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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받아.”
남자가 내용물이 든 검정 봉지를 내밀었다. 카페인을 과다 섭취 한 것처럼 심장이 뜀박질을 해 댔다. 수치심과 굴욕감이 굴뚝같이 올라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히 없다. 이 봉지를 비굴하게 받아 드는 것 말고는.
은초는 그의 살결이 닿기라도 할까, 봉지의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고지식하기는.”
지갑을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편의점을 나서는 그를 따랐다. 체면을 챙기느라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야 뚜렷하게 보였다.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과 조금은 짧다 싶게 잘린 머리칼, 그리고 가늘게 올라간 눈맵시와 과단성 있게 다물린 입술. 어른이 된 남자는 차가웠지만 정기가 잔뜩 무르익어 있었다.
주민들이 오가지 않는 골목 입구로 걸음을 옮긴 남자가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은초는 라이터를 딸깍이는 서빈에게서 시선을 틀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꽉 막혔던 것이 탁 터지는 것만 같은 웃음소리에 은초가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뒤섞인 해로운 숨결을 흘려보내던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은초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그의 담배로 눈동자를 굴렸다. 검게 타들어 가던 담뱃재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12년 만인가? 시간 참 빨라.”
“……그러게.”
“그런데도 여전하네, 너는.”
담담함을 넘어선 건조함이었다. 어제 만난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의 어투에서는, 조금의 감흥도 찾을 수 없었다. 은초는 그의 무관심한 태도를 시늉하며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
“내가 잘 지낸 것 같아?”
“응.”
순간적으로 쑥 밀려 나온 대답에 서빈이 조용히 웃었다.
“나는, 잘 지냈어. 누구 덕분에.”
누구 덕분에. 그 말소리에서 원대함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은초는 서빈을 응시했다. 그는 여름날의 습기처럼 끈적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웃음인가? 잘 모르겠다.
“잘 지냈냐는 식상한 질문 말고 다른 할 말은 없어?”
그가 푹 꺼트린 목소리로 물었다. 뜸을 들이던 은초의 입술이 재차 달싹거렸다.
“이 동네는 무슨 일로 온 거야?”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그의 얼굴에 독한 연기 같은 그늘이 서렸다 금방 사라졌다.
“무슨 일 같은 거 없어. 담배가 떨어져서 지나가는 길에 들른 거야.”
“……그렇구나. 이거, 대신 계산해 줘서 고마워.”
교과서적인 대답에 서빈이 불친절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트린 담배를 비벼 끄고 은초에게로 다가섰다. 시큰히 남아 있는 매캐한 연기에 엉겨 붙은 라임 향의 체향이 코끝을 찌르고 들어왔다.
“갚아.”
“……어?”
“못 들었어? 입 싹 닫을 생각 말고 갚으라고.”
“아,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지금 내가 깜빡 잊고 현금을 안 들고 왔어. 나한테 계좌 번호 알려 주면 그리로 돈 부쳐 줄게.”
일직선으로 가늘어진 서빈의 눈이 유순한 두 눈동자를 헤아렸다. 은초는 그의 동공에 비치는 제 모습이 미숙하고 어설퍼 고개를 조금 내렸다.
“내 계좌를? 널 어떻게 믿고?”
“그게 싫으면,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집이 근처라서 내가 금방…….”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란 건 너무하지 않나. 그것도 땡볕 아래에서.”
그가 지갑에서 은색 빛의 반투명한 명함을 꺼내다 말고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입력해. 난 이쪽이 더 편할 것 같거든.”
“…….”
“안 받아?”
그가 내민 휴대폰을 얼떨결에 받아 든 은초가 느릿한 손짓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은초는 정수리에 내려앉는 시린 시선을 무시하며 휴대폰을 다시 서빈에게 건넸다.
“오늘 일정 있어?”
“……아니.”
“잘됐네. 너도 질질 끌긴 싫잖아.”
크고 너른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뒤에서 기습하는 햇빛 한 줄기가 방심한 눈동자를 찔러 시야에 암점이 생겨났다.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이는데 돌연 그가 그늘을 만들며 귓가로 얼굴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기를 펴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스케줄 보고 연락할게.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숨으려 들지 마.”
