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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 거트루드의 밤(9)
“어디 가시나요?”
푹신한 카펫에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샬롯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캐서린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이모 댁이요.”
“……그 분께서 허락하셨나요?”
캐서린은 레슬리가 샬롯에게 신분을 알려 주었는지 아니었는지 몰라 애매하게 호칭했다. 물론 에드워드의 비명으로 레슬리가 왕자임이 알려졌고, 그 이전에도 샬롯은 그가 왕자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샬롯은 그녀가 움직이는 데 왜 레슬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인간은 무조건 왕도 아닌 왕자의 명에 따라야 한단 법이 있단 말인가?
“그게 필요한가요?”
기름칠된 문은 아무 소리 없이 샬롯의 손에 열렸다. 캐서린은 샬롯이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빠른 눈치는 더 많은 것들을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도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저택에 있는 누구도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레슬리는 늘 그렇듯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저택에 있는 이들이 뭔가 물어보기도 전에 궁으로 끌려갔다.
“여기 어쩌다 오셨나요……?”
“친구와 얘기하다가…… 레슬리가 절 들고 여기로, 네 여기로 왔어요.”
캐서린은 말문이 막혔다. 샬롯은 맹한 어조로 물었다.
“여긴 어디죠? 메이핏 4번 골목과 먼가요?”
이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캐서린은 차라리 샬롯이 평범하게 레슬리의 정부나 애인이기를 소망했다. 어쩌면 지나가다가 평범한 시민 하나를 들쳐 업고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지. 아니야. 왕자님의 이름을 알고 있잖아. 뭔가, 뭔가 관계가 있겠지.
“좀 멀어요. 아가씨. 만약 집에 가시려면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는 건 어떨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테일러 부인.”
어떤 이유든지 레슬리에게 달랑 들려 여기에 오게 된 여자치고는 참으로 정상적이었다. 마치 길에서 만나게 된 평범한 아가씨처럼. 캐서린은 샬롯의 얼룩진 얼굴에 그려진 상냥한 미소를 따라 얼떨결에 웃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랑 얘기하다가 왕자한테 납치되어 공주의 약혼자 집에 오게 된 여자가 평온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캐서린의 미소에 금이 갔다.
이본느 여왕은 쉰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늙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힘이 넘쳤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가벼운 슈미즈 위에 두꺼운 실크 가운을 걸친 여왕은 침실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낳은 개망나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기가 섞인 어두운 금발을 한쪽 어깨로 넘긴 채, 그녀는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린 듯 초점을 잃어 가는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여왕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보, 먼저 잠들면 안 되지.”
“날 내버려 둬. 이브.”
나른한 대공의 목소리에 여왕의 손이 대공이 목을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이 목을 반쯤 감싸 쥐었다.
“내 사랑. 명령이야. 자지 마.”
푸른 눈동자가 여왕을 응시했다. 여왕은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느껴지는 살갗 아래 혈관의 박동과 숨결에 웃었다. 그녀는 가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살아 있음의 흔적들은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발현되지 않는가.
대공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여왕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줄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손을 떼어 내어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인내심을 이만큼 시험하는 건 너뿐이겠지. 보.”
여왕은 대공의 이마부터 코, 턱까지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한 손은 여전히 강하게 움켜쥔 채로.
“레슬리도 당신만큼은 아니야.”
그녀의 속삭임과 동시에 문이 강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부서질 듯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서는 레슬리를 보면서 여왕은 시선을 겨우 대공에게서 떼어 냈다. 미묘하게나마 풀어졌던 여왕의 분위기가 다시 단단하게 굳었다.
“폐하. 여전히 정부와 즐거우신가 봅니다?”
단추라는 것의 존재를 잊었는지 외투나 조끼가 전부 열려 있었다. 심지어 어디서 구르기라도 했는지 셔츠의 단추도 몇 개 뜯어져 있었다. 여왕은 흙이 묻은 바지를 힐긋 보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나랏일에 하도 참여를 하지 않다 보니 네 계부의 존재도 잊었나 보구나. 그래도 여왕의 부군이 누군지는 기억하도록 해라.”
인사도 없이 침실 문가에 서서 여왕과 대공을 내려다보던 레슬리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여왕은 그 조롱 어린 시선을 오만하게 맞받아쳤다. 분명 여왕은 앉아 있었고, 레슬리는 서 있었지만, 여왕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을 폐하의 침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너와 다르게. 레슬리.”
