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밀레디아가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리기 쉽게 치맛자락을 말아 쥔 모습이었다. 보폭도 크게 하여 성큼성큼 달리는 기세가 남자 저리 가라였다.
라일과 시드,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벙 찐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밀레디아는 라일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쌩하니 지나쳐 갔다.
‘미친 건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거 하나였다.
그러나 역시 치맛자락이 길었는지 밀레디아는 기어코 치맛자락을 밟고 크게 앞으로 비틀거렸다. 명색이 황비고 레이디인지라 라일을 비롯한 신하들 모두 부축할 듯 앞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밀레디아는 부축을 받기도 전에 복도 한쪽에 세워 둔 장식 갑옷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장식 갑옷이 무너지며 밀레디아를 덮치자 사람들은 전부 기겁했다. 라일과 그의 신하들은 물론 시녀들은 비명까지 울렸다.
“황비 전하!”
“아야야야…….”
정작 장식 갑옷에 깔린 밀레디아는 짜증만 난 얼굴이었다.
라일은 밀레디아가 구두를 벗은 맨발인 데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임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로 올라갈 때야 맨발이었지만 라일은 밀레디아가 실내화 차림으로도 복도를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맨얼굴이라니! 결혼하기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열두 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디아?”
시종과 시녀들이 허겁지겁 밀레디아 주변의 갑옷을 치웠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인 밀레디아는 슬슬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었다. 라일이 부른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빠져나갈 구멍만 찾는 눈길이다.
“밀레디아.”
저를 무시하는가 싶어 라일이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시녀가 얼른 밀레디아에게 눈치를 주었다.
의아한 듯 밀레디아가 라일을 돌아보았다. 생경한 것을 보는 얼굴로, 휘둥그레진 눈으로 똑바로 라일을 올려다보고는, 위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다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지?’
쳐다보는 시선이 라일이 기억하는 밀레디아와 상당히 달랐다. 반짝반짝한 저 눈은 마치……
‘초콜릿 전문점 유리창 너머로 다섯 살짜리가 초콜릿 탑을 보는 듯한…….’
떠올려 놓고 소름 끼치는 비유라고 생각했던지 라일은 흠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황비.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무작정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밀레디아의 표정이 일변했다. 꽤 선명하고 다양한 표정의 변화여서 라일은 또 한번 놀랐다. 이제껏 밀레디아는 경멸과 증오의 표현은 확실했지만 그 외의 것에 있어서는 불분명한 반응만 보였었다.
“그…… 불편해서.”
“무슨 뜻이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라일이 되묻자 시녀들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라일은 이곳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부관인 시드와 다른 신하들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 있으라. 나는 황비와 할 얘기가 있으니.”
“예, 전하.”
시드를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라일과 밀레디아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물러났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지자 라일은 밀레디아가 아닌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할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이었다.
“황비가 궁의 복도를 달리고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이 황궁에서 황비를 핍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황제 본인인 라일을 제외하고.
“……황비 전하께서 깨시었기에 평소의 일과대로 세숫물을 대령하고 머리와 얼굴 손질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황비 전하께서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고집하시기에 그를 말리었더니…….”
“더는 못 참으시겠다며, 문을 열고 나가시고는 계속 도망을…….”
“신발은?”
“실내화를 신고 달리시다가 불편하셨는지 중간에 벗어…… 던지셨습니다.”
말을 잇기도 민망한지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라일은 눈에 빤히 보이는 증거가 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 황비?”
“…….”
밀레디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여기 화장품은 거의가 천연이고 비슷한 색깔을 내기는 했으나…… 현대의 화장품보다 질이 많이 떨어졌다. 여기의 화장이라는 것을 하면 얼굴이 근질거리고 분가루가 폴폴 날렸다.
거기다 머리 모양을 낸다면서 부풀리는 기구까지 넣어서 틀어 올리는데 왜 그렇게 무거운지! 탈모가 오지 않은 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걸 이틀간은 참았으나. 누구 보여 줄 것도 아니고, 싫다는데 계속 해야 한다고 쫓아다니는 시녀들이 귀찮아서 도망친 것뿐이다. 계속 쫓아오기에 달렸고, 달리다 보니 실내화가 불편해서 벗어 버렸다.
“폐하의 앞에서 추…… 추태를 보인 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요…… 용서해 주시 옵소서…….”
