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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be Station
2.
어머니가 절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진즉에 알았다.
아버지와 싸우고 제게 소리를 지를 때마다 듣던 말이니 모를 수가 없다. 아버지를 빼닮은 까만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원망도, 저 때문에 몇 년을 참았다는 말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매일같이 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은 들어 주셨으면 했는데.
머리칼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한기가 섞인 비바람이 매섭게 역 앞으로 휘몰아쳤다. 갈 곳을 잃은 발이 움직이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한다. 어머니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다시 돌아가서 버스를 타고, 한 번 갈아탄 뒤에…….
“저기요.”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알렉스는 몸을 휙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눈이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회색빛 정경 속에서 소년의 눈만이 색을 띠고 빛났다.
알렉스는 그 얼굴을 알았다. 입학하던 때부터 먼발치서 보아 오던 네이슨 화이트였다. 베타인 덕에 말을 섞어 본 기억조차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사회에 나가면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모든 게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은 저와 다른 것들을 경계했다. 발정기가 있는 알파와 오메가를 보고 짐승이라고 비하하는 베타 무리도 있을 정도였다.
“길…….”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은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막고 있는데.”
말뜻은 몇 초 뒤에 머리로 들어왔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알렉스는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입술이 떨리는 바람에 대답을 하는 게 어려웠다.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다듬고 난 뒤에야 입이 열렸다.
“미안.”
사과는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안개비처럼 부슬부슬 내리곤 하는 평소의 비와 달리 오늘따라 유독 빗줄기가 거셌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예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조금만 더 있다가 움직이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찰나였다.
비가 멈췄다. 머리칼 사이를 아프게 파고들던 물방울이 사라졌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향이 풍겼다. 바뀐 시선의 끝에서 알렉스는 방금 전 마주했던 초록 눈을 다시 보았다. 거스러미 하나 없는 분홍 입술과 흰 턱도 같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렉스 연, 맞지?”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렉스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움직이는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얇은 우산 천 위로 물이 흐르다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네이슨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알렉스를 보며 그저 서 있었다. 우산을 씌워 준 채로.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울던 이유마저 잊은 채 알렉스는 희게 질린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서러움이 밀려왔다가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뜨거운 흐느낌이 터지려는 것을 삼키며 알렉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비 맞지 마.”
한참의 침묵 끝에 네이슨은 그렇게 말했다.
“이거 너 줄게.”
팔이 뻗어 왔다. 우산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마디가 긴 손가락은 네이슨의 얼굴처럼 희고 고왔다. 끝을 마무리하는 손톱마저도 완벽하게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투명한 분홍빛이 도는 손톱 안의 반달도, 단정히 깎인 손끝도, 모두 네이슨 같았다.
“어서.”
받지 않고 멍하니 손을 보자 네이슨은 짤막히 말했다. 표정이나 목소리가 변화 없이 덤덤했다.
“그럼 네가 젖잖아.”
“응.”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이 네이슨은 대답했다. 이번에는 행동으로 재촉이 떨어졌다. 팔이 조금 더 뻗어 왔다. 그대로 뒀다간 네이슨이 아예 우산 밖으로 나갈 판이라 알렉스는 황급히 손잡이를 쥐었다. 손이 겹쳤다. 손끝에 닿은 네이슨의 살갗이 차가웠다.
“그래도 너보단 덜 젖을 것 같은데.”
그 말과 함께 네이슨은 손을 놓았다. 알렉스가 말릴 틈도 없었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자 네이슨은 드디어 표정을 바꿨다. 연한 웃음이 눈가에 맺혔다. 그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가슴 안쪽이 꽉 막히더니 아랫배가 잘게 떨렸다. 단번에 몸이 더워졌다. 눈앞의 광경이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네이슨 화이트가 웃는 걸 본 사람이 있던가? 없을 것이다. 눈에 띄는 외모와 달리 재수 없을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태도가 유명세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제 안 우네.”
뒤이어진 말에 알렉스는 흠칫 뺨을 닦았다. 예쁘장한 눈에 맴도는 웃음기가 좀 더 짙어졌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웃음이라는 걸 알지 못할 정도로 희미했지만, 어쨌든 미소였다.
“잠깐, 네이슨, 이건…….”
“나중에 봐.”
용건을 끝냈다는 듯 네이슨은 그대로 우산 밖으로 나갔다. 잡기 위해 뻗었던 손이 허공을 내저었다. 네이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걸어오던 그대로 서두르지 않고 역으로 들어갔다.
곧게 뻗은 등, 부드러운 흰 목덜미,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손끝을 보며 알렉스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응시했다. 우산을 타고 흐르던 비가 멈춰 때늦은 햇빛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쭉.
2.
