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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군침 돌게 하는 여자
서해안 서산 대진항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섬, 사랑도는 섬 모양 전체가 심장 모양인 섬이었다.
이 사랑도에서는 할머니와 함께 사랑도의 유일한 거주자인 스물두 살 해녀 옥도미가 흥겹게 물질 중이었다. 전복과 소라를 따는 그녀의 손길이 가벼웠다.
‘오늘도 가득 따야지.’
하지만 날씨가 도미의 의욕을 도와주지 않았다.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파도가 어느새 거칠게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섬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바람이 흙냄새를 듬뿍 머금고, 허공을 찢을 듯 불어 댔다.
철수하는 게 맞았지만, 주문량을 맞추려면 더 따야 했다.
다시 숨을 참고 들어가려는데, 방파제에 선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 모델처럼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흰 얼굴에 얼핏 보아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었다. 남자에게서 멋진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어? 오늘 같은 날 누구지?’
무인도나 다름없어져서 낚시꾼들도 찾아오지 않는 사랑도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존재에 도미는 놀랐다.
하지만 놀랄 틈도 없이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파도가 이렇게 칠 때는 자칫하면 사람이 물에 휩쓸리는 사고가 종종 있어 왔다.
도미가 남자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비켜서요!”
남자는 도미의 목소리를 못 듣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저기요! 어흑!”
그때 정말 해일 같은 파도가 밀려들었다. 도미는 물에 띄워 놓은 스티로폼을 꼭 껴안고 파도를 탔다. 입으로 짠물이 와락 들어왔다.
눈을 떠 보니, 방파제에 있던 남자가 사라져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도미는 방파제 주위를 수영하며 돌았다. 다행히 방파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남자가 물속에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남자의 슈트 상의 목덜미를 끌고 해변으로 헤엄쳐 데리고 갔다. 축 늘어진 남자를 데리고 가느라 몇 번이나 물속으로 가라앉을 뻔했고, 짠물을 많이 먹었다.
발바닥이 바다 바닥에 닿자, 도미는 남자를 한쪽 어깨에 메고 부축을 했다.
“아이고, 무거워.”
그래도 남자를 구할 생각에 그를 모래사장에 바로 눕혔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도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몇 번 흔들어도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아, 그래. 인공호흡!’
바닷가에 살면 인공호흡은 필수였다. 고등학교 보건 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실습해 두었던 그녀였다.
주저하지 않고, 입술을 남자의 입술 위로 포갰다. 그의 입술 안으로 다급하게 뜨거운 숨결을 계속 불어 넣었다.
그래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미는 심폐 소생술을 하러 남자의 가슴에 올라탔다. 남자의 흉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기요! 제발 일어나 봐요!”
남자가 혹시라도 익사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겁이 와락 났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부짖었다.
“제발요! 제발 살아 줘요!”
그러다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서준은 뺨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 느낌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귓가에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조금 전, 방파제에 올라갔다가 해일처럼 밀려온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이내 누군가의 더운 숨이 마구 들어왔다.
이 사람 누구지? 인어 공주인가? 여기는 말로만 듣던 용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서준은 간신히 손을 움직여 힘없이 누군가를 밀어 냈다.
순간, 그 누군가가 그의 뺨을 철썩 때렸다.
그가 심 봉사 눈 뜨듯 눈을 번쩍 떴다. 검은 해녀복을 입은 여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 지금 어디를 만지시는 거예요?”
하필 손을 뻗은 곳이 여자의 가슴이었나 보다.
“미안합니다.”
그제야 그녀가 눈에 자세히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작고 통통한 체구, 바닷가 자갈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와 눈 밑에 살짝 난 갈색 주근깨가 그다지 특별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토파즈처럼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와 살짝 처진 눈매 때문에 그녀는 귀염성 있어 보였다.
어릴 때 키우던 포메라니안 ‘첫눈이’를 닮은 것 같았다. 눈빛이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그때 해를 가리던 먹구름이 살짝 비껴 나며,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후광처럼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평상시 딱딱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던 서준의 심장이 고장 난 서랍처럼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고의 후유증인 것일까. 심장이 떨려 왔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어나 한 여자를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서준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녀가 한 손에 반질반질한 돌을 들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으악! 뭐 하는 겁니까?”
