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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민주의 딱딱한 한마디에 여직원이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머니 안의 돈까지 다 내줄 것처럼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제는 민주를 곁눈질로 살피며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지금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주는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고는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강승목 실장님 만날 수 있나요?”
“형사님? 부드럽게!”
그새 딱딱해진 민주의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형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부자연스러운 미소에 안내 데스크 직원의 표정은 더 굳어 버렸다.
“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여직원이 두 사람에게 방문증을 내어준 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과도한 친절은 언제나 불편한 법이었다.
‘엘리베이터쯤은 나도 찾아갈 수가 있는데…….’
여직원은 민주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친절하게 15층 버튼을 눌러 준 후 다시 사라졌다.
띵!
엘리베이터는 금세 15층에 멈추어 섰다. 민주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뒤를 형식이 졸졸 따라가며 저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싱긋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양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얼굴을 잔뜩 굳힌 채 걸어가는 민주를 본 사람들이 로비에서와 마찬가지로 곁눈질을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주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미리 전화로 들어 알고 있던 김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실장실 문 앞으로 안내한 후 똑 똑 가볍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한편 승목은 이민주 형사가 저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빌러 온 거라 확신했다.
“공무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승목은 처음 만났던 순간과는 완전 다른 태도로 의자에 비딱하게 기댄 채 손님을 맞았다.
“형사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민주는 도도하게 앉아 저를 맞이하는 승목을 보자마자 욱, 하고 올라왔지만 저가 한 짓이 있으므로 턱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쉬었다.
‘지금은 일단 참고 사건부터 해결하자.’
게다가 따라 들어온 형식이 저를 감시하듯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제일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승목을 향해 다가갔다.
‘급하긴 했나 보네. 어울리지도 않게 미소씩이나 지으시고.’
승목은 저를 보며 비굴하게 미소 짓는 민주를 쳐다보며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자, 이제 싹싹 빌어 봐. 한 번만 봐 달라고.’
승목이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민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명예훼손으로 절 고소하셨더군요.”
“형사님?”
곁에 선 형식이 한 번 더 민주를 불렀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 민주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승목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 일을 하며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 왔다. 뒷골목 양아치부터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사채업자까지. 물론 눈앞에 앉은 소위 재벌 집안의 잘난 자식 놈들도 몇 명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뼛속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었다.
이런 놈들에게 주눅 들 민주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일단 저자세로 나가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일 년간 공들인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민주는 다시 한 번 이를 앙다물고 공손하게 허리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사과를 못 드리고 그냥 왔습니다.”
이 정도면 민주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소곳하게 모아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꾹 참았다.
“그러게 내가 한 번 이야기했을 때 들었으면 좋았을걸.”
“미안합니다.”
민주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거만하게 저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선 뼛속부터 스며 있는 거만함이 느껴졌다.
승목은 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봤다. 분명 사과를 하러 온 사람이고,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지만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미안한 표정이 아닌데?”
“네?”
“아니, 미안하면 그게 얼굴에 나타나야 하는데 이 형사님 표정은 지금 당장 한 대라도 칠 것 같은 눈빛이라서요. 사과, 진심 아니죠?”
민주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참자, 참자, 지금은 참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아니요. 진심입니다. 원래 제 눈이 이렇게 생겨서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눈 모양 때문이 아닌데. 내가 사람 한두 번 상대해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곤란하죠. 만약 그날 중요한 거래처 사람이라도 봤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승목은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제 딴에는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책상까지 탕 내리쳤지만 눈앞에 선 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승목은 괜히 무안해져서 목소리를 더 높였다.
“만약 그랬으면 명예훼손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거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민주 형사님?”
형식이 아는 민주는 지금쯤이면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봐야만 했다.
하지만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을 일자로 굳힌 민주는 평소와 달리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형식은 자신의 파트너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비굴해진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썹이 구겨졌다.
목까지 벌게져서 흥분한 승목과 달리 민주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날 분명 제가 선생님께 실수를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절 고소하신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것까지는 사과할 마음이 없습니다.”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민주는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승목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까득.
갑자기 들린 잡음에 승목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형사의 손에 쥐어진 뭔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승목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민주는 두 손을 모아 손에 쥔 것을 감췄다.
형식은 곁눈질로 늘어뜨린 주먹을 바르르 떨고 있는 민주를 쳐다보았다. 잘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형식은 민주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날 일 년 동안 쫓던 범인과 선생님의 인상착의가 너무 비슷해서 수사팀 내에서 혼선이 있었습니다.”