“…….”
“빚지고 못 사는 네 성격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뜨거운 체온이 밴 입김이 귓속으로 진득이 스며들었다. 쿵쿵. 가파르게 맥박이 파동했다. 아니, 제 맥박이 아니라 한쪽 어깨를 쥔 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떨림이었다. 은초는 그 떨림을 의아하게 여기다 작게 답했다.
“……그래, 알겠어.”
나무에 매달려 맴맴 하고 우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욱 쟁쟁해진다.
보글보글, 알맞게 익은 라면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은초는 그릇에 옮겨 담은 라면과 폭삭 쉬어 버린 김치를 들고 탁상으로 향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젓가락을 들려는데, 뇌리에 빨간 경고등이 뻔쩍뻔쩍하고 울렸다. 가스 밸브. 가스 밸브 잠그는 것을 깜빡했다. 퍽 귀찮을 법도 하건만, 은초는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나 밸브의 손잡이를 가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그 습관은 강박과 같은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은초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TV도 켜지 않은 방 안, 후루룩 면발을 들이켜는 소리만이 공허한 정적을 가로질렀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그녀는 남자의 존재를 잠시 저 멀리 밀어 두고 빠르게 배를 채웠다.
은초가 국물 한 방울 없이 말끔히 비운 냄비와 반찬 통을 들고 일어서려던 그때, 탁상 모서리에 놓인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그녀의 눈길이 번쩍이는 화면에 가닿았다.
[오늘 저녁 8시까지 역삼역 근처 S&N 펍으로 와.]
모르는 번호였다. 은초가 번호를 외던 그 순간, 틈을 헤집고 나온 남자의 잔상이 둥실둥실 피어올랐다. 그 견고한 얼굴을 마주하던 은초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바보같이. 약속을 잡는다는 말에 왜 고개를 끄덕거려선.
[미안. 오늘은 안 될 것…….]
은초는 꾹꾹 작성하고 있던 거절 메시지를 몽땅 지워 버렸다. 깨진 양주값 따위가 그에게 타격을 줬을 리 없다는 것과 고작 돈을 되돌려받기 위해 제 번호를 가져간 게 아니란 것쯤은 즉각적으로 알았다. 기어코 다시 대면하여 돈을 갚으라 말하는 그의 얼굴은 썩 부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상맞은 신세를 진 건 자신이고,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중앙에 떠 있던 태양의 온도가 식어 갈 무렵, 깊게 고민하던 은초는 다시 메시지 창을 켰다. 다른 수단을 거부하는 그를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가 될지도 모른다. 은초는 미약하게 약동하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은초는 평소 사용하지 않던 화장대 앞에 앉았다. 툭툭 끊어지는 지푸라기, 혹은 밀짚색의 잔디와 같은 메마름이 제 얼굴에 그득했다.
은초는 투명 케이스에 담긴 각종 샘플들 중, 적당한 것을 찾아 골라냈다.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비비 크림의 샘플을 뜯어 손등에 꾹 눌러 짰다. 아이보리색 크림을 손가락에 묻혀 피부에 톡톡 문지르자 혈색이 조금은 생기 있게 변했다. 고작 하나 있는 다홍빛 립글로스도 옅게 칠했다. 꺼칠꺼칠하게 일어나 있던 입술의 표면이 숨을 죽였다.
은초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입술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 * *
네온사인이 빛을 발하는 출입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극지방의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분수였다. 잘박이는 물웅덩이에 동동 띄워진 화려한 꽃송이들과 분수 주위로 흩어지는 다채로운 빛들이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은초는 그 분수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다섯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다트 보드 앞에 서서 핀을 던지고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사람들은 없었다. 단꿈 같은 주말을 즐기기 위해 청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주말 저녁, 이리 넓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들뿐이라니. 약간은 괴이하고 이상했다.
“야, 권서빈. 네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님 오신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는 이와 티격태격하고 있던 남자가 핀을 한 뭉치 들고 있는 손으로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서빈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또 바람맞히고 튀는 건 아닌가 했는데, 왔네.”
느른한 두 눈동자가 제 얼굴을 검질기게 훑었다. 은초는 머뭇거리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앉아.”
