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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연의 커다란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승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네, 진서연.”

그의 옆에 놓인 커다란 캐리어가 보였다. 어째서 미국 뉴욕에 있어야 할 승혁이 여기에 있는 걸까.

“어디 가나 봐?”

무미건조하게 묻는 그의 말에 서연이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뉴, 뉴욕에.”

“그래? 잘 가라.”

집어 든 가방을 그녀의 카트 위에 올려 준 승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사라져 갔다. 멍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서연이 재빨리 그를 뒤쫓았다.

“뭐야?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돌아왔어.”

“뭐? 한국에? 왜?”

이해가 되지 않아 서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성인 남자에겐 국방의 의무가 있으니까.”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어쩐지 아빠가 쉽게 뉴욕 유학을 허락해 주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몰랐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승혁의 혼잣말에 서연이 재빨리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유학을 결심할 정도로 공부에 흥미가 많은지는.”

피식 웃으며 그가 몸을 돌렸다.

“열심히 해라.”

손을 흔들며 그가 멀어졌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서연은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유학 안 가! 아빠 다 알고 있었지, 오빠 오는 거? 몰라. 아빠 진짜 실망이야. 이건 배신이라고. 오빠들한테도 실망했다고 전해 줘.”

애지중지하는 딸과 막냇동생에게 처음으로 실망이란 소리를 들은 아빠와 오빠들은 곧장 공항으로 달려왔다. 그런 해프닝 속에서 서연의 뉴욕 유학은 끝내 취소가 되었다.

그 뒤로 2년간은 매일 군대에 있는 승혁에게 편지를 보내는 재미로 살았다. 단 한 번의 답장도 받아 본 적이 없었지만 그에게 편지를 쓰는 매 순간이 행복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면회도 갔다. 물론 서연의 예쁘장한 외모에 반한 고참들에게 끌려 억지로 면회실로 나오는 승혁이였지만, 그렇게라도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남자 얼굴을 훨씬 못생겨지게 만든다는 군대 머리도 승혁이 하니 멋있기만 했다.

그렇게 나름 즐겁게 서연은 2년의 기다림을 견뎌 냈다. 물론 여전히 승혁은 그녀에게 차가웠다. 절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지키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마음의 문을 조금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랑을 받지 못해도, 그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승혁은 제대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 3년 만에 돌아왔지만, 그저 그가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이젠 적어도 얼굴은 보고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 주식으로 큰돈을 번 승혁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회사를 차렸다. 그러고는 밤낮을 잊고 일에 몰두를 했다. 혹시나 그가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되어 도시락을 싸들고 회사에 찾아갔지만 얼굴조차 잘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유난히 자기 비서인 태린에겐 다정하게 굴었다. 서연에겐 비싸게 굴며 보여 주지 않던 미소도 그녀에게 자주 지어 주는 걸 목격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온 서연은 알 수 있었다.

승혁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태린을 향한 승혁의 마음을 깨달은 그날,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우산도 없이 거리를 정처 없이 걸으며 비를 맞은 서연은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앓았다. 두 오빠와 아빠가 건네는 약을 먹을 때 빼놓곤 계속해서 잠에 취해 있었다.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승혁이 사랑에 빠졌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때 이마 위에 서늘한 느낌의 커다란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서준 오빠야?”

큰오빠인 서진보다 손이 큰 서준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뜨는데, 잔뜩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승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아프다며?”

퉁명스러운 그의 물음에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프지 마라.”

무뚝뚝한 그의 한마디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토록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인데, 왜 포기가 되지 않는 건지 스스로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심하게도 승혁의 그 한마디에 서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이 포기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마음에 끝이 있길 바라며, 서연은 습관처럼 그를 찾았다.

그때마다 태린과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승혁의 모습에 상처를 받았지만,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무심하게 또 시간은 흘러갔다. 태린과 함께 있는 승혁의 모습을 보는 게 점점 더 괴로워, 서연은 그를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정말 못 참겠는 날만 그의 회사 앞으로 찾아가 멀찍이 떨어져 승혁을 지켜보다 오곤 했다.

그런 날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아빠가 서연을 향해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승혁이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 보는 건 어떻겠니?”

아빠의 물음에 서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빠한테는 물어본 거야? 나랑 결혼한대?”

“승혁이 의견이 뭐가 중요해. 뒷바라지 해 준 은혜를 알면 싫다고는 못할 거다.”

알고 있었다. 승혁의 미국 생활비를 대준 사람이 아빠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핑계로 결혼이란 올가미를 그에게 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싫어. 오빠한테 괜한 이야기하지 마. 절대 싫어요, 아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빠는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빠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렇게 결혼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승혁의 비서인 태린으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까진 적어도 그랬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만나 줄 수 있냐는 태린의 연락에 서연은 긴장된 얼굴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오셨어요.”

승혁의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자, 태린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반겼다.

“할 말이 뭐예요.”

사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그토록 원했던 승혁의 마음을 가진 여자. 세상에서 서연에게 태린보다 더 부러운 여자는 없었다.

“알고 계세요? 서연 씨랑 대표님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걸요.”

태린의 말에 물컵을 집어 드는 서연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기어코 아빠가 승혁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그래서요? 당신이랑 오빠랑 서로 사랑하니까 아빠 좀 뜯어말려 달라고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요. 오히려 반대예요.”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서연을 응시했다.

