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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명원이 기가 찬 듯 사납고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 입을 마구 놀리니 저승사자가 잘 알아듣고 먼저 데려간 게군.”

“뭐, 이 몸이 죽은 연후건 어쨌건 증명까지 필요할 만큼 이름날 그림이라고 생각해 주니 나야 감읍할 따름 아니겠나.”

“속도 편하이. 여하튼, 낙관에 무언가 장난이라도 쳐 둔 겐가?”

명국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네만, ‘국國’의 획 하나가 깨졌지. 새로이 만들어 찍을까 하다 귀찮아 관뒀어. 훗날 배알 틀리면 고걸 빌미로 내 그림 아니다 우겨 볼까 싶기도 했고.”

“저런, 아까운 장면 놓쳤군그래.”

두 사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주고받았다. 웃음기가 없어서 영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들이라면 정말 그렇게 하고, 또 느긋하게 구경할 것 같은 느낌이라 더더욱. 속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던 그녀는 명원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잘 들었느냐?”

“예?”

“지금 얘기들이 머릿속에 잘 정리되었느냐 이 말이다.”

“예, 그거야 무어…….”

“정황이 이러하니, 네가 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당장 낙관 확인해 오란 얘기는 아니겠지. 희는 설마 싶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명원은 다른 말을 꺼냈다.

“피맛골 옆 수진방壽進坊에 홍영루紅英樓라는 기방이 있다. 그곳에 가서 초나흘 밤에 종묘령이 과연 있었는지 알아 오너라. 또한 수하를 데리고 있었다면 그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할 수 있겠느냐?”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녀는 답을 이미 알았다. 읽었던 계서計書의 내용이 여직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굳이 명국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시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녀는 잠시의 짬을 두고 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역시 참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인심 썼다. 두 가지도 들어 주마. 무어냐?”

“어찌 어제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기십니까? 정녕 저가 나리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보다 잘 해낼 것이라 믿으시나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열었지만, 파하하 웃음을 터뜨린 명국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과연, 진우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걸 보니 일면식도 없었다는 게 사실이겠구나. 실상은 맡긴다기보다 떠넘기는 거란다. 또한 믿는다기보다, 믿어야 하는 게지. 도성 해어화 중에 이명원이를 모른다면 필시 두 가지 이유다. 너처럼 변복했거나, 한 시진 전에 도성에 들어왔거나.”

“……아아.”

이해한 희에게 명원이 손가락을 굽혀 이마를 가볍게 쳤다.

“무어가 ‘아아’냐? 한 가지만 빼면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리 쉽게 용납하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니군.”

“한 가지는 무언데요?”

“반 시진이다.”

어떤 대답이건 안 믿는 표정을 보여 주려던 그녀는 허를 찔려 피식 웃어 버렸다. 명국이 더 크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뭐, 진우가 직접 나서는 것이 다소 곤란한 것도 사실이고.”

무엇이 곤란하다는 말일까? 의아해하던 희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한결 조심스러운 눈으로 명원의 눈치를 살폈다.

“왜?”

“저기…… 혹, 종친…… 되십니까?”

두 사내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다음 순간, 희는 비명을 질렀다. 명원이 난데없이 그녀의 한쪽 뺨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아야야!”

“이 아해 말하는 것 좀 보게. 감히 이 몸을 종친 따위에 갖다 대?”

종친 ‘따위’? 순간적으로 그녀는 아픔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럼…… 설마, 군……!”

“어허, 그래도!”

“아야!”

다른 쪽 뺨도 마저 잡혀 버렸다. 양손으로 그녀의 볼을 쭉 잡아당긴 그가 이내 놓아주며 말했다.

“이가면 무조건 왕족이더냐? 뭐, 아무 데나 싸질러도 그저 황감히 여기라는 족속들이니 피 한 방울 정도는 태조대왕과 같을지도 모르지.”

얼얼한 양 볼을 감싸고 울상 짓던 희는 거침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하지만 그가 손에 묻은 검댕을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옷자락에 닦아 다시금 입을 삐죽거렸다.

