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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저택 6화

2. 12월 17일, 18일 (2)





시호는 왼쪽 것 하나를 들어 머리에 얹어 보았다. 거울을 보자 원래의 앞머리와 가발 앞머리가 겹쳐진 게 이상해 앞머리를 전부 뒤로 넘긴 뒤 다시 써 보았다. 이마와 눈썹을 전부 가리는 풍성한 앞머리는 어딘가 촌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그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사실에 시호는 자괴감이 들었다. 처음 해 본 여장이 화장도 안 했는데 어울릴 줄 몰랐다.

“하……. 나가야지.”

정말 이 상태로 나가고 싶진 않았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중년과 노년의 남성도 여장을 했단 사실을 기억해 내곤 꾸역꾸역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핸드폰과 혹시 몰라 가지고 왔던 노트북, 충전기 등을 다 집어넣고 캐리어를 털털 끌고 로비로 향했다.

어색하게 복장을 차려입은 열두 명이 시호를 마지막으로 전부 모였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1월에게 시선을 한 번씩 주었다.

‘이상한가.’

자신이 보기에 잘 어울렸다는 게 예상보다 어울렸단 것이지 진짜 여자처럼 보이거나 출중한 미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각자 기준에 따라 충분히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단 말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중 얼핏 11월이 보여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까도 시호에게 말을 잘 걸던 청년이었고, 아까 인물 관계도에서도 11월인 운전기사는 1월에게 애정을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시호가 다가서자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11월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모습 같았다.

아마도 인물 관계도나 설명서에 따른 무언가 때문일 것이라 여긴 시호는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10월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호는 자신의 어머니인 10월 역을 맡은 노인을 한 번 보고 눈을 깔았다. 그 옆으로 3월이 다가왔다. 3월은 1월을 짝사랑하고 있었고 모든 가족 중에서 1월의 말을 제일 잘 따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굳이 짐을 들어 줬던 거구만.’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을 떠올리며 이번엔 시호가 3월을 살짝 피했다. 분명 3월의 일방적인 짝사랑일 것이므로 1월이라면 이렇게 할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정답이었는지 3월이 만족스런 눈빛으로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시호와 일부러 눈을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칭찬을 들은 기분이었다. 시호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잘하고 있다는 얼굴로 시호를 보던 그가 저택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똑똑똑.

다시금 들린 정중한 노크 소리에 다들 굳어 있는 가운데 심부름꾼 3월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야,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부탁하신 짐을 받으러 왔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의 말에 일동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가지고 있던 짐을 차례대로 건넸다. 마찬가지로 짐을 건네기 위해 1월이 캐리어를 들려는 그때 불쑥 3월이 손을 내밀었다. 시호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 캐리어를 넘겼다. 3월은 시호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여 준 뒤 짐을 옮겼다.

그 뒤는 완전한 자유 시간이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6월이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곧 어디선가 조달된 음식을 그릇에 퍼 옮기는 작업만 한 6월이 종을 흔들어 사람들을 불렀다.



***



시호는 저녁을 먹고 난 뒤 천천히 산책을 했고 막혀 있는 3층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돌아보았다.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인물들은 전부 그를 쳐다봤다. 시호는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 못 본 척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아무 일 없었다 하더라도 긴장했던 탓에 시호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개인 욕실로 들어가 몸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 화장실, 욕실은 전부 프라이빗 존으로 카메라가 설치돼 있지 않다는 설명서 말을 믿고 편안하게 욕조에 기대 고개를 젖힌 뒤 눈을 감았다.

환풍기가 따로 없어 습기 찬 욕실 천장에서 맺힌 물방울이 뚝뚝 피부 위로 떨어졌다. 시호는 그 물방울을 맞고 눈을 떴다. 연두색의 천장에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흠, 흐음.”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허밍을 부르다가 점점 나른해지는 몸에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 욕조에서 나왔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물을 받은 것까진 좋았는데 어떻게 버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마개를 빼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다.

“뭐야.”

네 개의 다리로 지탱돼 바닥에 떠 있는 욕조는 마개를 빼고 나서 욕실 바닥이 물바다가 되면 배수구를 통해 물이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바로 욕조에서 배수구로 빠지는 게 아니었다.

싱겁게 문제가 해결되고 욕실을 나선 시호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잠옷을 입었다. 잠옷도 원피스 형태로 명치 부근에 조일 수 있는 리본이 달려 있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면서 동시에 조금 비치는 옷이었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남성용 언더웨어가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잠옷이니까.”

