 그 어렵다는 서론, 본론, 결론을 주구장창 쓸 때에 고작 논문 몇 줄 정도만 발췌해 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눈치껏 뭘 더 할까 물으면, 조원 녀석들이 알아서 손을 내젓기까지 하는 수준이었다. 워낙 밥 먹듯이 과제를 날려 오던 제 평소 행실이 방탕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손해가 될 것도 없겠다고 판단한 하랑은 그 과제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어차피 해야 할 과제라면 차라리 마감 전날에 해치워 버리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으니까.
그래. 그게 문제였다. 마감 당일, 평소 잘 가지도 않는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가게 된 하랑은 예상에도 없던 과음을 해 버리고 말았다. 며칠을 이어지던 술자리 성화에 적당히 구색만 맞춰 주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그러긴커녕 인사불성까지 되었다. 상대가 아무리 대화가 안 통하는 윗 학번 선배들이었다지만, 그 정도로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들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사경을 헤매다 오니 이미 제출 시간은 지나 있었고, 방전이 된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연락두절이 되었던 하랑의 빈 몫을 채워 넣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던 조원들은 이미 체념까지 해 있던 상태였고.
“그때만 생각해도 내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씨이발.”
거기에 우연찮게 공승빈까지 포함됐던 것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정말.
“어쨌든 너희들 내 이름 빼고 학점 잘만 받았잖아.”
“그 입 닥쳐라.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마를 짚은 승빈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대학까지 와서도 이렇게 맞붙게 되는 인연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하랑은 도리어 역정을 내는 뉘앙스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내가 그래서 시발, F에다 학고까지 받았잖아.”
승빈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을 흘려들으며, 이만하자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죽을래. 진짜?”
그제야 손 하나 대질 않은 것처럼 깨끗한 하랑의 책 페이지를 살핀 승빈이 언성을 높였다. 그 뒤집힌 눈을 보던 하랑이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제 하려고.”
하긴 개뿔이나. 애초에 하랑이 하는 말이라곤 믿을 생각도 없던 승빈이 골치가 아프단 듯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좀 하라고 하루 종일 붙들어 놔도 이 모양이냐? 네 새끼는 진짜 무슨 정신으로…….”
해 봤자 별 영양가도 없는 잔소리가 시작됐다. 이러다간 진짜 집에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하랑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던 부분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래서 이게 사람이 풀 만한 건가. 펜 선 끝으로 요동치는 그래프 곡선을 따라가던 하랑은 뭐라도 씹은 것처럼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하랑이 슬쩍 승빈의 눈치를 슥 보았다.
“야.”
“왜, 또. 시발아.”
치켜뜬 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어차피 좋은 소리 하나 못 들을 건데. 머쓱한 얼굴로 볼가를 긁적이던 하랑은 괜히 애먼 소리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까 왜 너랑 나밖에 없냐. 이거 조 과제잖아.”
“걔네는 각자 알아서 다 해 놨어. 너랑 같이할 바에야 차라리 따로 해서 낼 거라더라.”
“뭐? 야, 씨발. 내가 무슨 벌레라도 되냐?”
“벌레한테 모욕감 주는 말 하지 마라, 인마.”
하랑은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싶었다. 까놓고 말해서 노력이나 능력이 남들보다 부족한 편인 거지, 그렇다고 무임승차를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날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술자리에 형들한테 억지로 끌려가서 봉변을 당한 거였다. 나도 엄연한 피해자라니까. 하랑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오명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깥에선 벌써 해가 뉘엿 지고 있었다. 과제 제출이 당장 내일까지니 승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될 때까지 저를 붙들어 놓을 게 뻔했다. 이제는 집에 가자는 생각으로 펜을 다시 쥔 하랑이 전공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개념과 공식을 짚어 계산하기 시작했다. 맞나 모르겠네. 하랑은 어디선가 하나씩 주워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연산을 이어 갔다.
“야. 이거 답이 뭐라고?”
마침내 정답처럼 생긴 값을 산출해 낸 하랑이 다소 들뜬 어조로 승빈에게 물었다. 제 책을 쳐다보고 있던 그 답안을 확인하고는 어림 반 푼도 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거 아니야. 병신아. 다시 해.”