민주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형식이 얼른 나서며 나름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형식이 시선을 아래로 추욱 늘어뜨리며 지은 불쌍한 표정은 되레 위협적으로 다가와 승목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흔한 얼굴은 아닌데?”
그 와중에도 범인과 얼굴이 닮았다는 말에 승목은 자존심이 상해서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형식은 침을 튀겨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여기 이민주 형사님께서 정말 유능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단 한 가지, 흠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승목이 주저하듯 물었다. 형식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없으십니다.”
순간 저를 노려보는 민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형식은 모른 척 눈을 질끈 감았다.
“뭐,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승목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선 민주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덩치가 산만 한 형사 옆에 선 민주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지만 덩치와는 별개로 이상하게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민주는 저를 졸지에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형식이 괘씸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물러진 것 같아 다소 안심이 됐다.
그때였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승목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 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승목은 잔뜩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형사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실장님, 저 박변입니다.
“아, 변호사님!”
승목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빤히 바라봤다.
― 이번 고소 건, 회장님께서 아셨습니다.
“뭐라고요?”
승목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민주와 형식이 유심히 그를 쳐다봤다. 승목은 호기심이 가득한 두 쌍의 눈동자로부터 등을 돌리며 통화를 이어 갔다.
“아버지가 어떻게요?”
승목의 목소리는 잔뜩 낮아져 있었다.
― 일단 고소 건은 취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강 회장님께서 이런 일로 문제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이상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까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을 싹 지운 승목이 다시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변호사님. 안 그래도 형사님들께서 찾아오셔서 저도 마음을 바꾸고 있던 중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시죠.”
승목은 박 변호사가 전화를 끊은 후에도 얼마간 통화가 이어지는 척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후 승목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제가 방금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하게 기대며 잔뜩 거들먹거리는 승목의 모습에 민주와 형식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위협적으로 보여 승목은 흠칫 놀라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 깜짝이야. 웃는 게 더 무섭네.’
여형사도 여형사였지만 함께 온 덩치 큰 형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되풀이되는 승목의 말에 민주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럼, 저는 강. 승. 목. 실장님께서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시리라 굳. 게. 믿고 가겠습니다.”
마치 ‘강승목’이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말하던 민주의 모습에 승목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잔뜩 꼬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묘하게 주눅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함께 온 덩치 큰 형사가 헤벌쭉 인사했다. 승목은 얼른 두 사람을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음부터 조심하시고.”
승목이 끝까지 덧붙인 말에 두 사람이 싱긋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뭐야, 왜 이렇게 추워.”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싸늘해진 느낌에 승목은 제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댔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발견한 승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유심히 보던 승목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이게 뭐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민주 형사가 쥐고 있던 호두 껍질이었다.
으스러진 채 바닥에 떨어진 호두 껍질을 보는 승목의 눈에 경악스러움이 가득했다.
승목은 두 사람이 나가고 없는 문을 보며 혹시 다시 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무서운 여자야…….’
꿈에라도 나올까 소름이 돋았다.
즐거운 주말을 반납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승목의 얼굴에 분주함과 귀찮음이 동시에 어렸다. 웬만하면 그냥 돈만 보내고 말 텐데 십년지기 친구의 딸 돌잔치라 말로만 때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진수는 처음 웹디자인 사무실을 열었을 때 뜻을 함께해 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했다.
“진수야, 내가 너 만나려고 우리 사랑이와의 약속도 깨고 간다.”
운전대를 잡은 승목이 혼잣말을 하자 마치 듣고 있었다는 듯 사랑에게서 카톡 폭탄이 날아왔다. 마침 정지 신호를 받아 차를 멈춘 승목이 귀찮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카톡창은 메시지 하나를 채 읽기도 전에 다른 메시지들로 차례차례 채워졌다.
[자기, 진짜 너무해! 나 자기 만나려고 아침부터 숍에도 갔다 왔는데!]
[나랑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기로 했잖아!]
[우리 오늘 만난 지 일주일 되는 날인데! 잊었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카톡 세례에 운전대를 잡은 승목의 미간에 잔뜩 짜증이 어렸다.
“이래서야 원. 사랑아, 나는 널 한 달은 만나고 싶었는데.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
신호가 바뀌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승목은 사랑이에게 줄 이별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민주의 딱딱한 한마디에 여직원이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머니 안의 돈까지 다 내줄 것처럼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이제는 민주를 곁눈질로 살피며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지금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주는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고는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강승목 실장님 만날 수 있나요?”
