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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장. 체크메이트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이주가 결정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요정 왕 오베론의 목이 굴러 떨어졌다. 티타니아는 남편의 머리를 걷어찼다. 이제는 왕비가 아닌 왕이 된 티타니아는 의문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세 개의 대륙 어디든 인간이 살았다. 그들은 인간의 번식 속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대륙의 주인은 이제 인간이 되었다. 난쟁이 왕은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보다 탐욕스러운 것들이 닿지 않은 땅이 있겠나?”
5월의 마녀가 입을 열었다.
“없다면 만들도록 하죠.”
늘 기권 표를 던졌던 12월의 마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끼던 인간 소년을 그녀에게 빼앗긴 후로 12월의 마녀는 5월의 마녀가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지?”
모인 무리가 웅성거렸다. 12월의 마녀는 가슴을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린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어. 도망치는 대신에!”
“그건 너무 인간 같은 소리야.”
티타이나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한 주제에 탐욕스럽고 잔인한 것들. 적어도 그들은 좀 더 품위가 있었다. 5월의 마녀에게 다시 눈이 모였다. 12월의 마녀는 분에 차서 이를 갈았다.
“제가 만들도록 하죠. 우리들의 땅을.”
5월의 마녀가 말하자 난쟁이 왕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위대해질 걸세.”
서, 남, 북, 세 개의 대륙에서 인간이 아닌 것들이 전설로 사라졌다. 100여 년도 살지 않은 5월의 마녀는 그 때부터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다.
위대한 마녀, 위트니로.
[니들이 모르는 역사] 中
샬롯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어젯밤 위장에 들이부었던 술은 입에는 달았으나, 그게 그녀의 첫 음주였기에 주량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으…….”
앓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꿈틀거리자 뭔가 따뜻한 체온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샬롯은 깨끗해진 시야에 드러난 벌거벗은 가슴팍에 눈을 끔뻑였다.
갈색으로 탄 피부 아래에 근육이 꽉 차 있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그녀는 어쩐지 감각이 없는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기가 두려워졌다. 눈을 굴려 위를 쳐다보니 단단한 턱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파악해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위대한 마녀 위트니의 107년 짧은 인생에서 본 하나뿐인 딸, 샬롯 위트니 그린필은 맹세코 인생을 말아먹을 계획이 없었다.
샬롯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와 샬롯을 버리고 공주님과 결혼하겠다고 떠나갔을 때부터, 샬롯의 어머니, 위대한 마녀 위트니는 그녀에게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
특히 위트니는 어딘가 맹한 그녀의 딸에게 몇 번이나 더 강조했다.
남자는 인생에서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최악의 존재라고! 그녀는 샬롯을 사랑했지만, 샬롯이 하룻밤 실수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위대한 마녀 위트니의 인생 계획이 망가졌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샬롯은 그 사실에 그다지 상처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사랑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정신적 자산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위트니는 위대한 마녀답게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위트니의 하나뿐인 딸인 샬롯에게 상속되었다.
열 살 때 위트니의 죽음으로 강제로 아버지에게 맡겨진 샬롯은 그로부터 5년 뒤, 어머니의 친우라는 마녀 포피로부터 위트니가 남긴 유산에 대해 알고 인생은 역시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하나뿐인 공주와 결혼함으로서, 결국 여왕의 부군, 즉 대공 위에 오른 그린필 대공은 젊은 시절 실수의 결과인 샬롯을 정말 꺼림칙하게 여겼다.
뭐 샬롯은 나름 관대하게 이해했다. 백작이었던 그를 대공으로 만들어 준 여왕에게 사생아를 보이기 민망했겠지. 그건 공주가 이미 전남편에게서 두 명의 자식을 본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을 것이다.
그녀는 열 살 때부터 왕궁의 마구간 옆에 있는 궁인지 오두막인지 모를 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래 섞인 밀가루 몇 포대를 배급받아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위대한 마녀 위트니를 좁쌀만큼은 닮았는지 생활 마법은 제법 부릴 수 있었기에 사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아니었더라면 죽도록 원망했을 테지만.
아니 솔직히 옷도 한 벌 안 주고, 난방도 안 되고 벽이 숭숭 뚫린 말만 궁인 곳에서 평범한 열 살짜리 애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왕실 가족 모두의 경멸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물론 샬롯은 신경도 안 썼다.─ 그녀는 착실하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학대받고,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은 불쌍한 아이를 말이다.
샬롯은 연기를 하면서 착실하게 성인이 될 날을 기다렸다. 위트니의 유산을 정식으로 물려받아 떠날 수 있을 나이를!
