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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Prologue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을 것이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기엔 아직은 이른 3월. 겨울의 정적임이 여전히 녹지 않은 날이었다.
은초는 잠그지 못한 동복 재킷의 단추를 마저 채우고 인산인해를 이룬 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학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은 상태였다. 환영 문구와 학교의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가 출입문에 걸려 있었고, 넓은 강당의 바닥은 왁스 칠을 하여 반질반질했으며, 와인색의 전동 커튼이 달린 창가에는 풍선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줄지어 선 2열 종대의 끝에, 은초는 홀로 서서 고등학교를 소개하는 홍보 책자를 읽고 있었다. 은초는 타인과 분리된 적적한 외로움을 잘 다스리는 편이었다.
너 6반이냐? 쉬는 시간에 놀러 갈게. 아 꺼져, 오지 마.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제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틈에 끼어 있는 것쯤이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얘들아, 이제 입학식 시작한다고 줄 똑바로 서래.”
정각 10시가 되기 2분 전, 마이크를 잡은 1학년 부장 교사의 인사말로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애국가를 부르고,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의 선서를 듣고, 선배들과 상호 인사를 나누었다. 무게가 쏠린 다리가 아파 무릎을 살짝 구부릴 때쯤,
“네 옆에 좀 설게.”
청량한 비누 향기가 다리의 통증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은초의 턱이 위로 올려졌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애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기가 좋을 얼굴로 내려다보는 태도에, 은초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왼쪽 가슴에 각인된 이름으로 고개를 내렸다. 권서빈. 중성적이며 예쁜 이름이었다.
“여기 6반 줄이지?”
“……응.”
“난 5반인데, 내가 지금 와서 짝이 없거든. 같이 서자.”
뻔뻔하나 뻔뻔해 보이지 않았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애였다. 제 옆자리를 채워 주어서일까. 은초는 내내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입학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때때로 서빈의 모습이 기억 속에 돋아났다. 이목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는 늘 중심에 서 있었다. 교실이든, 급식실이든, 운동장이든 서빈이 있는 공간에선 다 같이 입을 모아 짜기라도 한 듯,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만 불러 댔다. ‘서빈아, 권서빈.’ 하고 말이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도 어느샌가 서빈을 찾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짝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그것이 사랑인지 동경인지 잘 알지 못했다.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고, 또다시 궁금했다. 처음 겪어 보는 이 감정은 짝사랑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아 그렇게 책임감 없이 규정해 버렸다.
청소 시간만 되면 그 애가 자주 오르내리는 계단을 청소했다. 그러던 도중, 드문드문 들려오는 반 아이들의 말소리에서 우연치 않게 서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서빈이 문과를 선택할 거라는 사실과 수영을 한다는 것. 단 두 가지의 정보였다. 나름의 수확이었다.
그 뒤로 2학년에 올라서면 같은 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비슷한 망상을 했다. 그리고 그 망상은 현실이 되고 진실이 되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바라고 바랐던 그 마음들이 무색하게 그 애에게 말 한마디 붙여 보질 못했다. 서빈은 입학식 날 보았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을뿐더러, 이은초라는 동급생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은초는 자신과 그와의 다름에 대해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사고했다. 그가 제 옆을 지나칠 때마다 맥박이 가열하게 똑딱거려도 시선을 올리지 않았으며, 유인물을 뒷자리로 전달할 때마다 스치는 손의 감촉도 무시했다.
분명 그랬는데,
새 학기의 불완전함이 가득했던 3월이 지나고 봄날의 기운이 코끝에 맺히는 4월의 어느 날.
“빨리 일어나. 차에 치이기 싫으면.”
서빈이 제게 두 번째로 말을 건네 왔다. 차들이 혼잡하게 늘어서 있는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01. 한여름의 파란
쾅쾅―!
인터폰의 벨이 울리고 뒤이어 현관문을 괄괄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 봐요.”
꽤나 오랫동안 사용해 너절해진 재색 걸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은초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물기를 지분거리며 인터폰의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자그마한 화면 안에는 단단한 각오가 어린 집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잠시만요.”
머리칼을 대충 정리한 은초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향했다. 의욕 없이 움직이는 다리가 톡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은초가 현관문을 슬며시 밀자 바깥쪽에서 그악스러운 손이 손잡이를 홱 잡아당겼다. 삐걱대는 안전 고리 장치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덜거덕거렸다.
