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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날 밤 도윤은 잠을 설쳤다. 잠이 들라치면 기태현이 방문을 차고 들어오는 상상에 잠이 홀랑 달아났고, 겨우 잠이 들면 기태현이 나와 고상한 욕을 하며 그의 멱살을 쥐거나 아예 멱을 따 버렸다. 결국 도윤은 이른 새벽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아펜첼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펜첼의 출구는 역 앞의 버스 정류장 한 곳뿐이었다. 기차 여행을 하겠답시고 차를 렌트하지 않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도윤은 낮은 한숨과 함께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휴대폰도 그랬다. 그는 이 마을에 휴대폰 매장이 있는지부터 몰랐다. 있는지를 알 방법도 당연히 없었다. 휴대폰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니 이번엔 배가 주렸다.
돌이켜 보면 아펜첼에 와서 먹은 거라곤 컵라면 두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젠 다 떨어졌다. 애당초 길게 잡고 온 여행이 아닌 까닭이었다. 도윤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간 기태현한테 잡혀 죽기 전에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팡질팡하던 생각은 뱃가죽을 울리는 소리에 죽더라도 먹고 죽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느리게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엔 어젯밤 불현듯 시야가 핑 돌았던 감각을 반추했다. 당시엔 낮에 받은 스트레스와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영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거울 속의 낯도 며칠 사이 창백하니 핼쑥해진 것 같았다.
역시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 도윤은 외투를 탈탈 털어 입고 방문을 열었다. 우선은 휴대폰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호텔 1층의 데스크에는 체크인할 때 보았던 아주머니가 아닌 처음 보는 노인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 경영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었다. 모쪼록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그만이었기에 도윤은 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301호에 머물고 있는데요.]
노인은 인사를 돌려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상하게 불길한 기분이 뒤통수를 쭉 잡아당겼다. 도윤은 애써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뗐다.
[혹시 이 근처에 휴대폰을 살 데가 있나요?]
여전히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확실했다. 눈썹을 축 내려트린 것이다. 그 순간 도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스위스 사람들이 생각보다 영어를 못한다던 어느 블로그 리뷰였다.
《미안해요, 청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네?”
도윤은 낭패한 기분에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노인이 말한 건 도윤이 모르는 외국어였다. 억양을 보면 독일어 같기도 한데 도윤이 아는 독일어라곤 ‘구텐탁Guten Tag’뿐이었다. 도윤은 노인이 직전에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지어 보였다.
《딸애는 지금 볼일을 보러 나가 있어요.》
“어떡한담…….”
노인은 손짓 발짓으로 힘겹게 뭔가를 표현하려고 했다. 애꿎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윤은 고민하다가 결국 손으로 하트를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당장 휴대폰을 해결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노인도 그 바디랭귀지의 함의만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마주 하트를 만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이 기승이었다. 도윤은 몸을 움츠리며 호텔을 돌아보다가 기찻길을 넘었다. 생각은 자조적으로 돌아갔다.
그래, 한국에서도 안 풀리던 인생이 외국서라고 갑자기 잘 풀릴 리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빵이나 한 아름 사서 며칠 동안 호텔에 박혀 있는 게 나을 것이다. 기태현도 천년만년 아펜첼에 있진 못할 테니, 우선 오늘 가서 호텔 연장을 하고, 아주머니가 돌아오시면 휴대폰 매장이 있는지 물어보고…….
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영상 한 번 찍다가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다시는 동영상의 디귿 자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지척으로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판에는 빵이 그려져 있었다. 인테리어도 달큰한 냄새가 날 것같이 귀엽고 보송보송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문 너머로 빵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베이커리였다.
이 와중에도 풀리는 일은 있는 모양이다. 문을 젖히니 삽시간 고소한 냄새가 훅 끼쳤다. 도윤은 달콤한 기분에 젖어 눈꺼풀을 끔뻑였다.
가게 안엔 밖에서 본 대로 갓 구운 빵과 꿀로 만든 잼 따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며칠간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한 혀에 침이 고였다. 몸도 마음도 허기져서인지 먹고 싶은 빵이 아주 많았다.