깨어 있음이 분명함에도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뺀 채 대화를 흘려보내는 대공을 내려다보며 여왕은 웃었다. 레슬리는 둘의 모습을 굳은 얼굴로 훑어보며 팔짱을 꼈다.
“제가 있고 싶은 곳이 제가 있을 자리입니다. 폐하.”
“저번 회의에는 왜 불참했지?”
“폐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위대한 폐하께서 계신데 저야 없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여왕은 레슬리의 조롱에 아예 시선을 대공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레슬리를 향했다.
“롤프 의장이 주조권을 관리할 공식 위원회를 만들자고 하던데.”
“죽여 버리던지 아니면 바꾸십시오. 그 버러지는 다음에 왕실을 관리할 위원회를 만들자고 할 겁니다.”
“휘링컴 백작은?”
“감옥에 처넣으십시오. 최소한 십 년은 썩게 만드는 게 보기도 좋겠죠.”
레슬리의 망설임 없는 대꾸에 여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를 닮아 정치에 있어서 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새 재무대신으로 맥퀸 경은 어떠할까.”
“주제 파악은 빠른 개새끼는 오래 써먹어야죠. 폐하. 어차피 무역세에 대해 분란이 한 번은 날 겁니다. 욕받이 하나 앉혀서 그 문제를 치우고 앉히죠.”
“그걸 회의에서 말했다면 참으로 좋았겠지.”
여왕의 말에 레슬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대로 하셨지 않습니까? 어차피 폐하께서 없다면 제가 할 일, 폐하께서 있을 때 쉬어야 수지가 맞죠.”
서슴없이 여왕의 죽음을 입에 담는 레슬리의 얼굴은 짜증을 제외하고는 서늘함만 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대공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여왕의 손길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레슬리, 내게 자식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다.”
“알리시아를 위해 왕실 법을 뜯어고치실 마음이 드디어 드셨습니까?”
“못 할 건 아니지.”
여왕의 말에 레슬리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귀찮은 짓을 여왕이 하기에는, 그녀는 그렇게 위튼에 열렬하게 매달리는 왕이 아니었다. 이본느 여왕이 관심 있는 건 20여 년 전부터 대공 하나뿐이었다.
“오늘은 네 궁에 머물러라. 네 궁은 도무지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더구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이 대답을 대신했다. 여왕은 더 이상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레슬리는 여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 * *
“안 돼요! 제발! 아가씨!”
캐서린은 절절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샬롯의 치마에 매달렸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나가고 말겠다는 샬롯의 의지를 꺾기 위해 캐서린은 바닥을 열심히 쓸고 닦았을 다른 하녀들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가지 마세요! 내일 마차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오늘 밤만이라도 제발!”
“왜 이러세요. 테일러 부인!”
샬롯은 어리벙벙한 채로 부풀린 치마에 매달려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캐서린을 쳐다봤다. 3층 복도에서 벌어진 소란에 몇몇의 하녀들이 올라왔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캐서린은 이러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캐서린. 도대체…….”
에드워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캐서린은 거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샬롯의 치마에 붙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샬롯과 치마를 붙든 캐서린의 씨름이 에드워드의 등장으로 멈췄다.
“안녕하세요.”
샬롯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에드워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캐서린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집에 가시겠다고…….”
“집? 11번 골목?”
“아뇨. 이제 거기 안 살아요.”
샬롯은 태연하게 에드워드의 질문을 정정했다. 담담한 어조는 마치 안부 인사를 하듯 매끄러웠다. 에드워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그녀를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모 댁에 살아요. 이제 가려구요.”
분홍빛으로 칠해진 입술이 벌어지면서 마치 잠시 친구 집에 놀러 온 것처럼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 에드워드는 묘하게 그녀가 처연해 보였다고 생각했던 이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화장으로 얼룩덜룩한 얼굴과 드레스를 훑었다.
“레슬리가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디 극단에서 일한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여자는 현란했다. 톡톡 튀는 색깔들이 기묘하게 어울렸다. 에드워드는 문득 떠오른 단어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는 기묘했다.
현란한 차림을 하고도 차분해 보였고, 상식적이지 않은 차림을 하고도 그게 어울렸다. 기묘할 노릇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샬롯의 눈을 응시하고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예뻤다.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
그리고 분명 낯익었다.
“했어요.”