그리고 드디어 스무 살, 성인이 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시한부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신이 있다면, 양심도 없지!
불쌍한 샬롯, 본인이야 편안하게 살았지만 아무튼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샬롯의 꿈과 희망을 이렇게 산산조각 낼 줄이야.
병명은 마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마력 고갈병이었다. 위대한 위트니의 면모를 거의 물려받지 못한 샬롯은 슬프게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기본 마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는 판정을 마녀 포피에게서 받았다.
10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10년뿐이었다.
샬롯은 그녀가 지지리도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위트니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고작 10년밖에 누리지 못한다니! 거기다가 그녀가 죽으면 끔찍하게도 그녀의 재산은 아버지, 그린필 대공에게로 갔다!
그녀는 죽는 것보다 유산이 빌어먹을 아버지에게 간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따라서 샬롯은 아이를 갖기로 했다. 삼대가 놀고먹어도 아깝지 않을 그녀의 재산을 물려받을 아이를!
샬롯은 아이에게 부모란 존재가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랑해 주고 아껴 줄 보호자였다. 그게 부모라면 더 좋겠지만, 아니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쓰레기인 그린필 대공과 같은 아버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샬롯은 오롯이 그녀에게 속한 아이가 갖고 싶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필요 없었다.
내가 낳고, 내가 키우고, 내가 사랑할 텐데. 말하지도 않으면 존재조차 모를 아비가 꼭 필요할까? 말해 봤자 사생아라 멸시할 아비가?
샬롯은 남녀가 만나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비문명화 된 방식에 분노하며,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기준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전적인 결함이 없을 것.
둘째, 사생아를 절대 받아 주지 않을 정도의 가문일 것.
셋째, 절대 그녀의 신분을 알 만큼 높은 신분은 아닐 것.
그러니까 당연히 어쩌다 잔 남자가 그녀의 의붓오라버니였던 건 그다지 계획에 있었던 일이 아니지! 애초에 세 번째 조건에서 틀려먹었잖아.
엄마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인생에서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최악의 존재라고.
남자 없이도 애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을 일찍이 엄마가 개발해 두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그녀는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아니, 왕자님이 왜 여기 있어?
샬롯은 얼굴 본 지도 오래된 의붓오라버니의 품 안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머리를 엉망인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어젯밤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만나러 뒷골목의 고급 창관으로 갔다. 돈에 눈이 돌아간 남창들을 보니 이놈들과 애를 만들었다가는 재산만 빼앗기기 딱 좋았다. 엮이면 답이 없어 보였다.
오. 그럼 날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를 만나면 되겠네.
그녀는 그 생각과 함께 마담 코와르 살롱에 들어섰다. 도대체 왜 살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알 수 없는 창관은 하급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녀가 정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들이 대강 굴러다닐 곳이라 여겼다.
오는 인간들이야 어차피 사생아를 원하지 않을 인간이었으니, 아무나 만나서 애를 만들면 설마 찾으러 오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룻밤 샀던 여자를 그리 오래 기억을 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도 나름 섞여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손님을 방으로 보내 달라고 주인 마담에게 돈까지 쥐어 주고, 혹시나 몰라 머리까지 염색에 화장도 단단히 했다.
그리고 밤이 되기 전에 잠시 거기 있던 여자들과 긴장을 풀 겸 술을 한두 잔 마시다가…….
마시다가 기억이 없다.
샬롯은 뺨에 닿는 오라비의 가슴팍과 허리를 감싸고 있는 무거운 팔에 그녀가 또 지지리도 운이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긴 속눈썹을 자랑하는 그녀의 의붓오라비인 레슬리 웨이필드의 눈이 감겨 있음을 확인했다.
이 인간이 도대체 왜 여기 있지?
레슬리 웨이필드, 이본느 여왕의 장남, 그린필 대공의 의붓아들, 다음 대 왕위를 이을 위튼 왕국의 첫째 왕자님.
미모로 서대륙에 이름을 날린 이본느 여왕을 꼭 닮은 스물셋의 젊고 인기가 넘치는 이 왕자란 양반이 왜 뒷골목에 굴러다니고 있는 건데……?
아니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고 탈출하자.
