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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황제는 개에게 명령했다.
‘사냥을 갔다 오려무나. 털이 아주 예쁜 여우를 잡아 왔으면 좋겠어.’
개는 지금껏 사람만을 사냥해 왔지만, 여우 사냥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령 사냥법이 다르더라도 상관없었다. 개는 황제의 명령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개는 언제나 임무를 완수하고 황제의 곁으로 돌아왔다.
개는 숲으로 향했다. 황제가 명령한 여우를 잡아 오기 위해. 그러나 밤이 내려앉은 숲에는 개와 여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왼쪽…….’
개는 자신을 쫓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빠르게 숲을 헤치고 나갔다.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넘을 때마다 나뭇잎이 파스스 흐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개를 쫓아오는 암살자 또한 다른 나뭇가지를 밟으며 뛰어넘어 오고 있었다.
파삭, 파사삭.
이미 존재를 들킨 이상 기척을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개는 잠행복 속에 숨겨 두었던 날카로운 암수를 만지작거렸다.
죽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황제는 개에게 여우를 잡아 올 것만 명령했다. 전처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거나, 수단을 가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윽.”
그리고 개가 고민하는 사이 암살자의 암수가 개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개는 순간 균형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졌으나, 바닥을 나뒹구는 대신 곧장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황제의 명령 없이는 행동할 수 없었다. 개는 태어났을 때부터 황제의 앞길을 막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암살자로 길러졌다. 개의 모든 판단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이뤄져 왔으며, 그렇기에 선악의 구분이나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 없이는 아무도 죽일 수 없다. 개는 생각했다.
파삭, 파삭.
암살자가 던진 비수가 나뭇잎을 헤치고 쏘아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개는 본능적으로 비수를 피하거나 쳐 냈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것들을 모두 피할 순 없었다.
“하아, 흐…….”
깊게 베인 살갗 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개는 숨을 몰아쉬며 어질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독 묻은 비수에 찔린 몸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개는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 달리며 가벼운 의문을 가졌다. 개는 황제의 암살자로 살기 위해 대부분의 독을 먹어 왔고, 그에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성을 갖지 못한 독의 종류는 황제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뒤에서 쏘아진 비수가 발목을 꿰뚫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개는 더 이상 달려 나가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작은 자갈들이 잠행복을 찢고 잔 상처를 남겼다.
개는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급히 눈을 들었다. 검은 잠행복을 입은 암살자는 독에 중독되었음에도 눈을 형형하게 떠 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군.”
“…….”
개는 말없이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낯설어야 할 암살자의 외형과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명령하지 않았으니 반격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는 암살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황제가 고용한 그림자 조직의 단원이었다. 암살자는 엎어진 개의 위에 올라타며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꺼내 들었다.
개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생채기가 난 개의 얼굴을 비췄다.
“…….”
“날 알고 있는 얼굴이군.”
황제에게 배신당한 것을 깨달았음에도 개의 얼굴은 덤덤했다. 개는 분노도 느끼지 않았고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던 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암살자는 그런 개의 까만 눈동자를 보더니 쯧, 혀를 찼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같은 이의 아래서 일했던 정을 보아 충고해 주지.”
개의 검고 빳빳한 머리칼이 암살자의 손에 거칠게 휘어잡혔다. 개는 신음 한 번 없이 물끄러미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벼려진 칼끝이 개의 동맥 위에 닿았다. 심판자처럼 냉담한 시선이 개를 향했다.
“네가 죽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탓이다.”
칼끝이 살갗을 느리게 파고들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심장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잘 가라.”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였나. 개는 처음 겪는 일에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죽음은 코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 건 개가 아니었다.
푸슉.
소음기 낀 총이 쏘아지는 소리가 숲을 갈랐다. 일순 암살자의 몸이 크게 반동하더니, 곧 후각을 마비시킬 것처럼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는 홉떠진 암살자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곧 생명이 꺼지는 모습까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챙. 암살자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비틀 흔들린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젖은 땅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총을 쏠 때까지 개도, 암살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지?
개는 몸을 바싹 긴장시킨 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을 든 괴한은 황제의 암살자까지 죽인 이였다.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해야…….
“어딜.”
그러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목덜미가 덥석 잡혔다. 개는 괴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중독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젠 시야마저 흐려져 괴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챙겨.”
괴한은 힘없이 늘어지는 개의 몸을 자신의 수하에게 던졌다. 개의 빳빳한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흰 얼굴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기절한 건가.
괴한은 무감한 얼굴로 늘어진 개를 보았다. 수하의 팔에 매달린 개는 별다른 미동조차 보이질 않았다. 벌써 기절했나 보군. 괴한이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
“…….”
