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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희는 넋 빠진 대꾸에 소리 내어 웃었지만 찬열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씻기 시작했다. 밥집과 등을 대어 포목전이 생긴 지 오 년이 흘렀고, 그 고명딸 순임과 희가 사귄 지도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다. 또한 배포가 크고 활달한 성정의 찬열이 그답지 않게 속으로만 앓기 시작한 기간도 얼추 비슷할 터였다. 낯을 가리는 순임이었지만 희와 형제간이나 마찬가지인 찬열과도 쉬이 가까워졌다. 그의 순정을 모를 만큼만, 일지라도.

덕분에 희는 야밤에 몰래 나다닐 일이 있을 때 찬열의 도움을 받기가 더 수월해졌다. 고아인 그에게도 희는 소중한 형제였지만 세상에서 희의 모친을 제일 무서워하는 만큼 더욱 확실한 담보를 가진 셈이었다. 물론 과한 부담을 주는 건 아니고, 이번의 약조는 모친이 그녀를 찾지 않도록 잘만 해 준다면 순임이 갖고 싶은 것이 무언지 알아봐 주기로 했었다. 희는 희대로 등짝이 무사하고 찬열은 찬열대로 순임의 생일에 무얼 줄지 한 달이나 넘게 앓지 않아도 되니 제법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무명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씻은 물을 뒤꼍 채소밭에 뿌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찬열이 입을 열었지만, 희가 선수를 쳤다.

“그래 봐야 넌 나한테는 안 된다니까.”

“젠장.”

그녀는 투덜거리는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 몸이 어디 한 입으로 두말하니? 염려 말고 기다리셔.”

“……진작 그리 말했음 됐지. 아주 갖고 놀아라, 놀아.”

“암, 그랬으면 아침부터 순임이한테 인사도 못 들었지.”

찬열은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때 모친이 찬열을 불렀고, 희는 방으로 들어갔다.

희는 솜을 댄 무명옷을 단단히 받쳐 입고 경鏡을 보며 머리를 다시 땋아 넘겼다. 이젠 바지 차림이 더 편해져 치마는 간밤처럼 잠시 입는 정도가 아니면 거치적거린다는 기분이 먼저 들곤 했다. 좌포청에 갈 채비를 마칠 때쯤 밥상을 든 찬열을 앞세운 모친이 들어왔다. 세 식구가 모여 앉아 아침 식사를 한 다음, 그녀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기세 좋게 사립문을 나섰다.

한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서슬 퍼런 포도청은 좌·우로 나뉘어 방대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병조, 형조, 의금부 등 군·형 관련 관청 중에서는 최하위라 볼 수 있으나 그만큼 민에 직접 맞닿는 기능을 하여 일반 백성들에게는 포청이야말로 인왕산 호랑이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북동향에, 우포도청은 서부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동향에 각각 자리하여 관할 구역을 아우른 지 오래다. 좌가 우보다 높다는 것은 포청에서도 예외가 아닌바, 서로를 ‘거만하기 일쑤인 얼치기들’과 ‘열등감만 가득한 핫바지들’이라 비난하는 일도 있지만 대개 일에 대한 호승심이 자극되는 정도로만 작용할 따름으로 그 외의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드물다는 것은 즉, 없지는 않더란 의미. 다름 아니라 끼어들어 훼방 삼기 일쑤인 술이란 놈이 있어서이다. 엊저녁 감골 나루터에서도 한 판 거하게 벌어진 것처럼.

간밤의 또 다른 기억을 되새긴 희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기분도 상쾌하여 좌포청 회의실에 먼저 와 있는 포도군관 정재겸鄭才兼에게 싹싹하게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나오셨습니까? 밤사이 무고하셨는지요.”

재겸은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눈길을 주었다.

“네가 아침부터 실실 쪼개는 걸 보니 오늘은 딱 유고할 건가 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이 인간은 그 흔한 옛말도 모르는가. 하기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투덕거리는 사이가 된 지 오래이니 새삼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면 그거야말로 기함할 일이겠다. 희는 더욱 생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큰일 날 말씀을 다 하셔요. 오늘까지 그러시면 어쩌시려고요.”

