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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야! 더럽게!”

혹시라도 비위가 상할까 한 손으로 미소의 눈을 가린 강우가 승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 순간, 강우보다 훨씬 더 무섭고 강력한 복병을 눈앞에 둔 승목은 강우의 호통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승목은 가영이를 안은 여자의 웃는 모습을 보고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며 입에 남아 있던 잡채를 씹기 시작했다.

‘저렇게도 웃네.’

승목은 가영이를 품에 안고 태어나 욕 한번 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가식적인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고 있는 민주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너 아까부터 뭘 그렇게 자꾸 흘끔거려?”

승목의 표정을 이상하다 생각하며 살피던 강우가 승목의 시선이 멈추어 있는 곳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 저 사람은?”

“왜? 너 아는 사람이야? 저 여자 알아?”

강우가 민주를 알은척하자 승목은 간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소야, 저기 봐. 이민주 형사님.”

“어? 정말?”

강우뿐만 아니라 미소도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뭐야. 둘 다 알아? 야야, 여기서 부르지 마라!”

하지만 승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우가 민주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알은척을 했다. 고개를 돌리며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던 민주는 멀리 앉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미소를 보며 알은척을 하다 승목과 눈이 마주쳤다.

“저 여자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강우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와 앉자마자 승목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아, 예전에 우리 엄마가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잘 해결해 주셔서 찾아가서 인사한 적이 있어. 그런데 진수 사촌이라니. 아까 그 수갑도 저 형사님 건가 봐. 세상 참 좁아. 그치?”

“그러게……. 왜 좁고 난리야.”

“왜. 너도 아는 사람이야?”

“뭘 알아. 몰라. 절대 모르는 사람이야.”

승목이 질색을 하며 대답하자 강우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까지 높이면서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을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승목이 형사랑 연관된 일이면 나쁜 쪽일 게 뻔했다. 강우는 걱정 반, 의심 반이 섞인 눈으로 승목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그래. 너하고 접점이 없는 분이긴 해. 너랑은 노는 물이 다르잖아?”

뭔가를 떠보려는 요량으로 물었지만 승목은 다른 부분에서 발끈 반응했다.

“분은 무슨.”

승목이 눈동자를 부라리며 눈썹까지 치켜올리자 강우는 분명 뭔가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물었다가 정말 엄청난 말을 들을 것 같아 섣불리 묻기도 겁났다.

승목은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서 먹는 둥 마는 둥 앉아 있다가 자리를 돌며 인사하는 진수가 가까이 다가오자 벌떡 일어섰다. 진수는 서둘러 가려는 승목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 벌써 가게?”

“어.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여기에 쏟아부을 수는 없잖아.”

진수가 섭섭한 듯 묻자 승목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말투는 경쾌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등지고 앉은 민주에게로 향했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마워. 토요일이라서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가 그 정도로 의리가 없는 놈은 아니잖아.”

“그래. 고맙다. 조심해서 가고.”

진수와 대강 인사를 마친 후 승목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저 여자랑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9, 8, 7…….

빨간색 숫자가 차례로 바뀌며 깜빡이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 다가와 서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목의 시선에 들어온 건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여자 구두였다.

흔한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무난한 디자인의 검은색 구두였다. 굽도 거의 없어서 신고 달리기를 해도 될 것처럼 보였다. 승목은 버릇처럼 옆에 선 여자를 곁눈질로 쓰윽 훑었다. 무난한 구두에, 유행이 한참 지난 더블버튼 정장 재킷. 게다가 어울리지 않는 줄무늬 블라우스는 뭐람.

패션 센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은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마지막으로 얼굴을 확인하려던 승목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여자와 눈이 딱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뜨억!”

공짜로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촌스러운 옷의 주인공은 민주였다.

“또 뵙네요. 강승목 실장님.”

“그, 그러게요. 형사님. 세상 참 좁네요. 이런 데서 마주치고.”

왜 말을 더듬는 거야. 승목은 괜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우물쭈물 시선을 피했다.

불현듯 바닥에 떨어져 있던 호두 부스러기가 떠오른 승목은 민주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진짜 사람 주눅 들게 만드는 데는 뭔가 있는 여자였다.

댕!

민주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멈춰 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장소와 사람이 겹치니 승목은 새삼스레 그 날의 일이 치욕스럽게 다가왔다.

승목은 옆에 선 민주를 흘깃 보다 분위기가 그 날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촌스럽긴 해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연하지만 화장도 좀 한 것 같았다.

‘쳇! 그래도 꼴에 얼굴에 뭘 바르기는 했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승목은 그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찌나 힘이 세던지. 뒷목을 누를 때는 정말 목이 꺾이는 줄 알았다. 승목은 애써 기억을 지워 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민주와 승목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도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승목은 가면서 혹시라도 민주가 저에게 말을 걸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민주는 앞만 보며 성큼성큼 걸어 금세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녀의 다 쓰러져 가는 차는 자신의 애마와 나란히 서 있었다. 혹시라도 민주가 저 고철 덩어리 같은 차 문을 열다 애마의 몸에 흠집이라도 내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민주는 뒤에서 따라오는 승목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고물차가 빠져나가고 난 후 차에 올라탈 생각이었던 승목은 민주가 탄 자동차가 주차장이 무너질 듯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트르르르륵! 트르르르륵!