샬롯은 그녀에게 늘 서늘한 눈초리로 쏘아보기만 했던 레슬리를 잘 알고 있었다. 무관심에 가까운 왕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싫어하는 티를 냈던 의붓오라비가 이 상황을 안다면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샬롯은 조심스럽게 허리에 걸쳐진 무거운 팔을 치워 냈다. 일상생활조차 마력으로 대신하는 바람에 근육 한 점 없는 샬롯에게 근육으로 꽉 찬 몸은 버거웠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샬롯은 부르르 떨면서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드레스를 슬픈 눈으로 응시했다. 엄격과 근엄함의 화신인 이 인간은 도대체 왜 그녀의 옷을 찢어발겨 놨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온몸의 근육들이 ‘넌 평소에 날 소중히 하지 않았지.’라며 존재감을 알려 댔다.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그녀는 근육으로 잘 짜인 그의 등을 흘겨보며 신음을 삼켰다.
깨우면 안 된다. 깨우면.
거의 네 발로 기어가면서 찢어진 드레스를 몸에 간신히 걸치고 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에서 어제 어울렸던 여자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테?”
어제 댔던 가명을 부르는 여자를 향해 샬롯은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를 부르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샬롯의 까무룩한 정신은 짐승 같은 놈, 이라던가 내 인생 계획, 따위의 단어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져야 할 일이었다.
* * *
레슬리 웨이필드는 샬롯 그린필을 싫어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마녀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덩치에 맞지도 않은 해진 드레스를 입은 양부의 사생아.
가장 구석진 궁에서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열 살 때와 다르지 않게 하얗고 작고 마른 그 소녀는 레슬리의 머릿속을 종종 점령하곤 했다. 이제 그 애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레슬리에게 그 애는 늘 소녀였다.
처음 봤을 때처럼.
흙바닥 위에 작고 하얀 발을 디딘 채로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던 그 커다랗기만 한 파란 눈동자.
그는 그 애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볼품없이 마른 몸과 해지고 찢어진 드레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흰 피부, 아니 그게 아니라.
레슬리는 차라리 눈을 감고 다른 여자들을 생각했다. 검은 머리가 아니고, 푸른 눈동자가 아니고, 그렇게 마르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그렇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는 여자들을.
그는 샬롯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 더럽고 볼품없는 사생아에 대해 그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늘 계획되어 있었고, 거기에 샬롯의 자리는 없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 여왕을 닮아 철저하고 까다로운, 왕이 될 자로서는 훌륭한 성정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레슬리 웨이필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일 리가 없었다.
서장. 체크메이트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이주가 결정되었다.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요정 왕 오베론의 목이 굴러 떨어졌다. 티타니아는 남편의 머리를 걷어찼다. 이제는 왕비가 아닌 왕이 된 티타니아는 의문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세 개의 대륙 어디든 인간이 살았다. 그들은 인간의 번식 속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대륙의 주인은 이제 인간이 되었다. 난쟁이 왕은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보다 탐욕스러운 것들이 닿지 않은 땅이 있겠나?”
5월의 마녀가 입을 열었다.
“없다면 만들도록 하죠.”
늘 기권 표를 던졌던 12월의 마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끼던 인간 소년을 그녀에게 빼앗긴 후로 12월의 마녀는 5월의 마녀가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지?”
모인 무리가 웅성거렸다. 12월의 마녀는 가슴을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린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어. 도망치는 대신에!”
“그건 너무 인간 같은 소리야.”
티타이나의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약한 주제에 탐욕스럽고 잔인한 것들. 적어도 그들은 좀 더 품위가 있었다. 5월의 마녀에게 다시 눈이 모였다. 12월의 마녀는 분에 차서 이를 갈았다.
“제가 만들도록 하죠. 우리들의 땅을.”
5월의 마녀가 말하자 난쟁이 왕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위대해질 걸세.”
서, 남, 북, 세 개의 대륙에서 인간이 아닌 것들이 전설로 사라졌다. 100여 년도 살지 않은 5월의 마녀는 그 때부터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다.
위대한 마녀, 위트니로.
[니들이 모르는 역사] 中
샬롯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어젯밤 위장에 들이부었던 술은 입에는 달았으나, 그게 그녀의 첫 음주였기에 주량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으…….”
앓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꿈틀거리자 뭔가 따뜻한 체온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샬롯은 깨끗해진 시야에 드러난 벌거벗은 가슴팍에 눈을 끔뻑였다.
갈색으로 탄 피부 아래에 근육이 꽉 차 있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그녀는 어쩐지 감각이 없는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기가 두려워졌다. 눈을 굴려 위를 쳐다보니 단단한 턱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파악해 보면…….
아무래도 그녀는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위대한 마녀 위트니의 107년 짧은 인생에서 본 하나뿐인 딸, 샬롯 위트니 그린필은 맹세코 인생을 말아먹을 계획이 없었다.
