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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3년 전에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는지 기억나? 기억 잘 안 나지?」
기억이 안 날 리가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데요.
「아무튼, 바깥바람 쐬니까 좋지?」
이 글을 쓴 분은 아마 마포 대교에 혼자 와서 겨울바람을 맞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 바람은 지금 우연의 얼굴을 사과 껍질처럼 깎고 있었다.
그래, 까짓것 하면 되는 거야. 핵 버튼도 아니고 고작 탈출 버튼이야. 지구가 멸망하거나 그러지 않아. 그냥 누르면 돼. 번지 점프는 올라서자마자 바로 뛰어내려야 덜 무서운 거야.
하지만 우연은 자꾸 꾸물거렸다. 뱃속에 숨은 어떤 똥멍청이가 ‘날 뜯어말려 줄 문장이 하나라도 나오면 좋겠다…….’ 하면서 자꾸 다음 문장을 읽고 있었다. 문장은 대책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한강은 넓고, 다리는 길고, 난간의 높이는 하필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다.
「비밀 있어요?」
……있어요.
「가슴 아파서, 누구한테도, 하지 못한 얘기」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 봐요.」
가슴 아파서 못 한 게 아니고 무서워서 못 한 거예요…….
난…… 너무 무서워요.
결국 멈춰 서서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울면서 처량하게 죽기 싫은데, 상상 속에서 나는 멋지게 팔을 벌리고 번지 점프를 했는데, 현실은 난간의 글자 따위에 붙잡혀서 질질 짜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한 번쯤은 시원하게 털어놔도 좋았을 텐데. 친구, 선생님, 경찰, 상담 전화, 왜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을까. 하다못해 아무에게든 인사라도 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남겨 두어야 할 말이 있다. 이대로 죽으면 엄마 아빠는 경찰서에 가서 철철 울면서 딸년이 철이 없어서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고 몰아갈 것이다. 진우연은 그렇게 홧김에 죽어 버린 철없는 년이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엄마 아빠는 딸이 왜 시체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알 권리가 있다. 눈물을 쏟아 내면서 반성하고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의무가 있다.
가방을 뒤져 연습장을 꺼냈다. 항상 갖고 다니는 그림 연습장이었다. 연습장을 편 우연은 시커멓게 언 손을 후후 불어 가며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손이 너무 얼어서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아이 씨, 아이 씨! 볼펜을 쥔 손을 치맛자락에 힘껏 비볐다. 이걸 쓰지 않으면, 엄마 아빠가 끝까지 발뺌할 텐데!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분하다. 분하다고 또 눈물이 난다. 눈알 속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다. 자신을 졸랑졸랑 따라왔던 글자들이 비뚤비뚤 찌그러져 보인다.
「그럴 때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막 하소연, 하고 싶을 때」
「지금 한번 해 봐요, 옆에, 전화기 있잖아요.」
글자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전화기는 없다. 집에 놓고 왔다. 지금처럼 마음 약해질까 봐. 누가 한마디만 해 주면 질질 울면서 집에 돌아갈까 봐.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 전화 가져올걸. 마지막 리셋 버튼 누르기 전에, 선생님에게라도 전화해서 속 시원하게 얘기라도 다 해 볼걸. 아니, 아무 번호라도 막 눌러서 누구라도 받는 사람 있으면 맺힌 거나 다 털어 내 볼걸.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창피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데.
손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고개를 든 우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정말로 눈앞에 공중 전화기가 서 있었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옆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 ■ □
평범한 아저씨였다. 강 건너 닥지닥지 포진한 고층 건물에 딱 어울릴 법한, 재미없고 어두침침한 양복 차림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뿅 나타날 거면, 차라리 슈퍼맨 코스프레가 나았을 텐데. 삼원색의 발랄함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유쾌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뚱맞은 생각을 얼른 지웠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정신병자 소릴 듣는 것이다. 우연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황당한 생각이 너무 싫었다.
아저씨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코트 자락이 찬 바람에 휘말려 퍽퍽 소리를 내며 다리를 후려갈기는 것이 그에게서 보이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회색 털 코트와 목도리, 장갑과 신발로 온몸을 치밀하게 감싸고는 있지만, 난간에 기댄 채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꼴을 보니 별로 따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추위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혹시 저 아저씨도 누군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인물화를 자주 그리는 우연은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표정이나 동작의 속뜻을 유추하는 일에도 익숙했다. 사람의 몸은 혀만큼이나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는데, 혀와 달리 거짓말에는 미숙했다. 거짓에 미숙한 몸의 언어를 읽는 것은 대인 관계를 무서워하는 우연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창이 되어 주었다.
