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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Giselle) 1화
0.
“시스!”
들고 있던 도끼를 내팽개치고는 마법사에게 달려갔다. 팔을 활짝 벌려 그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짙은 쥐색 로브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마탑의 오래된 마법서들이 풍기는 좀벌레 냄새인지, 그의 몸에서 풍기는 고유한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는 백 년을 꼬박 마탑에 박혀 마법을 연구했다고 했으니 책 냄새가 곧 시스의 체취나 다름없었다.
“이런 잡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마법사는 열렬한 포옹에 답해 주기는커녕 쪼개 둔 장작더미를 손짓했다. 우리의 이 작고 아담한 신혼집에는 어떤 시중인도 없었으므로 사소한 일들은 직접 해결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은 마법사의 손짓 하나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도 마법사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적어도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온종일 앉아 있는 일보다야 훨씬 쉬웠다.
“그동안 마법사님이 안 계셔서 무척 심심했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거기다 나는 날붙이라고는 식사용 나이프밖에 휘둘러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런 게 무척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시스는 다칠지도 모른다며 얼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적어도 도끼같이 위험한 물건은 내가 있을 때 다루도록 해요.”
“당신은 너무 저를 어린애 취급해요. 아직도 제가 당신 허리춤에 매달리던 자그마한 지젤로 보이세요?”
반쯤은 애교를 담아 작게 투덜거렸다. 그 꼬마는 이젠 훌쩍 자라 시스의 눈높이보다 높아졌다고요.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자랐다. 남들은 십 대 후반이면 성장기가 끝난다던데, 나는 오래오래 키가 컸다.
어쩌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본디 모습 그대로 지내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걸지도.
“그렇다고 위험한 물건이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죠.”
“쳇.”
아무튼 그는 부쩍 자라 눈높이도 높아지고 덩치도 커진 내가 아직도 열 살 어린애로 보이나 보다. 물론 오래 산 마법사의 눈에는 열 살의 나나 스물다섯의 나나 똑같은 핏덩이로 보이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난 그의 배우자인데.’
우린 왕국법상으로도 적법한 혼인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법사의 아내는 지젤이고, 지젤의 남편은 마법사다. 내 성별에 대한 진실만 제한다면 우리는 이 왕국 안에서 제일 유명한 한 쌍 중 하나일걸.
“지젤?”
불만 어린 속내를 눈치챘는지 마법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무척 무심해 보여도 가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마음을 읽어 냈다. 오늘이 그런 날인가.
“지젤. 나는 갓난아이처럼 생각하는 상대와 결혼하여 침대까지 나누어 쓰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데, 열이 확 올랐다. 화가 났단 의미는 아니다. 얼굴이랑 아랫도리가 화끈 달아올랐단 뜻이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어린애는 아니더라도 애송이긴 한가 보다. 이런 덤덤한 말 한마디에도 금방 숨이 거칠어지는 걸 보면.
‘그는 마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해도 되냐고 물어봐 볼까?’
그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답해 준다. 시답잖게 섹스를 졸라 대는 말까지 그랬다. 아, 이런 그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배 속이 둥둥 울릴 지경이었다.
열기 어린 숨결을 애써 감추며 마법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넣었다.
“시스…….”
말꼬리를 흐리며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면 금세 눈동자엔 습막이 어렸다. 그는 이 표정에 약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 스물다섯의 지젤이 되기까지 이 표정으로 마법사를 얼마나 많이 꾀어냈는지 모르겠다.
‘제발, 제발 이번에도 먹히기를.’
“음…… 그래요.”
역시나, 금세 허락해 주었다. 이럴 때는 응석쟁이 지젤인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마법사 시스는 나, 지젤에게는 유독 물러졌다. 그럼, 여기서 조금 더 해 볼까.
“저어, 시스. 밖에서 하면 안 돼요? 응? 정원에서.”
저기 정원 가운데에 둔 의자 위에서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여온 음란 서적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찌나 따라 해 보고 싶던지.
“좋을 것 같지 않나요? 색다르기도 하고, 마침 봄이라 꽃도 예쁘게 피었고…….”
“안 됩니다.”
“히잉.”
