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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1. 거트루드의 밤(4)
아니, 신은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죽어서 멱살이라도 잡을 게 아닌가.
“오늘은 색깔이 보였어?”
닫히는 문과 함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얼굴이 침대에 앉아 있는 샬롯의 바로 눈앞에 도착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금수의 것 같은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샬롯은 숨을 멈췄다.
단단하게 굳은 턱과 비틀린 입술은 레슬리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렸다. 물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왜?”
얇은 입술이 뱉어 내는 말에 샬롯은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맙소사. 그건 그가 제정신이라는 걸 뜻했다. 그녀는 그가 부디 샬롯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 않기를, 그녀가 제대로 연기를 해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젠장.
“손님 받아야지.”
목소리가 좀 더 매끄러워졌지만, 샬롯은 그게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눈을 들지도 못했다. 이번에도 눈동자 색은 바꾸지 못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그가 혹시 궁에서 쫓겨났을 적 자신과 공통점을 찾아낼 지도 몰랐다.
물론 그만큼 레슬리가 샬롯이나 거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낮인데…….”
샬롯은 그녀를 가둔 그의 양팔을 살짝 밀어 내며 속삭였다. 내일 확실히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레슬리가 씨 없는 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으니 그와 자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들킬 위험까지 있다면 더더욱!
“그럼 방금은?”
“잠깐 대화만, 하려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어서, 그래서 잠깐 대화만…….”
“너 이름이?”
샬롯은 목에 닿는 레슬리의 손에 소름이 돋았다. 샬롯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눈을 깔았다.
“로테. 로테에요.”
그의 손이 부드럽지만 반항할 수 없는 힘을 담고 그녀를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샬롯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눈 떠. 로테.”
뱀을 닮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샬롯은 욕심이 감도는 그 눈동자에 그가 알아차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찢어 버릴 것처럼 옷의 가슴 끈을 뜯어내는 레슬리의 손에 샬롯은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몸이 안 좋아서…….”
“돈 더 줄게.”
제기랄. 내가 애가 없지 돈이 없니. 이 씨 없는 놈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이었지만 샬롯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체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이 빠지자 샬롯의 몸을 더듬던 손길이 멈칫했다.
“눈 떠.”
묘하게 힘이 없는 어조였다. 취하지 않았음에도 늘어지는 어조에 샬롯은 눈을 떴다. 눈을 찡그린 채 그녀를 향해 화를 내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레슬리가 보였다.
“상냥하게 해 줄게. 몸이 안 좋다며. 착하게 굴어 줄 테니까.”
변명하듯 내뱉는 단어들에 샬롯은 레슬리가 원래 여자들에게는 좀 부드럽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영 못 쓸 인간은 아닌가 보지. 샬롯은 문득 저번 밤에 그가 다정하게 굴었던 것이 생각나 조금 웃었다.
레슬리를 아는 인간이 들었다면 그 무슨 돌아 버린 소리냐고 했을 터였다. 레슬리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그냥 세상 전부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아마 지나가는 천사가 말을 걸었어도 레슬리라면 장담컨대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거나 예의가 발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레슬리의 입술이 성급하게 샬롯의 목에 내려앉았다. 이전과 달리 이로 씹지 않은 태도에 샬롯은 그의 머리를 조금 도닥였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 말까요?”
“아니. 계속해.”
그 딴에는 나름 다정한 목소리였다. 샬롯이 본래 아는 레슬리와는 전혀 다른 면모였다. 어쩌면 그녀가 들키더라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샬롯은 결국 오늘도 그가 제대로 벗기지 못하고 찢어 버린 드레스를 보며, 오늘은 드레스 값을 청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애도 안 주면 돈이라도 줘야지.
레슬리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여자를 보고 입술을 끌어 올렸다. 지쳤는지 깜빡거리는 눈이 귀여웠다. 그는 빌어먹게도 변치 않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뺨을 깨물자 이상한 맛이 났다. 여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는 달래듯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여자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졸려요. 그만 할래요…….”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누워 있는 레슬리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애원하듯 이마를 어깨에 비비며 여자가 이미 반쯤 잠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하지 마세요. 손님.”
“레슬리, 레슬리라고 불러.”
그는 취한 상태도 아니었고, 졸리거나 정신이 이상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레슬리는 이 여자가 부르는 자기 이름이 듣고 싶었다.
“그럼 그만 할게.”
그 말에 여자의 감기던 눈이 조금 커졌다. 레슬리에게 기댄 몸을 떼어 낸 채 여자는 지친 얼굴로 속삭였다.
“여기 자주 오려고요?”