씨발. 제 머리칼을 움켜쥔 하랑이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저번 학기에 배웠던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해조차 덜 됐으니, 다시 이론서를 본다고 한들 시간이 한참 걸릴 게 뻔했고. 빨간 건 사과요, 파란 건 바다노라. 온갖 선들이 얽혀 있는 그래프를 쳐다보던 하랑이 쥐고 있던 펜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못한다고 하기만 해라. 머리털 다 뽑아 버릴 테니까.”
귀신같은 촉은 이런 데에만 발달한 모양이었다. ‘내가 못할 것 같냐?’ 책 페이지 위로 꼬부랑거리는 글자를 써내려 가던 승빈이 으르렁거렸다. 졸지에 머리털을 다 뽑히게 생긴 하랑이 착잡한 심경으로 묵언 수행을 했다. 남은 문제만 해도 무려 서너 개가 넘는데, 썅. 도대체 어느 세월에 집에 가라는 건데. 하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책 앞부분을 뒤적거렸다. 그 순간 끽, 하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하랑이 인상을 썼다.
“와, 형!”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승빈이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그쪽으로 등을 지고 서 있던 하랑이 그 낯선 목소리 하나를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줄글을 읽어 갔다. 워낙 마당발인 공승빈이니,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는 건 그리 별난 일도 아니었다.
“언제 복학하신 거예요?”
“이번에 했지. 제대한 지 좀 됐어.”
서로 안부를 묻는 대화가 한창 이어지면서, 승빈의 웃는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턱을 괴고 있던 하랑이 책에서 말한 내용대로 문제를 다시 풀어 가기 시작했다.
“야.”
“…….”
그래서 이걸 어떻게 구하라고 했더라. 펜 끝자락을 입술 끝에 물고 있던 하랑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야. 임하랑!”
갑자기 앞으로 밀려난 상체에 하랑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간만에 집중을 해 보려나 했는데.
“뭐. 왜.”
“인사하라고.”
아. 누군데. 짜증이 서린 눈으로 하랑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 목덜미를 붙든 승빈이 넌지시 덧붙였다.
“우리 과 선배라니까. 인사해.”
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더러 인사를 하게 만든다. 학기 초부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하랑이 불만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버티고 서 있으려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겉으로 보기만 해도 착하게 생긴 눈매가 자연스럽게 하랑에게로 향했다. 곧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살짝 음영이 지는 보조개에다 절로 시선이 갔다. 하랑은 그 훤칠하게 빼어난 얼굴을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제 뒤통수를 아래로 짓누르는 승빈의 손에 하랑은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반갑다는 말과 함께 썩 상냥한 답인사를 건넸다. 우리 학과에 저런 성격이 있던가. 하랑은 보기만 해도 서글서글한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그것조차 낯선 느낌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난 뒤에도 승빈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남자가 이만 가 봐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가 볼게. 과제 열심히들 하고.”
“바로 가시게요. 형?”
“응. 잠시 들른 거라.”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어 보인 남자가 이내 문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하랑이 곧 제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뒤통수에 와 닿는 충격에 억, 소리를 냈다.
“아! 왜?!”
뒷골이 당길 정도로 아린 뒷목을 잡은 하랑이 약이 오른 채 언성을 높였다. 승빈이 언짢은 눈으로 하랑을 쳐다봤다.
“인사하라면 그냥 하면 되지. 거기서 또 누구냐고 묻냐?”
“야. 아니, 뭐 누군지 알아야 인사를 하지. 한두 번이냐고. 네 새끼 때문에 이것도 어디까지 풀었는지 다 까먹었잖아.”
어차피 몇 날 며칠을 줘 봤자 제대로 풀지도 못할 거면서. 콧방귀를 뀐 승빈이 그대로 하랑의 목에다 초크를 걸었다. 하랑이 필사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붙든 채로 버텼다. 이게 누굴 죽이려고. 하랑이 기다렸다는 듯, 승빈의 팔뚝을 개처럼 물어뜯었다. 그제야 요상한 소리를 내며 하랑을 풀어 준 승빈이 곧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제 팔에 벌겋게 남은 잇자국을 보았다. 이 새끼, 존나 진심으로 물었네.
“야, 어디 가는데!”
그사이에 담뱃갑을 챙긴 하랑이 승빈에게 그것을 적당히 흔들어 보였다. 도망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며 성을 내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하랑이 카페 문을 열고 나섰다.