도윤은 카운터에 빵을 산처럼 가득 쌓아 놓고 계산했다. 주인은 아침부터 이 아시안이 무슨 사정으로 겨울 식량을 비축하는 다람쥐처럼 빵을 이렇게 사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아주 기쁘다는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윤도 품 안에 가득 들어올 몇 개의 빵 봉투가 든든해 마주 웃었다.
[계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심지어 주인과는 짧게나마 대화도 통했다. 먼 땅에 좌초된 듯했던 기분이 사르르 녹았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그가 빵을 안아 드는 것까지 도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윤은 빵 봉투를 꼭 끌어안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내 웃는 얼굴로 문을 밀며 가게를 나서는데, 몸을 채 꺼내기도 전에 웬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도윤이 무심코 웃는 얼굴 그대로 앞을 올려다보았다.
“한도윤 씨. 얘기 좀 하죠.”
기태현이었다. 그것도 냉랭한 얼굴을 한 기태현이었다. 도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빵이 든 봉투를 세게 끌어안았다. 빵 봉투 구겨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전을 울렸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기태현은 기어코 도윤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났다. 기실 마을이래 봐야 베이커리로부터 10분을 걸으면 벗어날 수 있는 크기였다. 기태현은 소와 풀밖에 없는 들판에 도달하자 자리에 멈추더니, 잠자코 도윤을 노려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영원한 지옥 같았다. 도윤은 숨마저 억누르며 기태현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입을 뗀 것은 긴장하고 있던 도윤이 기어코 빵 봉투 하나를 놓쳤을 때였다.
“뭘 원합니까.”
빵 봉투를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도윤이 엉거주춤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이 찍은 동영상. 대가로 뭘 원하냐고요.”
사나운 시선에 도윤은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
“아니, 전…….”
“찍었다는 걸 부인할 겁니까? 당신은 안 들킬 줄 알았나 본데, 당신이 휴대폰 바닥에 던질 때 동영상 촬영 종료되는 소리 다 났습니다.”
기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도윤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벽돌 바닥에 던져서인지 모서리가 조금 깨져 있었다. 할부는 여섯 달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 침음하는데 기태현이 한마디를 더했다.
“가지라더니 잠가 놨고요.”
“…….”
그건 도윤도 어젯밤 늦게서야 생각났다. 도윤의 불찰이 맞았다. 더구나 그의 휴대폰은 으레 그렇듯 드라이브에 사진이며 동영상을 자동으로 저장했다. 기태현으로서는 그 동영상이 어디에 옮겨졌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도윤의 생각을 기태현도 그대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잠금 화면엔 드라이브에 저장됐단 알림까지 뜨던데. 그래서 묻는 겁니다. 동영상 대가로 뭘 원하냐고.”
“……저기, 기태현 씨.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무슨 오해요.”
그는 이미 들어 줄 태도가 아니었지만, 도윤은 어떻게든 확실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정말 원하는 거 없습니다. 동영상은 죄송하게 됐는데 기태현 씨랑 그분 찍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원하시면 기태현 씨 보는 앞에서 지워 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도윤은 기태현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검은 눈이 한 치의 일렁임 없이 도윤을 직시했다. 그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감이 왔다. 기태현은 도윤의 진심을 알아보면서도 인정해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태현이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한도윤 씨 어딜 보고 그 말을 믿습니까.”
“…….”
“돈을 원한다면 기자들한테 넘겨서 받을 돈보다 많이 쳐드리겠습니다.”
그건 너무 거북한 소리였다. 도윤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애당초 그런 걸 노리고 찍은 것도 아니고, 남의 약점을 가지고 돈을 받는 것도 그가 보기엔 인간 된 도리가 아니었다. 도윤은 하물며 생활고에 시달릴 때에도 나쁜 생각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얼굴에서 채 숨기지 못한 거부감을 읽었는가 보다. 기태현의 어조가 조금 더 사나워졌다.
“그게 싫으면 원하는 걸 말해요.”
“정말로 원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있는 드라이브 계정 다 보여 드릴게요. 그리고…….”