“아니, 아가씨. 대체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하셨어요? 진동으로 돌려놔서 못 들었나 봐요.”
문짝에 한쪽 팔을 기대고 선 향옥이 손부채질로 불볕더위에 열이 오른 얼굴을 진정시켰다.
“내가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지?”
냉수를 떠 올까 고민하던 은초에게 갈퀴진 목소리가 덤벼들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서 굽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다.
“혹시 월세 때문에…….”
“그래! 이번 달 월세도 안 넣어 주면 어떡해. 내가 뭐랬어. 두 달까지만 봐줄 수 있다고 했잖아. 올해 2월, 5월, 그리고 이번 달까지. 무려 석 달 치야, 석 달 치. 알고 있어요?”
은초는 낯부끄러운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잔뜩 닳고 낡아 버린 스니커즈와 검정 슬리퍼 두 짝이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이번 달 말일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나보고 또 기다리라고?”
“말일이 제 월급날이거든요. 그때 밀린 월세까지 전부 보내 드릴게요.”
두 달 전, 은초가 맹장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향옥의 눈동자에 딱한 애잔함이 담겼다. 입술이 퍼렇게 질려서는 현관문 앞에 쭈그려 앉아 끙끙 앓고 있던 은초를 보고, 119 구급대에 곧장 신고를 넣은 것이 향옥이었다.
없는 사정에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입원비와 수술비에 죄다 쏟아붓고 지난달에는 보증금 차액을 지불하여야 했으니 이러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갔다.
듣자 하니 오래전, 크게 사기를 당해 모아 두었던 목돈도 날려 먹었다던데. 저였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앓아누웠지. 아니면 이미 숨넘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든가.
향옥은 혀를 끌끌 차며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바닥으로 턱턱 두드렸다.
“에휴, 나라서 아가씨 사정 봐주는 거야. 다른 집주인이었어 봐. 노발대발 난리 나지.”
“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은초는 향옥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근본적으로 죄송할 짓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 쉬운 걸 왜 자신은 해 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신음이 저 밑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 달 안으로 확실히 부쳐 주는 거지? 나 마음 약한 거 약점으로 잡고 허튼수작 부리려는 건 아니고?”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런 꿍꿍이를 꾸밀 만큼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뭐,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만……. 아무튼 이번만이야! 그 이상은 못 봐줘.”
향옥은 극히 떨떠름해하면서도 한 가닥 남아 있는 신뢰를 믿어 보기로 했다. 풍랑 같은 수심을 덜어 낸 은초의 얼굴이 더디게 풀렸다.
“꼭 보내 드릴게요. 매번 감사합니다.”
“알았으니까 하던 청소나 마저 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묵직한 현관문이 철커덩하고 닫혔다. 은초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다리를 쭉 폈다.
“후우.”
머릿속으로 찬찬히 계산을 했다. 세 달 치 월세와 관리비, 그리고 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다음 달은 꼼짝없이 입에 풀칠이나 하며 버텨야 했다.
습관적인 헛숨을 크게 내뱉은 은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르륵, 허기진 배 속이 요란하게 울린다. 꼬들꼬들한 라면 하나를 끓여 먹기 위해 주방의 찬장을 열었다. 텅텅 빈 공간 안에는 종이컵 두 개와 사용하지 않는 식기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초는 하는 수 없이 천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맴맴 우는 매미 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낮더위에 목말라하는 큰길을 빠르게 걸어 도착한 편의점의 출입문을 열었다.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늘 그렇듯, 왼쪽 코너에서 가장 저렴한 묶음 라면 하나와 생수 한 병을 고르는 손길이 익숙했다.
하루의 초반에 떠안게 된 걱정이 회복되지 않아서일까. 계산대로 돌아서는 두 발이 순식간에 어긋나 그녀의 몸이 사선으로 기울어지려 했다. 그 순간, 은초는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이 전시되어 있는 진열대를 다급히 잡았다.
“읏!”
위 칸에 반듯이 놓여 있던 양주 한 병이 땅을 치며 폭발했다. 그 휘황찬란한 파열음에 달려온 아르바이트생이 아씨, 짜증 섞인 추임새를 넣고는 표정을 한껏 비꼬았다. 높이 치솟던 액체가 흩뿌려진 바닥은 몹시 처참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빨리 치울게요. 걸레는 어디에 있죠?”
