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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2. 새로운 신분


르네는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창틀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남자의 낯이 익었다.

“아…….”

낮에 본 남자, 클레르건 공작이었다.

그때는 험상궂은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가벼운 복장과 흐트러진 머리 덕분에 한결 부드러운 인상으로 보였다.

“로이드는 어디 있나요?”

“그는 시종이니 마부와 함께 있지.”

“세르반은, 그는 괜찮나요?”

클레르건 공작은 눈앞의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흐릿한 눈으로 앉아 있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2, 3구역이 연합해서 1구역을 공격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는 것 같더군.”

“근위대에서는 관여하지 않나요?”

“지골로 구역 다툼은 정리된 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마지못해 답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상황이 낯선 르네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나요?”

“그가 말하지 않았나? 아니면 아직도 약에 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건가.”

“…….”

“넌 공작가 방계의 먼 친척인 아일레스 자작 부인이다. 말해 두지만 공작가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약들은 지닐 수 없다.”

한숨을 내뱉는 공작의 말투에 단호함이 섞이자 르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약에 취한 슬럼가 여인 취급이니 이상하게 굴어도 크게 의문 삼지 않을 것 같았다.

‘자작 부인의 신분을 주고, 공작이 직접 와서 슬럼가 여인을 데려간다…….’

르네가 특별한 건지 공작이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어릴 적 자신을 데려간 테일 남작이 생각나 눈살을 찌푸리다가 겨우 참았다.

“공작가에서 제가 해야 될 일이 있나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뻔뻔한 사람처럼 쳐다봤다. 어디 계속 해 보라는 태도를 보고 르네는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공작님이 아이 아버지인가요?”

“……!”

르네는 배를 감싸 안고 클레르건 공작에게 물었다.

시종일관 표정이 드러나지 않던 남자가 자신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도 아이 아버지가 아닌가 보네.

“넌 질문이 과하구나. 난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관심 없다. 그렇게 흐린 정신으로 대체…… 메니플은 중독성이 약하지만 장기 복용은 좋지 않아. 더구나 아이에게는 독초나 다름없다.”

클레르건 공작은 이내 누굴 상대로 말하는지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르네도 가볍게 헛소리 취급을 당했지만 쉽게 수긍했다.

“그러면 공작님이 저에게 해 주실 것은 뭐가 있나요?”

클레르건 공작은 눈매를 좁혔다.

방금 전까지 약에 취한 것처럼 넋을 놓고 있던 여자는 어느새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불쾌한 듯 인상을 쓰면 주눅 드는 척하면서도 제 할 말을 다했다.

시끄러운 것은 집에 있는 작은 꼬맹이 녀석으로 충분한데 이 여자도 못지않았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공작님 성함과 낮에 세르반과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만 알아요.”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제 신분과 몸 상태를 생각하면 공작가의 하녀로 일하기도 마땅치 않은데, 공작님께서 직접 오셔서 저를 데려가고 방계의 귀족 신분까지 만들어 주시니 의아할 수밖에요.”

클레르건 공작은 더 해 보라는 듯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필요 이상으로 과분한 권한을 주신 것 같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 겁나서 여쭤봤어요. 그래서 혹시…….”

르네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무례한 모습을 보여도 공작은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이 아이를 원하시는 건가 했는데, 죄송해요. 잠시 오해했어요.”

클레르건 공작은 귀찮은 듯 한숨을 흘렸지만 르네의 배를 보고 멈칫했다.

“너는…… 남편과 사별 후 공작가에 도움을 요청했고, 예법 선생으로 머무는 것이다. 임신을 이유로 출산 때까지 수업은 하지 않아도 되니 조용히 지내라.”

“언제까지 머무나요?”

“계약 조건은 너의 출산까지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충분히 제공하지.”

“감사하…….”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네 신분에 비해 부족함이 드러날 뿐이니, 되도록 별관을 벗어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짚어 주는 공작의 말 덕분에 르네는 자신의 신분을 실감했다.

세르반이 르네의 출산을 부탁한 이유와 르네에게 귀족 신분까지 위조해 준 공작의 목적이 궁금했다.

‘세르반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아내를 이해하는 걸까?’

르네는 자신의 정절이 의심스러웠지만 당장은 어떤 사정도 알 수 없었다.

긴장한 탓에 앉아 있는 내내 불편했다. 피에 젖은 세르반과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자 갑자기 배가 뭉쳤다. 아랫배에 뭉근하게 통증이 돌았지만 어떻게 해소하는지 몰라서 막연하게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어느 순간 빠르게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공작님, 실례지만 코트를 빌릴 수 있을까요?”

클레르건 공작은 배를 문지르는 르네의 손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가녀린 목소리에 여전히 턱을 받치고 시선만 들어 올렸다.

미동도 하지 않는 공작을 보며 르네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작 부인의 행색이 너무 단출하니 공작님의 코트를 걸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잠들 준비를 했던 르네의 옷차림은 내실에서나 볼 만한 옷이었다. 얇은 숄을 걸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는 귀족 부인이 있을 리가 없었다.

클레르건 공작은 말없이 자신이 걸쳤던 코트를 건넸다. 공작의 얇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자 르네의 작은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차 문이 열리기 전 르네는 클레르건 공작에게 부탁했다.

