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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온 시야가 흔들리는 탓에 멀미가 날 것 같은데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건 아마도 그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난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내내 어긋난 적 없이 맞추어 오던 그의 시선을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갖 것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정신을 차리려면 그를 바라보는 편이 더 좋기도 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젖은 뺨을 가볍게 쓸었다.
“흐으…….”
옅은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그가 저주를 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친 뺨 언저리가 꼭 불에 닿은 것처럼 뜨거워 고통스러웠다.
본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사이렌을 울렸다. 도망치라고. 로비에서 기획팀 사람들을 보고 도망쳤듯 이곳에서도 어서 도망치라고.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붉은 눈가가, 새카만 눈동자가 꼭 잡아먹을 것처럼 형형해서 감히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그저 도망치는 것도.
“아…….”
왜 그가 딛고 선 땅은 흔들리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공황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걸 알지만 이런 예외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흔들릴 거면 다 흔들려야 하는데 왜. 땅이고 하늘이고 다 흔들리는데 왜 그는, 그가 딛고 선 땅은 왜 저렇게 평화로운 거지.
와중에 몸은 오랜 긴장으로 흐물흐물해져 피가 다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힘이 빠졌다. 이대로 가다간 곧 주저앉을 것 같았다.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아직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
“죄송해요……. 제가 지금…….”
겨우겨우 한 걸음을 물리며 말을 하려는데,
“가려고?”
그가 물었다. 물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 봤자 한 걸음이었지만 겨우 물러난 것이었는데 그가 다가오니 의미가 없어졌다.
느리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힘들게 물러나면 그는 쉽게 다가왔다.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더니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속 갈 거야?”
놀리듯 가벼운 어투에 차마 대답은 못 하고 한 걸음 더 물러나려는데 그가 픽,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뒤에 계단이야.”
고개를 돌려 가파른 계단을 보았을 땐 어디가 평지고, 어디가 계단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몸의 중심을 잃은 뒤였다.
“아앗……!”
넘어지는구나, 하는 순간 강한 힘이 손목을 붙들었다. 도현이 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잡힌 손목이 아팠고 또 뜨거웠다. 그제야 흔들리던 계단이 또렷하게 보였다. 계단을 구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아…….”
수국이 망가졌다. 두어 계단 아래로 미끄러진 저 때문에 걸음을 당긴 그가 수국을 짓밟고 있었다. 꽃은 엉망이 되어 본래의 형태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미안―”
말은 그리했지만 얼굴은 평온한 채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오른 발목이 아파 왔다.
“흐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발목을 접질린 것 같은데.
“조심해야지.”
도현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손쉽게 끌어당겼다.
유주는 그런 도현을 보며 괜한 생각에 잠겼다.
제가 갖고 있는 불안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안정제를 먹어도 진정되지 않기 일쑤였고, 한번 시작하면 곧 죽을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다. 또 가끔은 오늘처럼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만큼 시야가 뒤집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뒤집힌 세상에서 도현은 홀로 단단하더니 저마저도 안정시켰다. 그가 손목을 움켜쥔 순간 모든 울렁거림도 함께 멈추었다. 머리는 여전히 조금 아팠고, 심장도 여전히 조금 급했지만 적어도 숨은 제대로 쉬었고 시야도 어지럽지 않았다.
괜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두렵고, 조금 어려운 이 남자의 옆은 조금 안전한 건가.
“괜찮아?”
뒤늦게 도현이 물어 왔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무겁고 짙은 향이 풍겼다. 무겁고 짙은 것이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안락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유주는 그가 두려웠다.
“아파요.”
그가 두려운 만큼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올라갈래?”
그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엉망인데.”
#2. 기다려
7층은 서늘하고 조용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무엇 하나 도현을 닮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의 취향으로 가득한 긴 복도에서 유주는 여전히 도현에게 몸을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아…….”
자꾸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의 보폭은 조금 넓은 편이었고 다친 발목으로 따르기에는 버거운 걸음이었다.