서준이 도미를 밀치려 했으나, 도미가 좀 더 빨랐다. 그는 자신의 아래쪽에서 순식간에 무엇인가 뜯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것을 재빨리 돌로 찍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그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곤죽이 된 해파리를 대나무로 엮은 망에 철퍼덕 넣으며 대답했다.
“그쪽 거기에 이 독해파리가 붙었다고요. 그거 쏘이면 큰일 나거든요.”
도미의 맑은 눈과 서준의 눈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투명한 눈망울에 진심으로 안심해 하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순간 마음 한편에 이유 모를 이물감을 느끼며 모래사장에서 일어나 몸에 붙은 모래를 털어 냈다.
도미는 서준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남자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쌍커풀 없이 커다란 눈. 선으로 그린 듯 곧게 뻗은 코. 얄팍한 듯하지만, 붉은 물감으로 채색한 듯한 입술. 여름 바다처럼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솟은 푸른 실핏줄들.
도미는 홀린 듯 완벽한 그의 외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래를 터는 모습마저 비현실적으로 멋진 남자의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에요! 살아 줘서 고마워요.”
도미가 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정중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던 겁니까. 제 비서는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도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생각 안 나세요? 아까 물속에 빠지셨던 거.”
서준은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는 차가운 얼굴로 도미를 보았다.
“그래서 그쪽이 저를 구해 주셨다 이겁니까?”
“네. 그런 셈이죠.”
“얼마면 되죠?”
순간 도미 얼굴이 일그러졌다.
‘와, 이게 무슨 왕재수지?’
평화롭게 살던 이 섬에 다짜고짜 들어와 집을 팔라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돈 때문에, 함께 살던 주민들이 도미네만 남겨 놓고 모두 떠났다. 그때 집을 팔라고 하던 사람들이 뱉던 말도 이것이었다.
‘얼마면 됩니까?’
그 일이 생각나 그녀는 울컥했다.
“저기요. 사람이 구해 줬으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요?”
서준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목숨 살려 준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해 준다는 게 그리 화낼 일입니까?”
도미는 조금 전 방파제에 서 있던 사람이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기껏 한다는 얘기가 얼마면 되냐는 말이라는 게 새삼 기가 막혔다.
“아까 그쪽 죽은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근데 얼마면 되냐고 하면 단가요? 그래요. 주실 거면 10억쯤 주시든가요.”
급기야 그녀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다시 글썽였다.
정말 아까는 그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랐다.
“암튼 살았으니 됐어요. 그리고 그쪽! 그렇게 살지 말아요.”
살았으니 괜찮다는 말에 서준은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하, 웃기는 여자네.”
서준의 혼잣말을 듣지도 않고, 도미는 갯바위 위로 가볍게 올라가 뛰었다. 뛰는 폼이 꼭 산으로 들로 제멋대로 쏘다니는 망아지 같았다.
서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러다 불쑥 나온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넘어졌다. 그가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좀 덜렁대는 편인 것 같았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호통치기는.’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간 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만나 본 여자들과는 다른 감정이 들게 하는 여자였다.
서준은 그녀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갈등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작은 감정의 동요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난데없이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서인 태우가 도미를 지나쳐 서준에게 뛰어왔다. 도미는 지나쳐 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단정한 갈색 눈썹, 동그랗고 커다란 눈, 높은 코와 선명한 입술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전반적으로 차분한 인상에 지적으로 보였다.
도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휴, 이 남자도 만만치 않게 잘생겼네.’
남자는 일단 도미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섬에서 본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도미에게 곧 시선을 거두고, 저 멀리 보이는 아까 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거기 계셨군요.”
남자는 그 남자를 향해 뛰었다.
190이 넘어 보이는 아까 그 남자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그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아까 그 남자가 조금 더 강렬하게 생긴 미남이라면, 방금 지나간 그 남자는 단정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태우는 젖어 버린 서준을 보고 경악하며 말했다.