웹 소설에서 읽었던 내용을 참고해서 최대로 짜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 근질근질한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서 밀레디아는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로 말했다.
라일은 당연히 눈살을 찌푸렸다.
“황비, 어딜 보고 말하는 거지?”
“그…… 수치스러워 차마 폐하를 마주 볼 수가…….”
말은 참 청산유수지만 믿음이 조금도 가지 않았다.
참다못한 라일은 밀레디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거친 손길은 아니었지만 밀레디아가 참으로 놀란 얼굴로 라일을 쳐다보았다. 마치 제게 손을 댈 줄은 몰랐다는 듯이.
라일은 약간 민망한 기분으로 밀레디아를 내려다보았다.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자 밀레디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언제나 라일을 탓하고 비난했다. 그가 사랑을 주지 않은 탓이고, 그가 웃어 주지 않은 탓이며, 그가 찾아와 주지 않은 탓이었다.
‘황비답지 않군.’
밀레디아의 얼굴에 밀레디아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마치 그녀와 닮은 누군가가 황비인 척하거나 쌍둥이가 뒤바뀐 것만 같았다.
“……일으켜 세워라.”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인 밀레디아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라일이 명령했다. 그러자 시종과 시녀들이 얼른 밀레디아를 부축했다. 다른 시녀 둘이 밀레디아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를 신은 밀레디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툭툭 드레스를 털었다. 시녀들도 그녀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으나 그 모습이 참으로 생경했다.
“황비.”
라일은 충동적으로 밀레디아를 불렀다. 밀레디아는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황비라는 명칭이 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정말 기억이 없는 건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미안한 듯 곤혹스러운 얼굴.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밀레디아가 긍정했다.
“예.”
곧은 시선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라일은 어째서인지 속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업무가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른 말씀 하실 것이 없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공손히 절을 하고 기다린다. 예법에 완벽하게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밀레디아가 이렇듯 먼저 가겠다 말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라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가 보시오.”
허락하자 어쩐지 냉큼 돌아섰다. 라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밀레디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폐하께서 비 전하를 바라보시는 눈빛이 뜨거웠습니다…….”
조심스레 말을 전하는 시녀에게 밀레디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착각이다.”
‘찍혔나? 벌써 밉보인 거야?’
위기감에 목이 탔지만 시녀들은 계속 힐끗힐끗 밀레디아의 눈치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폐하께서도 황비 전하가 아프시다고 하시니 신경 쓰시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기억 상실증은 심각한 병이니…….”
“폐하께서 황비 전하를 걱정하시는 모양입니다.”
밀레디아는 찡그린 얼굴로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이 정신을 차린 듯 ‘헉!’ 한 얼굴로 간살부리던 것을 멈췄다.
“도서관에 갈 것이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또 도서관이십니까?”
“건강을 위해서라도 하루에 한 번은 산책을 하셔야 합니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멀잖아.”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하고는 밀레디아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따라오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도서관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 내가 부를 때까지 문도 열지 말고.”
“네…….”
걸어가며 밀레디아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녀들은 5분마다 어디 불편한 곳이 없는지 물었다. 물을 가져다 먹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모두 혼자, 스스로 하는 것이 당연했던 그녀에게 시녀들의 시중은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황비 전하. 그렇게 크게 걸으시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성큼성큼 빨리 걸었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시녀장이 밀레디아에게 충고했다.
‘내가 자꾸 예법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라일이 날 폐위시킬까? 아니면 미쳤다고 여기고 어딘가 유폐시켜 버릴까?’
그러나 어느 쪽도 이 소설의 남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가 밀레디아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은 단순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라일은 밀레디아가 정신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어린 시절 학대받은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밀레디아가 도움을 요청했다면 라일은 철저하게 그녀를 보호했을 거다.
‘뭐, 좀 별나졌다고 생각할 것 같다.’
라일은 그런 황제였다. 잔혹해질 부분에서는 철저히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였지만 제 사람에게는 너그러우려 애썼다.
밀레디아가 온갖 패악을 떨었음에도 폐위시키지 않은 것도 그런 의식의 반로였다. 제 사람이었으니까. 보호해야 한다고 여겼다.
‘라일이 남편이니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지도.’
밀레디아는 휘적휘적 걷다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밀레디아가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리기 쉽게 치맛자락을 말아 쥔 모습이었다. 보폭도 크게 하여 성큼성큼 달리는 기세가 남자 저리 가라였다.