“그만.”
“치이.”
“지젤.”
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밖에 안 통하네.’
요즘 너무 자주 써먹었나? 예전에는 이거로 결혼까지 허락받았는데. 칭얼거리기, 예쁜 척하기, 눈물 글썽이기.
아, 그래. 우리의 결혼. 그 얘길 해야지.
나, 지젤과 마법사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는 통속 소설로까지 나와 인기를 떨칠 정도로 아주 유명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대부분 미화되어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애당초 ‘공주 지젤’의 성별부터가 틀렸으니까. 그들이 아는 공주 지젤은 아리따운 여성이고, 진짜 지젤은 올해 스물다섯 먹은 혈기 왕성한 청년이거든.
그럼 진짜 지젤과 마법사 이야기를 해 볼까.
부제는 좀 길다. 온 세상을 속여 넘긴 왕가의 사기극이자 공주 지젤의 생존기, 그리고 나의 짝사랑 성공기.
1. 유년기 (1)
어린 지젤은 소리쳤다.
“마법사님!”
어린잎처럼 옅은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마법사는 어느새 달음박질쳐 와 로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어린 공주, 지젤을 내려다보았다. 보석 같은 아이였다. 빛나는 백금발에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 진줏빛 피부, 루비로 물들인 듯 발그레한 양 뺨과 입술까지, 그야말로 온 세상의 보석을 모아 둔 것처럼 사랑스럽게 반짝거리는 외양을 가졌다. 마탑 한구석에 꼬박 백 년을 처박혀 지내 미추에 무감해질 대로 무감해진 마법사에게조차 특별한 감흥을 일으킬 정도였다.
“마법사님, 보고 싶었어요.”
공주는 또랑또랑한 눈초리로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공주는 유독 마법사와 눈맞춤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법사는 유모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떠올렸다.
‘어찌나 마법사님을 기다리시는지, 이 유모는 아주 뒷전이시라니까요.’
공주의 곁에서 온갖 시중을 드는 유모보다 보름에 한 번, 고작해야 반나절가량 머무르고 가는 게 다인 마법사를 더 따르니 서운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공주, 지젤의 입장에서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지젤은 사랑스럽고 천진한 외견에 비해 내면은 무척 조숙한 아이였다. 영리한 두뇌와 재빠른 눈치를 타고났다. 그런 지젤은 굉장히 어린 시절, 그러니까 갓난아기 때부터 공주궁의 시중인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간혹 어린 지젤은 이 낯선 눈빛 속에서 위축감, 혹은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지젤이 느끼는 기묘한 기분은 마법사를 마주할 때만은 사라졌다.
그렇다. 마법사만이 예외였다. 마법사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지젤을 응시해 주었다. 그럴 때면 지젤은 마법사가 마치 제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누군가는 마법사의 지혜 어린 눈빛이 두렵다 말했지만, 지젤은 그 심해 같은 시선이 무척 좋았다.
“저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짙은 쥐색의 로브 자락을 귀찮도록 잡아당기며 귀엽게 칭얼거리자, 금세 쑤욱 지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사는 지젤을 안아 주지는 않았다. 대신 마법을 사용해 허공에 몸을 띄워 주었다.
“하하, 재미있어요!”
지젤은 까르르 웃었다.
“공부방으로 돌아갑시다.”
마법사는 신이 난 공주를 동동 띄운 채 공부방으로 향했다.
과묵해 보이는 얼굴의 마법사와 그를 뒤따라 허공을 헤엄치는 공주, 제법 우스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둘 중 아무도 그따위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책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두 읽고 얌전히 앉아 계시면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마법사는 공주의 손에 적당히 두꺼운 동화책 한 권을 쥐여 주고 공부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마법사의 등 뒤로 ‘마법사님, 나빠요. 지젤과 놀아 주신다고 했잖아요?’ 하는 쨍한 목소리가 징징 울려 왔다. 마법사가 오래간만에 저를 상대해 주는 줄 알고 무척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사는 애당초 시끄럽게 궁 안을 뛰어다니는 공주를 잡아 공부방에 앉혀 두었을 뿐, 놀아 주겠다 약속한 적 없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지젤.”