“핸드폰 기지국 잡히는 곳에서 오후 일정을 조정하다 보니, 사장님이 사라지셨더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만 서울로 가지.”
“태풍이 갑자기 항로를 틀어 서해안으로 오고 있답니다. 기상청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오늘은 헬리콥터 운행이 어렵습니다. 이런 날 운행하면 큰 사고 납니다.”
“그럼 배를 구해 봐.”
“알아봤는데, 오늘 날씨에는 운항이 어렵답니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져, 서준의 얼굴에 따갑게 꽂혔다. 서준이 얼굴을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 이주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렇게 보고받았는데 말입니다,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아까 그 아가씨가 아직 이 섬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사장님 지금 몇 끼째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그 여자, 나한테 대드는 게 거슬리더군.”
“아니, 사장님한테 대드는 사람도 있습니까?”
재계 서열 20위인 용호그룹 홈 쇼핑 사장인 서준이었다.
사람들은 독사 같은 말을 쏟아 내는 서준을 보고 ‘독사준’이라고 수군거렸다.
누구와 같이 밥 먹는 모습조차 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뱀파이어라는 둥, 집무실에서 피를 먹는다는 둥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사람들 중 누구도 대놓고 서준의 의견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가 홈 쇼핑을 맡은 후 200% 매출 신장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완벽주의 성향과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서준은 차가운 표정만으로 20년 넘게 홈 쇼핑에서 일해 온 간부들을 얼어붙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서준에게 처음 보는 여자가 대들었다고 하니 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우는 흥미로운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의 얼굴에서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옷은 왜 그러십니까?”
“파도에 휩쓸렸어. 아까 그 여자가 날 구해 줬어.”
“인어 공주라도 되나요?”
“인어 공주는 개뿔. 그렇게 뚱뚱하고 다리가 짧은 공주도 있나? 헬기에서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 집에는 안 가.”
태우는 유독 발끈하며 화내는 서준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
1. 군침 돌게 하는 여자
서해안 서산 대진항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섬, 사랑도는 섬 모양 전체가 심장 모양인 섬이었다.
이 사랑도에서는 할머니와 함께 사랑도의 유일한 거주자인 스물두 살 해녀 옥도미가 흥겹게 물질 중이었다. 전복과 소라를 따는 그녀의 손길이 가벼웠다.
‘오늘도 가득 따야지.’
하지만 날씨가 도미의 의욕을 도와주지 않았다.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왔을 때 파도가 어느새 거칠게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듯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섬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바람이 흙냄새를 듬뿍 머금고, 허공을 찢을 듯 불어 댔다.
철수하는 게 맞았지만, 주문량을 맞추려면 더 따야 했다.
다시 숨을 참고 들어가려는데, 방파제에 선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 양복을 입고, 모델처럼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흰 얼굴에 얼핏 보아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끌었다. 남자에게서 멋진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어? 오늘 같은 날 누구지?’
무인도나 다름없어져서 낚시꾼들도 찾아오지 않는 사랑도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존재에 도미는 놀랐다.
하지만 놀랄 틈도 없이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파도가 이렇게 칠 때는 자칫하면 사람이 물에 휩쓸리는 사고가 종종 있어 왔다.
도미가 남자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비켜서요!”
남자는 도미의 목소리를 못 듣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저기요! 어흑!”
그때 정말 해일 같은 파도가 밀려들었다. 도미는 물에 띄워 놓은 스티로폼을 꼭 껴안고 파도를 탔다. 입으로 짠물이 와락 들어왔다.
눈을 떠 보니, 방파제에 있던 남자가 사라져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도미는 방파제 주위를 수영하며 돌았다. 다행히 방파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남자가 물속에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남자의 슈트 상의 목덜미를 끌고 해변으로 헤엄쳐 데리고 갔다. 축 늘어진 남자를 데리고 가느라 몇 번이나 물속으로 가라앉을 뻔했고, 짠물을 많이 먹었다.
발바닥이 바다 바닥에 닿자, 도미는 남자를 한쪽 어깨에 메고 부축을 했다.
“아이고, 무거워.”