“비밀이라는 점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알겠지? 혹여 일을 그르쳐서 네가 내 이름을 댄다 한들 난 모른다 잡아뗄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예.”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명원의 한쪽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갔다. 그는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그럼, 나가 보거라. 일을 끝내면 조금 전의 그 향월루 별채로 오고.”

고개를 숙여 보인 희는 명국에게도 묵례한 뒤 방을 나섰다. 뒤에서 말소리가 이어졌지만 이미 생각에 잠긴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잘나가는 기방이자 종묘령의 단골 기방이기도 한 홍영루는 간밤에 갔던 향월루보다는 규모가 다소 작긴 하지만 단장의 화려함에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마침 땔나무를 가득 실은 달구지가 뒷문을 넘고 있어 일행인 척 달구지 끝을 잡고 들어온 희는 머슴들이 짐을 내리느라 부산한 틈을 타 슬쩍 빠지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녀는 아직 해가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은 덕에 한산한 기방 내 뜰을 걸으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계서에 의하면 당시 이 사건에 파송된 다모가 종묘령이 특히 귀애하는 기녀 계랑桂琅을 만나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각 그와 함께 있었다는 증언을 받아 냈다. 그가 그녀와 운우지정을 나눌 때는 늘 수행하는 심복에게 아랫방을 내준다니 즉 그날도 두 사람 모두를 홍영루 담장 안에서 재웠다는 뜻이었다.

계랑의 방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기억을 되살린 희는 별천지에 온 천것인 양 시종일관 두리번거리며 슬금슬금 그쪽으로 향했다. 우연인 척 계랑을 만나 말을 넣어 볼 요량이었다. 누군가에게 부러 이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기에, 뒤에서 갑자기 경계하는 목소리가 날아왔을 때 희는 놀라지 않았다.

“이봐요! 우리 아씨 방 앞에서 지금 무얼 하는 거여요?”

들리길 바랐던 목소리보다 더 앳되고 거칠다. 희는 뒤를 돌아보았고, 한껏 인상 쓰고 있는 계집애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보다 더 앳된 얼굴 하며 수더분한 차림이 영락없이 몸종이다 싶은데 그러고 보니 방금 우리 아씨라고 했겠다. 희는 반색했다.

“아이고, 다행이다! 암만 한낮이래도 어찌 이리도 조용하나 했소. 덕분에 살았네.”

당황하기는커녕 반기는 태도에 몸종이 주춤했다. 그녀는 희를 위아래로 훑더니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거요?”

“사,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참말로, 이마이 넓을 줄 누가 알았겠노.”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급작스러운 사투리가 먹혀들었다. 희는 사투리가 나와 더욱 당황한 척 헛기침했고 몸종은 아직 때를 못 벗은 무지한 촌놈에게 경계심을 풀고 킥킥거렸다.

“좀 넓기는 하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닌데 댁이 길치 같소. 어찌 들어온 거요?”

“길치는 누가! 이래 봬도 우리 동네선 눈 맵다고 소문이 났단 말요.”

희는 질문은 못 들은 양 투덜거리며 계랑의 방 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우리 아씨라고 하더만, 이리 좋은 방에 사는 사람이 대체 뉘요? 여기서 제일 좋아 보이는데.”

“암요, 여기 홍영루에서 제일 이름난 분이신데. 계랑이라고 들어 보지도 못했소?”

몸종이 뻐기며 되물었지만, 희가 눈을 끔벅이기만 하자 다소 자존심이 상한 듯 허리에 손을 얹고 가르치려 들었다.

“알고 보니 길치뿐 아니라 귀도 어둔 사람일세. 이 한양 바닥에서 계랑 아씨 모르는 사내가 있는 줄 알아요? 뜨르르한 양반님네들까지 줄을 섰다고요.”

“아, 그게 참말이오?”

“내가 무어 얻어먹을 게 있다고 거짓부렁을 해요?”

희가 능청스럽게 쩝, 입맛을 다셨다.