“이이잉!”
마법사는 마탑의 마법사가 된 이래로 늘 조용하고 이성적인 환경에서 지내 왔던 터라, 안팎으로 정적인 상태가 익숙했다. 하지만 국왕의 요청으로 왕궁을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마법사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어쩌다 애 보기까지 하게 된 건지.’
떽떽거리는 어린아이에게 귀찮음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애당초 국왕이 은밀히 요청했던 일은 공주를 위해 주위에 암시 마법을 걸어 주는 것뿐이었다. 공주의 보모 노릇 따위를 해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사는 평소 성정대로 공주 지젤을 냉정하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다정한 성품이 눈을 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별궁 곳곳에 새겨진 마법을 보완하고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공주의 방해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젤은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였고, 마법사를 무척 좋아했으므로 마법사의 일을 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마법사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지젤에게 하기와 같은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도 내 일을 방해하지 않으면, 하루 더 궁에 있다 가겠습니다.’
천방지축 지젤이 가만히 공부방 안에 앉아 책만 읽게 하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거기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단 표정을 애써 감추며 책상 앞에 몇 시간을 내리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그건 무뚝뚝한 마법사의 눈에마저 사뭇 흐뭇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도 말 한마디로 말썽꾸러기 지젤을 방 안에 얌전히 앉혀 둔 마법사는 공주궁 구석구석 걸어 두었던 마법의 흔적을 확인하고 보수했다.
공주가 태어난 지 십 년, 즉 별궁에 거대한 마법을 새긴 지도 십 년이었다. 마법은 은밀한 장소에, 은밀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었다. 심지어 마법진을 숨겨 둔 마법사조차 몇 번이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해 지나칠 뻔했을 정도니, 어지간한 이들은 흔적도 찾지 못하리라.
그는 보름 사이 흐릿해진 마법의 흔적을 또렷하게 되살리며 십 년 전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백 번이 넘는 봄날을 지켜보았지만, 그날의 봄은 조금 인상 깊었던 데가 있었다. 세간에서 불길하다 일컬어지는 마탑의 마법사가 왕가와 인연이 닿게 된 때기도 했다.
‘그리고 지젤이 태어난 해.’
마법사와 공주의 인연을 따지기 위해서는 지젤의 출생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왕가의 기괴한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공주 지젤의 본명은 지젤 카를로타로 남부 지역에 위치한 카를로타 왕국의 왕녀였다. 형제로는 십오 분 먼저 태어난 쌍둥이 오라비인 윌리엄 왕자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어 두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지젤 카를로타는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젤은 공주 지젤이 아닌 왕자 지젤이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엿한 남성인 지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주 지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연유는 다음과 같았다.
카를로타 왕가는 왕위 계승에 한해서는 무척 보수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를 두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을 무척 경계했기 때문이다. 귀족 세력에 왕권이 흔들릴 만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해 왕가는 유독 남아 쌍둥이에 박했다. 정확히 말하면 첫 왕손이 남아 쌍생아일 경우.
남아 쌍둥이 중 둘째는 죽어 사라져야만 했다. 왕가의 규칙이었다.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을 아는 왕비는 쌍생아를 임신한 후 근심 걱정으로 보름 밤낮을 앓았다.
결국 국왕은 사랑하는 왕비에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왕좌를 거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를 지키리라.’
국왕은 단 하나뿐인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였고, 왕비와 자식들 모두를 살릴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아이가 죽기도 전에 소중한 왕비가 까무러쳐 죽어 버릴 판국이었다.
결국 왕비의 산실에는 산파와 하녀들 외에 은밀한 손님 하나가 찾아들게 되었다. 바로 마탑의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방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왕비의 출산을 집요한 눈길로 관찰했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랐다. 산실 안에 기묘한 마법을 걸어 두었으므로 들키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응애앳! 으애애앵!’
첫째 왕자를 보며 뛸 듯이 기뻐하던 산파는 둘째 왕자를 보며 안타깝게 탄식했다.
‘에구머니나, 두 분 다 왕자님이시네. 이를 어째. 이렇게 예쁜 왕자님을.’