늘 그렇듯 관심 없다는 투로 손안의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알고나 말하는 거냐?”

“소녀가 무어 아는 것이 있겠어요. 무지한 이년 기억력으로는 감골인지 배골인지도 헛갈리는데.”

능청스럽게 대꾸한 희는 신음을 흘리며 책상 위로 엎어지는 재겸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녀는 간밤에 향월루로 가기 전 단 오라버니에게 잠시 들른 덕에 우연히 패싸움의 말미를 목격하게 되었다. 술과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들은 비록 주먹다짐으로 다소 망가져 있었지만 쉽사리 알아보았고, 패가 갈린 기준을 지엄하신 나라님께서 정하셨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좌포청과 우포청 소속 관리들이, 제아무리 사적인 자리에서 음주를 즐기던 중이었다고는 하나 시정잡배처럼 패를 갈라 치고받았다는 것은 웃전에 알려지면 젊은 혈기가 좋다는 덕담 한마디로 끝나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역시 그 사실을 잘 아는 재겸이 끙, 하고 한숨지었다.

“귀신같은 년. 건 또 어찌 알았냐.”

“같은 귀신에게서 들었다면 농지거리고. 다 아는 수가 있습지요.”

“……설마하니, 뒤를 밟은 건 아니겠지?”

“저가 나리의 무얼 더 보겠다고 뒤를 밟아요?”

희가 코웃음 치며 핀잔을 주었다. 증거는 없고, 있다 한들 고해바치지 않으리라는 건 그녀도 그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말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기쁨을 누리는 선으로 만족했다.

“거야 네가 알지 내가 알랴?”

기습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난 재겸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낫살 먹은 계집이 조신치 못하게 체신 멀쩡한 사내 뒤를 따르는 연유야 궁금하지도 않고.”

이 작자가 지금 뭐래?

은근한 말뜻에 기가 막힌 희는 바로 반박하려다, 생각을 바꿔 보란 듯이 눈을 굴렸다.

“체신 멀쩡한 사내? 뉘를 말씀하시는 겐지 도통 모르겠네.”

“……여하튼 입만 살아서는.”

재겸의 투덜거림과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겹쳤다. 두 사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들어오는 수인과 군관 허엽許曄을 맞이했다. 묵례를 주고받은 세 사람은 수인이 상석에 앉기를 기다려 각자 자리를 잡았다.

“향방동에 있는 전前 예판 댁 며느리가 명을 달리했다 한다. 일단 자결이라고는 하나, 허 군관과 희가 가서 살피도록. 그리고 정 군관은 인창방에 가 보아. 강도 살인으로 보고된 시신이 있어. 한 군관도 그쪽으로 바로 갈 터이니.”

현재 자리를 비우고 있는 한소백韓紹伯 군관은 나흘 전 개경으로 파견되어 금일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반 사항에 대해 잠시 말이 오간 다음 엽과 희가 앞서 나왔다. 문을 닫기 전, “한데 자네, 턱은 어찌 그러나?”라는 수인의 물음이 새어 나왔다. 희는 몰래 웃음을 참고 엽과 걸음을 맞추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다지요? 전부 다 군관 어른 덕이라 하니 저가 다 뿌듯하더만요.”

“허허, 듣기는 좋다만 어디 나 혼자서 감당키나 했겠느냐. 다 잘들 도와준 덕이지.”

그저 겸양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아는 희는 생긋 웃었다. 소탈하고 겸손한 그는 겉으로는 사람 좋은 중년 사내일 뿐이지만 실상 열력 많은 노련한 군관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실력을 중히 여기고 따라서 편견이 없어, 천민이 아닌 희가 강 종사관에 의해 덜컥 다모가 되었을 적에 다들 그 특별한 처사를 두고 한마디씩 하였지만 그만은 말없이, 그리고 제일 먼저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희는 때로 엽에게서 아비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한데 들었느냐? 한성부우윤이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거.”

