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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사







※ 해당 작품에 등장하는 종교, 단체, 인물, 지명들은 모두 실제와 무관한 허구이며,

신수, 영물들도 작가에 의해 재해석되었음을 밝힙니다.





1화

Prologue. One day





사령은 자신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은 백 세 시대라고 하지만, 사령의 기대수명은 턱없이 낮다.

‘서른까지라도 살았으면…….’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세상일에는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령은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보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녀는 잘 다듬어진 돌담길을 걷다가, 햇살에 눈이 부셔 손바닥을 눈썹 위로 올려 손 그늘을 만들었다. 양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다란 나무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해태 님들 오늘도 반가워요.”

수문장처럼 대문을 지키고 있는 동물 모양의 석상들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부리부리한 눈에 복스러운 코, 사자의 머리와 비슷하나 머리에 뿔이 있는 상상의 동물.

사령은 악귀를 쫓아내 준다는 석물을 쓰다듬었다. 우툴두툴한 촉감이 느껴질 때마다 이곳이 꿈속 세상이란 것을 망각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의 집인지 모르는 고즈넉한 한옥집 안으로.

여기는 6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꾸는 사령의 꿈속이다. 자주 방문하다 보니 내 집처럼 편하게 활보를 하고 있다.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커다란 연못에서 걸음을 멈춘다. 손가락으로 수면을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한다.

커다란 연못 주변으로 형형색색들이 꽃과 진귀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사시사철 봄인 이곳은 지상낙원일지도 모른다. 무릉도원이라든가, 에덴동산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사령은 추측해 보았다.

디딤돌을 밟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대청마루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지를 곱게 바른 전통 창호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볕이 몸에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넓은 대청마루 양옆에는 한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이 있다. 한쪽은 주방이고, 다른 쪽은 옷방이다. 옷방 안에는 화려한 문양의 자개장이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 장 안에는 고급스러운 남성 정장들이 줄 지어 걸려 있다.

“옷이 있으면, 옷 주인도 있어야지.”

현실에서 쌓인 욕구불만이 꿈속에서는 불쑥 나오기도 한다. 그녀가 하고 싶은 건 연애지 쓸모없는 남자 옷 구경이 아니었다. 사령은 구시렁거리며 옷방에서 나왔다.

보통의 한옥 구조와 다르게 이 집은 3층이었다. 밖에서 보면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사령은 꿈에서 깨면 외부 모양이 기억나지 않았다. 막연하게 유명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한옥 정도로 추측할 뿐이었다.

나무로 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서재 방이다. 삼나무 책장이 계단 옆으로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고, 책장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서적들이 가득했다.

책장 맞은편에는 고풍스러운 병풍이, 바닥에는 금장 보료가 깔려 있었다. 양쪽 벽에는 커다란 여닫이 창문이 있다.

2층까지는 그녀가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3층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3층 방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매번 현실로 돌아왔다. 강제 로그아웃 되는 게임 같다고 할까. 그녀는 문고리를 잡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뗐는데,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낯선 공간,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샤를르 페로의 엽기적인 동화 ‘푸른 수염’에서, 남편인 영주(領主)가 금기한 방에 몰래 들어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이야기 속 아내처럼 여자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방 안 공기는 마치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에게 내리는 위험한 경고 같았다. 그리고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다.

“허락 없이 제 공간에 들어온 아가씨.”

어두운 공간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사령은 방금 잔혹 동화를 떠올려서인지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검은 형체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가 있을 줄 알고 겁 없이 들어오십니까.”

사령에게 이곳은 6년 동안이나 꿈속 세상이었다. 대문이 닫혀 있었던 적도 없었고, 게다가 꿈속에 존재하는 집에 주인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사실 이 방도 꿈에서 깨기 위해 들어온 거였다.

“빈집인 줄 알았는데.”

사령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옷방에서 옷 주인을 떠올려서 허상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꿈에서 깨면 사라질 허상일 텐데. 가위눌림을 한두 번 경험한 것도 아니고. 남들은 못 믿겠지만 유체이탈과 악령 빙의까지 겪었던 몸이다. 그것에 비하면 이런 것쯤이야. 혹 꿈속에서 죽더라도 깨고 나면 그저 기분만 찜찜하고 더러울 뿐이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부터 좀 자각하셨으면 합니다.”

남자의 느릿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방 안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넓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다란 침대. 막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 있는 남자의 알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까지.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이브처럼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옷은 언제 벗었을까.

사령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알몸은 아니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꿈속이라는 사실이 바로 떠올랐다. 현실에서 반강제적으로 순결을 지키다 보니 욕구불만이 심해졌나 보다. 그것이 꿈속에 이렇게 반영되었겠지. 그렇지 않다면 잘생긴 남자가 홀랑 벗고 자신 앞에 서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발정이 나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지.”

남자의 눈은 어느새 정욕에 휩싸여 사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령은 남자의 몸을 훑어보았다. 얼굴도 몸매도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훌륭했다. 직업적으로 잘난 이들을 많이 봐 왔지만, 이 남자는 최고 중의 최고였다. 사령은 넋을 잃고 멍하게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참지 않으면 되잖아요.”

“책임지지 못할 겁니다.”

“제가 책임질게요.”

사령은 손을 뻗어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현실에서라면 절대 하지 못할 과감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지만 낯간지러운 문장이 삭막한 공간 안에서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자 사령은 왠지 용기가 났다.

“어떻게 책임지실 생각이신지.”

“아시면서.”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무덤덤한 표정을 보며 사령은 눈을 내리깔았다.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남자는 사령을 느른한 눈빛으로 내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입술 끝은 휘어졌으나 웃음기가 지워진 메마른 미소였다.

“각오해야 할 겁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지라.”

“…….”

사령은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을 휘감는 열기 때문에 머릿속이 이미 백지가 되었으니까. 솔직히 궁금했다. 섹스가 어떤 건지.

“그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미쳐 날뛸지도 모르는데.”

“…….”

그는 사령을 침대에 눕혔다. 사령은 등 뒤로 느껴지는 시트의 보드라운 촉감이 무척이나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 자체가 처음이라 사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는 사령의 질 입구를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손가락 한 개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도망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해요.”

남자의 말은 아랫도리 사정과 모순되었다. 보지 않아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게 느껴지는데. 사령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안 봐줄 겁니다.”

남자가 갑자기 사령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잘근잘근 먹이를 씹듯, 내 거라고 영역표시를 하듯 잇자국을 남겼다. 목덜미가 따끔거렸고 아래서부터 시작된 저릿함이 온몸을 휩쓸기 시작했다.

“아아…… 뭐, 뭐 하시는.”

“짐승을 건드렸으면, 이 정도는 각오하셨어야지.”

목 위로 습한 입김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스치는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향이 풍겨 오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목덜미부터 시작한 입맞춤이 입술로 옮겨 왔다. 차가운 얼음장 같은 남자의 입술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시원함에 놀랐다. 벌어진 틈 사이로 물컹한 혀가 파고들었다. 아래를 휘젓는 손길과 다를 바 없는 격한 움직임으로 그녀의 입천장을 긁고 혀를 감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