도윤은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
“저도 동성애자예요. 함부로 떠벌리진 않아요.”
제 딴엔 큰 용기를 낸 말이었다. 하지만 기태현의 반응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답답한 듯 주위의 들판이며 언덕을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봐요, 한도윤 씨.”
“네…….”
“한도윤 씨 같으면 그 말에 옳다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야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넘어가 줬으면 했다. 도윤이 입을 다물자 기태현은 거 보란 듯 턱 끝을 까딱였다.
“한도윤 씨 십 년 동안 극단에서 배우 일을 했다고 했죠?”
“네.”
“그렇게 오래 한 일을 왜 그만뒀습니까? 몇 살인지는 몰라도 꽤 어릴 때부터 했던 것 같은데.”
“…….”
스무 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다. 원해서 그만둔 게 아니란 건 그 역시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도윤이 대답을 않자 기태현은 대뜸 그의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잠금은 해제된 채였다.
“번호 주십시오.”
“네…….”
도윤은 순순히 빵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폰을 받아 들었다. 번호 열한 자리를 꾹꾹 눌러 입력하고 있는데 기태현이 첨언했다.
“유심 쓰는 것 같던데 여기 번호도요.”
유심을 쓰면 전화번호가 바뀐다. 도윤은 그를 기억하긴커녕 확인해 본 적도 없었다. 차마 달란 말도 못 하고 제 휴대폰을 힐끔거리자, 이를 눈치챈 기태현이 던지듯이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막상 휴대폰이 손에 들어오니 번호고 뭐고 이젠 재앙처럼 느껴지는 영상부터 삭제하고 싶어졌다.
잠금만 푼 채로 방황하고 있으려니 기태현이 ‘뭐 합니까?’ 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장 영상부터 지우란 얘길 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긴 한 모양인데……. 도윤은 결국 한숨을 쉬며 번호를 찾았다.
그날 밤 도윤은 잠을 설쳤다. 잠이 들라치면 기태현이 방문을 차고 들어오는 상상에 잠이 홀랑 달아났고, 겨우 잠이 들면 기태현이 나와 고상한 욕을 하며 그의 멱살을 쥐거나 아예 멱을 따 버렸다. 결국 도윤은 이른 새벽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아펜첼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아펜첼의 출구는 역 앞의 버스 정류장 한 곳뿐이었다. 기차 여행을 하겠답시고 차를 렌트하지 않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도윤은 낮은 한숨과 함께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휴대폰도 그랬다. 그는 이 마을에 휴대폰 매장이 있는지부터 몰랐다. 있는지를 알 방법도 당연히 없었다. 휴대폰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통에 머리를 움켜쥐니 이번엔 배가 주렸다.
돌이켜 보면 아펜첼에 와서 먹은 거라곤 컵라면 두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이젠 다 떨어졌다. 애당초 길게 잡고 온 여행이 아닌 까닭이었다. 도윤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간 기태현한테 잡혀 죽기 전에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팡질팡하던 생각은 뱃가죽을 울리는 소리에 죽더라도 먹고 죽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느리게 일어나 세면대 앞으로 갔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엔 어젯밤 불현듯 시야가 핑 돌았던 감각을 반추했다. 당시엔 낮에 받은 스트레스와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영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거울 속의 낯도 며칠 사이 창백하니 핼쑥해진 것 같았다.
역시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 도윤은 외투를 탈탈 털어 입고 방문을 열었다. 우선은 휴대폰부터 구할 생각이었다.
호텔 1층의 데스크에는 체크인할 때 보았던 아주머니가 아닌 처음 보는 노인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 경영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었다. 모쪼록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그만이었기에 도윤은 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301호에 머물고 있는데요.]
노인은 인사를 돌려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상하게 불길한 기분이 뒤통수를 쭉 잡아당겼다. 도윤은 애써 웃는 얼굴로 다시 입을 뗐다.
[혹시 이 근처에 휴대폰을 살 데가 있나요?]