“예?”

희가 되묻자 엽은 피식 웃었다.

“모르는가 보구나. 정작 들어야 할 것은 아니 듣고, 너도 참 오지랖 넓다.”

“한성부우윤이라면…….”

“그래, 너와 정 군관이 맡았던 처첩 사건 말이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본처가 첩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한데 첩이 본처의 단명을 위해 몰래 굿을 하고 부적을 쓴 것이 들통난 탓이라 속으로 한심해했었다. 엽이 말을 이었다.

“원체 또 여색을 밝혀 왔던 것들이 일시에 몰아친 셈이지. 집안 간수 제대로 못 하는 자가 어찌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겠느냐고 옥음이 높으셨다 하더라. 아까 일찍 와 있더니, 정 군관에게서 듣지 못하였더냐?”

그녀가 고개를 젓자 그는 껄껄 웃었다.

“마주치면 말싸움에 바쁘니 잊을 만도 하겠다. 그만 좀 정답게 지내면 아니 되는 거냐?”

정답게?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군. 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그리 가시를 세우는 분한테 괜히 아양 떨기는 싫습니다.”

“거야 착한 네가 이해하는 게 나을 성싶구나. 그 아이도 워낙 고집이 있어 놔서.”

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모는 필요로 차출된 관비일 뿐, 능력과 상관없이 보조로서의 역할만 충실하면 된다고 믿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중 한 명이며 세상 모든 죄악을 제 손으로 처단할 의욕에 가득 찬 재겸에게 종사관이 특별히 차출한 평민 다모가 수사에 열심인 것이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 그러나 그녀가 방해가 되기는커녕 그 반대라는 이유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결국 농인지 진담인지 툴툴거리고 있다는 건 엽이 귀띔해 주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다 한들 그녀만이 마냥 웃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 재겸과는 투덕거리는 지금이 편하기도 해서 희는 이 이상 그에게 친밀하게 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저가 착한 건 맞는데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요.”

“그래그래, 내 다 알지.”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대꾸에 그는 다독거리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인자한 웃음이 퍼진 그 얼굴이 문득 진지해지더니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한데, 네 눈에도 명명백백하게 끝난 사건이더랬지?”

“예. ……군관님에게는 달리 보이셨어요?”

“아니, 아니다. 그리 깔끔한 사건도 드물지. 다만…… 후덕하기로 소문난 그 마나님이 아무리 첩의 만행이 끔찍하여도 그만치나 피를 볼 만한지. 무언가 이상하더구나.”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돌부처도 시앗 보면 돌아눕는다잖아요. 투기에 눈이 뒤집히면 어찌 될는지 누가 알아요?”

고개를 갸웃하던 엽은 의문을 털어 내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동의했다.

“하기야, 네 말이 맞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들 하니. 다들 나더러 채신없다 하지만 내가 제일 지혜로운 거 아니겠느냐?”

“암요!”

유능한 군관이란 명성에 덧대어 부인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한다는 애처가 소리도 듣는 그의 말에 희가 웃으면서 적극 찬성했다. 기방에 차려진 술자리에서도 끈 하나 함부로 풀지 않는다는 그는 이미 혼인한 지 십 년이 얼추 지나 아이가 둘이었다.

나도 나이 먹어도 이리 아껴 주는 반려를 만났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인물도……. 실없는 바람을 이어 가던 희는 문득 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이, 그런 한량은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어차피 기방에서 노닥대는 한량쯤 되면 신분도 다르겠지만 아닌 건 아니다. 희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마침 생각난 참에 엽에게 물었다.

“군관님, 혹 이명원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신지요?”

“이명원?”

“예. 이립 전후일 법한 외양인데 재산깨나 있는 듯합니다만.”

“자산가인 젊은 자, 이가라면 혹 종친이려나?”

엑! 종친?

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런 방탕한 자가 나라님의 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대한 반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공평하게 정정했다.

“그건 모르는데요. 아닌 게 나을,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아닌 것 같긴 해요.”

“이명원, 이명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