늦봄의 적당한 따스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담배 하나를 빼어 문 하랑이 하얀 연기를 뱉어 냈다. 묵혀 두었던 것들이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오래 참았지. 산중에 걸쳐 있는 해를 쳐다본 하랑이 생각했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기를 따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던 하랑이 문득,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시선을 멈췄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전화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한참 전에 나갔던 것 같은데. 남자가 나간 뒤로 대충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려 보던 하랑이 작게 연기를 흘렸다.
“…….”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하랑이 질겅질겅 필터만 씹어 댔다. 아니, 들은 적도 없었나. 그 생각을 할 무렵, 대기 중이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주변의 인영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든 남자가 천천히 그 인파 속으로 섞여 들기 시작했다. 초록빛을 띤 숫자가 점차 두 자리에서 한 자리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 서둘러 담뱃불을 끈 하랑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기요!”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다가선 하랑이 막 도보에 이르려던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 반동에 놀란 눈을 한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제 손에 든 커피 잔을 하랑에게서 멀리했다.
뛰어온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벅찬 숨이 새어 나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하랑의 어깨너머로 무언가를 살핀 남자가 갑자기 하랑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자동차 경적 소리가 빵 울렸다.
“신호 바뀌었는데.”
하랑은 순식간에 보도블록 안쪽으로 옮겨 온 제 발을 보고서 아, 하고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정신이 없다. 고개를 드니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하랑이 무심결에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탁 놓았다.
“왜?”
그 경황이 없는 모습을 보고만 있던 남자가 은근히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다른 건 아니고…’ 하랑이 천천히 입술을 열자,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빨아올린 남자가 편하게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4월의 바람에 살랑대는 밤색 머리칼이 눈에 담겼다.
“공부 좀 하세요?”
흡사 ‘도를 아세요?’와 같은 물음에 남자는 웃기만 했다.
이건 무슨 그림일까. 승빈은 썩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서 눈앞에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위화감은 둘째 치더라도, 이렇다 할 개연성 자체도 없었다.
그다지 꺼리는 기색도 없이 승빈의 옆에 앉은 유원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있는 전공 책을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승빈이 설마 하는 눈치로 유원의 팔목을 붙잡았다.
“형. 어디 가던 길 아니었어요?”
“아. 잠시 시간 낼 정도는 되길래.”
책장을 쥐고 있던 유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는 하랑을 쳐다본 승빈이 나지막한 탄식을 터뜨렸다. 이 새끼는 잠시로 해결될 수준이 아닌데. 저 머리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이쯤 되니 별의별 짓을 다 한다 싶었다. 아까는 모르는 얼굴더러 인사 한번 시켰다고 노발대발해 댈 때는 언제고.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승빈은 괜히 저에게 불똥이 튈까 부러 자리를 피했다. 그 잠시 동안 하랑이 이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승빈은 곧, ‘그래’ 하며 친절히 대답까지 해 주는 유원의 뒤통수를 보고는 ‘난 아무 잘못 없다’ 속으로 세뇌를 시켰다.
그렇게 승빈이 자리를 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하랑은 졸지에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어색한 기침 소리를 냈다. 모르겠다, 나도. 평소라면 죽어도 안 했을 그딴 짓은 왜 한 건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다고 거기서 흔쾌히 수락해 줄 건 또 뭐냐고. 하랑은 다시 떠올려 보면, 철면피가 따로 없는 제 대범함에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너 내 이름은 알아?”
책장을 살피고 있던 남자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그 속눈썹 아래로 자연히 그늘이 진 걸 쳐다보던 하랑이 난데없는 질문에 눈동자를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모르면, 그냥 가시려고요?”
그 말에 남자가 어이가 없단 듯이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랑은 말실수라도 한 듯 재빠르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작은 잘못이라도 했다가는 언제 허사가 될지 몰랐으니까.
“공승빈한테 물어보지. 걔도 공부 꽤 하던데.”
“걔랑은 근본적으로 대화가 안 돼서요.”
“친한가 보네.”
남자는 입술 끝에 잔웃음을 단 채로 대꾸를 하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하랑은 어느새 얼음물로 한가득 불어난 제 커피 잔을 보고는 몽롱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새 각성이 다 풀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 하랑은 남자가 계속 책을 살피고 있는 동안, 소리 없는 하품까지 했다.
“이 부분 설명해 주면 되지?”
“……어, 네. 맞아요.”
“잘 봐 봐.”