“몰라.”
“손님. 여기 자주 오는 건 안 좋아요.”
꼭 어린 아이에게 훈계하듯 여자는 중얼거렸다. 레슬리는 조금 초초하게 여자를 다시 끌어안았다. 맨 살갗이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난 원래 이런 데 자주 와.”
제정신으로 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사실 그는 취하면 정말 아무나 하고 잤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 여자들은 에드워드가 해결했다. 에드워드는 레슬리의 상대가 원했던 것을 쥐여 주고 입을 닫게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대를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왜?”
그는 변명하듯 속삭인 말 뒤에 질문을 붙였다. ‘왜? 내가 싫어? 넌 뭐가 좋은데?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까? 아니면 어떤 걸 해 줄까?’.
이 여자는 레슬리를 자꾸만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이 여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레슬리의 손에 순종적으로 굴었으니까. 다만 그는 그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지 성욕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내가 돈을 적게 주나? 그래서…… 별론가?”
이 여자는 제 의붓동생인 샬롯과 달리 그가 통제할 수 있었다. 돈만 주면 그에게 순하게 웃어 주는, 그런. 씨발. 그건 다른 놈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레슬리는 순간 아까 봤던 광경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여자들은 다 예뻐요. 손님.”
여자는 그의 말에 딴소리를 늘어놨다. 레슬리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마 허리나 등에 그의 손자국이 남겠지. 앓는 한숨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돈 많은 단골을 뺏기려고?”
레슬리는 이 여자를 그의 통제하에만 두고 싶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는 감정들을 털어 내며 단순하게 정리했다.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돈으로 살 수 있었고, 그건 그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으니까.
여자는 길게 침묵하다 조금 웃었다. 웃음은 작은 기침으로 변했고,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꾸 그러시면, 제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릴지도 몰라요. 손님.”
후회하실 거예요.
* * *
후회할 거라고?
레슬리는 뒷골목에 깊숙이 자리한 펍 안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바로 그 다음날 마담을 찾아가 로테 앞으로는 아무 손님도 받지 말라고 금을 지불했다.
원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는 특정한 상대를 여러 번 찾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상하게 웃는 그 여자가 그저 거기서 가만히 그만 기다리고 있기를 원했다.
“여긴 이런 거 취급 안 해요.”
가슴을 반쯤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갔다. 짙은 화장으로 가렸지만 목에 있는 주름 때문에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빼앗은 담배를 걸친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거기서 두툼한 담배를 새로 꺼내 그의 입가에 댔다.
“제일 약한 거예요. 꼬마 도련님.”
웬만한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레슬리를 훑어보며 여자는 킬킬 웃었다. 레슬리는 별말 없이 그녀가 내민 것을 입에 물고 돈을 내밀었다. 여자는 빠르게 돈을 낚아챔과 동시에 담배 위에 불을 붙었다.
“더 필요하면 찾아요. 도련님. 깨끗한 입이 놀라서 토하면 걷어차일 테니까 조심하고.”
어둑한 펍 안은 기름등의 불빛과 연기로 음산했다. 여자는 펍의 한구석에서 싸우고 있는 남자들을 질린다는 얼굴로 외면한 채 문가에 있는 덩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슬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려지는 생각들과 이상한 색깔들로 물들어 가는 시야를 느끼면서 레슬리는 왼팔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까지 감은 흰 붕대를 오른손으로 뜯어냈다. 빼곡한 흉터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에 레슬리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이 잡히자, 끄집어내 마시던 술을 부었다.
레슬리는 입에 문 것을 다시 고쳐 물고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중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더할 나위 없는 평온의 시간 속에서 그는 왼팔에 가장 벌겋게 남아 있는 상처 위를 느릿하게 단검으로 그었다.
뇌를 찌르는 고통이 물렁한 머릿속을 뚫고 조금씩 선명해졌다. 레슬리는 그 감각에 비틀린 웃음을 그려 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자해에도 펍에 있는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해 정도면 평범하지.
그는 세 번 더 왼팔을 가로로 길게 그어 낸 뒤에 단검을 탁자 위에 던졌다. 약한 마약에 취한 몸은 그 간단한 고통에 선명한 감각을 뽑아냈다. 그는 이 감각을 위해 몇 년째 마약을 하면서도 중독자는 되지 않도록 까다롭게 정도를 조절했다.