샬롯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와 샬롯을 버리고 공주님과 결혼하겠다고 떠나갔을 때부터, 샬롯의 어머니, 위대한 마녀 위트니는 그녀에게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
특히 위트니는 어딘가 맹한 그녀의 딸에게 몇 번이나 더 강조했다.
남자는 인생에서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최악의 존재라고! 그녀는 샬롯을 사랑했지만, 샬롯이 하룻밤 실수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위대한 마녀 위트니의 인생 계획이 망가졌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샬롯은 그 사실에 그다지 상처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사랑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정신적 자산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위트니는 위대한 마녀답게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위트니의 하나뿐인 딸인 샬롯에게 상속되었다.
열 살 때 위트니의 죽음으로 강제로 아버지에게 맡겨진 샬롯은 그로부터 5년 뒤, 어머니의 친우라는 마녀 포피로부터 위트니가 남긴 유산에 대해 알고 인생은 역시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하나뿐인 공주와 결혼함으로서, 결국 여왕의 부군, 즉 대공 위에 오른 그린필 대공은 젊은 시절 실수의 결과인 샬롯을 정말 꺼림칙하게 여겼다.
뭐 샬롯은 나름 관대하게 이해했다. 백작이었던 그를 대공으로 만들어 준 여왕에게 사생아를 보이기 민망했겠지. 그건 공주가 이미 전남편에게서 두 명의 자식을 본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을 것이다.
그녀는 열 살 때부터 왕궁의 마구간 옆에 있는 궁인지 오두막인지 모를 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모래 섞인 밀가루 몇 포대를 배급받아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위대한 마녀 위트니를 좁쌀만큼은 닮았는지 생활 마법은 제법 부릴 수 있었기에 사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아니었더라면 죽도록 원망했을 테지만.
아니 솔직히 옷도 한 벌 안 주고, 난방도 안 되고 벽이 숭숭 뚫린 말만 궁인 곳에서 평범한 열 살짜리 애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왕실 가족 모두의 경멸하는 눈빛을 받으면서─물론 샬롯은 신경도 안 썼다.─ 그녀는 착실하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학대받고,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은 불쌍한 아이를 말이다.
샬롯은 연기를 하면서 착실하게 성인이 될 날을 기다렸다. 위트니의 유산을 정식으로 물려받아 떠날 수 있을 나이를!
그리고 드디어 스무 살, 성인이 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시한부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신이 있다면, 양심도 없지!
불쌍한 샬롯, 본인이야 편안하게 살았지만 아무튼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샬롯의 꿈과 희망을 이렇게 산산조각 낼 줄이야.
병명은 마녀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마력 고갈병이었다. 위대한 위트니의 면모를 거의 물려받지 못한 샬롯은 슬프게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기본 마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는 판정을 마녀 포피에게서 받았다.
10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10년뿐이었다.
샬롯은 그녀가 지지리도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위트니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고작 10년밖에 누리지 못한다니! 거기다가 그녀가 죽으면 끔찍하게도 그녀의 재산은 아버지, 그린필 대공에게로 갔다!
그녀는 죽는 것보다 유산이 빌어먹을 아버지에게 간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따라서 샬롯은 아이를 갖기로 했다. 삼대가 놀고먹어도 아깝지 않을 그녀의 재산을 물려받을 아이를!
샬롯은 아이에게 부모란 존재가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랑해 주고 아껴 줄 보호자였다. 그게 부모라면 더 좋겠지만, 아니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쓰레기인 그린필 대공과 같은 아버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샬롯은 오롯이 그녀에게 속한 아이가 갖고 싶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필요 없었다.
내가 낳고, 내가 키우고, 내가 사랑할 텐데. 말하지도 않으면 존재조차 모를 아비가 꼭 필요할까? 말해 봤자 사생아라 멸시할 아비가?
샬롯은 남녀가 만나야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비문명화 된 방식에 분노하며, 남자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기준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전적인 결함이 없을 것.
둘째, 사생아를 절대 받아 주지 않을 정도의 가문일 것.
셋째, 절대 그녀의 신분을 알 만큼 높은 신분은 아닐 것.
그러니까 당연히 어쩌다 잔 남자가 그녀의 의붓오라버니였던 건 그다지 계획에 있었던 일이 아니지! 애초에 세 번째 조건에서 틀려먹었잖아.
엄마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인생에서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최악의 존재라고.
남자 없이도 애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을 일찍이 엄마가 개발해 두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그녀는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아니, 왕자님이 왜 여기 있어?
