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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심, 있습니다
30층이 아니었네.
지호는 난감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선 장소 헤븐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드러난 층은 29층이었다. 로얄 층인지 육중한 객실 문은 현란한 황금색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빨리 이곳에서 사라져야겠다. 어디로 가야 하지. 두리번거리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발견했다.
“헤븐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요.”
“이쪽 비상구로 나가서 한 층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호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비상구의 문을 열고 계단을 성큼 올라갔다.
귓속의 마이클 잭슨이 오늘은 전율의 밤이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어떤 유령도 감당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휴대폰은 스릴러를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뚝, 순간 마이클의 목소리가 끊겼다. 휴대폰을 쳐다본 지호는 터치했다.
“응.”
―언니! 도착했어?
“아직.”
―뭐야? 지금 2시라고.
“곧 도착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언니 맞선 처음인데! 물가에 내놓은 애 같이 느껴져서 불안하다고.
저도 맞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걱정은. 지호는 살짝 미소 지었다.
―언니, 호텔 2층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릴 테니까 맞선 끝나면 전화해.
“응.”
―그래도 엄마가 보증한 선 자리니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거야. 생긴 건 멀끔하니 정상적으로 보이더라. 긴장하지 말고 쫄지 말고 파이팅!
지호는 지유가 맞선 장소까지 따라와 보호자처럼 구는 것이 귀여웠다. 비록 동생이 하기 싫은 맞선을 제게 미룬 것이 미안해서 이것저것 신경 써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유가 맞선을 보기 싫어 가상의 애인까지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차피 이 맞선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니와 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맞선이 지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번잡스럽고 피곤해도, 시간을 내야 해 귀찮아도, 낯선 사람과의 불편한 대화에도 짜증이 일지 않았다. 지호에게 오늘의 맞선은 맞선이 아니었다. <트라이앵글>을 풀어 나갈 취재와 다름없었다.
서한주의 모델이 될 수도 있는 남자와의 만남이었다.
헤븐을 둘러본 지호의 눈에는 감탄이 어리었다. 번화한 서울 한복판에 수목원 같은 장소가 있다니. 작은 새들도 있으면 좋겠다. 예쁠 텐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왜 이곳에 와 있는가를 생각했다. 헤븐은 맞선 장소로 손색없는 곳이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의 우거진 줄기와 가지가 사생활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었다. 고개를 빼고 실내를 돌아보았지만 지호는 맞선 상대가 도착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 서성이던 지호에게 직원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찾으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서한주입니다.”
직원은 대기 리스트를 살펴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식물의 이름은 무엇일까. 지호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고객님, 서한주라는 분은 안 계신데요?”
지호는 직원이 부른 이름에 아차, 싶어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서한주 씨가 아니에요.”
“그러시군요. 찾으시는 분의 성함을 다시 알려 주시겠어요?”
상냥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잠시만요.”
지호는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교롭게도 상대방이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만 들렸다. 낭패감이 등을 적셨다. 맞선남의 이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인데 그렇다고 엄마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언짢아하실 것이 분명했다.
지호는 어떻게든 맞선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자 미간을 모았다. 실내 공중의 한편을 노려보며 엄마가 사진을 보여 주고 입을 크게 벌리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엄마의 입이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였다. 가아앙. 강!
“강…….”
흐릿하게 나온 성씨에 눈치 빠른 직원이 대기 리스트를 훑어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 여기 한 분 계시네요. 강유결 씨가 이름을 남겨 놓으셨어요.”
강유결. 낯선 사람이 입에 올린 이름이 귀에 쏙 들어왔다. 문득 그의 사진이 뇌리에 떠올랐다. 햇빛 같은 미소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지호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키가 큰 식물로 에워싸인 창가로 걸어갔다. 직원은 손짓을 하고 사라졌다. 지호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유리창을 뚫고 남자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햇빛이 그의 반듯한 이마에서 우뚝하게 솟은 콧날을 지나 입체감이 분명한 입술로 떨어졌다. 그가 인기척을 느껴서인지 고개를 돌렸다. 온기를 품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이는 듯 움직였다.