유주가 아픈 발목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붉게 부어오른 발목이 괴상했다.
“많이 아파?”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검은 눈은 다정하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차가웠고 또 어딘가 엄격했다. 그런데도 유주가 그에게 몸을 맡긴 이유는 단순했다. 두려운 만큼 편안했다. 온갖 불안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온몸을 긴장하게 하는 그의 등장은 기묘한 평화를 만들어 냈다. 몸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고, 말을 더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래서 편안했다.
유주는 덕분에 조금 솔직할 수 있었다.
“조금이요. 아주 조금.”
안정제의 부재가 만들어 낸 나약함, 도현이 만들어 낸 위압감. 그것들이 균형을 이뤘다.
도현은 그런 유주의 상태를 기민하게 살폈다. 상황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방금 전까지 그의 기분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티 하나 없이 완벽해야 할 다음 전시 계획에 차질이 생긴 탓이었다. 타고난 성정이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그는 잔뜩 예민해졌고 담배라도 피우면 좀 가라앉을까 싶어 비상계단을 찾았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 유주였다. 울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그는 면접 당시의 유주를 떠올렸다. 괜찮은 대학 간판에 잘 다듬은 학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자기소개서가 꽤 훌륭했다.
솔직히 독특하게 어여쁜 외모가 먼저 이목을 끌었다. 핏줄이 보일 만큼 얇고 투명한 피부에 이목구비는 선명했고 언뜻 화려한 느낌도 있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아 보였다. 조금 마주한다 싶으면 곧장 피해 버리는 눈동자가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약이 올라 어려운 질문을 몇 개 했더니 그것에는 또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돋보일 사람이 필사적으로 숨어드는 것 같은 꼴. 쥐면 망가질 것 같았다. 똑똑한데 겁이 많은 사람. 도현이 기억하는 유주의 첫인상이었다.
“괜찮아―”
하이힐에 갇힌 작은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평소라면 거슬렸을 일이기는 했다. 제 것에 대한 집착 하나는 끔찍하게 타고난 터라 제 사람, 제 공간, 제 물건에 손을 대는 이들을 도현은 역겨워했다. 그러니 저 혼자 쓰는 것이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인 7층 비상계단에서 별로 좋지도 않은 꼴로 자리한 유주가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물에 약한 것도 타고난 성정이었다.
아, 약하지 않고 강하다고 말하는 게 맞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붉어진 눈초리로, 달아오른 뺨으로 우는 사람을 보면 꼭 더 울리고 싶어 나빠지는 사람이 그였다. 가학을 즐기는 사람. 그게 취향이라면 취향이었다.
다시 말해 유주는, 어두운 비상계단 한편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유주는 그의 취향이었다. 마음껏 울지 못해 흐느끼고 손발을 덜덜 떠는 것이, 서 있는 것도 위태로워 잡아 줘야 할 것 같은 유주의 모든 것이 가련하게도 그의 취향이란 말이었다.
가는 발목에 색칠이라도 한 듯 빨갛게 일어난 부기를 쳐다보았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걸음은 처음보다 조금 느려진 채였다.
조도가 낮은 복도의 끝에는 두 개의 검은 문이 있었다. 오른쪽 문을 열자 도현의 넓고 개인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오크색의 커다란 소파가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이 도시의 풍경을 담았다.
“기다려.”
도현이 유주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아직 유주를 어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우선은 조금 더 보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얌전히 곁에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프냐는 물음에 조금 아프다고 대답하는 게 귀여워서.
허리를 감은 팔을 풀자 유주가 화들짝, 눈에 띄게 놀랐다.
“왜, 왜요?”
유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기다리라는 말이 잠깐의 안정을 모두 휘발시켰다. 그만큼 그의 곁에서 찾은 안정이 달았다.
다시금 땅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오는 것은 아닐까. 온갖 두려움이 튀어나왔다. 공황 상태를 벗어난 직후라 더욱 그랬다.