통제를 잃어버린 머리가 다시 통제력을 되찾을 때의 짜릿한 감각에 레슬리는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돌아 버린 통제광이었고, 그건 그러니까 그의 누이인 알리시아가 말하듯이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는 이게 핏줄을 타고 흐르는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첫 번째 웨이필드는 거인 101명의 눈알을 뽑아 그것으로 목걸이를 꿰어 만들었다고 한다. 초대 위튼 왕의 전설이라며 그걸 처음 들었을 때, 레슬리는 무엄하게도 제 조상이 돌아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뭐 사실 어릴 적에는, 그의 어머니라면 그 전설에 나온 것처럼 남의 눈알로 목걸이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인간을 물건 다루듯 대수롭지 않게 짓뭉갤 수 있는 그 여자라면.
그는 아무튼 스스로가 그리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딱히 연민을 하며 스스로를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을 보라. 그는 대개의 인간들이 탐낼 아름다움과 권력, 부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도.
레슬리는 역겨워지는 속에 반쯤 태운 담배를 탁자에 비벼 껐다. 그 여자를 통제하고 싶은 게 그의 병적인 기질이 발동되어서일까, 아니라면 뭔가 좀 더 순진한 감정이란 게 그에게도 있어서일까.
왼팔 위에 술을 부으며 레슬리는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에 스스로를 조금 비웃었다. 이 짓도 3년 만이었다.
병적인 통제욕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솟을 때면 보통은 술에 뇌까지 절인 후에 정신이 들 때까지 여자를 안았다. 그래도 정신이 멍청해져 있으면 팔을 그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약까지는 굳이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성인이 되고서부터 나름의 선이라는 것을 지키려 꽤 노력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다시 여기에 왔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좀 더 강렬한 감각의 반전을 원해서. 그 여자 때문에.
레슬리는 고민을 치웠다. 사실 사랑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렇다고 지금에서 뭔가 바뀌지도 않을 텐데.
그 여자는 가만히 그 좁은 방에서 그를 기다릴 테고, 레슬리는 내킬 때 그녀를 찾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의 통제하에 얌전히 있는 여자에게 쉽게 질릴 수도 있겠지. 아니면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고.
미래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레슬리는 의자 속으로 몸을 더 깊게 파묻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그 여자가 좀 더 마음에 들어서 집을 하나 마련해 줄 수도 있겠지. 그래. 소위 말하는 정부라는 것을 레슬리가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그 여자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거트루드의 밤(4)
아니, 신은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죽어서 멱살이라도 잡을 게 아닌가.
“오늘은 색깔이 보였어?”
닫히는 문과 함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의 얼굴이 침대에 앉아 있는 샬롯의 바로 눈앞에 도착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금수의 것 같은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샬롯은 숨을 멈췄다.
단단하게 굳은 턱과 비틀린 입술은 레슬리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렸다. 물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왜?”
얇은 입술이 뱉어 내는 말에 샬롯은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며 눈을 내리깔았다.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맙소사. 그건 그가 제정신이라는 걸 뜻했다. 그녀는 그가 부디 샬롯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 않기를, 그녀가 제대로 연기를 해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 젠장.
“손님 받아야지.”
목소리가 좀 더 매끄러워졌지만, 샬롯은 그게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눈을 들지도 못했다. 이번에도 눈동자 색은 바꾸지 못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그가 혹시 궁에서 쫓겨났을 적 자신과 공통점을 찾아낼 지도 몰랐다.
물론 그만큼 레슬리가 샬롯이나 거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겠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낮인데…….”
샬롯은 그녀를 가둔 그의 양팔을 살짝 밀어 내며 속삭였다. 내일 확실히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레슬리가 씨 없는 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으니 그와 자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들킬 위험까지 있다면 더더욱!
“그럼 방금은?”
“잠깐 대화만, 하려고…….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어서, 그래서 잠깐 대화만…….”
“너 이름이?”
샬롯은 목에 닿는 레슬리의 손에 소름이 돋았다. 샬롯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눈을 깔았다.
“로테. 로테에요.”
그의 손이 부드럽지만 반항할 수 없는 힘을 담고 그녀를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샬롯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눈 떠. 로테.”
뱀을 닮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샬롯은 욕심이 감도는 그 눈동자에 그가 알아차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찢어 버릴 것처럼 옷의 가슴 끈을 뜯어내는 레슬리의 손에 샬롯은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몸이 안 좋아서…….”
“돈 더 줄게.”
제기랄. 내가 애가 없지 돈이 없니. 이 씨 없는 놈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이었지만 샬롯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체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뻣뻣하게 굳은 몸에 힘이 빠지자 샬롯의 몸을 더듬던 손길이 멈칫했다.
“눈 떠.”