그림 같다. 일순 창밖의 서울 풍경은 한가로운 호수로 변했고 눈앞의 남자는 서한주로 변했다. 은우와 한주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이 맑은 호수가 일렁이는 그의 별장이었다. 은우와 한주의 그다음 대사와 줄거리가 머릿속에서 줄줄 일어났다.
소설 속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호의 시선이 위로 따라 올라갔다. 꽤 키가 큰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유결입니다.”
“양지호입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지호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상대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호는 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부분적으로 꼼꼼히 뜯어보았다.
잘 어울리는 깔끔한 미색 셔츠와 짙은 색 팬츠, 길고 단정한 손가락, 부드럽게 뻗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언가가 못마땅해 보이는 눈.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자 지호는 퍼뜩 현실감이 들었다.
속내는 취재 차원이었지만 겉 무늬는 맞선이므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딴청을 부리듯 허공을 쳐다보다 슬쩍 남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에게 향해 있고, 눈빛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미간을 살짝 모으고 뚫어지게 쳐다보니, 지은 죄는 없지만 한낱 티끌이라도 줄줄 토해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많이 늦었나.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니 10분 정도 늦었다. 시간을 황금처럼 생각하는 부류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한주도……. 아니지. 이렇게 머릿속이 온통 서한주라는 캐릭터 구현에 빠져 있으면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좀 시킬까요?”
지호가 생각을 차단하려고 불쑥 말을 꺼내자 대답이 없던 남자는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고 지호는 음료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전 아메리카노. 뭐로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사이다 주세요. 얼음 넣어서.”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고 지호는 건너편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햇빛의 파편이 숨어 들어간 듯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반짝거렸다.
“더우세요?”
“네. 좀. 덥습니다.”
“코트를 벗으면 나으실 텐데요.”
지호는 타당한 그의 말에 말없이 아이보리색 코트를 벗었다.
착 달라붙은 블랙 원피스가 지호의 날씬한 몸매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맞선 때 입을 만한 정장 치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유가 입고 나가라며 기어코 빌려준 옷이다. 길이가 짧아 지호는 무심코 원피스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래도 불편함이 온몸을 에워싸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벗어 두었던 코트를 쳐다보았다.
저걸로 가리면 되겠다. 지호는 코트를 허벅지에 올려 두고 맞은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 스민 햇빛 파편이 더욱 커져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듯 보이는 그 눈에, 지호는 관찰의 대상자가 전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까. 조금 전까지는 분명 마뜩지 않은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신기한 것을 본다는 눈빛이었다.
직원이 다가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을 두고 갔다. 설마 사이다를 시켜서? 지호는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2월도 되기 전인데, 겨울바람은 꽤나 매서웠고 오늘은 한파가 지속된다는 기상 예보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호텔 난방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얼음을 띄운 사이다라니. 보통 맞선에서는 잘 시키지 않는 음료다. 갑자기 지유의 짱알짱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언니! 부모님이 주선한 맞선을 볼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해. 책잡히지 않게 적당히 예쁜 척, 얌전한 척, 모르는 척 내숭 떨다가 일어나야 한다고. 안 그럼 상대방이 맞선 실패의 책임을 언니에게 떠넘길 수도 있단 말이야.”
“알았어.”
“대충 대답하지 말고! 이러니까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상대가 누구건 간에 언니는 자기 스타일대로 굴 거잖아. 사소한 거라도 틈을 보이면 안 돼. 그걸 좋게 보면 솔직한 여자구나 할 테지만 나쁘게 보면 이상한 여자가 나왔네, 이럴 거라니까. 언니를 이상하게 여기는 순간 상대방이 맞선의 칼을 손에 쥐게 되는 거라고. 그 남자가 기분 나빠 봐. 그 칼을 휘두르며 자기 엄마한테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몰라.”
“알았어.”
무난한 커피를 시켰어야 했다. 지호는 아쉬운 눈으로 상대방의 커피를 바라보았다. 맞선을 보는 남자에게 칼을 쥐여 줘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옷을 제대로 입어야 했다.
엄마가 이 남자 칭찬하느라 바빴는데.
“엄친아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지호는 검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제가 알고 있는 그 뜻 맞습니까? 엄마 친구 아들?”
“네.”
남자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분위기로 보건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지호는 애써 밝게 말했다.