여전히 노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확실했다. 눈썹을 축 내려트린 것이다. 그 순간 도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스위스 사람들이 생각보다 영어를 못한다던 어느 블로그 리뷰였다.
《미안해요, 청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네?”
도윤은 낭패한 기분에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노인이 말한 건 도윤이 모르는 외국어였다. 억양을 보면 독일어 같기도 한데 도윤이 아는 독일어라곤 ‘구텐탁Guten Tag’뿐이었다. 도윤은 노인이 직전에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지어 보였다.
《딸애는 지금 볼일을 보러 나가 있어요.》
“어떡한담…….”
노인은 손짓 발짓으로 힘겹게 뭔가를 표현하려고 했다. 애꿎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윤은 고민하다가 결국 손으로 하트를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당장 휴대폰을 해결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노인도 그 바디랭귀지의 함의만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마주 하트를 만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이 기승이었다. 도윤은 몸을 움츠리며 호텔을 돌아보다가 기찻길을 넘었다. 생각은 자조적으로 돌아갔다.
그래, 한국에서도 안 풀리던 인생이 외국서라고 갑자기 잘 풀릴 리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빵이나 한 아름 사서 며칠 동안 호텔에 박혀 있는 게 나을 것이다. 기태현도 천년만년 아펜첼에 있진 못할 테니, 우선 오늘 가서 호텔 연장을 하고, 아주머니가 돌아오시면 휴대폰 매장이 있는지 물어보고…….
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영상 한 번 찍다가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다시는 동영상의 디귿 자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지척으로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판에는 빵이 그려져 있었다. 인테리어도 달큰한 냄새가 날 것같이 귀엽고 보송보송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문 너머로 빵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베이커리였다.
이 와중에도 풀리는 일은 있는 모양이다. 문을 젖히니 삽시간 고소한 냄새가 훅 끼쳤다. 도윤은 달콤한 기분에 젖어 눈꺼풀을 끔뻑였다.
가게 안엔 밖에서 본 대로 갓 구운 빵과 꿀로 만든 잼 따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며칠간 음식다운 음식을 먹지 못한 혀에 침이 고였다. 몸도 마음도 허기져서인지 먹고 싶은 빵이 아주 많았다.
도윤은 카운터에 빵을 산처럼 가득 쌓아 놓고 계산했다. 주인은 아침부터 이 아시안이 무슨 사정으로 겨울 식량을 비축하는 다람쥐처럼 빵을 이렇게 사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좌우지간 아주 기쁘다는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윤도 품 안에 가득 들어올 몇 개의 빵 봉투가 든든해 마주 웃었다.
[계산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심지어 주인과는 짧게나마 대화도 통했다. 먼 땅에 좌초된 듯했던 기분이 사르르 녹았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그가 빵을 안아 드는 것까지 도왔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도윤은 빵 봉투를 꼭 끌어안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내 웃는 얼굴로 문을 밀며 가게를 나서는데, 몸을 채 꺼내기도 전에 웬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도윤이 무심코 웃는 얼굴 그대로 앞을 올려다보았다.
“한도윤 씨. 얘기 좀 하죠.”
기태현이었다. 그것도 냉랭한 얼굴을 한 기태현이었다. 도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빵이 든 봉투를 세게 끌어안았다. 빵 봉투 구겨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전을 울렸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기태현은 기어코 도윤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났다. 기실 마을이래 봐야 베이커리로부터 10분을 걸으면 벗어날 수 있는 크기였다. 기태현은 소와 풀밖에 없는 들판에 도달하자 자리에 멈추더니, 잠자코 도윤을 노려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영원한 지옥 같았다. 도윤은 숨마저 억누르며 기태현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입을 뗀 것은 긴장하고 있던 도윤이 기어코 빵 봉투 하나를 놓쳤을 때였다.
“뭘 원합니까.”
빵 봉투를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도윤이 엉거주춤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이 찍은 동영상. 대가로 뭘 원하냐고요.”
사나운 시선에 도윤은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
“아니, 전…….”
“찍었다는 걸 부인할 겁니까? 당신은 안 들킬 줄 알았나 본데, 당신이 휴대폰 바닥에 던질 때 동영상 촬영 종료되는 소리 다 났습니다.”