왕비의 걱정은 옳았다. 쌍둥이 모두 남아였으며, 두 번째로 태어난 아기는 죽어야만 했다.
‘왕자님,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하여 첫울음을 우는 아이의 쪼글쪼글한 얼굴 위로 베개가 눌리기 직전, 마법사는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흔들었다. 침실 구석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은밀히 빛났다.
순식간에 방 안 모두가 강력한 암시에 빠져들었다.
‘……아, 다행이야. 이번에는 예쁜 공주님이셔.’
수발을 드는 이 모두 눈빛이 탁해진 채 새로 태어난 ‘공주’의 미모를 칭찬하기 바빴다.
그러했다. 국왕은 마탑에 귀중한 왕가의 유산을 바치며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달라 청했고, 마탑은 그를 위해 마법사를 보냈다.
마탑이 찾은 방도란 이러했다.
‘본디 타고난 성별을 바꾸는 것은 금지된 사술이다. 다만, 주위의 시선을 혼란하게 하는 마법은 가능하다.’
강력한 암시를 걸어 남아를 여아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탑에서 손꼽히는 마법사가 왕궁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마법사였다.
국왕은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둘째로 태어난 공주가 무척 병약하다는 말을 흘렸다. 그리고 왕궁 가장 깊숙한 곳, 자그마한 별궁에 지젤을 데려다 두어 키웠다.
별궁을 드나드는 궁인들은 채 열 손가락이 되지 않았다. 공주를 가까이서 살피는 인원도 다섯이 안 됐다. 보통 궁 하나에 서른이 넘는 궁인들을 배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적통 공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대우였다.
모두가 갓 태어난 어린 공주를 향한 영문 모를 차별에 수군거렸다. 왕은 공주가 몸이 무척 약한 탓에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 없다며 공표했지만, 온갖 허황한 소문이 나돌았다. 누군가는 이것이 과보호라, 어떤 이는 무엇인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뒷말을 했다. 하지만 국왕 부처는 꿋꿋했다. 지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0.
“시스!”
들고 있던 도끼를 내팽개치고는 마법사에게 달려갔다. 팔을 활짝 벌려 그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짙은 쥐색 로브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마탑의 오래된 마법서들이 풍기는 좀벌레 냄새인지, 그의 몸에서 풍기는 고유한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는 백 년을 꼬박 마탑에 박혀 마법을 연구했다고 했으니 책 냄새가 곧 시스의 체취나 다름없었다.
“이런 잡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마법사는 열렬한 포옹에 답해 주기는커녕 쪼개 둔 장작더미를 손짓했다. 우리의 이 작고 아담한 신혼집에는 어떤 시중인도 없었으므로 사소한 일들은 직접 해결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은 마법사의 손짓 하나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도 마법사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적어도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온종일 앉아 있는 일보다야 훨씬 쉬웠다.
“그동안 마법사님이 안 계셔서 무척 심심했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요.”
거기다 나는 날붙이라고는 식사용 나이프밖에 휘둘러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런 게 무척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시스는 다칠지도 모른다며 얼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적어도 도끼같이 위험한 물건은 내가 있을 때 다루도록 해요.”
“당신은 너무 저를 어린애 취급해요. 아직도 제가 당신 허리춤에 매달리던 자그마한 지젤로 보이세요?”
반쯤은 애교를 담아 작게 투덜거렸다. 그 꼬마는 이젠 훌쩍 자라 시스의 눈높이보다 높아졌다고요.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자랐다. 남들은 십 대 후반이면 성장기가 끝난다던데, 나는 오래오래 키가 컸다.
어쩌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본디 모습 그대로 지내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 그런 걸지도.
“그렇다고 위험한 물건이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죠.”
“쳇.”
아무튼 그는 부쩍 자라 눈높이도 높아지고 덩치도 커진 내가 아직도 열 살 어린애로 보이나 보다. 물론 오래 산 마법사의 눈에는 열 살의 나나 스물다섯의 나나 똑같은 핏덩이로 보이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난 그의 배우자인데.’
우린 왕국법상으로도 적법한 혼인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법사의 아내는 지젤이고, 지젤의 남편은 마법사다. 내 성별에 대한 진실만 제한다면 우리는 이 왕국 안에서 제일 유명한 한 쌍 중 하나일걸.