어차피 남 안 보여 준다면서 스스로를 마인드 컨트롤 한 시호는 침대로 가 누웠다. 바로 눕자마자 보이는 건 동그란 카메라 렌즈였다. 약 2cm 정도의 구멍이 천장에 뚫려 있었다. 그 안에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렌즈가 싫어 다시 자리에 일어섰다. 그는 일어난 김에 머리를 다 말릴 때까지 흔들의자에 앉아 놀다가 몸이 식어 추위가 느껴지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11시였다. 한번 나른해졌었던 몸은 금세 다시 침대로 빨려들 듯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버스에서 졸던 것까지 합하면 오늘만 세 번째로 잠에 드는 것이었다.



새벽 4시 5분. 시호는 어딘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어떤 인영이 보였다.

‘여기까지 쫓아왔어?’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 준 첫째였다. 시호만 아니었다면 진짜 첫째 자리를 지켰을 그 집의 아들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침대 위를 네발짐승처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들자 평소와는 달리 가위에 눌리지 않은 상태였다.

‘꺼져.’

그래서 하마터면 저 말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하지만 시호는 곧 그것이 트라우마가 아님을 알았다. 쳐 놓지 않은 커튼 사이로 쏟아진 달빛에 인영의 생김새가 어슴푸레 나타났다.

11월이었다.

시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꿈뻑이다가 가까스로 설명서를 떠올렸다. 11월은 1월에게 애정을 주고 있었고, 오늘 새벽 4시쯤 무슨 일이 있어도 비명을 지르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기 적힌 애정이……. 둘이 연인이었나?’

어쩌면 11월 운전기사와 딸인 1월이 10월 몰래 만나던 연인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마친 시호는 잠시 카메라 렌즈를 확인했다. 모든 지시문은 CCTV 앞에서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시호는 침대 전용 카메라가 있는 이유를 깨닫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잘 때도 가발 쓰라고 한 건가.’

빌어먹을 연극.

시호는 자신의 다리를 벌리는 손길을 느끼고 깜짝 놀라 오므렸다. 11월의 손이 멈칫하며 당황한 듯 어설프게 허공을 헤맸다. 시호는 등 뒤가 서늘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를 11월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적당히 해. 적당히.’

대체 무슨 지령이 있었기에 이러는지 몰라도 비명을 지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했던 설명서를 욕하며 시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불은 걷어진 지 오래였고 자신의 위에선 11월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1월의 얼굴이 그의 코앞까지 내려왔다. 놀란 시호가 고개를 돌리자 11월이 앓는 소리를 내며 소곤거렸다.

“딱 5분이면 된대요. 부탁 좀 할게요. 안 하면 페널티예요…….”

페널티. 행동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50만 원 감면이었다. 시호는 설마하니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겠지만, 매일 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매일이면 자그마치 15일간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어질 수도 있겠지만 15일을 꽉 채우면 원래 받기로 한 500만 원을 웃돌고도 남는 페널티를 내는 건 지나친 손해였다.

어차피 하는 척이었고, 불쾌한 기억이지만 자신과 동갑이었던 첫째 아들과 삽입만 없었지 비슷한 행위는 했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시호의 트라우마는 성적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첫째 아들이 준 공포에서 기인했다는 점이다. 그만 아니라면 딱히 겁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새끼도 아닌데. 그래, 눈 딱 감고…….’

시호는 결심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11월이 망설임 가득한 손길로 다리를 벌리는 게 느껴졌다. 그에 얇은 잠옷의 치맛자락이 위로 딸려 올라왔다.

그리고…….

“…….”

“…….”

둘은 말없이 서로의 사타구니를 조금씩 부딪쳤다. 시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고, 11월은 애써 그런 시호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옆으로 돌린 뒤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최대한 약하게 누르면서 유사 성행위를 하고 있다고 해도 밤에 긴 가발을 쓴 치마 입은 상대의 다리 사이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자신이 직접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기에 11월은 불쾌감보단 난감함이 앞섰다. 서로에게 부족한 정보를 짜 맞추지 못해 확실하진 않지만, 1월은 이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그랬다.

11월은 1월의 눈을 감은 옆얼굴을 힐끗 훔쳐본 뒤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함과 죄책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원래 1월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며 시호에게 1월이 돼 줘서 고맙다고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절절하게 전했다.

11월은 긴장으로 뻣뻣이 굳은 몸을 움직이다가 뻐근함이 느껴지자 자세를 바꾸기 위해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허리를 좀 더 숙여 시호의 옆구리 옆에 손을 얹어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자세가 바뀌자 서로의 몸이 더 가까워져서 시호와 고간이 세게 맞닿았다.

“……!”

샅이 확 쳐올려져 위로 들썩인 시호가 놀라 위를 올려다보자 11월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11월은 1월의 시선을 피하려 급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꾸만 모아지려는 시호의 허벅지를 잡고 벌리다가 결국 다리에서 손을 놓고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어두워서 색이 보이진 않을 터인데도 11월은 쪽팔려 죽을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