묘하게 힘이 없는 어조였다. 취하지 않았음에도 늘어지는 어조에 샬롯은 눈을 떴다. 눈을 찡그린 채 그녀를 향해 화를 내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레슬리가 보였다.
“상냥하게 해 줄게. 몸이 안 좋다며. 착하게 굴어 줄 테니까.”
변명하듯 내뱉는 단어들에 샬롯은 레슬리가 원래 여자들에게는 좀 부드럽게 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영 못 쓸 인간은 아닌가 보지. 샬롯은 문득 저번 밤에 그가 다정하게 굴었던 것이 생각나 조금 웃었다.
레슬리를 아는 인간이 들었다면 그 무슨 돌아 버린 소리냐고 했을 터였다. 레슬리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그냥 세상 전부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아마 지나가는 천사가 말을 걸었어도 레슬리라면 장담컨대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거나 예의가 발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레슬리의 입술이 성급하게 샬롯의 목에 내려앉았다. 이전과 달리 이로 씹지 않은 태도에 샬롯은 그의 머리를 조금 도닥였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 말까요?”
“아니. 계속해.”
그 딴에는 나름 다정한 목소리였다. 샬롯이 본래 아는 레슬리와는 전혀 다른 면모였다. 어쩌면 그녀가 들키더라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샬롯은 결국 오늘도 그가 제대로 벗기지 못하고 찢어 버린 드레스를 보며, 오늘은 드레스 값을 청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애도 안 주면 돈이라도 줘야지.
레슬리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여자를 보고 입술을 끌어 올렸다. 지쳤는지 깜빡거리는 눈이 귀여웠다. 그는 빌어먹게도 변치 않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뺨을 깨물자 이상한 맛이 났다. 여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는 달래듯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여자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졸려요. 그만 할래요…….”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누워 있는 레슬리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애원하듯 이마를 어깨에 비비며 여자가 이미 반쯤 잠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하지 마세요. 손님.”
“레슬리, 레슬리라고 불러.”
그는 취한 상태도 아니었고, 졸리거나 정신이 이상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레슬리는 이 여자가 부르는 자기 이름이 듣고 싶었다.
“그럼 그만 할게.”
그 말에 여자의 감기던 눈이 조금 커졌다. 레슬리에게 기댄 몸을 떼어 낸 채 여자는 지친 얼굴로 속삭였다.
“여기 자주 오려고요?”
“몰라.”
“손님. 여기 자주 오는 건 안 좋아요.”
꼭 어린 아이에게 훈계하듯 여자는 중얼거렸다. 레슬리는 조금 초초하게 여자를 다시 끌어안았다. 맨 살갗이 스치는 감각이 좋았다.
“난 원래 이런 데 자주 와.”
제정신으로 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사실 그는 취하면 정말 아무나 하고 잤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 여자들은 에드워드가 해결했다. 에드워드는 레슬리의 상대가 원했던 것을 쥐여 주고 입을 닫게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대를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왜?”
그는 변명하듯 속삭인 말 뒤에 질문을 붙였다. ‘왜? 내가 싫어? 넌 뭐가 좋은데?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줄까? 아니면 어떤 걸 해 줄까?’.
이 여자는 레슬리를 자꾸만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이 여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레슬리의 손에 순종적으로 굴었으니까. 다만 그는 그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지 성욕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내가 돈을 적게 주나? 그래서…… 별론가?”
이 여자는 제 의붓동생인 샬롯과 달리 그가 통제할 수 있었다. 돈만 주면 그에게 순하게 웃어 주는, 그런. 씨발. 그건 다른 놈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레슬리는 순간 아까 봤던 광경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여자들은 다 예뻐요. 손님.”
여자는 그의 말에 딴소리를 늘어놨다. 레슬리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마 허리나 등에 그의 손자국이 남겠지. 앓는 한숨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돈 많은 단골을 뺏기려고?”
레슬리는 이 여자를 그의 통제하에만 두고 싶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는 감정들을 털어 내며 단순하게 정리했다.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돈으로 살 수 있었고, 그건 그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으니까.
여자는 길게 침묵하다 조금 웃었다. 웃음은 작은 기침으로 변했고, 여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꾸 그러시면, 제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릴지도 몰라요. 손님.”
후회하실 거예요.
* * *
후회할 거라고?
레슬리는 뒷골목에 깊숙이 자리한 펍 안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바로 그 다음날 마담을 찾아가 로테 앞으로는 아무 손님도 받지 말라고 금을 지불했다.
원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는 특정한 상대를 여러 번 찾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상하게 웃는 그 여자가 그저 거기서 가만히 그만 기다리고 있기를 원했다.