“강유결 씨 어머니와 제 어머니가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단짝이셨다고. 그런 분의 자제분이시니 엄친아시죠.”
“그럼 양지호 씨는 엄친딸이 되시는 겁니까?”
“네. 그렇죠.”
담담한 지호의 어조에 남자의 눈에는 웃음이 스며들었다.
“또 어머님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나가는 의사시라고.”
“잘나가는?”
“예. 연봉은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알려 드려야 합니까, 연봉?”
“아니요. 알려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자가 너무 빤히 쳐다보니 지호는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이 간절했다. 마시려고 시켰지만, 사이다를 주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의도적으로 사이다를 외면하게 됐다. 하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지호는 물끄러미 사이다를 주시했다.
“지호 씨는 연봉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남자의 입에서 지호라는 이름이 친근감 있게 흘러나왔다. 지호는 사이다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전보다 편해져 있었다. 물어봐도 될까.
“다른 게 궁금한데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느긋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인상을 풀고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외면해도 그 사람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을 만나 봐도 자꾸 그 사람만 떠오릅니다. 이럴 때 서, 아니 강유결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지호의 질문을 가늠해 보려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선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의외라는 듯 그의 눈빛은 모호했다.
“답은 하나네요. 외면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도 사랑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강유결 씨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데도요?”
“대답은 이미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요. 사랑할 수 없다는 전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전제는 어쩌면 강유결 씨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이 내 인생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아도 그 무게를 견뎌 낼 겁니다. 그 사람이 날 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사랑이니까요.”
과연 서한주다운 대답이었다. 심장이 두둥, 하고 뛰었다. 지호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짓다 다시 물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누가 그래요? 내가 겪어 보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가 웃었다. 싱긋 웃는 그 깨끗한 미소가 지호의 눈에 박혔다. 겪어 봤다면 어떤 성질의 사랑이었을까 궁금했다. 더 이상 그가 서한주인지 변증할 필요가 없어졌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서한주 그 자체였다.
30층이 아니었네.
지호는 난감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선 장소 헤븐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드러난 층은 29층이었다. 로얄 층인지 육중한 객실 문은 현란한 황금색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빨리 이곳에서 사라져야겠다. 어디로 가야 하지. 두리번거리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발견했다.
“헤븐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요.”
“이쪽 비상구로 나가서 한 층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호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비상구의 문을 열고 계단을 성큼 올라갔다.
귓속의 마이클 잭슨이 오늘은 전율의 밤이라고 외쳐 대고 있었다. 어떤 유령도 감당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휴대폰은 스릴러를 무한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뚝, 순간 마이클의 목소리가 끊겼다. 휴대폰을 쳐다본 지호는 터치했다.
“응.”
―언니! 도착했어?
“아직.”
―뭐야? 지금 2시라고.
“곧 도착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언니 맞선 처음인데! 물가에 내놓은 애 같이 느껴져서 불안하다고.
저도 맞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걱정은. 지호는 살짝 미소 지었다.
―언니, 호텔 2층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릴 테니까 맞선 끝나면 전화해.
“응.”
―그래도 엄마가 보증한 선 자리니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거야. 생긴 건 멀끔하니 정상적으로 보이더라. 긴장하지 말고 쫄지 말고 파이팅!
지호는 지유가 맞선 장소까지 따라와 보호자처럼 구는 것이 귀여웠다. 비록 동생이 하기 싫은 맞선을 제게 미룬 것이 미안해서 이것저것 신경 써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지유가 맞선을 보기 싫어 가상의 애인까지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차피 이 맞선의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니와 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맞선이 지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번잡스럽고 피곤해도, 시간을 내야 해 귀찮아도, 낯선 사람과의 불편한 대화에도 짜증이 일지 않았다. 지호에게 오늘의 맞선은 맞선이 아니었다. <트라이앵글>을 풀어 나갈 취재와 다름없었다.
서한주의 모델이 될 수도 있는 남자와의 만남이었다.