“내릴 때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몸이 이렇다 보니 혼자서 움직이기 쉽지 않네요……. 그리고 자작 부인에게 하는 공작님의 하대는 여기 마차 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남들 눈이 있으니 구색을 맞춰야 한다는 로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귀부인으로 대해 달라는 마지막 말은 개인적인 욕심이었고, 계약으로 떠맡은 르네에게 공작의 아량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서 던진 말이기도 했다.

클레르건 공작이 순간 움찔하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곧 마차 문이 열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르네와 클레르건 공작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뜻밖의 대치 상황에 문을 열었던 마부가 걸음을 물리자, 로이드가 나서며 정중하게 르네를 불렀다.

“부인, 내리시겠습니까?”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둘의 시선에도 로이드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공작은 잠시 로이드를 내려 보다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장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르네의 이름을 불렀다.

“아일레스 부인.”

“……클레르건 공작님.”

미소 짓던 르네는 클레르건 공작의 손을 잡기 전에 멈칫했다.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공작의 얼굴을 비췄다. 가벼운 미소를 짓고 정중하게 자신을 대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오랜만에 받아 보는 에스코트와 숙녀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 남자도 잘생겼구나.’

세르반이 부드럽고 민첩해 보이는 외모라면, 클레르건 공작은 좀 더 다부진 체격에 선이 굵은 얼굴이었다. 여유롭게 외모 감상이나 하다니 긴장이 풀렸나.

“부인, 몸이 불편하시오?”

“……아닙니다.”

머뭇거리던 르네는 이내 해사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이 닿자 저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가 민망함에 서둘러 힘을 뺐다.

클레르건 공작을 살폈지만 어느새 불빛을 등지고 선 그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땅에 발이 닿자 서둘러 로이드를 찾았다. 로이드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 뒤로 바짝 붙어 섰다.

그사이 나이 지긋한 집사 프레오가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에드워드는?”

“일찍 주무십니다.”

“그래.”

클레르건 공작은 소개를 기다리는 프레오를 보고 르네에게 시선을 돌렸다.

“프레오, 아일레스 부인을 별관으로 모시고 시중들어 줄 사용인들을 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프레오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르네에게 인사했다.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집사직을 맡고 있는 프레오입니다.”

“반갑네. 밤이 늦었는데 고생이 많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지금 별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클레르건 공작은 귀족 영애가 할 법한 자연스러운 하대와 태도를 빤히 보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귀부인으로서 예법을 챙기는 모습도 의외였지만, 대저택에 도착해 수많은 사용인들 앞에서도 주눅 드는 모습이 없었다.

세르반의 저택도 제법 규모가 컸지만 공작가와 비할 수는 없었다. 지골로 출신 여자가 귀부인을 흉내 내는데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는 모습이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르네가 자리를 뜨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 시선을 느끼고 흠칫했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며 유연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클레르건 공작님, 오늘은 이만 물러갑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부인.”

“배려 감사드립니다, 공작님.”

클레르건 공작은 예법이 익숙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잠시 의문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별관으로 이동하는 르네의 뒷모습을 보다가 아직 온기가 남은 손을 흘깃 내려다봤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알버트가 클레르건 공작을 쫓았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알버트.”

“새벽이 되기 전에 2, 3구역 정리가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세르반의 계획대로 지골로 구역을 생활 터전으로 복구시킨다고 하니까 안정되려면 꽤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2차 피해가 생기지 않게 주변 순찰을 강화해라.”

“네. 알겠습니다. 아마 2, 3구역이 갑자기 공격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상황이 급박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내일 오후에 세르반이 직접 방문하기로 했었으니까요.”

“대략적인 상황은 직접 봤으니 나머지는 문서로 확인하지. 다른 사항은?”

집무실에 들어선 클레르건 공작은 습관처럼 코트를 벗으려다가 헛손질을 했다. 뒤늦게 르네의 어깨에 걸쳐 준 코트가 생각났다.

“공작님?”

“……다른 내용이 없다면 오늘은 그만 들어가지.”

의아해하는 알버트를 뒤로하고 클레르건 공작은 책상에 앉았다.

“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떠나려던 알버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책상 위 서류를 뒤적이던 클레르건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남았나?”

“아, 제가 지골로 구역에 가서 그 여자를 데려와도 되는데 공작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계약 조건이었으니 상관없다.”

“그게 아니라…… 그 여자는 언제까지 있습니까? 세르반이 약속한 정보는 조금씩 들어오고 있지만 지골로 구역을 정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텐데요.”

“무사히 출산을 마치면 그 이후에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지. 그리고 그 여자가 아니라 자작 부인이다. 행여나 실수하지 않도록 언행을 주의해라.”

“네, 주의하겠습니다. 내일 오전은 지골로 구역을 살피고, 오후에 황실에서 뵙겠습니다.”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알버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가 자리를 떠난 후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떠올렸다. 세르반에게 전해 들은 말이 없다고 했지만, 스스로 계약 조건을 추측하는 르네는 첫인상과 달랐다.

‘상황 판단도 빠르고 자신의 의무와 권리부터 생각한다……. 약에 취해 몸을 파는 슬럼가 여자가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