“지젤?”
불만 어린 속내를 눈치챘는지 마법사가 낮게 웃었다. 그는 무척 무심해 보여도 가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마음을 읽어 냈다. 오늘이 그런 날인가.
“지젤. 나는 갓난아이처럼 생각하는 상대와 결혼하여 침대까지 나누어 쓰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데, 열이 확 올랐다. 화가 났단 의미는 아니다. 얼굴이랑 아랫도리가 화끈 달아올랐단 뜻이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어린애는 아니더라도 애송이긴 한가 보다. 이런 덤덤한 말 한마디에도 금방 숨이 거칠어지는 걸 보면.
‘그는 마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해도 되냐고 물어봐 볼까?’
그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답해 준다. 시답잖게 섹스를 졸라 대는 말까지 그랬다. 아, 이런 그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배 속이 둥둥 울릴 지경이었다.
열기 어린 숨결을 애써 감추며 마법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넣었다.
“시스…….”
말꼬리를 흐리며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면 금세 눈동자엔 습막이 어렸다. 그는 이 표정에 약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 스물다섯의 지젤이 되기까지 이 표정으로 마법사를 얼마나 많이 꾀어냈는지 모르겠다.
‘제발, 제발 이번에도 먹히기를.’
“음…… 그래요.”
역시나, 금세 허락해 주었다. 이럴 때는 응석쟁이 지젤인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마법사 시스는 나, 지젤에게는 유독 물러졌다. 그럼, 여기서 조금 더 해 볼까.
“저어, 시스. 밖에서 하면 안 돼요? 응? 정원에서.”
저기 정원 가운데에 둔 의자 위에서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여온 음란 서적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찌나 따라 해 보고 싶던지.
“좋을 것 같지 않나요? 색다르기도 하고, 마침 봄이라 꽃도 예쁘게 피었고…….”
“안 됩니다.”
“히잉.”
“그만.”
“치이.”
“지젤.”
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밖에 안 통하네.’
요즘 너무 자주 써먹었나? 예전에는 이거로 결혼까지 허락받았는데. 칭얼거리기, 예쁜 척하기, 눈물 글썽이기.
아, 그래. 우리의 결혼. 그 얘길 해야지.
나, 지젤과 마법사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는 통속 소설로까지 나와 인기를 떨칠 정도로 아주 유명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대부분 미화되어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애당초 ‘공주 지젤’의 성별부터가 틀렸으니까. 그들이 아는 공주 지젤은 아리따운 여성이고, 진짜 지젤은 올해 스물다섯 먹은 혈기 왕성한 청년이거든.
그럼 진짜 지젤과 마법사 이야기를 해 볼까.
부제는 좀 길다. 온 세상을 속여 넘긴 왕가의 사기극이자 공주 지젤의 생존기, 그리고 나의 짝사랑 성공기.
1. 유년기 (1)
어린 지젤은 소리쳤다.
“마법사님!”
어린잎처럼 옅은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마법사는 어느새 달음박질쳐 와 로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어린 공주, 지젤을 내려다보았다. 보석 같은 아이였다. 빛나는 백금발에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 진줏빛 피부, 루비로 물들인 듯 발그레한 양 뺨과 입술까지, 그야말로 온 세상의 보석을 모아 둔 것처럼 사랑스럽게 반짝거리는 외양을 가졌다. 마탑 한구석에 꼬박 백 년을 처박혀 지내 미추에 무감해질 대로 무감해진 마법사에게조차 특별한 감흥을 일으킬 정도였다.
“마법사님, 보고 싶었어요.”
공주는 또랑또랑한 눈초리로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공주는 유독 마법사와 눈맞춤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법사는 유모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떠올렸다.
‘어찌나 마법사님을 기다리시는지, 이 유모는 아주 뒷전이시라니까요.’