당황한 은초가 끝이 삐죽한 유리 조각을 집어 들려 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혼자 치우는 게 더 편하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깨진 양주값은 제가 물어낼게요.”
부주의한 말썽에 의해 일어난 성가신 상황에, 아르바이트생이 불평을 웅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치를 살피던 은초는 바닥에 떨어진 라면과 생수를 계산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양주값까지 다 해서 58,000원입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체크 카드를 꺼내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었다. 카드를 들고 수차례 결제를 시도하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카드, 잔액 부족이라고 뜨는데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결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이라 생각한 은초는 한 번 더 결제를 해 달라고 말을 꺼내려다 안으로 집어삼켰다. 어젯밤의 기억이 불쑥 되살아난 탓이었다. 카드에 남아 있던 잔액들을 모조리 현금으로 뽑아 놓은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은초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면구스러움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현금 가지고 바로 돌아와도 될까요? 혹시 모르니까 제 번호도 적어 놓고 갈게요. 이 물건들은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가지가지 하네.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그러했다.
사실, 그만한 현금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뱀 꼬리를 감추듯, 낭패감을 내려앉힌 은초가 봉지에 담기지 못한 물건들을 잡으려 할 때였다.
“이걸로 계산해 줘요.”
난데없이 손 하나가 대뜸 끼어들었다. 은초는 익숙지 않은 선의를 거절하려 뒤를 돌았다. 낯익고도 낯선 남자가 자신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지워 버리곤 했던 그 얼굴에 호흡이 가로막힌 은초가 티셔츠 끝단을 함부로 움켜쥐자, 평평했던 티셔츠에 꾸깃꾸깃한 자국이 덩어리로 뭉쳐 들었다.
18살, 고등학교, 첫사랑, 권서빈. 공중에 흩날리는 이물질처럼 그와 관련된 단어들이 은초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드나들었다.
#Prologue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을 것이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기엔 아직은 이른 3월. 겨울의 정적임이 여전히 녹지 않은 날이었다.
은초는 잠그지 못한 동복 재킷의 단추를 마저 채우고 인산인해를 이룬 강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학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은 상태였다. 환영 문구와 학교의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가 출입문에 걸려 있었고, 넓은 강당의 바닥은 왁스 칠을 하여 반질반질했으며, 와인색의 전동 커튼이 달린 창가에는 풍선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줄지어 선 2열 종대의 끝에, 은초는 홀로 서서 고등학교를 소개하는 홍보 책자를 읽고 있었다. 은초는 타인과 분리된 적적한 외로움을 잘 다스리는 편이었다.
너 6반이냐? 쉬는 시간에 놀러 갈게. 아 꺼져, 오지 마.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제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틈에 끼어 있는 것쯤이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얘들아, 이제 입학식 시작한다고 줄 똑바로 서래.”
정각 10시가 되기 2분 전, 마이크를 잡은 1학년 부장 교사의 인사말로 입학식이 시작되었다. 애국가를 부르고,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의 선서를 듣고, 선배들과 상호 인사를 나누었다. 무게가 쏠린 다리가 아파 무릎을 살짝 구부릴 때쯤,
“네 옆에 좀 설게.”
청량한 비누 향기가 다리의 통증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은초의 턱이 위로 올려졌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애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기가 좋을 얼굴로 내려다보는 태도에, 은초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왼쪽 가슴에 각인된 이름으로 고개를 내렸다. 권서빈. 중성적이며 예쁜 이름이었다.
“여기 6반 줄이지?”
“……응.”
“난 5반인데, 내가 지금 와서 짝이 없거든. 같이 서자.”
뻔뻔하나 뻔뻔해 보이지 않았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애였다. 제 옆자리를 채워 주어서일까. 은초는 내내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입학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때때로 서빈의 모습이 기억 속에 돋아났다. 이목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던 그는 늘 중심에 서 있었다. 교실이든, 급식실이든, 운동장이든 서빈이 있는 공간에선 다 같이 입을 모아 짜기라도 한 듯,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만 불러 댔다. ‘서빈아, 권서빈.’ 하고 말이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도 어느샌가 서빈을 찾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짝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그것이 사랑인지 동경인지 잘 알지 못했다.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고, 또다시 궁금했다. 처음 겪어 보는 이 감정은 짝사랑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아 그렇게 책임감 없이 규정해 버렸다.