한때 동급생이었던 이들과의 조우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은초는 방황하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나 기억하지?”
친근하게 말을 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이윤성이었던가. 풍채가 훤하고 준수하게 생긴 남자는, 고등학교 시절 서빈의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그 질긴 우정이 한편으론 부러웠고, 한편으론 씁쓸했다.
“……응. 기억해.”
“오, 그래? 감동인데?”
“내가 얘기한 건, 잘 가져왔어?”
의도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여 주도권을 가로챈 서빈이 예사롭게 물었다.
“뭘 잘 가져와?”
즉각 받아치는 윤성의 물음에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동 귀를 곤두세웠다.
“어쩌다 보니, 이은초가 나한테 갚아야 할 돈이 생겨 버려서.”
입을 뻐끔거리는 은초 대신, 서빈이 무심하게 응수했다. 은초는 자신의 손안에 감싸여 있는 만 원짜리 여섯 장을 꽉 말아 쥐었다.
“돈? 너한테 돈을 빌렸다고?”
“어.”
“얼마나?”
“그건 알 거 없고.”
서빈이 갈색 액체가 담뿍 담긴 온더록스 잔을 흔들거렸다. 일순간, 제 치부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된 추억을 기억할 겨를 없이 나타나, 그에게 몇만 원 남짓한 돈을 빌려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들이 짓게 될 표정을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둘이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데, 그사이에 채무 관계로 발전한 게 더 놀랍다, 나는.”
윤성이 은초를 한 번 쳐다보는가 싶더니, 대화의 논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 덕에 이은초가 권서빈에게 돈을 빌렸다는 주제에서 금세 흥미를 잃은 무리는 제각기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은초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두어 번 제게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늘 하던 대로 잠잠히 앉아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실체 없는 유령이었다.
술자리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은초가 서빈을 바깥으로 따로 불러내기 위해 몸을 살짝 트는데, 거나하게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던 이름 모를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실눈을 뜨고 은초를 자세히 관찰하던 남자는 이내 앞에 놓인 청포도 몇 알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댔다.
그러고는 대뜸 은초에게 삿대질을 해 대며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받아.”
남자가 내용물이 든 검정 봉지를 내밀었다. 카페인을 과다 섭취 한 것처럼 심장이 뜀박질을 해 댔다. 수치심과 굴욕감이 굴뚝같이 올라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히 없다. 이 봉지를 비굴하게 받아 드는 것 말고는.
은초는 그의 살결이 닿기라도 할까, 봉지의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고지식하기는.”
지갑을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편의점을 나서는 그를 따랐다. 체면을 챙기느라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야 뚜렷하게 보였다.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과 조금은 짧다 싶게 잘린 머리칼, 그리고 가늘게 올라간 눈맵시와 과단성 있게 다물린 입술. 어른이 된 남자는 차가웠지만 정기가 잔뜩 무르익어 있었다.
주민들이 오가지 않는 골목 입구로 걸음을 옮긴 남자가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은초는 라이터를 딸깍이는 서빈에게서 시선을 틀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꽉 막혔던 것이 탁 터지는 것만 같은 웃음소리에 은초가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뒤섞인 해로운 숨결을 흘려보내던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은초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그의 담배로 눈동자를 굴렸다. 검게 타들어 가던 담뱃재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12년 만인가? 시간 참 빨라.”
“……그러게.”
“그런데도 여전하네, 너는.”
담담함을 넘어선 건조함이었다. 어제 만난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의 어투에서는, 조금의 감흥도 찾을 수 없었다. 은초는 그의 무관심한 태도를 시늉하며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
“내가 잘 지낸 것 같아?”
“응.”
순간적으로 쑥 밀려 나온 대답에 서빈이 조용히 웃었다.
“나는, 잘 지냈어. 누구 덕분에.”
누구 덕분에. 그 말소리에서 원대함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은초는 서빈을 응시했다. 그는 여름날의 습기처럼 끈적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웃음인가? 잘 모르겠다.
“잘 지냈냐는 식상한 질문 말고 다른 할 말은 없어?”
그가 푹 꺼트린 목소리로 물었다. 뜸을 들이던 은초의 입술이 재차 달싹거렸다.