혹시 저 아저씨도 지금 나처럼 번지 점프를 꿈꾸는 걸까?
우연은 계속 흘끔대며 그를 곁눈질했다. 때마침 강 쪽에서 바람이 훅 밀어닥쳤고, 긴 코트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어?
눈이 번쩍 뜨였다. 두꺼운 코트에 감춰져 있던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순간, 그를 지배하던 칙칙한 분위기가 오간 데 없이 사라지면서 미끈하고 유려한 선이 눈에 확 감겨 왔다.
우연은 그림을 많이 그릴수록 인간의 몸이 가진 선(線)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저 아저씨에게서는 원초적일 만큼 뚜렷한 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우연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깜박 잊은 채 대놓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저씨는 키가 컸다. 아주 컸다. 마포 대교 난간은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는데, 저 아저씨는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고, 149.7센티인 우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다.
그는 키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었고 몸의 비율도 좋았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벨트 선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5 대 8, 소위 말하는 황금 비율이었다. 우연은 저렇게 완벽한 황금비를 가진 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잡지에서 보는 모델들처럼 비정상적으로 마른 체형이 아니라 적당한 부피감까지 느껴졌다. 아마 저 옷 속에는 분명 우아한 선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몸이 숨어 있을 것이다.
찰칵.
머릿속에서 셔터가 터진다. 우연은 번지 점프 계획을 깜박 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연습장을 황급히 넘겼다. 조건 반사처럼 손끝에서 미끈한 선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선들이 미끄러진다, 달린다, 날아간다, 화악 감겨 맺힌다. 사악, 사그락, 삭. 타타타탓. 몇 개의 선으로 머리, 등, 엉덩이, 다리의 뼈대를 순식간에 잡아 낸 우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라인 진짜 예술이다.
어깨에서 등, 허리, 다리로 뻗어 내려가는 몸의 선은 굳건하면서도 물 흐르듯 유려했다. 다만 코트의 어깨 덮개 때문인지 어깨 폭이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게 조금 아쉬웠다.
사그락, 삭, 삭, 사악, 스스스, 탓탓탓탓.
점점 궁금해졌다. 저 아저씨는 왜 여기 온 걸까. 이런 추위에 마포 대교 한복판까지 나와 강을 들여다보며 서 있으려면 어지간한 이유로는 안 될 텐데.
저 아저씨도 혹시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쌍코피 터지도록 따귀를 맞았을까? 백치, 머저리, 정신병자, 사이코패스 소리라도 들은 걸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몹쓸 짓을 당해 왔을까?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다. 저 아저씨는 나처럼 작고 약해 빠진 여고생이 아니다. 저런 아저씨를 때리려면 저도 반 죽을 걸 각오하고 덤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정면에서 볼 수만 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바로 들키겠지. 그럼 끝장이다.
우연은 빠르게 스케치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한강이 느릿하게 흘렀고 왼쪽으로는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 사이로 시간은 느릿하거나 빠르게 흘러갔다.
갑자기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떨어졌다.
“거기 학생,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헉, 드, 들켰나?
우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다가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차갑게 날이 선 눈동자가 우연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엔 그늘이 짙었고, 표정은 오금이 쪼그라들 정도로 써늘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어떡해. 나 어떡해.
우연은 허둥지둥 뒷걸음질하다가 난간에 부딪쳐 연습장을 놓쳤다. 연습장은 저 앞쪽으로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우연은 주우러 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울상만 지었다. 턱이 달달 떨렸다.
“어, 아, 아저, 아저씨, ……그게.”
그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혔다. 순간 우연은 긴 코트 안에 감춰져 있던 양복이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이고, 턱 끝까지 바짝 졸라맨 넥타이 역시 새까만 색임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럼 혹시?
조폭이 아닌 다음에야 까만 양복, 까만 넥타이로 출근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저런 복장은 회사보다 장례식장 같은 곳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살벌한 목소리가 재차 튀어나온다.
“지금 뭐 하냐고 물었는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리면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다. 몰래 훔쳐보고 그리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몰카도 범죄니까 몰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범죄일까? 그럼 나 지금 경찰서에 끌려가는 건가? 두 손 모으고 싹싹 빌어야 할까?