샬롯은 얼굴 본 지도 오래된 의붓오라버니의 품 안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머리를 엉망인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어젯밤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만나러 뒷골목의 고급 창관으로 갔다. 돈에 눈이 돌아간 남창들을 보니 이놈들과 애를 만들었다가는 재산만 빼앗기기 딱 좋았다. 엮이면 답이 없어 보였다.
오. 그럼 날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를 만나면 되겠네.
그녀는 그 생각과 함께 마담 코와르 살롱에 들어섰다. 도대체 왜 살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알 수 없는 창관은 하급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녀가 정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들이 대강 굴러다닐 곳이라 여겼다.
오는 인간들이야 어차피 사생아를 원하지 않을 인간이었으니, 아무나 만나서 애를 만들면 설마 찾으러 오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룻밤 샀던 여자를 그리 오래 기억을 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도 나름 섞여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손님을 방으로 보내 달라고 주인 마담에게 돈까지 쥐어 주고, 혹시나 몰라 머리까지 염색에 화장도 단단히 했다.
그리고 밤이 되기 전에 잠시 거기 있던 여자들과 긴장을 풀 겸 술을 한두 잔 마시다가…….
마시다가 기억이 없다.
샬롯은 뺨에 닿는 오라비의 가슴팍과 허리를 감싸고 있는 무거운 팔에 그녀가 또 지지리도 운이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긴 속눈썹을 자랑하는 그녀의 의붓오라비인 레슬리 웨이필드의 눈이 감겨 있음을 확인했다.
이 인간이 도대체 왜 여기 있지?
레슬리 웨이필드, 이본느 여왕의 장남, 그린필 대공의 의붓아들, 다음 대 왕위를 이을 위튼 왕국의 첫째 왕자님.
미모로 서대륙에 이름을 날린 이본느 여왕을 꼭 닮은 스물셋의 젊고 인기가 넘치는 이 왕자란 양반이 왜 뒷골목에 굴러다니고 있는 건데……?
아니 일단 고민은 나중에 하고 탈출하자.
샬롯은 그녀에게 늘 서늘한 눈초리로 쏘아보기만 했던 레슬리를 잘 알고 있었다. 무관심에 가까운 왕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싫어하는 티를 냈던 의붓오라비가 이 상황을 안다면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샬롯은 조심스럽게 허리에 걸쳐진 무거운 팔을 치워 냈다. 일상생활조차 마력으로 대신하는 바람에 근육 한 점 없는 샬롯에게 근육으로 꽉 찬 몸은 버거웠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샬롯은 부르르 떨면서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드레스를 슬픈 눈으로 응시했다. 엄격과 근엄함의 화신인 이 인간은 도대체 왜 그녀의 옷을 찢어발겨 놨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온몸의 근육들이 ‘넌 평소에 날 소중히 하지 않았지.’라며 존재감을 알려 댔다.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그녀는 근육으로 잘 짜인 그의 등을 흘겨보며 신음을 삼켰다.
깨우면 안 된다. 깨우면.
거의 네 발로 기어가면서 찢어진 드레스를 몸에 간신히 걸치고 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에서 어제 어울렸던 여자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테?”
어제 댔던 가명을 부르는 여자를 향해 샬롯은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를 부르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샬롯의 까무룩한 정신은 짐승 같은 놈, 이라던가 내 인생 계획, 따위의 단어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확실한 건,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져야 할 일이었다.
* * *
레슬리 웨이필드는 샬롯 그린필을 싫어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마녀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덩치에 맞지도 않은 해진 드레스를 입은 양부의 사생아.
가장 구석진 궁에서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지 열 살 때와 다르지 않게 하얗고 작고 마른 그 소녀는 레슬리의 머릿속을 종종 점령하곤 했다. 이제 그 애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도, 레슬리에게 그 애는 늘 소녀였다.
처음 봤을 때처럼.
흙바닥 위에 작고 하얀 발을 디딘 채로 멍청하게 그를 쳐다보던 그 커다랗기만 한 파란 눈동자.
그는 그 애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볼품없이 마른 몸과 해지고 찢어진 드레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흰 피부, 아니 그게 아니라.
레슬리는 차라리 눈을 감고 다른 여자들을 생각했다. 검은 머리가 아니고, 푸른 눈동자가 아니고, 그렇게 마르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그렇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는 여자들을.
그는 샬롯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 더럽고 볼품없는 사생아에 대해 그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의 인생은 늘 계획되어 있었고, 거기에 샬롯의 자리는 없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 여왕을 닮아 철저하고 까다로운, 왕이 될 자로서는 훌륭한 성정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레슬리 웨이필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일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