“품어 보는 거야 언감생심, 손이나 한번 잡아 봤음 좋겠네.”

“헹, 손은 가당키나 하고요?”

몸종이 코웃음 치며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높으신 양반 아니면 가락 한 번 청하기도 힘이 들겠지만, 인제 곧 아무나 못 뵙게 될 거여요. 씀씀이가 크기로 이름난 종묘령 나리께서 우리 아씨에게 흠뻑 반하셨거든. 그 댁으로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종묘령 나리?”

이리도 쉽게 풀리다니. 희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이마에 ‘이상하다’는 단어를 써 붙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종이 눈치 빠르게 채근했다.

“왜요?”

“아니, 별건 아니라서. 댁이 그렇다면 그런 걸 테고.”

“별거 아니면 얘기해도 되겠네요, 뭘. 뭔데 그래요?”

“진짜 별거 아니오만……,”

희는 짐짓 주변을 둘러보고는 은근하게 말을 맺었다.

“실은 진시쯤 향월루에서 일하는 놈을 만났는데…… 간밤에 종묘령 나리가 거기 계셨다고.”

“무어가 어째요?”

몸종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쉿! 목소리가 너무 크오.”

희가 말리는 척 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세게 쳐 낸 몸종이 한탄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다른 데도 아니고 그런 야호野狐 소굴에? 아니 우리 아씨가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데 어찌 이럴 수가!”

“진정하소, 사내들이야 원체 뒷간 갈 때 맘 다르고 나올 때 맘 다른 게 이치지.”

순간 째려본 눈길이 하도 험악해 희가 움찔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 꼴에 같은 사내라고 역성들기요? 아이고, 암만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인정이란 게 있다면 그리는 못 한다고요, 내 이럴 줄 알았으면 포졸 어른에게 확 말해 버리는 건데!”

이거다!

마구 뛰기 시작한 가슴을 의식하며, 희는 태연한 척 슬쩍 찔렀다.

“무얼 말이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나리가 흉한 일에 얽혔다는 소문은 들었소만.”

“그러니까요! 댁도 아는군요? 아니 물론, 그 일이 터진 날엔 우리 아씨가 직접 뫼시기는 했지만, 그치가 늘상 데리고 다니던 사내가 오밤중에 나다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어느새 호칭이 ‘나리’에서 ‘치’로 바뀐 것을 희는 민감하게 감지했다.

“빈손이었던 거 아뇨? 뒷간에라도 다녀온 거겠지.”

“나도 포청에서 나왔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암말 안 했어요. 괜한 분란만 일으키나 싶어서 입 꾹 다물고 있었건만! 다 말해 버릴걸!”

“확실하오?”

“그럼 없는 일을 만들어 붙이겠어요? 암만 빈손이라도 뒷간엘 다니는데 그리도 쫓기는 금수처럼 두리번거릴 리가 있나요.”

지금이라도 당장 포청으로 달려가 버릴까, 하고 분해 하는 그녀에게 희가 얼른 말렸다.

“듣고 보니 수상하긴 하네만, 이미 시일이 흘렀는데 이제 와 얘기를 하면 되레 그쪽이 상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소. 감싸 준 거로 몰리면 꼼짝없이 당하기 십상인데.”

“예?”

이를 갈던 그녀는 단박에 겁을 집어먹은 눈치였다.

“그…… 그리되는 건가요?”

“왜 제때 말 안 했느냐 채근당하면 어쩔 거요? 그냥 끝까지 조용히 있는 편이 낫지.”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모시는 아씨에게 등을 돌린 괘씸한 자를 편들어 줘 버린 꼴이 영 속상한 모양이었다. 조금 안된 마음이 든 희가 넌지시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오, 듣자니 지기들이 나서서 가 보자 했다더만. 간밤에 갔다가 실망하고 완전히 이편으로 돌아설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휴!”

그녀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거부도 못하고, 미워도 못하고 기다려야만 하다니. 계집으로 태난 것이 그저 한이네요.”

“그러게, 조선이란 땅이 사내만 귀애하니 도통 답답……하기도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