한번 패닉이 오면 다음 시발점은 낮아 더 불안했다. 언니의 기일이 있는 9월은 유독 심했으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 안정제를 부적처럼 끼고 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늘은 악재가 겹쳐 안정제 없이 패닉을 맞아 비상구로 도망쳐야 했지만 도현을 만나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도현이 구원자란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를 감당하느라 다른 건 신경도 쓸 수 없었으니.
“왜.”
도현이 물어 왔다.
“어디……. 어디 가시게요?”
그가 가면 안 됐다. 겨우 숨을 쉬고 겨우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그가 떠나서는 안 됐다.
“…….”
도현은 그런 유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이 그냥 듣기에도 위태로웠다. 그것이 꽤나 예뻐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영락없는 제 취향이기는 했지만 제 직원이기도 했으니까. 손에 쥐면 부서질 듯 연약한 것이 가학심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 직원이니까.
“6층에.”
도현이 느리게 답했다.
“아이스 팩이 거기 있거든.”
“아―”
괜찮아요. 유주가 재빨리 답했다. 말해 놓고 조금 후회하기는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프다고 품에 안겨 온 주제에 아이스 팩은 괜찮다니.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되도 않는 끼를 부린다 생각할까.
“대표님, 저…….”
“쉬이―”
그가 조용히 달랬다.
“괜찮아.”
유주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온 공간에 주인 없이 홀로 남겨져야 한다는 게 말도 못 하게 두려웠다. 패닉이 오면 늘 이렇게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생명 줄이라도 잡는 기분으로 그의 손끝을 잡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새끼손가락을.
“…….”
손가락이 잡힌 그는 조용했다. 죄송해요. 유주는 본인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도현은 조용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긴 눈살을 더 날카롭게 다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다려.”
그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눈을 맞추고 말하는 모습이 흡사 명령을 하는 듯했다. 그 단호하고 물러남 없는 태도에 저항을 포기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붕 떠 위태롭던 마음이 바닥으로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저를 조종이라도 하는 건가, 유주는 생각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온 시야가 흔들리는 탓에 멀미가 날 것 같은데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건 아마도 그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난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내내 어긋난 적 없이 맞추어 오던 그의 시선을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온갖 것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정신을 차리려면 그를 바라보는 편이 더 좋기도 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젖은 뺨을 가볍게 쓸었다.
“흐으…….”
옅은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그가 저주를 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친 뺨 언저리가 꼭 불에 닿은 것처럼 뜨거워 고통스러웠다.
본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사이렌을 울렸다. 도망치라고. 로비에서 기획팀 사람들을 보고 도망쳤듯 이곳에서도 어서 도망치라고.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붉은 눈가가, 새카만 눈동자가 꼭 잡아먹을 것처럼 형형해서 감히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그저 도망치는 것도.
“아…….”
왜 그가 딛고 선 땅은 흔들리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공황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걸 알지만 이런 예외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흔들릴 거면 다 흔들려야 하는데 왜. 땅이고 하늘이고 다 흔들리는데 왜 그는, 그가 딛고 선 땅은 왜 저렇게 평화로운 거지.
와중에 몸은 오랜 긴장으로 흐물흐물해져 피가 다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힘이 빠졌다. 이대로 가다간 곧 주저앉을 것 같았다. 추한 꼴을 보이기 전에, 아직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
“죄송해요……. 제가 지금…….”
겨우겨우 한 걸음을 물리며 말을 하려는데,
“가려고?”
그가 물었다. 물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 봤자 한 걸음이었지만 겨우 물러난 것이었는데 그가 다가오니 의미가 없어졌다.
느리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힘들게 물러나면 그는 쉽게 다가왔다.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더니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속 갈 거야?”
놀리듯 가벼운 어투에 차마 대답은 못 하고 한 걸음 더 물러나려는데 그가 픽,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뒤에 계단이야.”
고개를 돌려 가파른 계단을 보았을 땐 어디가 평지고, 어디가 계단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몸의 중심을 잃은 뒤였다.
“아앗……!”