라일과 시드,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벙 찐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밀레디아는 라일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쌩하니 지나쳐 갔다.
‘미친 건가?’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거 하나였다.
그러나 역시 치맛자락이 길었는지 밀레디아는 기어코 치맛자락을 밟고 크게 앞으로 비틀거렸다. 명색이 황비고 레이디인지라 라일을 비롯한 신하들 모두 부축할 듯 앞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밀레디아는 부축을 받기도 전에 복도 한쪽에 세워 둔 장식 갑옷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장식 갑옷이 무너지며 밀레디아를 덮치자 사람들은 전부 기겁했다. 라일과 그의 신하들은 물론 시녀들은 비명까지 울렸다.
“황비 전하!”
“아야야야…….”
정작 장식 갑옷에 깔린 밀레디아는 짜증만 난 얼굴이었다.
라일은 밀레디아가 구두를 벗은 맨발인 데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임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로 올라갈 때야 맨발이었지만 라일은 밀레디아가 실내화 차림으로도 복도를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맨얼굴이라니! 결혼하기 전에도 후에도 보지 못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열두 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디아?”
시종과 시녀들이 허겁지겁 밀레디아 주변의 갑옷을 치웠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인 밀레디아는 슬슬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었다. 라일이 부른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빠져나갈 구멍만 찾는 눈길이다.
“밀레디아.”
저를 무시하는가 싶어 라일이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시녀가 얼른 밀레디아에게 눈치를 주었다.
의아한 듯 밀레디아가 라일을 돌아보았다. 생경한 것을 보는 얼굴로, 휘둥그레진 눈으로 똑바로 라일을 올려다보고는, 위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다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지?’
쳐다보는 시선이 라일이 기억하는 밀레디아와 상당히 달랐다. 반짝반짝한 저 눈은 마치……
‘초콜릿 전문점 유리창 너머로 다섯 살짜리가 초콜릿 탑을 보는 듯한…….’
떠올려 놓고 소름 끼치는 비유라고 생각했던지 라일은 흠흠하고 헛기침을 했다.
“황비.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무작정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밀레디아의 표정이 일변했다. 꽤 선명하고 다양한 표정의 변화여서 라일은 또 한번 놀랐다. 이제껏 밀레디아는 경멸과 증오의 표현은 확실했지만 그 외의 것에 있어서는 불분명한 반응만 보였었다.
“그…… 불편해서.”
“무슨 뜻이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라일이 되묻자 시녀들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라일은 이곳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부관인 시드와 다른 신하들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 있으라. 나는 황비와 할 얘기가 있으니.”
“예, 전하.”
시드를 비롯한 다른 신하들이 라일과 밀레디아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물러났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지자 라일은 밀레디아가 아닌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할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이었다.
“황비가 궁의 복도를 달리고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이 황궁에서 황비를 핍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황제 본인인 라일을 제외하고.
“……황비 전하께서 깨시었기에 평소의 일과대로 세숫물을 대령하고 머리와 얼굴 손질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황비 전하께서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고집하시기에 그를 말리었더니…….”
“더는 못 참으시겠다며, 문을 열고 나가시고는 계속 도망을…….”
“신발은?”
“실내화를 신고 달리시다가 불편하셨는지 중간에 벗어…… 던지셨습니다.”
말을 잇기도 민망한지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라일은 눈에 빤히 보이는 증거가 있음에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 황비?”
“…….”
밀레디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여기 화장품은 거의가 천연이고 비슷한 색깔을 내기는 했으나…… 현대의 화장품보다 질이 많이 떨어졌다. 여기의 화장이라는 것을 하면 얼굴이 근질거리고 분가루가 폴폴 날렸다.
거기다 머리 모양을 낸다면서 부풀리는 기구까지 넣어서 틀어 올리는데 왜 그렇게 무거운지! 탈모가 오지 않은 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걸 이틀간은 참았으나. 누구 보여 줄 것도 아니고, 싫다는데 계속 해야 한다고 쫓아다니는 시녀들이 귀찮아서 도망친 것뿐이다. 계속 쫓아오기에 달렸고, 달리다 보니 실내화가 불편해서 벗어 버렸다.
“폐하의 앞에서 추…… 추태를 보인 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요…… 용서해 주시 옵소서…….”