그래도 남자를 구할 생각에 그를 모래사장에 바로 눕혔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도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몇 번 흔들어도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아, 그래. 인공호흡!’
바닷가에 살면 인공호흡은 필수였다. 고등학교 보건 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실습해 두었던 그녀였다.
주저하지 않고, 입술을 남자의 입술 위로 포갰다. 그의 입술 안으로 다급하게 뜨거운 숨결을 계속 불어 넣었다.
그래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미는 심폐 소생술을 하러 남자의 가슴에 올라탔다. 남자의 흉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저기요! 제발 일어나 봐요!”
남자가 혹시라도 익사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겁이 와락 났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부짖었다.
“제발요! 제발 살아 줘요!”
그러다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서준은 뺨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은 느낌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귓가에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조금 전, 방파제에 올라갔다가 해일처럼 밀려온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이내 누군가의 더운 숨이 마구 들어왔다.
이 사람 누구지? 인어 공주인가? 여기는 말로만 듣던 용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서준은 간신히 손을 움직여 힘없이 누군가를 밀어 냈다.
순간, 그 누군가가 그의 뺨을 철썩 때렸다.
그가 심 봉사 눈 뜨듯 눈을 번쩍 떴다. 검은 해녀복을 입은 여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 지금 어디를 만지시는 거예요?”
하필 손을 뻗은 곳이 여자의 가슴이었나 보다.
“미안합니다.”
그제야 그녀가 눈에 자세히 들어왔다. 자그마한 키에 작고 통통한 체구, 바닷가 자갈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와 눈 밑에 살짝 난 갈색 주근깨가 그다지 특별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토파즈처럼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와 살짝 처진 눈매 때문에 그녀는 귀염성 있어 보였다.
어릴 때 키우던 포메라니안 ‘첫눈이’를 닮은 것 같았다. 눈빛이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그때 해를 가리던 먹구름이 살짝 비껴 나며, 눈부신 햇살이 그녀를 후광처럼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평상시 딱딱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던 서준의 심장이 고장 난 서랍처럼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고의 후유증인 것일까. 심장이 떨려 왔다.
어쩐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어나 한 여자를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서준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녀가 한 손에 반질반질한 돌을 들고 눈을 희번덕거렸다.
“으악! 뭐 하는 겁니까?”
서준이 도미를 밀치려 했으나, 도미가 좀 더 빨랐다. 그는 자신의 아래쪽에서 순식간에 무엇인가 뜯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것을 재빨리 돌로 찍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그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곤죽이 된 해파리를 대나무로 엮은 망에 철퍼덕 넣으며 대답했다.
“그쪽 거기에 이 독해파리가 붙었다고요. 그거 쏘이면 큰일 나거든요.”
도미의 맑은 눈과 서준의 눈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투명한 눈망울에 진심으로 안심해 하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순간 마음 한편에 이유 모를 이물감을 느끼며 모래사장에서 일어나 몸에 붙은 모래를 털어 냈다.
도미는 서준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남자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쌍커풀 없이 커다란 눈. 선으로 그린 듯 곧게 뻗은 코. 얄팍한 듯하지만, 붉은 물감으로 채색한 듯한 입술. 여름 바다처럼 투명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솟은 푸른 실핏줄들.
도미는 홀린 듯 완벽한 그의 외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래를 터는 모습마저 비현실적으로 멋진 남자의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에요! 살아 줘서 고마워요.”
도미가 서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정중하게 뿌리치며 말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던 겁니까. 제 비서는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도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생각 안 나세요? 아까 물속에 빠지셨던 거.”
서준은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는 차가운 얼굴로 도미를 보았다.
“그래서 그쪽이 저를 구해 주셨다 이겁니까?”
“네. 그런 셈이죠.”
“얼마면 되죠?”
순간 도미 얼굴이 일그러졌다.
‘와, 이게 무슨 왕재수지?’
평화롭게 살던 이 섬에 다짜고짜 들어와 집을 팔라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돈 때문에, 함께 살던 주민들이 도미네만 남겨 놓고 모두 떠났다. 그때 집을 팔라고 하던 사람들이 뱉던 말도 이것이었다.
‘얼마면 됩니까?’