왜 이전에 이 여자를 처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에드워드는 그 눈을 보고 깨달았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는 눈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안온한 저택 안에서도 축축한 안개의 냄새가 맡아질 만큼.
“꼭 들어야 하나요?”
그는 이런 눈을 알았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바다의 색깔을 가지고도, 비를 닮은 이상한 눈을. 샬롯의 눈이 깜빡였다.
에드워드는 앓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좋지 않다는 예감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런 눈에 한 번 홀린 사람은 도무지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봤다.
이 여자는 대공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레슬리는 빨라지는 발걸음을 의식적으로 늦췄다. 갑자기 쏟아진 얕은 비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짜증스럽게 뒤로 쓸어 넘기면서 그는 축축한 흙발로 값비싼 카펫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밟았다.
“레슬리 님.”
집사의 부름에 레슬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젖어서 무거워진 외투를 벗어 던졌다. 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레슬리의 넓은 등을 바라보면서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인이 에드워드 맥퀸인 이상 그의 한숨은 아마도 계속 지속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 나와 있지?”
레슬리는 3층 복도에서 마주 서 있는 샬롯과 에드워드, 그리고 샬롯의 치마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캐서린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불쾌한 기색이 섞인 발언에 그들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오로지 샬롯만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운 채 그를 응시했다.
“레슬리.”
“머리가 덜 깨졌나? 복도에 나와 돌아다니고.”
한숨 섞인 에드워드의 부름에 레슬리가 맞받아쳤다. 에드워드는 체념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주인의 모습에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샬롯의 치마는 그녀의 손에 꽉 붙들린 채였다.
“아가씨께서 가셔야 한다고 하셔서…….”
“맞아요. 몇 시죠? 벌써 식사 시간이 지났을 것 같은데.”
샬롯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캐서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캐서린은 마주친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어이없음을 숨기기 위해 느리게 답했다.
“네. 이미 지났죠. 그러니까…… 가시더라도 식사를 하고 가시는 건 어떨까요?”
“테일러 부인, 그건 폐가 아닐까요?”
차분하고 이성적인 물음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기 발로 여기에 온 게 아니란 사실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레슬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팔짱을 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더 하나 지켜봤다.
1. 거트루드의 밤(9)
“어디 가시나요?”
푹신한 카펫에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샬롯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캐서린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이모 댁이요.”
“……그 분께서 허락하셨나요?”
캐서린은 레슬리가 샬롯에게 신분을 알려 주었는지 아니었는지 몰라 애매하게 호칭했다. 물론 에드워드의 비명으로 레슬리가 왕자임이 알려졌고, 그 이전에도 샬롯은 그가 왕자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샬롯은 그녀가 움직이는 데 왜 레슬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인간은 무조건 왕도 아닌 왕자의 명에 따라야 한단 법이 있단 말인가?
“그게 필요한가요?”
기름칠된 문은 아무 소리 없이 샬롯의 손에 열렸다. 캐서린은 샬롯이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물어보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빠른 눈치는 더 많은 것들을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지금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도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 저택에 있는 누구도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레슬리는 늘 그렇듯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저택에 있는 이들이 뭔가 물어보기도 전에 궁으로 끌려갔다.
“여기 어쩌다 오셨나요……?”
“친구와 얘기하다가…… 레슬리가 절 들고 여기로, 네 여기로 왔어요.”
캐서린은 말문이 막혔다. 샬롯은 맹한 어조로 물었다.
“여긴 어디죠? 메이핏 4번 골목과 먼가요?”
이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캐서린은 차라리 샬롯이 평범하게 레슬리의 정부나 애인이기를 소망했다. 어쩌면 지나가다가 평범한 시민 하나를 들쳐 업고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지. 아니야. 왕자님의 이름을 알고 있잖아. 뭔가, 뭔가 관계가 있겠지.
“좀 멀어요. 아가씨. 만약 집에 가시려면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하시는 건 어떨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테일러 부인.”
어떤 이유든지 레슬리에게 달랑 들려 여기에 오게 된 여자치고는 참으로 정상적이었다. 마치 길에서 만나게 된 평범한 아가씨처럼. 캐서린은 샬롯의 얼룩진 얼굴에 그려진 상냥한 미소를 따라 얼떨결에 웃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랑 얘기하다가 왕자한테 납치되어 공주의 약혼자 집에 오게 된 여자가 평온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캐서린의 미소에 금이 갔다.