……제발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3년 전에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는지 기억나? 기억 잘 안 나지?」
기억이 안 날 리가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데요.
「아무튼, 바깥바람 쐬니까 좋지?」
이 글을 쓴 분은 아마 마포 대교에 혼자 와서 겨울바람을 맞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 바람은 지금 우연의 얼굴을 사과 껍질처럼 깎고 있었다.
그래, 까짓것 하면 되는 거야. 핵 버튼도 아니고 고작 탈출 버튼이야. 지구가 멸망하거나 그러지 않아. 그냥 누르면 돼. 번지 점프는 올라서자마자 바로 뛰어내려야 덜 무서운 거야.
하지만 우연은 자꾸 꾸물거렸다. 뱃속에 숨은 어떤 똥멍청이가 ‘날 뜯어말려 줄 문장이 하나라도 나오면 좋겠다…….’ 하면서 자꾸 다음 문장을 읽고 있었다. 문장은 대책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한강은 넓고, 다리는 길고, 난간의 높이는 하필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다.
「비밀 있어요?」
……있어요.
「가슴 아파서, 누구한테도, 하지 못한 얘기」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 봐요.」
가슴 아파서 못 한 게 아니고 무서워서 못 한 거예요…….
난…… 너무 무서워요.
결국 멈춰 서서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울면서 처량하게 죽기 싫은데, 상상 속에서 나는 멋지게 팔을 벌리고 번지 점프를 했는데, 현실은 난간의 글자 따위에 붙잡혀서 질질 짜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한 번쯤은 시원하게 털어놔도 좋았을 텐데. 친구, 선생님, 경찰, 상담 전화, 왜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을까. 하다못해 아무에게든 인사라도 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남겨 두어야 할 말이 있다. 이대로 죽으면 엄마 아빠는 경찰서에 가서 철철 울면서 딸년이 철이 없어서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고 몰아갈 것이다. 진우연은 그렇게 홧김에 죽어 버린 철없는 년이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엄마 아빠는 딸이 왜 시체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알 권리가 있다. 눈물을 쏟아 내면서 반성하고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의무가 있다.
가방을 뒤져 연습장을 꺼냈다. 항상 갖고 다니는 그림 연습장이었다. 연습장을 편 우연은 시커멓게 언 손을 후후 불어 가며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손이 너무 얼어서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아이 씨, 아이 씨! 볼펜을 쥔 손을 치맛자락에 힘껏 비볐다. 이걸 쓰지 않으면, 엄마 아빠가 끝까지 발뺌할 텐데!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분하다. 분하다고 또 눈물이 난다. 눈알 속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다. 자신을 졸랑졸랑 따라왔던 글자들이 비뚤비뚤 찌그러져 보인다.
「그럴 때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막 하소연, 하고 싶을 때」
「지금 한번 해 봐요, 옆에, 전화기 있잖아요.」
글자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전화기는 없다. 집에 놓고 왔다. 지금처럼 마음 약해질까 봐. 누가 한마디만 해 주면 질질 울면서 집에 돌아갈까 봐.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 전화 가져올걸. 마지막 리셋 버튼 누르기 전에, 선생님에게라도 전화해서 속 시원하게 얘기라도 다 해 볼걸. 아니, 아무 번호라도 막 눌러서 누구라도 받는 사람 있으면 맺힌 거나 다 털어 내 볼걸.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창피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데.
손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고개를 든 우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정말로 눈앞에 공중 전화기가 서 있었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옆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 ■ □
평범한 아저씨였다. 강 건너 닥지닥지 포진한 고층 건물에 딱 어울릴 법한, 재미없고 어두침침한 양복 차림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뿅 나타날 거면, 차라리 슈퍼맨 코스프레가 나았을 텐데. 삼원색의 발랄함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유쾌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뚱맞은 생각을 얼른 지웠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정신병자 소릴 듣는 것이다. 우연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황당한 생각이 너무 싫었다.
아저씨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코트 자락이 찬 바람에 휘말려 퍽퍽 소리를 내며 다리를 후려갈기는 것이 그에게서 보이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회색 털 코트와 목도리, 장갑과 신발로 온몸을 치밀하게 감싸고는 있지만, 난간에 기댄 채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꼴을 보니 별로 따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추위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혹시 저 아저씨도 누군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인물화를 자주 그리는 우연은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표정이나 동작의 속뜻을 유추하는 일에도 익숙했다. 사람의 몸은 혀만큼이나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는데, 혀와 달리 거짓말에는 미숙했다. 거짓에 미숙한 몸의 언어를 읽는 것은 대인 관계를 무서워하는 우연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창이 되어 주었다.