아까부터 하랑의 손에 장식처럼 들려 있던 펜을 가져간 남자가 새하얀 여백 위로 글씨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작게 사각이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감겼다. 눈에 힘을 준 하랑이 펜 끝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설명해 주려면 한참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보통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닌가.
“이 부분 구하는 방법은 알지?”
빨간 그래프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킨 남자가 물었다. 공식은 알긴 아니까.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하랑을 확인한 남자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게 단숨에 한 문제를 풀어냈다. 심지어 풀이도 그렇게 길지가 않았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
남자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는 반응에 의아한 듯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하랑의 표정을 발견한 남자가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저 얼굴을 보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 지난 학기 학사 경고 받아서요.”
“아. 그래?”
알아서 다시 맨 처음 부분으로 펜촉을 옮긴 남자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어조로 대답을 했다.
“다시 설명해 줄게. 미안.”
이게 그쪽이 미안할 일은 아닌데. 하랑은 차마 ‘그쪽’이라고 호칭을 붙이기에는 좀 뭣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PER이랑 주당순이익, 주당배당만 잘 계산해 주면 간단한데….”
생략 없는 풀이는 이전보다 길어졌다. 그런데도 불필요한 말 하나 없는 설명이 귀에 잘만 들어박혔다. 어릴 적 눈높이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무의식중에 집중을 해 버린 하랑이 작게 입을 벌렸다. 이거, 공부를 좀 하는 게 아니라 웬만한 교수보다 잘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공백 (1)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비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하랑은 유리창 너머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주말 오후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얼마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얼굴 가죽에 손자국이 불그스름히 더해진 것도 몰랐다.
소리 없는 하품을 하며 다리를 반대로 꼰 하랑이 왼쪽으로 손을 뻗자, 예상치도 못한 물기가 손바닥 위로 번졌다. 그제야 시선을 돌리면 잔 안에서 모가 나 있던 얼음들이 그새 형편없이 녹아 버린 모습이 보였다. 후덥지근한 숨소리를 흘리며 쥐었던 잔도 다시 내려놓은 하랑이 의자 등 뒤로 허리를 젖혔다.
“……아. 조온나 하기 싫어.”
지겨워 죽겠다는 뉘앙스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매서운 눈총이 단번에 들러붙어 왔다.
“확 조져 버리기 전에 해라. 저번처럼 일내지나 말고.”
맞은편에서 다소 공격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하랑은 말없이 인중 근처를 긁적이기만 할 뿐이었다. 달리 할 말이랄 것도 없어서였다.
사건의 발단은 바야흐로 몇 주 전, 전공 수업 조 과제 보고서 제출을 앞두고였다. 애초부터 조원들의 기대치가 낮았던 하랑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역할을 맡았다. 남들이 그 어렵다는 서론, 본론, 결론을 주구장창 쓸 때에 고작 논문 몇 줄 정도만 발췌해 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눈치껏 뭘 더 할까 물으면, 조원 녀석들이 알아서 손을 내젓기까지 하는 수준이었다. 워낙 밥 먹듯이 과제를 날려 오던 제 평소 행실이 방탕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손해가 될 것도 없겠다고 판단한 하랑은 그 과제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어차피 해야 할 과제라면 차라리 마감 전날에 해치워 버리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으니까.
그래. 그게 문제였다. 마감 당일, 평소 잘 가지도 않는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가게 된 하랑은 예상에도 없던 과음을 해 버리고 말았다. 며칠을 이어지던 술자리 성화에 적당히 구색만 맞춰 주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그러긴커녕 인사불성까지 되었다. 상대가 아무리 대화가 안 통하는 윗 학번 선배들이었다지만, 그 정도로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들일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사경을 헤매다 오니 이미 제출 시간은 지나 있었고, 방전이 된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연락두절이 되었던 하랑의 빈 몫을 채워 넣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던 조원들은 이미 체념까지 해 있던 상태였고.
“그때만 생각해도 내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씨이발.”
거기에 우연찮게 공승빈까지 포함됐던 것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정말.
“어쨌든 너희들 내 이름 빼고 학점 잘만 받았잖아.”
“그 입 닥쳐라.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마를 짚은 승빈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대학까지 와서도 이렇게 맞붙게 되는 인연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하랑은 도리어 역정을 내는 뉘앙스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내가 그래서 시발, F에다 학고까지 받았잖아.”
승빈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을 흘려들으며, 이만하자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죽을래. 진짜?”