이본느 여왕은 쉰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늙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힘이 넘쳤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가벼운 슈미즈 위에 두꺼운 실크 가운을 걸친 여왕은 침실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낳은 개망나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기가 섞인 어두운 금발을 한쪽 어깨로 넘긴 채, 그녀는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졸린 듯 초점을 잃어 가는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여왕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보, 먼저 잠들면 안 되지.”
“날 내버려 둬. 이브.”
나른한 대공의 목소리에 여왕의 손이 대공이 목을 쓸어내렸다. 긴 손가락이 목을 반쯤 감싸 쥐었다.
“내 사랑. 명령이야. 자지 마.”
푸른 눈동자가 여왕을 응시했다. 여왕은 손바닥,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느껴지는 살갗 아래 혈관의 박동과 숨결에 웃었다. 그녀는 가끔 그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살아 있음의 흔적들은 죽음에 가까워져서야 발현되지 않는가.
대공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여왕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줄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손을 떼어 내어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 인내심을 이만큼 시험하는 건 너뿐이겠지. 보.”
여왕은 대공의 이마부터 코, 턱까지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한 손은 여전히 강하게 움켜쥔 채로.
“레슬리도 당신만큼은 아니야.”
그녀의 속삭임과 동시에 문이 강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부서질 듯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서는 레슬리를 보면서 여왕은 시선을 겨우 대공에게서 떼어 냈다. 미묘하게나마 풀어졌던 여왕의 분위기가 다시 단단하게 굳었다.
“폐하. 여전히 정부와 즐거우신가 봅니다?”
단추라는 것의 존재를 잊었는지 외투나 조끼가 전부 열려 있었다. 심지어 어디서 구르기라도 했는지 셔츠의 단추도 몇 개 뜯어져 있었다. 여왕은 흙이 묻은 바지를 힐긋 보고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나랏일에 하도 참여를 하지 않다 보니 네 계부의 존재도 잊었나 보구나. 그래도 여왕의 부군이 누군지는 기억하도록 해라.”
인사도 없이 침실 문가에 서서 여왕과 대공을 내려다보던 레슬리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여왕은 그 조롱 어린 시선을 오만하게 맞받아쳤다. 분명 여왕은 앉아 있었고, 레슬리는 서 있었지만, 여왕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공을 폐하의 침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다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너와 다르게. 레슬리.”
깨어 있음이 분명함에도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뺀 채 대화를 흘려보내는 대공을 내려다보며 여왕은 웃었다. 레슬리는 둘의 모습을 굳은 얼굴로 훑어보며 팔짱을 꼈다.
“제가 있고 싶은 곳이 제가 있을 자리입니다. 폐하.”
“저번 회의에는 왜 불참했지?”
“폐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위대한 폐하께서 계신데 저야 없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여왕은 레슬리의 조롱에 아예 시선을 대공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레슬리를 향했다.
“롤프 의장이 주조권을 관리할 공식 위원회를 만들자고 하던데.”
“죽여 버리던지 아니면 바꾸십시오. 그 버러지는 다음에 왕실을 관리할 위원회를 만들자고 할 겁니다.”
“휘링컴 백작은?”
“감옥에 처넣으십시오. 최소한 십 년은 썩게 만드는 게 보기도 좋겠죠.”
레슬리의 망설임 없는 대꾸에 여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를 닮아 정치에 있어서 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새 재무대신으로 맥퀸 경은 어떠할까.”
“주제 파악은 빠른 개새끼는 오래 써먹어야죠. 폐하. 어차피 무역세에 대해 분란이 한 번은 날 겁니다. 욕받이 하나 앉혀서 그 문제를 치우고 앉히죠.”
“그걸 회의에서 말했다면 참으로 좋았겠지.”
여왕의 말에 레슬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대로 하셨지 않습니까? 어차피 폐하께서 없다면 제가 할 일, 폐하께서 있을 때 쉬어야 수지가 맞죠.”
서슴없이 여왕의 죽음을 입에 담는 레슬리의 얼굴은 짜증을 제외하고는 서늘함만 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대공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여왕의 손길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레슬리, 내게 자식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다.”
“알리시아를 위해 왕실 법을 뜯어고치실 마음이 드디어 드셨습니까?”
“못 할 건 아니지.”
여왕의 말에 레슬리가 코웃음 쳤다. 그녀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귀찮은 짓을 여왕이 하기에는, 그녀는 그렇게 위튼에 열렬하게 매달리는 왕이 아니었다. 이본느 여왕이 관심 있는 건 20여 년 전부터 대공 하나뿐이었다.