넘어지는구나, 하는 순간 강한 힘이 손목을 붙들었다. 도현이 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잡힌 손목이 아팠고 또 뜨거웠다. 그제야 흔들리던 계단이 또렷하게 보였다. 계단을 구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아…….”
수국이 망가졌다. 두어 계단 아래로 미끄러진 저 때문에 걸음을 당긴 그가 수국을 짓밟고 있었다. 꽃은 엉망이 되어 본래의 형태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미안―”
말은 그리했지만 얼굴은 평온한 채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오른 발목이 아파 왔다.
“흐으…….”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발목을 접질린 것 같은데.
“조심해야지.”
도현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손쉽게 끌어당겼다.
유주는 그런 도현을 보며 괜한 생각에 잠겼다.
제가 갖고 있는 불안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안정제를 먹어도 진정되지 않기 일쑤였고, 한번 시작하면 곧 죽을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다. 또 가끔은 오늘처럼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만큼 시야가 뒤집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뒤집힌 세상에서 도현은 홀로 단단하더니 저마저도 안정시켰다. 그가 손목을 움켜쥔 순간 모든 울렁거림도 함께 멈추었다. 머리는 여전히 조금 아팠고, 심장도 여전히 조금 급했지만 적어도 숨은 제대로 쉬었고 시야도 어지럽지 않았다.
괜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 두렵고, 조금 어려운 이 남자의 옆은 조금 안전한 건가.
“괜찮아?”
뒤늦게 도현이 물어 왔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무겁고 짙은 향이 풍겼다. 무겁고 짙은 것이 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안락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유주는 그가 두려웠다.
“아파요.”
그가 두려운 만큼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올라갈래?”
그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얼굴, 엉망인데.”
#2. 기다려
7층은 서늘하고 조용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무엇 하나 도현을 닮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의 취향으로 가득한 긴 복도에서 유주는 여전히 도현에게 몸을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아…….”
자꾸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의 보폭은 조금 넓은 편이었고 다친 발목으로 따르기에는 버거운 걸음이었다.
유주가 아픈 발목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붉게 부어오른 발목이 괴상했다.
“많이 아파?”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검은 눈은 다정하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차가웠고 또 어딘가 엄격했다. 그런데도 유주가 그에게 몸을 맡긴 이유는 단순했다. 두려운 만큼 편안했다. 온갖 불안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온몸을 긴장하게 하는 그의 등장은 기묘한 평화를 만들어 냈다. 몸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고, 말을 더듬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래서 편안했다.
유주는 덕분에 조금 솔직할 수 있었다.
“조금이요. 아주 조금.”
안정제의 부재가 만들어 낸 나약함, 도현이 만들어 낸 위압감. 그것들이 균형을 이뤘다.
도현은 그런 유주의 상태를 기민하게 살폈다. 상황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방금 전까지 그의 기분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티 하나 없이 완벽해야 할 다음 전시 계획에 차질이 생긴 탓이었다. 타고난 성정이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그는 잔뜩 예민해졌고 담배라도 피우면 좀 가라앉을까 싶어 비상계단을 찾았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 유주였다. 울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그는 면접 당시의 유주를 떠올렸다. 괜찮은 대학 간판에 잘 다듬은 학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자기소개서가 꽤 훌륭했다.
솔직히 독특하게 어여쁜 외모가 먼저 이목을 끌었다. 핏줄이 보일 만큼 얇고 투명한 피부에 이목구비는 선명했고 언뜻 화려한 느낌도 있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게 겁이 많아 보였다. 조금 마주한다 싶으면 곧장 피해 버리는 눈동자가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약이 올라 어려운 질문을 몇 개 했더니 그것에는 또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돋보일 사람이 필사적으로 숨어드는 것 같은 꼴. 쥐면 망가질 것 같았다. 똑똑한데 겁이 많은 사람. 도현이 기억하는 유주의 첫인상이었다.