공주의 곁에서 온갖 시중을 드는 유모보다 보름에 한 번, 고작해야 반나절가량 머무르고 가는 게 다인 마법사를 더 따르니 서운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공주, 지젤의 입장에서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지젤은 사랑스럽고 천진한 외견에 비해 내면은 무척 조숙한 아이였다. 영리한 두뇌와 재빠른 눈치를 타고났다. 그런 지젤은 굉장히 어린 시절, 그러니까 갓난아기 때부터 공주궁의 시중인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간혹 어린 지젤은 이 낯선 눈빛 속에서 위축감, 혹은 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지젤이 느끼는 기묘한 기분은 마법사를 마주할 때만은 사라졌다.
그렇다. 마법사만이 예외였다. 마법사는 깊고 검은 눈동자로 지젤을 응시해 주었다. 그럴 때면 지젤은 마법사가 마치 제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누군가는 마법사의 지혜 어린 눈빛이 두렵다 말했지만, 지젤은 그 심해 같은 시선이 무척 좋았다.
“저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짙은 쥐색의 로브 자락을 귀찮도록 잡아당기며 귀엽게 칭얼거리자, 금세 쑤욱 지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사는 지젤을 안아 주지는 않았다. 대신 마법을 사용해 허공에 몸을 띄워 주었다.
“하하, 재미있어요!”
지젤은 까르르 웃었다.
“공부방으로 돌아갑시다.”
마법사는 신이 난 공주를 동동 띄운 채 공부방으로 향했다.
과묵해 보이는 얼굴의 마법사와 그를 뒤따라 허공을 헤엄치는 공주, 제법 우스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둘 중 아무도 그따위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책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두 읽고 얌전히 앉아 계시면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마법사는 공주의 손에 적당히 두꺼운 동화책 한 권을 쥐여 주고 공부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마법사의 등 뒤로 ‘마법사님, 나빠요. 지젤과 놀아 주신다고 했잖아요?’ 하는 쨍한 목소리가 징징 울려 왔다. 마법사가 오래간만에 저를 상대해 주는 줄 알고 무척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사는 애당초 시끄럽게 궁 안을 뛰어다니는 공주를 잡아 공부방에 앉혀 두었을 뿐, 놀아 주겠다 약속한 적 없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지젤.”
“이이잉!”
마법사는 마탑의 마법사가 된 이래로 늘 조용하고 이성적인 환경에서 지내 왔던 터라, 안팎으로 정적인 상태가 익숙했다. 하지만 국왕의 요청으로 왕궁을 드나들게 되면서부터 마법사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어쩌다 애 보기까지 하게 된 건지.’
떽떽거리는 어린아이에게 귀찮음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애당초 국왕이 은밀히 요청했던 일은 공주를 위해 주위에 암시 마법을 걸어 주는 것뿐이었다. 공주의 보모 노릇 따위를 해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사는 평소 성정대로 공주 지젤을 냉정하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다정한 성품이 눈을 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별궁 곳곳에 새겨진 마법을 보완하고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공주의 방해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젤은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였고, 마법사를 무척 좋아했으므로 마법사의 일을 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마법사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지젤에게 하기와 같은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도 내 일을 방해하지 않으면, 하루 더 궁에 있다 가겠습니다.’
천방지축 지젤이 가만히 공부방 안에 앉아 책만 읽게 하는 마법의 문장이었다. 거기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단 표정을 애써 감추며 책상 앞에 몇 시간을 내리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그건 무뚝뚝한 마법사의 눈에마저 사뭇 흐뭇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도 말 한마디로 말썽꾸러기 지젤을 방 안에 얌전히 앉혀 둔 마법사는 공주궁 구석구석 걸어 두었던 마법의 흔적을 확인하고 보수했다.
공주가 태어난 지 십 년, 즉 별궁에 거대한 마법을 새긴 지도 십 년이었다. 마법은 은밀한 장소에, 은밀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었다. 심지어 마법진을 숨겨 둔 마법사조차 몇 번이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해 지나칠 뻔했을 정도니, 어지간한 이들은 흔적도 찾지 못하리라.
그는 보름 사이 흐릿해진 마법의 흔적을 또렷하게 되살리며 십 년 전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마법사는 백 번이 넘는 봄날을 지켜보았지만, 그날의 봄은 조금 인상 깊었던 데가 있었다. 세간에서 불길하다 일컬어지는 마탑의 마법사가 왕가와 인연이 닿게 된 때기도 했다.
