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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하아……. SNS 같은 건 진즉에 탈퇴했어야 했어.”

오늘의 이 참사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전 남자 친구, 김재호의 SNS였다.

아침 출근길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하윤은 우연히 SNS 아이콘을 눌러 실행시켰고, 하필이면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게시물이 재호가 올린 청첩장 사진이었다. 헤어진 지 3개월 만에 다른 여자와의 결혼 소식을 SNS에 당당하게 올려놓은 것이다.

재호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도 속으론 그가 조금은 불행하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루 종일 저기압인 하윤을 걱정한 동료 선생님들이 퇴근 후에 술자리를 마련했고, 더러운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연거푸 술을 마시다 보니 평소 주량을 훨씬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 다시 떠올려 가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던 하윤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아! 생각났다, 그 남자!”

과거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본 덕분일까? 까맣게 지워졌던 낯선 남자와의 기억 하나가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제 술에 많이 취해서 덥고 어지러웠던 하윤은 찬바람을 쐬기 위해 술집 밖으로 나왔었다. 그리고 술집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오늘 아침 그녀와 한 침대에 있었던 바로 그 낯선 남자일 것이다.



‘정하윤. 많이 취했네?’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지, 그리고 왜 다짜고짜 반말을 했던 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 전에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남자의 집으로 가서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정작 알고 싶은 것들은 여전히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진 상태였다.

술이 원수였다. 그리고 술자리를 즐기는 자신의 성격도.

주량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하윤은 평소 친구, 동료들과 갖는 술자리를 좋아했다. 기분이 좋아서 한 잔, 두 잔 받아 마시다 오늘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진 날이 있기도 했지만, 아무리 취해도 집에는 꼭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제는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고,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일까지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잊자. 정하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다시 마주치지 않으면 되는 거야. 앞으로 3개월,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조심하자. 그러면 되는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불안한 마음을 혼잣말로 달랜 하윤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절대로 그 낯선 남자와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그녀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라도 청하려 애썼다. 오로지 잠드는 것만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잡생각들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 * *



오후 4시. 수업을 끝낸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홀로 교실에 남은 하윤은 여유롭게 차 한잔을 마시며 학생들의 일기장을 검사하고 있었다.



「12월 5일 날씨: 흐림

짝꿍 재희에게 지우개를 빌려준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재희에게 지우개를 돌려 달라고 말했다. 재희는 지우개 빌린 것을 까먹고 있었다고 미안해하며 가방에서 지우개를 찾아 돌려주었다. 재희에게 빌려줄 땐 거의 새것이던 지우개가 크기도 작아지고,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속이 상했지만, 재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엄마는 내 지우개가 더러워지고 작아진 덕분에 재희가 틀린 글씨를 많이 지울 수 있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말씀을 들으니 내 지우개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해졌다. 앞으로도 재희가 지우개를 빌려 달라고 하면 잘 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초등학생들의 일기는 언제나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려주고 깊은 교훈을 얻은 영훈이의 일기 아래에 칭찬의 말을 적은 하윤이 뿌듯한 표정으로 식은 차 한 모금을 호로록 삼켰다.

영훈이의 일기를 한쪽에 덮어 놓고 다른 일기를 펼치려던 순간,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이윤희 선생이 교실 앞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정 쌤, 바빠?”

바쁘냐고 묻는 윤희의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묘한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냐, 이 쌤. 들어와.”

막 펼치려던 노트에서 손을 뗀 하윤이 들어와 앉으라는 듯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지만, 윤희는 문을 열고 선 채로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

윤희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용건을 바로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그녀의 모습에 하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밖에 누가 찾아왔어.”

“누구?”

누구냐고 묻는 하윤의 질문에 윤희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중앙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가 봐.”

빼꼼히 열었던 교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윤희가 어서 가 보라는 듯 복도 쪽을 향해 팔을 쭉 뻗어 보였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하윤은 윤희와 시선을 맞춘 채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향해 걸어 나왔다.

묘하게 말려 올라가는 윤희의 입꼬리를 보며 하윤은 가슴속에 일어난 원일 모를 불안감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윤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걸 그녀는 전화로도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고스럽게도 교실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하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윤은 마음속의 불안함이 괜한 기우이길 간절히 바라며 중앙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뒤에 윤희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더욱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결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사람만은 아니길 하늘에 빌었지만, 왠지 오늘의 하늘은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중앙 현관과 이어진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내려가자 현관 앞에 서 있는 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가까워질수록 하윤의 머릿속엔 잊고 싶은 지난주 토요일 아침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황급히 그 집을 빠져나왔지만, 침대에 상체를 드러낸 채 누워 있던 남자의 얼굴만은 사진을 찍은 듯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윤은 멍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기억나지 않는 척해야만 한다.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지만, 그녀의 목구멍으론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하윤의 인기척을 느낀 듯 뒤돌아서 있던 남자가 계단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남자의 손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윤은 계단을 내려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 만약 이 경고를 무시했다간 왠지 위험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남자는 훌륭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큰 키와 넓은 어깨, 긴 팔과 다리는 모델이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완벽한 비율을 뽐냈다. 게다가 깊은 눈매와 우뚝한 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 부드러운 외모는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얻을 만큼 훈훈했다.

“정하윤.”

계단의 중간쯤에 서 있는 하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하윤 씨도, 정하윤 선생님도 아닌 그저 정하윤이란 이름 세 글자로만 말이다. 아주 친숙한 사람을 부르듯이.

그의 부름을 들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 계단 하나를 올라갔다. 그녀가 멀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힌 채로 남자가 하윤을 향해 오른쪽 검지를 펴 보였다.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하윤은 우습게도 그의 손이 꽤나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큼직한 손바닥과 마디가 굵은 기다란 손가락은 뭇 여성들의 로망이지 않은가.

“정하윤, 어딜 또 도망가려고? 빨리 이리 와.”

뭇 여성들의 로망인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하윤을 부르며 까딱거렸다. 다소 건방진 손가락의 움직임에 하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제발, 절대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게 바로 엊그제이건만, 어떻게 일주일도 안 돼서 이 남자를 그녀의 눈앞에 데려다 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쪽으로 오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가는 수밖에.”

계단 위에 선 하윤이 꼼짝도 하지 않자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