그제야 손 하나 대질 않은 것처럼 깨끗한 하랑의 책 페이지를 살핀 승빈이 언성을 높였다. 그 뒤집힌 눈을 보던 하랑이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제 하려고.”
하긴 개뿔이나. 애초에 하랑이 하는 말이라곤 믿을 생각도 없던 승빈이 골치가 아프단 듯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좀 하라고 하루 종일 붙들어 놔도 이 모양이냐? 네 새끼는 진짜 무슨 정신으로…….”
해 봤자 별 영양가도 없는 잔소리가 시작됐다. 이러다간 진짜 집에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하랑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던 부분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래서 이게 사람이 풀 만한 건가. 펜 선 끝으로 요동치는 그래프 곡선을 따라가던 하랑은 뭐라도 씹은 것처럼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하랑이 슬쩍 승빈의 눈치를 슥 보았다.
“야.”
“왜, 또. 시발아.”
치켜뜬 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어차피 좋은 소리 하나 못 들을 건데. 머쓱한 얼굴로 볼가를 긁적이던 하랑은 괜히 애먼 소리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까 왜 너랑 나밖에 없냐. 이거 조 과제잖아.”
“걔네는 각자 알아서 다 해 놨어. 너랑 같이할 바에야 차라리 따로 해서 낼 거라더라.”
“뭐? 야, 씨발. 내가 무슨 벌레라도 되냐?”
“벌레한테 모욕감 주는 말 하지 마라, 인마.”
하랑은 도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싶었다. 까놓고 말해서 노력이나 능력이 남들보다 부족한 편인 거지, 그렇다고 무임승차를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날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술자리에 형들한테 억지로 끌려가서 봉변을 당한 거였다. 나도 엄연한 피해자라니까. 하랑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오명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깥에선 벌써 해가 뉘엿 지고 있었다. 과제 제출이 당장 내일까지니 승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될 때까지 저를 붙들어 놓을 게 뻔했다. 이제는 집에 가자는 생각으로 펜을 다시 쥔 하랑이 전공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개념과 공식을 짚어 계산하기 시작했다. 맞나 모르겠네. 하랑은 어디선가 하나씩 주워들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연산을 이어 갔다.
“야. 이거 답이 뭐라고?”
마침내 정답처럼 생긴 값을 산출해 낸 하랑이 다소 들뜬 어조로 승빈에게 물었다. 제 책을 쳐다보고 있던 그 답안을 확인하고는 어림 반 푼도 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거 아니야. 병신아. 다시 해.”
씨발. 제 머리칼을 움켜쥔 하랑이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저번 학기에 배웠던 것 같은데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해조차 덜 됐으니, 다시 이론서를 본다고 한들 시간이 한참 걸릴 게 뻔했고. 빨간 건 사과요, 파란 건 바다노라. 온갖 선들이 얽혀 있는 그래프를 쳐다보던 하랑이 쥐고 있던 펜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못한다고 하기만 해라. 머리털 다 뽑아 버릴 테니까.”
귀신같은 촉은 이런 데에만 발달한 모양이었다. ‘내가 못할 것 같냐?’ 책 페이지 위로 꼬부랑거리는 글자를 써내려 가던 승빈이 으르렁거렸다. 졸지에 머리털을 다 뽑히게 생긴 하랑이 착잡한 심경으로 묵언 수행을 했다. 남은 문제만 해도 무려 서너 개가 넘는데, 썅. 도대체 어느 세월에 집에 가라는 건데. 하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책 앞부분을 뒤적거렸다. 그 순간 끽, 하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하랑이 인상을 썼다.
“와, 형!”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승빈이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그쪽으로 등을 지고 서 있던 하랑이 그 낯선 목소리 하나를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줄글을 읽어 갔다. 워낙 마당발인 공승빈이니,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는 건 그리 별난 일도 아니었다.
“언제 복학하신 거예요?”
“이번에 했지. 제대한 지 좀 됐어.”
서로 안부를 묻는 대화가 한창 이어지면서, 승빈의 웃는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턱을 괴고 있던 하랑이 책에서 말한 내용대로 문제를 다시 풀어 가기 시작했다.
“야.”
“…….”
그래서 이걸 어떻게 구하라고 했더라. 펜 끝자락을 입술 끝에 물고 있던 하랑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야. 임하랑!”
갑자기 앞으로 밀려난 상체에 하랑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간만에 집중을 해 보려나 했는데.