‘그리고 지젤이 태어난 해.’
마법사와 공주의 인연을 따지기 위해서는 지젤의 출생부터, 그리고 더 나아가 왕가의 기괴한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공주 지젤의 본명은 지젤 카를로타로 남부 지역에 위치한 카를로타 왕국의 왕녀였다. 형제로는 십오 분 먼저 태어난 쌍둥이 오라비인 윌리엄 왕자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어 두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지젤 카를로타는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지젤은 공주 지젤이 아닌 왕자 지젤이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엿한 남성인 지젤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주 지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연유는 다음과 같았다.
카를로타 왕가는 왕위 계승에 한해서는 무척 보수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왕위를 두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을 무척 경계했기 때문이다. 귀족 세력에 왕권이 흔들릴 만한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해 왕가는 유독 남아 쌍둥이에 박했다. 정확히 말하면 첫 왕손이 남아 쌍생아일 경우.
남아 쌍둥이 중 둘째는 죽어 사라져야만 했다. 왕가의 규칙이었다.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사실을 아는 왕비는 쌍생아를 임신한 후 근심 걱정으로 보름 밤낮을 앓았다.
결국 국왕은 사랑하는 왕비에게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왕좌를 거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를 지키리라.’
국왕은 단 하나뿐인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였고, 왕비와 자식들 모두를 살릴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아이가 죽기도 전에 소중한 왕비가 까무러쳐 죽어 버릴 판국이었다.
결국 왕비의 산실에는 산파와 하녀들 외에 은밀한 손님 하나가 찾아들게 되었다. 바로 마탑의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방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왕비의 출산을 집요한 눈길로 관찰했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랐다. 산실 안에 기묘한 마법을 걸어 두었으므로 들키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응애앳! 으애애앵!’
첫째 왕자를 보며 뛸 듯이 기뻐하던 산파는 둘째 왕자를 보며 안타깝게 탄식했다.
‘에구머니나, 두 분 다 왕자님이시네. 이를 어째. 이렇게 예쁜 왕자님을.’
왕비의 걱정은 옳았다. 쌍둥이 모두 남아였으며, 두 번째로 태어난 아기는 죽어야만 했다.
‘왕자님,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하여 첫울음을 우는 아이의 쪼글쪼글한 얼굴 위로 베개가 눌리기 직전, 마법사는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흔들었다. 침실 구석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은밀히 빛났다.
순식간에 방 안 모두가 강력한 암시에 빠져들었다.
‘……아, 다행이야. 이번에는 예쁜 공주님이셔.’
수발을 드는 이 모두 눈빛이 탁해진 채 새로 태어난 ‘공주’의 미모를 칭찬하기 바빴다.
그러했다. 국왕은 마탑에 귀중한 왕가의 유산을 바치며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달라 청했고, 마탑은 그를 위해 마법사를 보냈다.
마탑이 찾은 방도란 이러했다.
‘본디 타고난 성별을 바꾸는 것은 금지된 사술이다. 다만, 주위의 시선을 혼란하게 하는 마법은 가능하다.’
강력한 암시를 걸어 남아를 여아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탑에서 손꼽히는 마법사가 왕궁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마법사였다.
국왕은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둘째로 태어난 공주가 무척 병약하다는 말을 흘렸다. 그리고 왕궁 가장 깊숙한 곳, 자그마한 별궁에 지젤을 데려다 두어 키웠다.
별궁을 드나드는 궁인들은 채 열 손가락이 되지 않았다. 공주를 가까이서 살피는 인원도 다섯이 안 됐다. 보통 궁 하나에 서른이 넘는 궁인들을 배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적통 공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대우였다.
모두가 갓 태어난 어린 공주를 향한 영문 모를 차별에 수군거렸다. 왕은 공주가 몸이 무척 약한 탓에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 없다며 공표했지만, 온갖 허황한 소문이 나돌았다. 누군가는 이것이 과보호라, 어떤 이는 무엇인가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뒷말을 했다. 하지만 국왕 부처는 꿋꿋했다. 지젤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