“이 동네는 무슨 일로 온 거야?”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그의 얼굴에 독한 연기 같은 그늘이 서렸다 금방 사라졌다.
“무슨 일 같은 거 없어. 담배가 떨어져서 지나가는 길에 들른 거야.”
“……그렇구나. 이거, 대신 계산해 줘서 고마워.”
교과서적인 대답에 서빈이 불친절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트린 담배를 비벼 끄고 은초에게로 다가섰다. 시큰히 남아 있는 매캐한 연기에 엉겨 붙은 라임 향의 체향이 코끝을 찌르고 들어왔다.
“갚아.”
“……어?”
“못 들었어? 입 싹 닫을 생각 말고 갚으라고.”
“아,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지금 내가 깜빡 잊고 현금을 안 들고 왔어. 나한테 계좌 번호 알려 주면 그리로 돈 부쳐 줄게.”
일직선으로 가늘어진 서빈의 눈이 유순한 두 눈동자를 헤아렸다. 은초는 그의 동공에 비치는 제 모습이 미숙하고 어설퍼 고개를 조금 내렸다.
“내 계좌를? 널 어떻게 믿고?”
“그게 싫으면,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집이 근처라서 내가 금방…….”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란 건 너무하지 않나. 그것도 땡볕 아래에서.”
그가 지갑에서 은색 빛의 반투명한 명함을 꺼내다 말고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입력해. 난 이쪽이 더 편할 것 같거든.”
“…….”
“안 받아?”
그가 내민 휴대폰을 얼떨결에 받아 든 은초가 느릿한 손짓으로 번호를 입력했다. 은초는 정수리에 내려앉는 시린 시선을 무시하며 휴대폰을 다시 서빈에게 건넸다.
“오늘 일정 있어?”
“……아니.”
“잘됐네. 너도 질질 끌긴 싫잖아.”
크고 너른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뒤에서 기습하는 햇빛 한 줄기가 방심한 눈동자를 찔러 시야에 암점이 생겨났다.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이는데 돌연 그가 그늘을 만들며 귓가로 얼굴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기를 펴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스케줄 보고 연락할게.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숨으려 들지 마.”
“…….”
“빚지고 못 사는 네 성격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뜨거운 체온이 밴 입김이 귓속으로 진득이 스며들었다. 쿵쿵. 가파르게 맥박이 파동했다. 아니, 제 맥박이 아니라 한쪽 어깨를 쥔 그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떨림이었다. 은초는 그 떨림을 의아하게 여기다 작게 답했다.
“……그래, 알겠어.”
나무에 매달려 맴맴 하고 우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욱 쟁쟁해진다.
보글보글, 알맞게 익은 라면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은초는 그릇에 옮겨 담은 라면과 폭삭 쉬어 버린 김치를 들고 탁상으로 향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젓가락을 들려는데, 뇌리에 빨간 경고등이 뻔쩍뻔쩍하고 울렸다. 가스 밸브. 가스 밸브 잠그는 것을 깜빡했다. 퍽 귀찮을 법도 하건만, 은초는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나 밸브의 손잡이를 가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그 습관은 강박과 같은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은초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TV도 켜지 않은 방 안, 후루룩 면발을 들이켜는 소리만이 공허한 정적을 가로질렀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그녀는 남자의 존재를 잠시 저 멀리 밀어 두고 빠르게 배를 채웠다.
은초가 국물 한 방울 없이 말끔히 비운 냄비와 반찬 통을 들고 일어서려던 그때, 탁상 모서리에 놓인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그녀의 눈길이 번쩍이는 화면에 가닿았다.
[오늘 저녁 8시까지 역삼역 근처 S&N 펍으로 와.]
모르는 번호였다. 은초가 번호를 외던 그 순간, 틈을 헤집고 나온 남자의 잔상이 둥실둥실 피어올랐다. 그 견고한 얼굴을 마주하던 은초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바보같이. 약속을 잡는다는 말에 왜 고개를 끄덕거려선.
[미안. 오늘은 안 될 것…….]