“뭐. 왜.”
“인사하라고.”
아. 누군데. 짜증이 서린 눈으로 하랑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 목덜미를 붙든 승빈이 넌지시 덧붙였다.
“우리 과 선배라니까. 인사해.”
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더러 인사를 하게 만든다. 학기 초부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하랑이 불만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버티고 서 있으려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겉으로 보기만 해도 착하게 생긴 눈매가 자연스럽게 하랑에게로 향했다. 곧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살짝 음영이 지는 보조개에다 절로 시선이 갔다. 하랑은 그 훤칠하게 빼어난 얼굴을 쳐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제 뒤통수를 아래로 짓누르는 승빈의 손에 하랑은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반갑다는 말과 함께 썩 상냥한 답인사를 건넸다. 우리 학과에 저런 성격이 있던가. 하랑은 보기만 해도 서글서글한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그것조차 낯선 느낌에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난 뒤에도 승빈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던 남자가 이만 가 봐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가 볼게. 과제 열심히들 하고.”
“바로 가시게요. 형?”
“응. 잠시 들른 거라.”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어 보인 남자가 이내 문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하랑이 곧 제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뒤통수에 와 닿는 충격에 억, 소리를 냈다.
“아! 왜?!”
뒷골이 당길 정도로 아린 뒷목을 잡은 하랑이 약이 오른 채 언성을 높였다. 승빈이 언짢은 눈으로 하랑을 쳐다봤다.
“인사하라면 그냥 하면 되지. 거기서 또 누구냐고 묻냐?”
“야. 아니, 뭐 누군지 알아야 인사를 하지. 한두 번이냐고. 네 새끼 때문에 이것도 어디까지 풀었는지 다 까먹었잖아.”
어차피 몇 날 며칠을 줘 봤자 제대로 풀지도 못할 거면서. 콧방귀를 뀐 승빈이 그대로 하랑의 목에다 초크를 걸었다. 하랑이 필사적으로 책상 모서리를 붙든 채로 버텼다. 이게 누굴 죽이려고. 하랑이 기다렸다는 듯, 승빈의 팔뚝을 개처럼 물어뜯었다. 그제야 요상한 소리를 내며 하랑을 풀어 준 승빈이 곧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제 팔에 벌겋게 남은 잇자국을 보았다. 이 새끼, 존나 진심으로 물었네.
“야, 어디 가는데!”
그사이에 담뱃갑을 챙긴 하랑이 승빈에게 그것을 적당히 흔들어 보였다. 도망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며 성을 내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하랑이 카페 문을 열고 나섰다.
늦봄의 적당한 따스함이 피부에 와 닿았다. 담배 하나를 빼어 문 하랑이 하얀 연기를 뱉어 냈다. 묵혀 두었던 것들이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오래 참았지. 산중에 걸쳐 있는 해를 쳐다본 하랑이 생각했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기를 따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던 하랑이 문득,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시선을 멈췄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전화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한참 전에 나갔던 것 같은데. 남자가 나간 뒤로 대충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려 보던 하랑이 작게 연기를 흘렸다.
“…….”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하랑이 질겅질겅 필터만 씹어 댔다. 아니, 들은 적도 없었나. 그 생각을 할 무렵, 대기 중이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주변의 인영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든 남자가 천천히 그 인파 속으로 섞여 들기 시작했다. 초록빛을 띤 숫자가 점차 두 자리에서 한 자리로 줄어들고 있었다.
아. 서둘러 담뱃불을 끈 하랑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기요!”
수많은 인파를 헤집고 다가선 하랑이 막 도보에 이르려던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 반동에 놀란 눈을 한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제 손에 든 커피 잔을 하랑에게서 멀리했다.
뛰어온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벅찬 숨이 새어 나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하랑의 어깨너머로 무언가를 살핀 남자가 갑자기 하랑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자동차 경적 소리가 빵 울렸다.
“신호 바뀌었는데.”
하랑은 순식간에 보도블록 안쪽으로 옮겨 온 제 발을 보고서 아, 하고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정신이 없다. 고개를 드니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하랑이 무심결에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탁 놓았다.
“왜?”
그 경황이 없는 모습을 보고만 있던 남자가 은근히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다른 건 아니고…’ 하랑이 천천히 입술을 열자,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빨아올린 남자가 편하게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4월의 바람에 살랑대는 밤색 머리칼이 눈에 담겼다.