어머니가 절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진즉에 알았다.
아버지와 싸우고 제게 소리를 지를 때마다 듣던 말이니 모를 수가 없다. 아버지를 빼닮은 까만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원망도, 저 때문에 몇 년을 참았다는 말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매일같이 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은 들어 주셨으면 했는데.
머리칼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한기가 섞인 비바람이 매섭게 역 앞으로 휘몰아쳤다. 갈 곳을 잃은 발이 움직이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한다. 어머니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다시 돌아가서 버스를 타고, 한 번 갈아탄 뒤에…….
“저기요.”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알렉스는 몸을 휙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눈이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회색빛 정경 속에서 소년의 눈만이 색을 띠고 빛났다.
알렉스는 그 얼굴을 알았다. 입학하던 때부터 먼발치서 보아 오던 네이슨 화이트였다. 베타인 덕에 말을 섞어 본 기억조차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사회에 나가면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모든 게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은 저와 다른 것들을 경계했다. 발정기가 있는 알파와 오메가를 보고 짐승이라고 비하하는 베타 무리도 있을 정도였다.
“길…….”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은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막고 있는데.”
말뜻은 몇 초 뒤에 머리로 들어왔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알렉스는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입술이 떨리는 바람에 대답을 하는 게 어려웠다. 갈라진 목소리를 간신히 다듬고 난 뒤에야 입이 열렸다.
“미안.”
사과는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안개비처럼 부슬부슬 내리곤 하는 평소의 비와 달리 오늘따라 유독 빗줄기가 거셌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예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조금만 더 있다가 움직이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찰나였다.
비가 멈췄다. 머리칼 사이를 아프게 파고들던 물방울이 사라졌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한 향이 풍겼다. 바뀐 시선의 끝에서 알렉스는 방금 전 마주했던 초록 눈을 다시 보았다. 거스러미 하나 없는 분홍 입술과 흰 턱도 같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렉스 연, 맞지?”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렉스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움직이는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얇은 우산 천 위로 물이 흐르다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네이슨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알렉스를 보며 그저 서 있었다. 우산을 씌워 준 채로.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울던 이유마저 잊은 채 알렉스는 희게 질린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서러움이 밀려왔다가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뜨거운 흐느낌이 터지려는 것을 삼키며 알렉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비 맞지 마.”
한참의 침묵 끝에 네이슨은 그렇게 말했다.
“이거 너 줄게.”
팔이 뻗어 왔다. 우산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마디가 긴 손가락은 네이슨의 얼굴처럼 희고 고왔다. 끝을 마무리하는 손톱마저도 완벽하게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투명한 분홍빛이 도는 손톱 안의 반달도, 단정히 깎인 손끝도, 모두 네이슨 같았다.
“어서.”
받지 않고 멍하니 손을 보자 네이슨은 짤막히 말했다. 표정이나 목소리가 변화 없이 덤덤했다.
“그럼 네가 젖잖아.”
“응.”
당연한 걸 말한다는 듯이 네이슨은 대답했다. 이번에는 행동으로 재촉이 떨어졌다. 팔이 조금 더 뻗어 왔다. 그대로 뒀다간 네이슨이 아예 우산 밖으로 나갈 판이라 알렉스는 황급히 손잡이를 쥐었다. 손이 겹쳤다. 손끝에 닿은 네이슨의 살갗이 차가웠다.
“그래도 너보단 덜 젖을 것 같은데.”
그 말과 함께 네이슨은 손을 놓았다. 알렉스가 말릴 틈도 없었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자 네이슨은 드디어 표정을 바꿨다. 연한 웃음이 눈가에 맺혔다. 그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가슴 안쪽이 꽉 막히더니 아랫배가 잘게 떨렸다. 단번에 몸이 더워졌다. 눈앞의 광경이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네이슨 화이트가 웃는 걸 본 사람이 있던가? 없을 것이다. 눈에 띄는 외모와 달리 재수 없을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태도가 유명세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제 안 우네.”
뒤이어진 말에 알렉스는 흠칫 뺨을 닦았다. 예쁘장한 눈에 맴도는 웃음기가 좀 더 짙어졌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웃음이라는 걸 알지 못할 정도로 희미했지만, 어쨌든 미소였다.
“잠깐, 네이슨, 이건…….”
“나중에 봐.”
용건을 끝냈다는 듯 네이슨은 그대로 우산 밖으로 나갔다. 잡기 위해 뻗었던 손이 허공을 내저었다. 네이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걸어오던 그대로 서두르지 않고 역으로 들어갔다.
곧게 뻗은 등, 부드러운 흰 목덜미,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손끝을 보며 알렉스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응시했다. 우산을 타고 흐르던 비가 멈춰 때늦은 햇빛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