하지만 요란한 소리만 낼 뿐 민주의 자동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 듯했다.

“에이! 진짜! 너 이럴 거야?”

승목은 처음에 저를 보며 하는 소린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다행히 고함 소리는 고물차를 향한 것이었다.

“놀래라…….”

승목은 괜히 눈치를 살피며 차에 타 조용히 시동 걸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터질 듯한 엔진 소리에 승목은 또다시 몸이 움츠러들었다. 엔진 소리의 투박함과 요란함이 꼭 저 여자 같아 자동차도 주인을 닮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트르르륵! 트르르륵!

“에이! 진짜……!”

아까 가영이 앞에서 지었던 미소는 가식적인 거짓 미소가 분명했다. 민주는 핸들을 주먹으로 퉁 퉁 치며 욕을 해 대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승목은 더 이상 민주의 근처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여자야.”

부릉∼∼∼

민주의 차와는 달리 승목의 애마는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차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갑자기 차창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주였다. 승목은 결코 유리창을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민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스르륵 유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왜요?”

승목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죄송하지만 큰길까지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민주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서로 차 태워 주고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급해서 그래요. 큰길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게다가 이 여자랑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싫습니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민주는 몇 번 더 입술을 달싹인 후 하는 수 없다는 듯 주차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승목은 민주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려보고 있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차를 출발시켰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통화를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민주가 보였다.

다리까지 동동거리고 있는 걸 보니 정말 급한 모양이었다. 모른 척 스르륵 옆으로 지나가던 승목은 짜증스레 머리를 긁으며 차를 세웠다. 하여간 너무 착해도 탈이라니까.

“큰길까지만 가면 됩니까?”

그냥 갈 줄 알았던 승목이 차를 세우며 물어보자 민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타란 말을 하기도 전에 조수석으로 올라탄 민주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택시 승강장까지만 부탁합니다.”

승목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차를 몰아 근처의 택시 승강장까지 갔다. 하지만 승강장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대기하고 있는 택시 또한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옆에서 들리는 진동 소리에 승목은 흘깃 곁눈질을 했다. 그사이 민주는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그쪽으로 빨리 갈게. 여기서 가까우니까 서두르면 30분 내로 갈 수 있을 거야.”

가깝다는 말에 승목의 마음이 약해졌다.

“에휴, 내가 이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승목은 혼잣말을 한 후 차창을 내리고 차에서 내린 민주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타요. 태워 줄게요.”

하지만 그런 오지랖은 부리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승목은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민주가 얼른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 *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서울이라고 보기 힘든 낡고 오래된 동네에 있는 클럽 앞이었다.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승목은 신기하다는 듯 밖을 두리번거렸다. 민주는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총과 수갑을 확인한 후 차에서 내리며 승목을 보고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제 가세요.”

“초, 총은 뭡니까?”

하지만 급한 일이 있다던 민주는 승목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그를 향해 가라는 신호를 보낸 후 앞에 있는 낡은 건물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뭐야……. 찜찜하게.”

승목은 민주가 들어간 건물 입구를 보며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곳인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데려다준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승목은 잠시간 민주가 간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곧바로 출발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아는 사람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에이, 몰라. 형사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승목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부르르 떨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때였다. 차라고는 그림자도 없던 골목에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급하게 멈추어 섰다.

끼이이익!

잠시 후 차와 꼭 닮은 검은색 양복을 쫘악 빼입은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 손에 쇠 파이프를 든 남자들은 좀 전에 민주가 들어간 건물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뭐, 뭐야!”

승목은 운전석 아래로 얼른 몸을 숨겼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골로 가는 수가 있겠는데?”

처음 보는 광경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 혼자 건물 안으로 들어간 민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당해 낼 수는 없을 텐데…….’

승목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른 다음 위치를 설명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절대 내리지 말라던 민주의 말을 애써 지워 내며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 밖으로 발만 내밀었을 뿐인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승목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천천히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주변에 행인도 없는데 입구의 네온사인만 요란하게 번쩍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처럼 정신없는 불빛을 보며 걸어가던 승목은 입구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침을 꿀꺽 삼켰다.

“난 강승목이야. 이런 걸로 쫄면 안 되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중얼거린 후 승목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피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입구는 곧장 지하로 이어졌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입구와는 달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컴컴하고 습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승목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장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저가 손님이라면 절대 이런 곳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발바닥에 본드가 붙었는지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겨우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선 승목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섰다.

우당탕탕!

퍼억!

악!

쿵!

뭔가 부러지고 넘어지고 부딪히는 소리였다. 승목은 심장이 벌렁벌렁거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자 혼자 저곳에 놔둘 수도 없었다.

“진짜 미치겠네!”

승목이 오만상을 쓰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거기 안 서!”

굵고 거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귓가를 때릴 듯 울렸다.

“뭐, 뭐야!”

승목은 저도 모르게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