“오늘은 네 궁에 머물러라. 네 궁은 도무지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더구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이 대답을 대신했다. 여왕은 더 이상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레슬리는 여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 * *
“안 돼요! 제발! 아가씨!”
캐서린은 절절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서 샬롯의 치마에 매달렸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나가고 말겠다는 샬롯의 의지를 꺾기 위해 캐서린은 바닥을 열심히 쓸고 닦았을 다른 하녀들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가지 마세요! 내일 마차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오늘 밤만이라도 제발!”
“왜 이러세요. 테일러 부인!”
샬롯은 어리벙벙한 채로 부풀린 치마에 매달려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캐서린을 쳐다봤다. 3층 복도에서 벌어진 소란에 몇몇의 하녀들이 올라왔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캐서린은 이러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캐서린. 도대체…….”
에드워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캐서린은 거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샬롯의 치마에 붙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샬롯과 치마를 붙든 캐서린의 씨름이 에드워드의 등장으로 멈췄다.
“안녕하세요.”
샬롯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에드워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캐서린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집에 가시겠다고…….”
“집? 11번 골목?”
“아뇨. 이제 거기 안 살아요.”
샬롯은 태연하게 에드워드의 질문을 정정했다. 담담한 어조는 마치 안부 인사를 하듯 매끄러웠다. 에드워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그녀를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모 댁에 살아요. 이제 가려구요.”
분홍빛으로 칠해진 입술이 벌어지면서 마치 잠시 친구 집에 놀러 온 것처럼 태평한 소리를 내뱉었다. 에드워드는 묘하게 그녀가 처연해 보였다고 생각했던 이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화장으로 얼룩덜룩한 얼굴과 드레스를 훑었다.
“레슬리가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디 극단에서 일한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여자는 현란했다. 톡톡 튀는 색깔들이 기묘하게 어울렸다. 에드워드는 문득 떠오른 단어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는 기묘했다.
현란한 차림을 하고도 차분해 보였고, 상식적이지 않은 차림을 하고도 그게 어울렸다. 기묘할 노릇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샬롯의 눈을 응시하고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예뻤다.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
그리고 분명 낯익었다.
“했어요.”
왜 이전에 이 여자를 처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에드워드는 그 눈을 보고 깨달았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는 눈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안온한 저택 안에서도 축축한 안개의 냄새가 맡아질 만큼.
“꼭 들어야 하나요?”
그는 이런 눈을 알았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바다의 색깔을 가지고도, 비를 닮은 이상한 눈을. 샬롯의 눈이 깜빡였다.
에드워드는 앓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좋지 않다는 예감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런 눈에 한 번 홀린 사람은 도무지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봤다.
이 여자는 대공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레슬리는 빨라지는 발걸음을 의식적으로 늦췄다. 갑자기 쏟아진 얕은 비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짜증스럽게 뒤로 쓸어 넘기면서 그는 축축한 흙발로 값비싼 카펫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밟았다.
“레슬리 님.”
집사의 부름에 레슬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젖어서 무거워진 외투를 벗어 던졌다. 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레슬리의 넓은 등을 바라보면서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인이 에드워드 맥퀸인 이상 그의 한숨은 아마도 계속 지속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 나와 있지?”
레슬리는 3층 복도에서 마주 서 있는 샬롯과 에드워드, 그리고 샬롯의 치마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캐서린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불쾌한 기색이 섞인 발언에 그들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오로지 샬롯만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운 채 그를 응시했다.
“레슬리.”
“머리가 덜 깨졌나? 복도에 나와 돌아다니고.”
한숨 섞인 에드워드의 부름에 레슬리가 맞받아쳤다. 에드워드는 체념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주인의 모습에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샬롯의 치마는 그녀의 손에 꽉 붙들린 채였다.
“아가씨께서 가셔야 한다고 하셔서…….”
“맞아요. 몇 시죠? 벌써 식사 시간이 지났을 것 같은데.”
샬롯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캐서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캐서린은 마주친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어이없음을 숨기기 위해 느리게 답했다.
“네. 이미 지났죠. 그러니까…… 가시더라도 식사를 하고 가시는 건 어떨까요?”
“테일러 부인, 그건 폐가 아닐까요?”
차분하고 이성적인 물음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기 발로 여기에 온 게 아니란 사실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레슬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팔짱을 끼고 도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더 하나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