“형사님? 부드럽게!”
그새 딱딱해진 민주의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형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부자연스러운 미소에 안내 데스크 직원의 표정은 더 굳어 버렸다.
“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여직원이 두 사람에게 방문증을 내어준 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과도한 친절은 언제나 불편한 법이었다.
‘엘리베이터쯤은 나도 찾아갈 수가 있는데…….’
여직원은 민주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친절하게 15층 버튼을 눌러 준 후 다시 사라졌다.
띵!
엘리베이터는 금세 15층에 멈추어 섰다. 민주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뒤를 형식이 졸졸 따라가며 저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싱긋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양손은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얼굴을 잔뜩 굳힌 채 걸어가는 민주를 본 사람들이 로비에서와 마찬가지로 곁눈질을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민주가 올라온다는 사실을 미리 전화로 들어 알고 있던 김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실장실 문 앞으로 안내한 후 똑 똑 가볍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한편 승목은 이민주 형사가 저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빌러 온 거라 확신했다.
“공무원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승목은 처음 만났던 순간과는 완전 다른 태도로 의자에 비딱하게 기댄 채 손님을 맞았다.
“형사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민주는 도도하게 앉아 저를 맞이하는 승목을 보자마자 욱, 하고 올라왔지만 저가 한 짓이 있으므로 턱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쉬었다.
‘지금은 일단 참고 사건부터 해결하자.’
게다가 따라 들어온 형식이 저를 감시하듯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민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제일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승목을 향해 다가갔다.
‘급하긴 했나 보네. 어울리지도 않게 미소씩이나 지으시고.’
승목은 저를 보며 비굴하게 미소 짓는 민주를 쳐다보며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자, 이제 싹싹 빌어 봐. 한 번만 봐 달라고.’
승목이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민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명예훼손으로 절 고소하셨더군요.”
“형사님?”
곁에 선 형식이 한 번 더 민주를 불렀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 민주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승목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이 일을 하며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 왔다. 뒷골목 양아치부터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사채업자까지. 물론 눈앞에 앉은 소위 재벌 집안의 잘난 자식 놈들도 몇 명 만나 본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뼛속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었다.
이런 놈들에게 주눅 들 민주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일단 저자세로 나가야 했다.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일 년간 공들인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민주는 다시 한 번 이를 앙다물고 공손하게 허리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사과를 못 드리고 그냥 왔습니다.”
이 정도면 민주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소곳하게 모아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꾹 참았다.
“그러게 내가 한 번 이야기했을 때 들었으면 좋았을걸.”
“미안합니다.”
민주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거만하게 저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선 뼛속부터 스며 있는 거만함이 느껴졌다.
승목은 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봤다. 분명 사과를 하러 온 사람이고,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지만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미안한 표정이 아닌데?”
“네?”
“아니, 미안하면 그게 얼굴에 나타나야 하는데 이 형사님 표정은 지금 당장 한 대라도 칠 것 같은 눈빛이라서요. 사과, 진심 아니죠?”
민주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참자, 참자, 지금은 참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아니요. 진심입니다. 원래 제 눈이 이렇게 생겨서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눈 모양 때문이 아닌데. 내가 사람 한두 번 상대해 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곤란하죠. 만약 그날 중요한 거래처 사람이라도 봤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승목은 생각만 해도 괘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제 딴에는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책상까지 탕 내리쳤지만 눈앞에 선 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승목은 괜히 무안해져서 목소리를 더 높였다.
“만약 그랬으면 명예훼손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거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민주 형사님?”
형식이 아는 민주는 지금쯤이면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로 앞에 선 남자를 노려봐야만 했다.
하지만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을 일자로 굳힌 민주는 평소와 달리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형식은 자신의 파트너이자 존경하는 선배가 비굴해진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썹이 구겨졌다.
목까지 벌게져서 흥분한 승목과 달리 민주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날 분명 제가 선생님께 실수를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절 고소하신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것까지는 사과할 마음이 없습니다.”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민주는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승목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까득.
갑자기 들린 잡음에 승목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형사의 손에 쥐어진 뭔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승목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민주는 두 손을 모아 손에 쥔 것을 감췄다.
형식은 곁눈질로 늘어뜨린 주먹을 바르르 떨고 있는 민주를 쳐다보았다. 잘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형식은 민주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날 일 년 동안 쫓던 범인과 선생님의 인상착의가 너무 비슷해서 수사팀 내에서 혼선이 있었습니다.”