웹 소설에서 읽었던 내용을 참고해서 최대로 짜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 근질근질한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서 밀레디아는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로 말했다.
라일은 당연히 눈살을 찌푸렸다.
“황비, 어딜 보고 말하는 거지?”
“그…… 수치스러워 차마 폐하를 마주 볼 수가…….”
말은 참 청산유수지만 믿음이 조금도 가지 않았다.
참다못한 라일은 밀레디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거친 손길은 아니었지만 밀레디아가 참으로 놀란 얼굴로 라일을 쳐다보았다. 마치 제게 손을 댈 줄은 몰랐다는 듯이.
라일은 약간 민망한 기분으로 밀레디아를 내려다보았다.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자 밀레디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언제나 라일을 탓하고 비난했다. 그가 사랑을 주지 않은 탓이고, 그가 웃어 주지 않은 탓이며, 그가 찾아와 주지 않은 탓이었다.
‘황비답지 않군.’
밀레디아의 얼굴에 밀레디아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 같다. 마치 그녀와 닮은 누군가가 황비인 척하거나 쌍둥이가 뒤바뀐 것만 같았다.
“……일으켜 세워라.”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인 밀레디아의 모습이 거슬렸는지 라일이 명령했다. 그러자 시종과 시녀들이 얼른 밀레디아를 부축했다. 다른 시녀 둘이 밀레디아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를 신은 밀레디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툭툭 드레스를 털었다. 시녀들도 그녀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으나 그 모습이 참으로 생경했다.
“황비.”
라일은 충동적으로 밀레디아를 불렀다. 밀레디아는 반박자 늦게 반응했다. 황비라는 명칭이 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정말 기억이 없는 건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미안한 듯 곤혹스러운 얼굴.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밀레디아가 긍정했다.
“예.”
곧은 시선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라일은 어째서인지 속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업무가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른 말씀 하실 것이 없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공손히 절을 하고 기다린다. 예법에 완벽하게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밀레디아가 이렇듯 먼저 가겠다 말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라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가 보시오.”
허락하자 어쩐지 냉큼 돌아섰다. 라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밀레디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한동안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폐하께서 비 전하를 바라보시는 눈빛이 뜨거웠습니다…….”
조심스레 말을 전하는 시녀에게 밀레디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착각이다.”
‘찍혔나? 벌써 밉보인 거야?’
위기감에 목이 탔지만 시녀들은 계속 힐끗힐끗 밀레디아의 눈치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폐하께서도 황비 전하가 아프시다고 하시니 신경 쓰시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기억 상실증은 심각한 병이니…….”
“폐하께서 황비 전하를 걱정하시는 모양입니다.”
밀레디아는 찡그린 얼굴로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이 정신을 차린 듯 ‘헉!’ 한 얼굴로 간살부리던 것을 멈췄다.
“도서관에 갈 것이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또 도서관이십니까?”
“건강을 위해서라도 하루에 한 번은 산책을 하셔야 합니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멀잖아.”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하고는 밀레디아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뒤따라오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도서관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 내가 부를 때까지 문도 열지 말고.”
“네…….”
걸어가며 밀레디아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녀들은 5분마다 어디 불편한 곳이 없는지 물었다. 물을 가져다 먹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모두 혼자, 스스로 하는 것이 당연했던 그녀에게 시녀들의 시중은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황비 전하. 그렇게 크게 걸으시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성큼성큼 빨리 걸었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시녀장이 밀레디아에게 충고했다.
‘내가 자꾸 예법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라일이 날 폐위시킬까? 아니면 미쳤다고 여기고 어딘가 유폐시켜 버릴까?’
그러나 어느 쪽도 이 소설의 남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가 밀레디아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은 단순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라일은 밀레디아가 정신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어린 시절 학대받은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밀레디아가 도움을 요청했다면 라일은 철저하게 그녀를 보호했을 거다.
‘뭐, 좀 별나졌다고 생각할 것 같다.’
라일은 그런 황제였다. 잔혹해질 부분에서는 철저히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였지만 제 사람에게는 너그러우려 애썼다.
밀레디아가 온갖 패악을 떨었음에도 폐위시키지 않은 것도 그런 의식의 반로였다. 제 사람이었으니까. 보호해야 한다고 여겼다.
‘라일이 남편이니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지도.’
밀레디아는 휘적휘적 걷다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