“여긴 이런 거 취급 안 해요.”
가슴을 반쯤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갔다. 짙은 화장으로 가렸지만 목에 있는 주름 때문에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빼앗은 담배를 걸친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거기서 두툼한 담배를 새로 꺼내 그의 입가에 댔다.
“제일 약한 거예요. 꼬마 도련님.”
웬만한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레슬리를 훑어보며 여자는 킬킬 웃었다. 레슬리는 별말 없이 그녀가 내민 것을 입에 물고 돈을 내밀었다. 여자는 빠르게 돈을 낚아챔과 동시에 담배 위에 불을 붙었다.
“더 필요하면 찾아요. 도련님. 깨끗한 입이 놀라서 토하면 걷어차일 테니까 조심하고.”
어둑한 펍 안은 기름등의 불빛과 연기로 음산했다. 여자는 펍의 한구석에서 싸우고 있는 남자들을 질린다는 얼굴로 외면한 채 문가에 있는 덩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슬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려지는 생각들과 이상한 색깔들로 물들어 가는 시야를 느끼면서 레슬리는 왼팔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까지 감은 흰 붕대를 오른손으로 뜯어냈다. 빼곡한 흉터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에 레슬리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이 잡히자, 끄집어내 마시던 술을 부었다.
레슬리는 입에 문 것을 다시 고쳐 물고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중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더할 나위 없는 평온의 시간 속에서 그는 왼팔에 가장 벌겋게 남아 있는 상처 위를 느릿하게 단검으로 그었다.
뇌를 찌르는 고통이 물렁한 머릿속을 뚫고 조금씩 선명해졌다. 레슬리는 그 감각에 비틀린 웃음을 그려 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자해에도 펍에 있는 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해 정도면 평범하지.
그는 세 번 더 왼팔을 가로로 길게 그어 낸 뒤에 단검을 탁자 위에 던졌다. 약한 마약에 취한 몸은 그 간단한 고통에 선명한 감각을 뽑아냈다. 그는 이 감각을 위해 몇 년째 마약을 하면서도 중독자는 되지 않도록 까다롭게 정도를 조절했다.
통제를 잃어버린 머리가 다시 통제력을 되찾을 때의 짜릿한 감각에 레슬리는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돌아 버린 통제광이었고, 그건 그러니까 그의 누이인 알리시아가 말하듯이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는 이게 핏줄을 타고 흐르는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첫 번째 웨이필드는 거인 101명의 눈알을 뽑아 그것으로 목걸이를 꿰어 만들었다고 한다. 초대 위튼 왕의 전설이라며 그걸 처음 들었을 때, 레슬리는 무엄하게도 제 조상이 돌아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뭐 사실 어릴 적에는, 그의 어머니라면 그 전설에 나온 것처럼 남의 눈알로 목걸이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인간을 물건 다루듯 대수롭지 않게 짓뭉갤 수 있는 그 여자라면.
그는 아무튼 스스로가 그리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딱히 연민을 하며 스스로를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을 보라. 그는 대개의 인간들이 탐낼 아름다움과 권력, 부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도.
레슬리는 역겨워지는 속에 반쯤 태운 담배를 탁자에 비벼 껐다. 그 여자를 통제하고 싶은 게 그의 병적인 기질이 발동되어서일까, 아니라면 뭔가 좀 더 순진한 감정이란 게 그에게도 있어서일까.
왼팔 위에 술을 부으며 레슬리는 후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에 스스로를 조금 비웃었다. 이 짓도 3년 만이었다.
병적인 통제욕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솟을 때면 보통은 술에 뇌까지 절인 후에 정신이 들 때까지 여자를 안았다. 그래도 정신이 멍청해져 있으면 팔을 그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약까지는 굳이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성인이 되고서부터 나름의 선이라는 것을 지키려 꽤 노력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다시 여기에 왔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좀 더 강렬한 감각의 반전을 원해서. 그 여자 때문에.
레슬리는 고민을 치웠다. 사실 사랑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렇다고 지금에서 뭔가 바뀌지도 않을 텐데.
그 여자는 가만히 그 좁은 방에서 그를 기다릴 테고, 레슬리는 내킬 때 그녀를 찾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의 통제하에 얌전히 있는 여자에게 쉽게 질릴 수도 있겠지. 아니면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고.
미래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레슬리는 의자 속으로 몸을 더 깊게 파묻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그 여자가 좀 더 마음에 들어서 집을 하나 마련해 줄 수도 있겠지. 그래. 소위 말하는 정부라는 것을 레슬리가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그 여자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