기태현은 그렇게 말하며 도윤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벽돌 바닥에 던져서인지 모서리가 조금 깨져 있었다. 할부는 여섯 달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 침음하는데 기태현이 한마디를 더했다.
“가지라더니 잠가 놨고요.”
“…….”
그건 도윤도 어젯밤 늦게서야 생각났다. 도윤의 불찰이 맞았다. 더구나 그의 휴대폰은 으레 그렇듯 드라이브에 사진이며 동영상을 자동으로 저장했다. 기태현으로서는 그 동영상이 어디에 옮겨졌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도윤의 생각을 기태현도 그대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잠금 화면엔 드라이브에 저장됐단 알림까지 뜨던데. 그래서 묻는 겁니다. 동영상 대가로 뭘 원하냐고.”
“……저기, 기태현 씨.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무슨 오해요.”
그는 이미 들어 줄 태도가 아니었지만, 도윤은 어떻게든 확실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정말 원하는 거 없습니다. 동영상은 죄송하게 됐는데 기태현 씨랑 그분 찍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원하시면 기태현 씨 보는 앞에서 지워 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도윤은 기태현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검은 눈이 한 치의 일렁임 없이 도윤을 직시했다. 그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감이 왔다. 기태현은 도윤의 진심을 알아보면서도 인정해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태현이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한도윤 씨 어딜 보고 그 말을 믿습니까.”
“…….”
“돈을 원한다면 기자들한테 넘겨서 받을 돈보다 많이 쳐드리겠습니다.”
그건 너무 거북한 소리였다. 도윤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애당초 그런 걸 노리고 찍은 것도 아니고, 남의 약점을 가지고 돈을 받는 것도 그가 보기엔 인간 된 도리가 아니었다. 도윤은 하물며 생활고에 시달릴 때에도 나쁜 생각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얼굴에서 채 숨기지 못한 거부감을 읽었는가 보다. 기태현의 어조가 조금 더 사나워졌다.
“그게 싫으면 원하는 걸 말해요.”
“정말로 원하는 게 없어서 그래요. 있는 드라이브 계정 다 보여 드릴게요. 그리고…….”
도윤은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
“저도 동성애자예요. 함부로 떠벌리진 않아요.”
제 딴엔 큰 용기를 낸 말이었다. 하지만 기태현의 반응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답답한 듯 주위의 들판이며 언덕을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봐요, 한도윤 씨.”
“네…….”
“한도윤 씨 같으면 그 말에 옳다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야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넘어가 줬으면 했다. 도윤이 입을 다물자 기태현은 거 보란 듯 턱 끝을 까딱였다.
“한도윤 씨 십 년 동안 극단에서 배우 일을 했다고 했죠?”
“네.”
“그렇게 오래 한 일을 왜 그만뒀습니까? 몇 살인지는 몰라도 꽤 어릴 때부터 했던 것 같은데.”
“…….”
스무 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다. 원해서 그만둔 게 아니란 건 그 역시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도윤이 대답을 않자 기태현은 대뜸 그의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잠금은 해제된 채였다.
“번호 주십시오.”
“네…….”
도윤은 순순히 빵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폰을 받아 들었다. 번호 열한 자리를 꾹꾹 눌러 입력하고 있는데 기태현이 첨언했다.
“유심 쓰는 것 같던데 여기 번호도요.”
유심을 쓰면 전화번호가 바뀐다. 도윤은 그를 기억하긴커녕 확인해 본 적도 없었다. 차마 달란 말도 못 하고 제 휴대폰을 힐끔거리자, 이를 눈치챈 기태현이 던지듯이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막상 휴대폰이 손에 들어오니 번호고 뭐고 이젠 재앙처럼 느껴지는 영상부터 삭제하고 싶어졌다.
잠금만 푼 채로 방황하고 있으려니 기태현이 ‘뭐 합니까?’ 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장 영상부터 지우란 얘길 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긴 한 모양인데……. 도윤은 결국 한숨을 쉬며 번호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