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장. 기억 상실 황비



$1.



‘실수로라도 죽을 때가 되지 않았나?’

말머리를 돌리며 라일은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이 전해 온 소식은 황비가 또다시 자살 시도를 했다는 거였다.

벌써 여덟 번째.

황비는 자살 시도만 하고 죽지 않았다.

이제는 차라리 죽었으면 싶다. 밀레디아가 죽으면 곤란해지는 것은 황제인 라일이었으나 그 정도로 그는 지쳐 있었다.

낙마 사고에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연못에 빠지고 수시로 넘어졌다.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다. 솔직히 라일이 보기에 밀레디아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2층 발코니에서 떨어졌다고 했던가? 기왕 떨어지는 거 목이라도 부러지지.

시종의 입에서 황비가 죽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을 봐서는 ‘이번에도’ 무사한 모양이었다.

“폐하…….”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내뱉지 못한 채 신하들은 눈치만 살폈다.

라일은 짜증스레 활을 집어 들었다. 멀리 수풀 사이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크기나 형태로 보아 사슴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라일이 말하자 신하들이 흠칫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시종에게 라일은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말했다.

“네가 저 사슴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입을 잘 놀리는 것이 좋을 거다.”

황비에게 발설했다가는 그를 사냥감으로 사냥터에 풀어놓고 사냥을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시종은 자신의 입을 가린 채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은 화살을 활시위에 메겨 멀리 있는 사슴을 겨냥했다.



***



“폐하는 아직이시냐?”

“아직이십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 시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했다.

밀레디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 황제가 곁에 없다면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갈 터였다. 지난번에도 황제가 한발 늦게 나타나 시녀 여럿이 죽어 나갈 뻔했다.

밀레디아 콘스탄스 케이아드.

공작가의 장녀인 그녀는 열두 살부터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열두 살임에도 매우 아름다운 소녀였고, 제국 최고의 미녀로 자라날 거라고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일찍 서거하자 황자는 황위에 오르면서, 동시에 열여섯 살이 된 그녀를 황비로 만들었다. 어린 황자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케이아드 공작가의 힘이 절실했던 탓이다.

그러나 어리고 순진했던 밀레디아는 황비가 되자마자 변했다.

아니.

밀레디아가 그런 성정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공작가를 떠나기 전까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밀레디아는 제국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으면서도 제가 아름답지 못하다 여겼다. 잠자리에 든 라일이 저를 안아 주지 않으면 제가 못생기다 여기고, 격무로 라일이 방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제가 뚱뚱한 탓이라 여겼다.

라일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밀레디아는 지나치게 노력했다. 스스로를 뚱뚱하다 여긴 황비는 3개월 만에 급속하게 말라 갔다. 보다 못한 라일이 단식을 금지하자 밀레디아는 몰래 음식을 토하기까지 했다.

앙상하게 말라 가는 밀레디아를 보던 라일은 그녀와의 동침을 거부했다. 일정 체중이 될 때까지 합방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자 그제야 밀레디아는 이를 악물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이어트가 금지되자 밀레디아가 눈을 돌린 것은 여인들이었다.

밀레디아는 라일이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황제 주변의 시녀들을 모두 시종으로 바꾸고 자신의 곁에 두는 시녀도 못생긴 자들로 선별했다.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서 라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참견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 여인을 보신 겁니까?’



가만히 울리는 그 한마디에 피가 말랐다.

마음이 가지 않으니 몸도 가지 않아서 각방을 쓰게 된 지도 오래였다. 귀족원의 청으로 마지못해 정한 합방일에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몸만 나누었다.

밀레디아는 늘 외롭고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왜 아름답다 말씀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며, 제게는 왜 다정한 눈빛 한 번 없으신 거냐고 애원하고 매달리고……. 그래도 안 되면 악을 쓰고 고함을 질러 댔다.

라일을 하루에도 열두 번이고 그녀를 폐위시키고 싶었으나 끝끝내 참아 왔었다.

황비의 부친인 케이아드 공작은 여전히 귀족원의 수장이었고 라일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였다. 또한 숙부인 로웬달 대공의 존재도 있었다.

케이아드 공작은 중립을 지키는 척 로웬달을 완전히 쳐 내는 것은 거부하고 있었다. 로웬달을 쳐 내면 다음은 자신임을 모르지 않는 것이다.

“으음…….”

안절부절못하며 밀레디아를 간호하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랐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열렸다. 곧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시녀장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누르며 밀레디아를 살폈다.

“화…… 황비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그러자 밀레디아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을 보였다. 마치 ‘이 아줌마가 왜 이래?’라고 하는 듯한 눈길로 경계하듯 시녀장의 얼굴을 훑었다. 직감적으로 시녀장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전하?”

밀레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눈살을 찌푸려도, 성질을 부리며 악을 써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이런 평온(?)한 표정은 몇 년 만에 보는 것인지 몰랐다.

“어……. 저요?”

하고 되묻는다.

시녀장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사약을 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신하처럼 시녀장은 밀레디아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다음 말이 나올 것을 기다렸다.

“저보고 지금 전하라고 하신 거예요?”