헤븐을 둘러본 지호의 눈에는 감탄이 어리었다. 번화한 서울 한복판에 수목원 같은 장소가 있다니. 작은 새들도 있으면 좋겠다. 예쁠 텐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왜 이곳에 와 있는가를 생각했다. 헤븐은 맞선 장소로 손색없는 곳이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의 우거진 줄기와 가지가 사생활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었다. 고개를 빼고 실내를 돌아보았지만 지호는 맞선 상대가 도착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 서성이던 지호에게 직원이 상냥하게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찾으시는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서한주입니다.”
직원은 대기 리스트를 살펴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식물의 이름은 무엇일까. 지호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고객님, 서한주라는 분은 안 계신데요?”
지호는 직원이 부른 이름에 아차, 싶어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서한주 씨가 아니에요.”
“그러시군요. 찾으시는 분의 성함을 다시 알려 주시겠어요?”
상냥한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잠시만요.”
지호는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교롭게도 상대방이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만 들렸다. 낭패감이 등을 적셨다. 맞선남의 이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인데 그렇다고 엄마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언짢아하실 것이 분명했다.
지호는 어떻게든 맞선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자 미간을 모았다. 실내 공중의 한편을 노려보며 엄마가 사진을 보여 주고 입을 크게 벌리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엄마의 입이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였다. 가아앙. 강!
“강…….”
흐릿하게 나온 성씨에 눈치 빠른 직원이 대기 리스트를 훑어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 여기 한 분 계시네요. 강유결 씨가 이름을 남겨 놓으셨어요.”
강유결. 낯선 사람이 입에 올린 이름이 귀에 쏙 들어왔다. 문득 그의 사진이 뇌리에 떠올랐다. 햇빛 같은 미소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지호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키가 큰 식물로 에워싸인 창가로 걸어갔다. 직원은 손짓을 하고 사라졌다. 지호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유리창을 뚫고 남자의 옆얼굴을 비추었다.
햇빛이 그의 반듯한 이마에서 우뚝하게 솟은 콧날을 지나 입체감이 분명한 입술로 떨어졌다. 그가 인기척을 느껴서인지 고개를 돌렸다. 온기를 품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이는 듯 움직였다.
그림 같다. 일순 창밖의 서울 풍경은 한가로운 호수로 변했고 눈앞의 남자는 서한주로 변했다. 은우와 한주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이 맑은 호수가 일렁이는 그의 별장이었다. 은우와 한주의 그다음 대사와 줄거리가 머릿속에서 줄줄 일어났다.
소설 속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호의 시선이 위로 따라 올라갔다. 꽤 키가 큰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유결입니다.”
“양지호입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지호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상대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호는 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부분적으로 꼼꼼히 뜯어보았다.
잘 어울리는 깔끔한 미색 셔츠와 짙은 색 팬츠, 길고 단정한 손가락, 부드럽게 뻗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언가가 못마땅해 보이는 눈.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며들자 지호는 퍼뜩 현실감이 들었다.
속내는 취재 차원이었지만 겉 무늬는 맞선이므로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딴청을 부리듯 허공을 쳐다보다 슬쩍 남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에게 향해 있고, 눈빛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가 미간을 살짝 모으고 뚫어지게 쳐다보니, 지은 죄는 없지만 한낱 티끌이라도 줄줄 토해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많이 늦었나.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니 10분 정도 늦었다. 시간을 황금처럼 생각하는 부류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한주도……. 아니지. 이렇게 머릿속이 온통 서한주라는 캐릭터 구현에 빠져 있으면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좀 시킬까요?”
지호가 생각을 차단하려고 불쑥 말을 꺼내자 대답이 없던 남자는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고 지호는 음료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전 아메리카노. 뭐로 하시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사이다 주세요. 얼음 넣어서.”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고 지호는 건너편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햇빛의 파편이 숨어 들어간 듯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반짝거렸다.
“더우세요?”
“네. 좀. 덥습니다.”
“코트를 벗으면 나으실 텐데요.”
지호는 타당한 그의 말에 말없이 아이보리색 코트를 벗었다.
착 달라붙은 블랙 원피스가 지호의 날씬한 몸매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맞선 때 입을 만한 정장 치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유가 입고 나가라며 기어코 빌려준 옷이다. 길이가 짧아 지호는 무심코 원피스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래도 불편함이 온몸을 에워싸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벗어 두었던 코트를 쳐다보았다.