“제가 대표님 앞에서 사라질게요. 대신 서연 씨가 제 빚만 갚아 준다면요.”

그녀가 꺼내는 기가 막힌 이야기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승혁이 사랑하는 그녀가 그의 사랑을 돈과 맞바꾸려 하고 있었다. 서연에겐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 여자에겐 아니었나 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네.”

“당신은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정하죠.”

재차 확인하는 서연의 물음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흔들림 없이 당당한 그녀의 눈빛이 오히려 더 거슬렸다. 묻고 싶었다. 서연이 그렇게 사랑하는 승혁이 그녀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는지.

하나 질문할 수 없었다. 서연의 자존심은 질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예요, 그 빚.”

“삼천만 원이요.”

“기다려요.”

삼천만 원. 서연에게도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최태린이란 여자에게 차승혁이 겨우 삼천만 원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승혁은 왜 하필 이런 여자를 사랑한 걸까.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곧장 은행에 가서 수표를 찾아온 서연은 봉투에 담아 태린을 향해 내밀었다.

“약속 지켜요. 다시는 오빠 앞에 나타나지 마. 당신이란 여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녀는 묵묵히 서연이 내미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가방에 봉투를 집어넣던 그녀가 머뭇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염치는 있는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오빠를 위해서 말 안 할 거니까.”

자존심이 강한 승혁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그는 분명 견디지 못할 것이다.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 그런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저녁 승혁이 서연을 찾아왔다. 집 앞에 와 있다는 그의 전화에 서연은 마냥 좋았다. 지금껏 그가 먼저 연락을 한 게 처음이었기,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잔뜩 굳어 있는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연한 갈색 눈엔 들끓는 분노가 가득했다. 저벅저벅 걸어서 서연을 향해 다가온 승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 이래, 오빠?”

서연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뭔데 그런 짓을 해?”

“무슨 소리……!”

그 순간 승혁이 코트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서연을 향해 내던졌다. 태린에게 서연이 돈 봉투를 건네는 장면이 사진에 찍혀 있었다.

“뭐야, 이 사진?”

“그게 중요해?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이 여자한테?”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그의 물음에도 서연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진실을 밝히면 상처받을 그가 너무 빤히 눈에 보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사랑을 받지 못할 바에는 미움이라도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적어도 평생 동안 저를 잊지 못할 테니까.

“좋은 짓 했어. 섭섭지 않게 넣어 줬으니까 그 여자도 만족할 거야.”

“진서연!”

“무섭게 협박도 했어. 다시 나타나면 가만 안 둔다고. 아마 그 여자 무서워서 오빠 앞에 다시는 못 나타날…….”

그가 위압적인 얼굴로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목 위에 올라왔다. 살갗을 태울 듯이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순간 그가 자신의 목을 비틀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승혁의 손은 그대로 그녀의 피부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서연이 몸을 떨었다. 그의 증오가 전해졌다. 낙인을 찍듯.

“너란 여자 정말 끔찍해, 알아? 갖고 싶은 건 기어코 가져야 직성이 풀리지.”

서늘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원한다면 가져 봐.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느끼게 해 줄 테니까.”

목을 향해 다가왔던 손이 점점 더 멀어졌다.

“하자, 결혼.”

그녀가 늘 상상하던 달콤한 청혼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시린 목소리로 건네는 속삭임에 서연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악마의 속삭임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불행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파도 좋으니까 살아 보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 끝이 비록 고통이라도 그 순간엔 그러고 싶었다.



결혼식은 승혁의 의견대로 스몰웨딩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신혼여행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그였지만 둘의 결혼 선물로 오빠들이 하와이 신혼여행을 선물한 덕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

최고급 시설을 갖춘 풀 빌라였지만, 승혁은 방에 들어가 일에만 집중한 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별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 새파란 수초가 출렁거리는 풀장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하며 서연은 적적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결혼식 내내 승혁은 차가웠다. 사진작가가 아무리 웃어 달라 부탁을 해도, 그는 굳은 얼굴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들은 걱정이 많았지만, 서연은 걱정 말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냉대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이걸 알면서 스스로 선택했기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상처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수영을 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그렇게 한참 물 안에서 놀던 서연은 배고픔을 느끼며 풀장 밖으로 나왔다. 수영복 위에 가운만 걸치고 빌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막 방에서 나오는 승혁과 마주쳤다.

풀어진 가운 사이로 비키니 수영복만 입고 있는 서연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기다 수영을 하느라 젖어 있는 머리를 보며 승혁은 피식 웃었다.

“꽤나 도발적이네.”

천천히 서연을 향해 다가온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아 달라고 대놓고 유혹하는 건가?”

공식적인 첫날밤에도 그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았다. 그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가 자신의 육체에 관심을 둘지는 몰랐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두근거렸다. 그의 연한 갈색 눈에 번지는 적나라한 욕망에 심장이 떨려 왔다.

“뭐, 나쁘진 않아.”

그녀의 붉은 입술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그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늘 꿈꾸던 그와의 첫 키스가 곧 이루어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의 입술이 닿는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경멸 어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기대하지 마.”

그의 입술이 열리며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너 같은 거 안고 싶은 생각 따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