“왜, 왜 그러십니까, 황비 전하…….”

바들바들 떨면서 시녀장이 되물었다. 아무리 황제가 황비를 싫어한다고는 하나, 황비에게 탈이 생기면 가장 먼저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그들이었다.

“황…… 황비?”

하더니 밀레디아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막 뇌진탕을 당한 몸이라 현기증을 느꼈는지 다시 쓰러지려는 것을 시녀들이 급히 붙잡았다. 밀레디아는 그 손을 뿌리치고 제 머리털을 잡았다. 그러고는 경악한 얼굴로,

“길어!”

하더니 가슴께를 더듬다가,

“이 옷 뭐……. 헉, 완전 커.”

하며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손이 내려와 제 허리와 배까지 살폈다.

“뱃살이 없다? 가늘어? 이거 무슨…….”

하며 얼어붙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신과 영웅이 조각되어 있는 높고 웅장한 침실의 천장과 천장화, 그리고 중세풍의 메이드 복장을 한 시녀들까지 훑어보더니 눈이 풀렸다.

그러고는 풀썩 기절해 버렸다.

역시 벌써 일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황비 전하!”

시녀들의 비명이 황비의 침실을 울렸다.



***



“……기억 상실?”

사냥용 장갑을 벗으며 라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쯤 황비가 시녀들을 잡고 있으니 말려 달라는 전갈이 날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소식이 들려왔다. 라일은 기가 찼다.

“기억 상실이면 오늘은 편안히 잘 수 있겠군. 날 기억하지 못하니 내 침실 안에 숨어 있다는 망상 속 여인을 찾아내라 닦달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테니 말이야.”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정말인 것 같습니다.”

심각한 시드의 말에도 라일은 썩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살 시도를 할 때마다 매번 죽는다 숨이 넘어가던 황비였다.

‘기억 상실이라니……. 이번에는 약간 머리를 쓰긴 했군.’

기억 상실이 왔으니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올 황비가 눈에 보이는 듯하여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의가 살폈느냐?”

“예. 폐하께서도 어서…….”

그러나 라일의 표정은 차가웠다.

“어의가 봤으니 되었다. 내가 간다고 황비가 낫는 것도 아니고. 기억 상실이 사실이라면 나는 낯선 이일 테니 얼굴을 보이지 않는 편이 낫겠지.”

“하, 하오나 폐하…….”

라일은 더 듣기 싫다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드가 난처한 얼굴로 황제의 뒤를 쫓았다.

어차피 닷새 뒤면 싫어도 합방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녀가 진짜 기억 상실이라면 그때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흥! 차라리 그 닷새째까지는 편히 잘 수 있겠군.’

지긋지긋한 황비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라일은 시드에게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물었다.



***



밀레디아는 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의가 다녀갔고 그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그녀는 자신이 밀레디아 콘스탄스 케이아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밀레디아.’

그 이름이 삼총사의 악녀를 연상시켜서 기억하고 있었다.

<황제의 아름다운 검>에 나오는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전에 자살 소동을 일으켜 진짜로 죽어 버리는 황비였다.

황제의 여성 혐오증을 설명하기 위한 인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였네.’

멍한 얼굴로 침대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밀레디아는 생각했다.

빙의물, 회귀물. 최근 웹 소설에서 그런 것들이 유행이었다. 그녀 오수연도 휴대폰과 컴퓨터로 많이도 읽고 또 읽었다.

‘기왕 빙의되는 거 미혼으로 해 주지 않고!’

이미 기혼녀. 그것도 빼도 박도 못하게 황제의 여인이라니.

썩 안 좋다. 아니, 아주아주 많이 안 좋았다.

배경이 중세 시대인 것도 싫다. 중세물은 소설로 볼 때나 좋은 거지, 여기는 게임도 텔레비전도 웹 소설도 없지 않은가!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매일 아침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웹 소설을 보고, 퇴근하면서 나머지 웹 소설을 읽는 재미로 살았던 그녀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난 웹 소설 중독이라고! 최소한 완결 편까지는 보고 죽게 해 주든가!’

미처 완독하지 못한 웹 소설을 떠올리며 밀레디아는 흑흑 눈물을 흘렸다.

웹 소설을 다 못 본 것도 아쉽고 중세로 떨어진 것도 억울했다. 게다가…… 저금한 돈을 다 못 쓰고 죽은 거! 이게 제일 짜증 나고 화가 났다.

“망할. 내가 왜 죽은 거지?”

마지막 기억은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권하는 폭탄주를 들이켜던 거였다. 이미 열여덟 잔째 마시는 중이라 주변에서 개부장을 말리던 참이었다.



‘이번에 정직원 안 되면 오수연 씨는 진짜 힘들지 않아?’



히죽히죽 웃으며 그가 술을 권하던 얼굴이 떠올라 밀레디아는 이불킥을 날렸다.

그 술. 그 한 잔을 더 마시고 내가 죽다니.

그때 그놈의 머리털을 쥐어뜯어 놨어야 하는 건데!

그 마지막 잔을 마시고 눈앞이 핑 돌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뒤로 다른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고 사색이 된 개부장의 얼굴이 얼핏 보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