저걸로 가리면 되겠다. 지호는 코트를 허벅지에 올려 두고 맞은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 속에 스민 햇빛 파편이 더욱 커져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듯 보이는 그 눈에, 지호는 관찰의 대상자가 전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일까. 조금 전까지는 분명 마뜩지 않은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신기한 것을 본다는 눈빛이었다.
직원이 다가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시원한 사이다 한 잔을 두고 갔다. 설마 사이다를 시켜서? 지호는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2월도 되기 전인데, 겨울바람은 꽤나 매서웠고 오늘은 한파가 지속된다는 기상 예보도 있었으니까.
아무리 호텔 난방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얼음을 띄운 사이다라니. 보통 맞선에서는 잘 시키지 않는 음료다. 갑자기 지유의 짱알짱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언니! 부모님이 주선한 맞선을 볼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해. 책잡히지 않게 적당히 예쁜 척, 얌전한 척, 모르는 척 내숭 떨다가 일어나야 한다고. 안 그럼 상대방이 맞선 실패의 책임을 언니에게 떠넘길 수도 있단 말이야.”
“알았어.”
“대충 대답하지 말고! 이러니까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상대가 누구건 간에 언니는 자기 스타일대로 굴 거잖아. 사소한 거라도 틈을 보이면 안 돼. 그걸 좋게 보면 솔직한 여자구나 할 테지만 나쁘게 보면 이상한 여자가 나왔네, 이럴 거라니까. 언니를 이상하게 여기는 순간 상대방이 맞선의 칼을 손에 쥐게 되는 거라고. 그 남자가 기분 나빠 봐. 그 칼을 휘두르며 자기 엄마한테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몰라.”
“알았어.”
무난한 커피를 시켰어야 했다. 지호는 아쉬운 눈으로 상대방의 커피를 바라보았다. 맞선을 보는 남자에게 칼을 쥐여 줘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옷을 제대로 입어야 했다.
엄마가 이 남자 칭찬하느라 바빴는데.
“엄친아시라고 들었습니다.”
“네?”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지호는 검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제가 알고 있는 그 뜻 맞습니까? 엄마 친구 아들?”
“네.”
남자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분위기로 보건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지호는 애써 밝게 말했다.
“강유결 씨 어머니와 제 어머니가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단짝이셨다고. 그런 분의 자제분이시니 엄친아시죠.”
“그럼 양지호 씨는 엄친딸이 되시는 겁니까?”
“네. 그렇죠.”
담담한 지호의 어조에 남자의 눈에는 웃음이 스며들었다.
“또 어머님이 저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잘나가는 의사시라고.”
“잘나가는?”
“예. 연봉은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알려 드려야 합니까, 연봉?”
“아니요. 알려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자가 너무 빤히 쳐다보니 지호는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이 간절했다. 마시려고 시켰지만, 사이다를 주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의도적으로 사이다를 외면하게 됐다. 하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지호는 물끄러미 사이다를 주시했다.
“지호 씨는 연봉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남자의 입에서 지호라는 이름이 친근감 있게 흘러나왔다. 지호는 사이다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전보다 편해져 있었다. 물어봐도 될까.
“다른 게 궁금한데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느긋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인상을 풀고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외면해도 그 사람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을 만나 봐도 자꾸 그 사람만 떠오릅니다. 이럴 때 서, 아니 강유결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지호의 질문을 가늠해 보려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선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의외라는 듯 그의 눈빛은 모호했다.
“답은 하나네요. 외면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도 사랑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강유결 씨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데도요?”
“대답은 이미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요. 사랑할 수 없다는 전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전제는 어쩌면 강유결 씨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이 내 인생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아도 그 무게를 견뎌 낼 겁니다. 그 사람이 날 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사랑이니까요.”
과연 서한주다운 대답이었다. 심장이 두둥, 하고 뛰었다. 지호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짓다 다시 물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죠?”
“누가 그래요? 내가 겪어 보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가 웃었다. 싱긋 웃는 그 깨끗한 미소가 지호의 눈에 박혔다. 겪어 봤다면 어떤 성질의 사랑이었을까 궁금했다. 더 이상 그가 서한주인지 변증할 필요가 없어졌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서한주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