은초는 꾹꾹 작성하고 있던 거절 메시지를 몽땅 지워 버렸다. 깨진 양주값 따위가 그에게 타격을 줬을 리 없다는 것과 고작 돈을 되돌려받기 위해 제 번호를 가져간 게 아니란 것쯤은 즉각적으로 알았다. 기어코 다시 대면하여 돈을 갚으라 말하는 그의 얼굴은 썩 부자연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상맞은 신세를 진 건 자신이고,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중앙에 떠 있던 태양의 온도가 식어 갈 무렵, 깊게 고민하던 은초는 다시 메시지 창을 켰다. 다른 수단을 거부하는 그를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가 될지도 모른다. 은초는 미약하게 약동하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은초는 평소 사용하지 않던 화장대 앞에 앉았다. 툭툭 끊어지는 지푸라기, 혹은 밀짚색의 잔디와 같은 메마름이 제 얼굴에 그득했다.
은초는 투명 케이스에 담긴 각종 샘플들 중, 적당한 것을 찾아 골라냈다.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비비 크림의 샘플을 뜯어 손등에 꾹 눌러 짰다. 아이보리색 크림을 손가락에 묻혀 피부에 톡톡 문지르자 혈색이 조금은 생기 있게 변했다. 고작 하나 있는 다홍빛 립글로스도 옅게 칠했다. 꺼칠꺼칠하게 일어나 있던 입술의 표면이 숨을 죽였다.
은초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입술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 * *
네온사인이 빛을 발하는 출입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극지방의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분수였다. 잘박이는 물웅덩이에 동동 띄워진 화려한 꽃송이들과 분수 주위로 흩어지는 다채로운 빛들이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은초는 그 분수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다섯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다트 보드 앞에 서서 핀을 던지고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사람들은 없었다. 단꿈 같은 주말을 즐기기 위해 청춘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주말 저녁, 이리 넓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들뿐이라니. 약간은 괴이하고 이상했다.
“야, 권서빈. 네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님 오신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는 이와 티격태격하고 있던 남자가 핀을 한 뭉치 들고 있는 손으로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서빈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또 바람맞히고 튀는 건 아닌가 했는데, 왔네.”
느른한 두 눈동자가 제 얼굴을 검질기게 훑었다. 은초는 머뭇거리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앉아.”
한때 동급생이었던 이들과의 조우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은초는 방황하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나 기억하지?”
친근하게 말을 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이윤성이었던가. 풍채가 훤하고 준수하게 생긴 남자는, 고등학교 시절 서빈의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그 질긴 우정이 한편으론 부러웠고, 한편으론 씁쓸했다.
“……응. 기억해.”
“오, 그래? 감동인데?”
“내가 얘기한 건, 잘 가져왔어?”
의도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여 주도권을 가로챈 서빈이 예사롭게 물었다.
“뭘 잘 가져와?”
즉각 받아치는 윤성의 물음에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동 귀를 곤두세웠다.
“어쩌다 보니, 이은초가 나한테 갚아야 할 돈이 생겨 버려서.”
입을 뻐끔거리는 은초 대신, 서빈이 무심하게 응수했다. 은초는 자신의 손안에 감싸여 있는 만 원짜리 여섯 장을 꽉 말아 쥐었다.
“돈? 너한테 돈을 빌렸다고?”
“어.”
“얼마나?”
“그건 알 거 없고.”
서빈이 갈색 액체가 담뿍 담긴 온더록스 잔을 흔들거렸다. 일순간, 제 치부를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된 추억을 기억할 겨를 없이 나타나, 그에게 몇만 원 남짓한 돈을 빌려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들이 짓게 될 표정을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둘이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데, 그사이에 채무 관계로 발전한 게 더 놀랍다, 나는.”
윤성이 은초를 한 번 쳐다보는가 싶더니, 대화의 논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 덕에 이은초가 권서빈에게 돈을 빌렸다는 주제에서 금세 흥미를 잃은 무리는 제각기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은초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두어 번 제게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늘 하던 대로 잠잠히 앉아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실체 없는 유령이었다.
술자리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은초가 서빈을 바깥으로 따로 불러내기 위해 몸을 살짝 트는데, 거나하게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던 이름 모를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실눈을 뜨고 은초를 자세히 관찰하던 남자는 이내 앞에 놓인 청포도 몇 알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댔다.
그러고는 대뜸 은초에게 삿대질을 해 대며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