청소 시간만 되면 그 애가 자주 오르내리는 계단을 청소했다. 그러던 도중, 드문드문 들려오는 반 아이들의 말소리에서 우연치 않게 서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서빈이 문과를 선택할 거라는 사실과 수영을 한다는 것. 단 두 가지의 정보였다. 나름의 수확이었다.
그 뒤로 2학년에 올라서면 같은 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비슷한 망상을 했다. 그리고 그 망상은 현실이 되고 진실이 되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바라고 바랐던 그 마음들이 무색하게 그 애에게 말 한마디 붙여 보질 못했다. 서빈은 입학식 날 보았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을뿐더러, 이은초라는 동급생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은초는 자신과 그와의 다름에 대해 객관적으로 지각하고 사고했다. 그가 제 옆을 지나칠 때마다 맥박이 가열하게 똑딱거려도 시선을 올리지 않았으며, 유인물을 뒷자리로 전달할 때마다 스치는 손의 감촉도 무시했다.
분명 그랬는데,
새 학기의 불완전함이 가득했던 3월이 지나고 봄날의 기운이 코끝에 맺히는 4월의 어느 날.
“빨리 일어나. 차에 치이기 싫으면.”
서빈이 제게 두 번째로 말을 건네 왔다. 차들이 혼잡하게 늘어서 있는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01. 한여름의 파란
쾅쾅―!
인터폰의 벨이 울리고 뒤이어 현관문을 괄괄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으면 문 좀 열어 봐요.”
꽤나 오랫동안 사용해 너절해진 재색 걸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은초는 손바닥에 남아 있는 물기를 지분거리며 인터폰의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자그마한 화면 안에는 단단한 각오가 어린 집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잠시만요.”
머리칼을 대충 정리한 은초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향했다. 의욕 없이 움직이는 다리가 톡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은초가 현관문을 슬며시 밀자 바깥쪽에서 그악스러운 손이 손잡이를 홱 잡아당겼다. 삐걱대는 안전 고리 장치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덜거덕거렸다.
“아니, 아가씨. 대체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하셨어요? 진동으로 돌려놔서 못 들었나 봐요.”
문짝에 한쪽 팔을 기대고 선 향옥이 손부채질로 불볕더위에 열이 오른 얼굴을 진정시켰다.
“내가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지?”
냉수를 떠 올까 고민하던 은초에게 갈퀴진 목소리가 덤벼들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서 굽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진다.
“혹시 월세 때문에…….”
“그래! 이번 달 월세도 안 넣어 주면 어떡해. 내가 뭐랬어. 두 달까지만 봐줄 수 있다고 했잖아. 올해 2월, 5월, 그리고 이번 달까지. 무려 석 달 치야, 석 달 치. 알고 있어요?”
은초는 낯부끄러운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잔뜩 닳고 낡아 버린 스니커즈와 검정 슬리퍼 두 짝이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이번 달 말일까지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나보고 또 기다리라고?”
“말일이 제 월급날이거든요. 그때 밀린 월세까지 전부 보내 드릴게요.”
두 달 전, 은초가 맹장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향옥의 눈동자에 딱한 애잔함이 담겼다. 입술이 퍼렇게 질려서는 현관문 앞에 쭈그려 앉아 끙끙 앓고 있던 은초를 보고, 119 구급대에 곧장 신고를 넣은 것이 향옥이었다.
없는 사정에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입원비와 수술비에 죄다 쏟아붓고 지난달에는 보증금 차액을 지불하여야 했으니 이러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갔다.
듣자 하니 오래전, 크게 사기를 당해 모아 두었던 목돈도 날려 먹었다던데. 저였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앓아누웠지. 아니면 이미 숨넘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든가.
향옥은 혀를 끌끌 차며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바닥으로 턱턱 두드렸다.
“에휴, 나라서 아가씨 사정 봐주는 거야. 다른 집주인이었어 봐. 노발대발 난리 나지.”