“공부 좀 하세요?”
흡사 ‘도를 아세요?’와 같은 물음에 남자는 웃기만 했다.
이건 무슨 그림일까. 승빈은 썩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하고서 눈앞에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위화감은 둘째 치더라도, 이렇다 할 개연성 자체도 없었다.
그다지 꺼리는 기색도 없이 승빈의 옆에 앉은 유원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있는 전공 책을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승빈이 설마 하는 눈치로 유원의 팔목을 붙잡았다.
“형. 어디 가던 길 아니었어요?”
“아. 잠시 시간 낼 정도는 되길래.”
책장을 쥐고 있던 유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조용히 입만 다물고 있는 하랑을 쳐다본 승빈이 나지막한 탄식을 터뜨렸다. 이 새끼는 잠시로 해결될 수준이 아닌데. 저 머리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이쯤 되니 별의별 짓을 다 한다 싶었다. 아까는 모르는 얼굴더러 인사 한번 시켰다고 노발대발해 댈 때는 언제고.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승빈은 괜히 저에게 불똥이 튈까 부러 자리를 피했다. 그 잠시 동안 하랑이 이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승빈은 곧, ‘그래’ 하며 친절히 대답까지 해 주는 유원의 뒤통수를 보고는 ‘난 아무 잘못 없다’ 속으로 세뇌를 시켰다.
그렇게 승빈이 자리를 비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하랑은 졸지에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어색한 기침 소리를 냈다. 모르겠다, 나도. 평소라면 죽어도 안 했을 그딴 짓은 왜 한 건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다고 거기서 흔쾌히 수락해 줄 건 또 뭐냐고. 하랑은 다시 떠올려 보면, 철면피가 따로 없는 제 대범함에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너 내 이름은 알아?”
책장을 살피고 있던 남자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그 속눈썹 아래로 자연히 그늘이 진 걸 쳐다보던 하랑이 난데없는 질문에 눈동자를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모르면, 그냥 가시려고요?”
그 말에 남자가 어이가 없단 듯이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랑은 말실수라도 한 듯 재빠르게 입술을 감쳐물었다. 작은 잘못이라도 했다가는 언제 허사가 될지 몰랐으니까.
“공승빈한테 물어보지. 걔도 공부 꽤 하던데.”
“걔랑은 근본적으로 대화가 안 돼서요.”
“친한가 보네.”
남자는 입술 끝에 잔웃음을 단 채로 대꾸를 하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하랑은 어느새 얼음물로 한가득 불어난 제 커피 잔을 보고는 몽롱한 눈을 감았다 떴다. 그새 각성이 다 풀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 하랑은 남자가 계속 책을 살피고 있는 동안, 소리 없는 하품까지 했다.
“이 부분 설명해 주면 되지?”
“……어, 네. 맞아요.”
“잘 봐 봐.”
아까부터 하랑의 손에 장식처럼 들려 있던 펜을 가져간 남자가 새하얀 여백 위로 글씨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작게 사각이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에 감겼다. 눈에 힘을 준 하랑이 펜 끝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설명해 주려면 한참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보통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닌가.
“이 부분 구하는 방법은 알지?”
빨간 그래프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킨 남자가 물었다. 공식은 알긴 아니까.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하랑을 확인한 남자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게 단숨에 한 문제를 풀어냈다. 심지어 풀이도 그렇게 길지가 않았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
남자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는 반응에 의아한 듯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하랑의 표정을 발견한 남자가 저도 모르게 웃는 소리를 냈다.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저 얼굴을 보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 지난 학기 학사 경고 받아서요.”
“아. 그래?”
알아서 다시 맨 처음 부분으로 펜촉을 옮긴 남자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어조로 대답을 했다.
“다시 설명해 줄게. 미안.”
이게 그쪽이 미안할 일은 아닌데. 하랑은 차마 ‘그쪽’이라고 호칭을 붙이기에는 좀 뭣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PER이랑 주당순이익, 주당배당만 잘 계산해 주면 간단한데….”
생략 없는 풀이는 이전보다 길어졌다. 그런데도 불필요한 말 하나 없는 설명이 귀에 잘만 들어박혔다. 어릴 적 눈높이 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무의식중에 집중을 해 버린 하랑이 작게 입을 벌렸다. 이거, 공부를 좀 하는 게 아니라 웬만한 교수보다 잘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