“괜찮아―”
하이힐에 갇힌 작은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평소라면 거슬렸을 일이기는 했다. 제 것에 대한 집착 하나는 끔찍하게 타고난 터라 제 사람, 제 공간, 제 물건에 손을 대는 이들을 도현은 역겨워했다. 그러니 저 혼자 쓰는 것이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인 7층 비상계단에서 별로 좋지도 않은 꼴로 자리한 유주가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물에 약한 것도 타고난 성정이었다.
아, 약하지 않고 강하다고 말하는 게 맞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붉어진 눈초리로, 달아오른 뺨으로 우는 사람을 보면 꼭 더 울리고 싶어 나빠지는 사람이 그였다. 가학을 즐기는 사람. 그게 취향이라면 취향이었다.
다시 말해 유주는, 어두운 비상계단 한편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유주는 그의 취향이었다. 마음껏 울지 못해 흐느끼고 손발을 덜덜 떠는 것이, 서 있는 것도 위태로워 잡아 줘야 할 것 같은 유주의 모든 것이 가련하게도 그의 취향이란 말이었다.
가는 발목에 색칠이라도 한 듯 빨갛게 일어난 부기를 쳐다보았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걸음은 처음보다 조금 느려진 채였다.
조도가 낮은 복도의 끝에는 두 개의 검은 문이 있었다. 오른쪽 문을 열자 도현의 넓고 개인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오크색의 커다란 소파가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창문이 도시의 풍경을 담았다.
“기다려.”
도현이 유주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아직 유주를 어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우선은 조금 더 보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얌전히 곁에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프냐는 물음에 조금 아프다고 대답하는 게 귀여워서.
허리를 감은 팔을 풀자 유주가 화들짝, 눈에 띄게 놀랐다.
“왜, 왜요?”
유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기다리라는 말이 잠깐의 안정을 모두 휘발시켰다. 그만큼 그의 곁에서 찾은 안정이 달았다.
다시금 땅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오는 것은 아닐까. 온갖 두려움이 튀어나왔다. 공황 상태를 벗어난 직후라 더욱 그랬다.
한번 패닉이 오면 다음 시발점은 낮아 더 불안했다. 언니의 기일이 있는 9월은 유독 심했으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 안정제를 부적처럼 끼고 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늘은 악재가 겹쳐 안정제 없이 패닉을 맞아 비상구로 도망쳐야 했지만 도현을 만나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도현이 구원자란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를 감당하느라 다른 건 신경도 쓸 수 없었으니.
“왜.”
도현이 물어 왔다.
“어디……. 어디 가시게요?”
그가 가면 안 됐다. 겨우 숨을 쉬고 겨우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그가 떠나서는 안 됐다.
“…….”
도현은 그런 유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숨이 그냥 듣기에도 위태로웠다. 그것이 꽤나 예뻐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영락없는 제 취향이기는 했지만 제 직원이기도 했으니까. 손에 쥐면 부서질 듯 연약한 것이 가학심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 직원이니까.
“6층에.”
도현이 느리게 답했다.
“아이스 팩이 거기 있거든.”
“아―”
괜찮아요. 유주가 재빨리 답했다. 말해 놓고 조금 후회하기는 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프다고 품에 안겨 온 주제에 아이스 팩은 괜찮다니.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되도 않는 끼를 부린다 생각할까.
“대표님, 저…….”
“쉬이―”
그가 조용히 달랬다.
“괜찮아.”
유주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온 공간에 주인 없이 홀로 남겨져야 한다는 게 말도 못 하게 두려웠다. 패닉이 오면 늘 이렇게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생명 줄이라도 잡는 기분으로 그의 손끝을 잡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새끼손가락을.
“…….”
손가락이 잡힌 그는 조용했다. 죄송해요. 유주는 본인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도현은 조용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긴 눈살을 더 날카롭게 다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다려.”
그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어.”
눈을 맞추고 말하는 모습이 흡사 명령을 하는 듯했다. 그 단호하고 물러남 없는 태도에 저항을 포기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붕 떠 위태롭던 마음이 바닥으로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저를 조종이라도 하는 건가, 유주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