그 일이 생각나 그녀는 울컥했다.
“저기요. 사람이 구해 줬으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요?”
서준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목숨 살려 준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해 준다는 게 그리 화낼 일입니까?”
도미는 조금 전 방파제에 서 있던 사람이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기껏 한다는 얘기가 얼마면 되냐는 말이라는 게 새삼 기가 막혔다.
“아까 그쪽 죽은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근데 얼마면 되냐고 하면 단가요? 그래요. 주실 거면 10억쯤 주시든가요.”
급기야 그녀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다시 글썽였다.
정말 아까는 그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몰랐다.
“암튼 살았으니 됐어요. 그리고 그쪽! 그렇게 살지 말아요.”
살았으니 괜찮다는 말에 서준은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하, 웃기는 여자네.”
서준의 혼잣말을 듣지도 않고, 도미는 갯바위 위로 가볍게 올라가 뛰었다. 뛰는 폼이 꼭 산으로 들로 제멋대로 쏘다니는 망아지 같았다.
서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러다 불쑥 나온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넘어졌다. 그가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는 좀 덜렁대는 편인 것 같았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호통치기는.’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간 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만나 본 여자들과는 다른 감정이 들게 하는 여자였다.
서준은 그녀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갈등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작은 감정의 동요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다. 난데없이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서인 태우가 도미를 지나쳐 서준에게 뛰어왔다. 도미는 지나쳐 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단정한 갈색 눈썹, 동그랗고 커다란 눈, 높은 코와 선명한 입술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전반적으로 차분한 인상에 지적으로 보였다.
도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휴, 이 남자도 만만치 않게 잘생겼네.’
남자는 일단 도미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섬에서 본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도미에게 곧 시선을 거두고, 저 멀리 보이는 아까 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거기 계셨군요.”
남자는 그 남자를 향해 뛰었다.
190이 넘어 보이는 아까 그 남자보다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그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아까 그 남자가 조금 더 강렬하게 생긴 미남이라면, 방금 지나간 그 남자는 단정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태우는 젖어 버린 서준을 보고 경악하며 말했다.
“핸드폰 기지국 잡히는 곳에서 오후 일정을 조정하다 보니, 사장님이 사라지셨더군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만 서울로 가지.”
“태풍이 갑자기 항로를 틀어 서해안으로 오고 있답니다. 기상청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오늘은 헬리콥터 운행이 어렵습니다. 이런 날 운행하면 큰 사고 납니다.”
“그럼 배를 구해 봐.”
“알아봤는데, 오늘 날씨에는 운항이 어렵답니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져, 서준의 얼굴에 따갑게 꽂혔다. 서준이 얼굴을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 이주 다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그렇게 보고받았는데 말입니다,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아까 그 아가씨가 아직 이 섬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사장님 지금 몇 끼째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그 여자, 나한테 대드는 게 거슬리더군.”
“아니, 사장님한테 대드는 사람도 있습니까?”
재계 서열 20위인 용호그룹 홈 쇼핑 사장인 서준이었다.
사람들은 독사 같은 말을 쏟아 내는 서준을 보고 ‘독사준’이라고 수군거렸다.
누구와 같이 밥 먹는 모습조차 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뱀파이어라는 둥, 집무실에서 피를 먹는다는 둥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사람들 중 누구도 대놓고 서준의 의견에 토를 달 수 없었다. 그가 홈 쇼핑을 맡은 후 200% 매출 신장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완벽주의 성향과 뛰어난 사업 수완 덕분이었다.
서준은 차가운 표정만으로 20년 넘게 홈 쇼핑에서 일해 온 간부들을 얼어붙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서준에게 처음 보는 여자가 대들었다고 하니 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우는 흥미로운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의 얼굴에서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옷은 왜 그러십니까?”
“파도에 휩쓸렸어. 아까 그 여자가 날 구해 줬어.”
“인어 공주라도 되나요?”
“인어 공주는 개뿔. 그렇게 뚱뚱하고 다리가 짧은 공주도 있나? 헬기에서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 집에는 안 가.”
태우는 유독 발끈하며 화내는 서준을 미심쩍은 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