“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은초는 향옥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근본적으로 죄송할 짓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 쉬운 걸 왜 자신은 해 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신음이 저 밑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 달 안으로 확실히 부쳐 주는 거지? 나 마음 약한 거 약점으로 잡고 허튼수작 부리려는 건 아니고?”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런 꿍꿍이를 꾸밀 만큼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뭐,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만……. 아무튼 이번만이야! 그 이상은 못 봐줘.”
향옥은 극히 떨떠름해하면서도 한 가닥 남아 있는 신뢰를 믿어 보기로 했다. 풍랑 같은 수심을 덜어 낸 은초의 얼굴이 더디게 풀렸다.
“꼭 보내 드릴게요. 매번 감사합니다.”
“알았으니까 하던 청소나 마저 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묵직한 현관문이 철커덩하고 닫혔다. 은초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다리를 쭉 폈다.
“후우.”
머릿속으로 찬찬히 계산을 했다. 세 달 치 월세와 관리비, 그리고 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다음 달은 꼼짝없이 입에 풀칠이나 하며 버텨야 했다.
습관적인 헛숨을 크게 내뱉은 은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르륵, 허기진 배 속이 요란하게 울린다. 꼬들꼬들한 라면 하나를 끓여 먹기 위해 주방의 찬장을 열었다. 텅텅 빈 공간 안에는 종이컵 두 개와 사용하지 않는 식기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은초는 하는 수 없이 천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맴맴 우는 매미 소리가 귓전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낮더위에 목말라하는 큰길을 빠르게 걸어 도착한 편의점의 출입문을 열었다.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늘 그렇듯, 왼쪽 코너에서 가장 저렴한 묶음 라면 하나와 생수 한 병을 고르는 손길이 익숙했다.
하루의 초반에 떠안게 된 걱정이 회복되지 않아서일까. 계산대로 돌아서는 두 발이 순식간에 어긋나 그녀의 몸이 사선으로 기울어지려 했다. 그 순간, 은초는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이 전시되어 있는 진열대를 다급히 잡았다.
“읏!”
위 칸에 반듯이 놓여 있던 양주 한 병이 땅을 치며 폭발했다. 그 휘황찬란한 파열음에 달려온 아르바이트생이 아씨, 짜증 섞인 추임새를 넣고는 표정을 한껏 비꼬았다. 높이 치솟던 액체가 흩뿌려진 바닥은 몹시 처참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빨리 치울게요. 걸레는 어디에 있죠?”
당황한 은초가 끝이 삐죽한 유리 조각을 집어 들려 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혼자 치우는 게 더 편하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깨진 양주값은 제가 물어낼게요.”
부주의한 말썽에 의해 일어난 성가신 상황에, 아르바이트생이 불평을 웅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아르바이트생의 눈치를 살피던 은초는 바닥에 떨어진 라면과 생수를 계산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양주값까지 다 해서 58,000원입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체크 카드를 꺼내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었다. 카드를 들고 수차례 결제를 시도하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카드, 잔액 부족이라고 뜨는데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결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이라 생각한 은초는 한 번 더 결제를 해 달라고 말을 꺼내려다 안으로 집어삼켰다. 어젯밤의 기억이 불쑥 되살아난 탓이었다. 카드에 남아 있던 잔액들을 모조리 현금으로 뽑아 놓은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은초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면구스러움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현금 가지고 바로 돌아와도 될까요? 혹시 모르니까 제 번호도 적어 놓고 갈게요. 이 물건들은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겠습니다.”
가지가지 하네.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그러했다.
사실, 그만한 현금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뱀 꼬리를 감추듯, 낭패감을 내려앉힌 은초가 봉지에 담기지 못한 물건들을 잡으려 할 때였다.
“이걸로 계산해 줘요.”
난데없이 손 하나가 대뜸 끼어들었다. 은초는 익숙지 않은 선의를 거절하려 뒤를 돌았다. 낯익고도 낯선 남자가 자신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지워 버리곤 했던 그 얼굴에 호흡이 가로막힌 은초가 티셔츠 끝단을 함부로 움켜쥐자, 평평했던 티셔츠에 꾸깃꾸깃한 자국이 덩어리로 뭉쳐 들었다.
18살, 고등학교, 첫사랑, 권서빈. 공중에 흩날리는 이물질처럼 그와 관련된 단어들이 은초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드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