혹시 저 아저씨도 지금 나처럼 번지 점프를 꿈꾸는 걸까?
우연은 계속 흘끔대며 그를 곁눈질했다. 때마침 강 쪽에서 바람이 훅 밀어닥쳤고, 긴 코트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어?
눈이 번쩍 뜨였다. 두꺼운 코트에 감춰져 있던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순간, 그를 지배하던 칙칙한 분위기가 오간 데 없이 사라지면서 미끈하고 유려한 선이 눈에 확 감겨 왔다.
우연은 그림을 많이 그릴수록 인간의 몸이 가진 선(線)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저 아저씨에게서는 원초적일 만큼 뚜렷한 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우연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깜박 잊은 채 대놓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저씨는 키가 컸다. 아주 컸다. 마포 대교 난간은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는데, 저 아저씨는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고, 149.7센티인 우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다.
그는 키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었고 몸의 비율도 좋았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벨트 선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5 대 8, 소위 말하는 황금 비율이었다. 우연은 저렇게 완벽한 황금비를 가진 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잡지에서 보는 모델들처럼 비정상적으로 마른 체형이 아니라 적당한 부피감까지 느껴졌다. 아마 저 옷 속에는 분명 우아한 선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몸이 숨어 있을 것이다.
찰칵.
머릿속에서 셔터가 터진다. 우연은 번지 점프 계획을 깜박 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연습장을 황급히 넘겼다. 조건 반사처럼 손끝에서 미끈한 선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선들이 미끄러진다, 달린다, 날아간다, 화악 감겨 맺힌다. 사악, 사그락, 삭. 타타타탓. 몇 개의 선으로 머리, 등, 엉덩이, 다리의 뼈대를 순식간에 잡아 낸 우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라인 진짜 예술이다.
어깨에서 등, 허리, 다리로 뻗어 내려가는 몸의 선은 굳건하면서도 물 흐르듯 유려했다. 다만 코트의 어깨 덮개 때문인지 어깨 폭이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게 조금 아쉬웠다.
사그락, 삭, 삭, 사악, 스스스, 탓탓탓탓.
점점 궁금해졌다. 저 아저씨는 왜 여기 온 걸까. 이런 추위에 마포 대교 한복판까지 나와 강을 들여다보며 서 있으려면 어지간한 이유로는 안 될 텐데.
저 아저씨도 혹시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쌍코피 터지도록 따귀를 맞았을까? 백치, 머저리, 정신병자, 사이코패스 소리라도 들은 걸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몹쓸 짓을 당해 왔을까?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다. 저 아저씨는 나처럼 작고 약해 빠진 여고생이 아니다. 저런 아저씨를 때리려면 저도 반 죽을 걸 각오하고 덤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정면에서 볼 수만 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바로 들키겠지. 그럼 끝장이다.
우연은 빠르게 스케치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한강이 느릿하게 흘렀고 왼쪽으로는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 사이로 시간은 느릿하거나 빠르게 흘러갔다.
갑자기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떨어졌다.
“거기 학생,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헉, 드, 들켰나?
우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다가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차갑게 날이 선 눈동자가 우연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엔 그늘이 짙었고, 표정은 오금이 쪼그라들 정도로 써늘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어떡해. 나 어떡해.
우연은 허둥지둥 뒷걸음질하다가 난간에 부딪쳐 연습장을 놓쳤다. 연습장은 저 앞쪽으로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우연은 주우러 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울상만 지었다. 턱이 달달 떨렸다.
“어, 아, 아저, 아저씨, ……그게.”
그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혔다. 순간 우연은 긴 코트 안에 감춰져 있던 양복이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이고, 턱 끝까지 바짝 졸라맨 넥타이 역시 새까만 색임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럼 혹시?
조폭이 아닌 다음에야 까만 양복, 까만 넥타이로 출근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저런 복장은 회사보다 장례식장 같은 곳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살벌한 목소리가 재차 튀어나온다.
“지금 뭐 하냐고 물었는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리면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다. 몰래 훔쳐보고 그리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몰카도 범죄니까 몰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범죄일까? 그럼 나 지금 경찰서에 끌려가는 건가? 두 손 모으고 싹싹 빌어야 할까?
……제발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