민주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형식이 얼른 나서며 나름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형식이 시선을 아래로 추욱 늘어뜨리며 지은 불쌍한 표정은 되레 위협적으로 다가와 승목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흔한 얼굴은 아닌데?”
그 와중에도 범인과 얼굴이 닮았다는 말에 승목은 자존심이 상해서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형식은 침을 튀겨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여기 이민주 형사님께서 정말 유능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단 한 가지, 흠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승목이 주저하듯 물었다. 형식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정말 없으십니다.”
순간 저를 노려보는 민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형식은 모른 척 눈을 질끈 감았다.
“뭐,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승목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선 민주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덩치가 산만 한 형사 옆에 선 민주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지만 덩치와는 별개로 이상하게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민주는 저를 졸지에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형식이 괘씸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물러진 것 같아 다소 안심이 됐다.
그때였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승목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 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승목은 잔뜩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형사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실장님, 저 박변입니다.
“아, 변호사님!”
승목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빤히 바라봤다.
― 이번 고소 건, 회장님께서 아셨습니다.
“뭐라고요?”
승목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민주와 형식이 유심히 그를 쳐다봤다. 승목은 호기심이 가득한 두 쌍의 눈동자로부터 등을 돌리며 통화를 이어 갔다.
“아버지가 어떻게요?”
승목의 목소리는 잔뜩 낮아져 있었다.
― 일단 고소 건은 취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강 회장님께서 이런 일로 문제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이상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까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표정을 싹 지운 승목이 다시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변호사님. 안 그래도 형사님들께서 찾아오셔서 저도 마음을 바꾸고 있던 중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시죠.”
승목은 박 변호사가 전화를 끊은 후에도 얼마간 통화가 이어지는 척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후 승목은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제가 방금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느긋하게 기대며 잔뜩 거들먹거리는 승목의 모습에 민주와 형식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위협적으로 보여 승목은 흠칫 놀라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 깜짝이야. 웃는 게 더 무섭네.’
여형사도 여형사였지만 함께 온 덩치 큰 형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되풀이되는 승목의 말에 민주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럼, 저는 강. 승. 목. 실장님께서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시리라 굳. 게. 믿고 가겠습니다.”
마치 ‘강승목’이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말하던 민주의 모습에 승목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잔뜩 꼬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묘하게 주눅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함께 온 덩치 큰 형사가 헤벌쭉 인사했다. 승목은 얼른 두 사람을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음부터 조심하시고.”
승목이 끝까지 덧붙인 말에 두 사람이 싱긋 웃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뭐야, 왜 이렇게 추워.”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싸늘해진 느낌에 승목은 제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댔다.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발견한 승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유심히 보던 승목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이게 뭐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민주 형사가 쥐고 있던 호두 껍질이었다.
으스러진 채 바닥에 떨어진 호두 껍질을 보는 승목의 눈에 경악스러움이 가득했다.
승목은 두 사람이 나가고 없는 문을 보며 혹시 다시 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무서운 여자야…….’
꿈에라도 나올까 소름이 돋았다.
즐거운 주말을 반납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승목의 얼굴에 분주함과 귀찮음이 동시에 어렸다. 웬만하면 그냥 돈만 보내고 말 텐데 십년지기 친구의 딸 돌잔치라 말로만 때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진수는 처음 웹디자인 사무실을 열었을 때 뜻을 함께해 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했다.
“진수야, 내가 너 만나려고 우리 사랑이와의 약속도 깨고 간다.”
운전대를 잡은 승목이 혼잣말을 하자 마치 듣고 있었다는 듯 사랑에게서 카톡 폭탄이 날아왔다. 마침 정지 신호를 받아 차를 멈춘 승목이 귀찮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카톡창은 메시지 하나를 채 읽기도 전에 다른 메시지들로 차례차례 채워졌다.
[자기, 진짜 너무해! 나 자기 만나려고 아침부터 숍에도 갔다 왔는데!]
[나랑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기로 했잖아!]
[우리 오늘 만난 지 일주일 되는 날인데! 잊었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카톡 세례에 운전대를 잡은 승목의 미간에 잔뜩 짜증이 어렸다.
“이래서야 원. 사랑아, 나는 널 한 달은 만나고 싶었는데.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
신호가 바뀌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승목은 사랑이에게 줄 이별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