개의 새까만 눈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났다. 독에 중독된 탓에 개의 눈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괴한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해독부터 시작해.”
개는 간신히 들어 올렸던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더 이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해독해.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개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
창덕궁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는 석조 건물 안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은 창에 닿아 부스러지는 햇빛과 따스한 빛을 받아 윤기를 띠는 회색 융단, 은박으로 공예된 가구들, 푸르스름한 난초.
바스락. 넓은 방 안, 얇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공기를 적셨다. 씁쓰레한 차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달칵, 누군가 찻잔을 차 받침대에 놓는 소리가 짧은 소란을 일으켰다.
“…….”
하얀 침대 위에 죽은 듯 놓여 있던 개의 눈꺼풀이 떨린 건 그때였다.
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수면제를 들이마신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그러나 몸을 뒤척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개는 구역질이 날 뻔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렸다.
……여긴 어디지?
낯선 풍경이 눈에 담겼다. 황제의 방만큼 넓은 방 안이 햇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채도가 낮은 색으로 덧칠해진 그림이 걸려 있었고, 섬세하게 꾸며진 장식장 안에는 반듯하게 정리된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넓은 방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머리 아래로 반듯한 콧대가 보였다. 남자는 옅은 혈색을 띠는 입술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곧고 긴 손으로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미학적인 기준이 전무한 개에게도 낯선 남자는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그뿐, 개는 가라앉은 눈으로 남자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한다.
오랫동안 사람의 목숨을 끊어 왔던 개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저 남자는 죽일 수 없다.
그러나 개는 남자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건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단검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개는 한 손으로도 능히 사람의 목을 비틀 자신이 있었다. 다만 개에겐 명령이 없었을 뿐이다.
남자를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
개는 몸을 낮춘 짐승처럼 남자의 흰 목덜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죽일 수 있다. 남자와 자신의 거리는 고작 서른 발자국쯤. 달려들어 목을 비틀어 버리면 남자는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일 수 없다. 개는 혼자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가 명령하기 전까지 개는 장식물이나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수도 없었다. 개는 감각을 곤두세운 채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셈이지.”
“……!”
불현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개를 향해 돌아선 것도 그때였다.
“황제의 개.”
개는 정체를 들켰다는 생각에 돌격 자세를 취했다.
“윽……!”
그러나 남자에게 달려들려던 개는 꼴같잖게 침대로 넘어졌다.
목을 팽팽히 조이는 것이 있었다. 겨우 삼켰던 구역질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개는 자신의 목을 할퀴듯이 움켜쥐었다.
달칵.
그 순간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
그것이 목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황제는 개에게 명령했다.
‘사냥을 갔다 오려무나. 털이 아주 예쁜 여우를 잡아 왔으면 좋겠어.’
개는 지금껏 사람만을 사냥해 왔지만, 여우 사냥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설령 사냥법이 다르더라도 상관없었다. 개는 황제의 명령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개는 언제나 임무를 완수하고 황제의 곁으로 돌아왔다.
개는 숲으로 향했다. 황제가 명령한 여우를 잡아 오기 위해. 그러나 밤이 내려앉은 숲에는 개와 여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왼쪽…….’
개는 자신을 쫓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빠르게 숲을 헤치고 나갔다.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넘을 때마다 나뭇잎이 파스스 흐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개를 쫓아오는 암살자 또한 다른 나뭇가지를 밟으며 뛰어넘어 오고 있었다.
파삭, 파사삭.
이미 존재를 들킨 이상 기척을 숨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개는 잠행복 속에 숨겨 두었던 날카로운 암수를 만지작거렸다.
죽여도 되는 걸까? 하지만 황제는 개에게 여우를 잡아 올 것만 명령했다. 전처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거나, 수단을 가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윽.”
그리고 개가 고민하는 사이 암살자의 암수가 개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개는 순간 균형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졌으나, 바닥을 나뒹구는 대신 곧장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개는 황제의 명령 없이는 행동할 수 없었다. 개는 태어났을 때부터 황제의 앞길을 막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암살자로 길러졌다. 개의 모든 판단은 황제의 명령에 의해 이뤄져 왔으며, 그렇기에 선악의 구분이나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령 없이는 아무도 죽일 수 없다. 개는 생각했다.
파삭, 파삭.
암살자가 던진 비수가 나뭇잎을 헤치고 쏘아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개는 본능적으로 비수를 피하거나 쳐 냈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것들을 모두 피할 순 없었다.
“하아, 흐…….”
깊게 베인 살갗 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개는 숨을 몰아쉬며 어질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독 묻은 비수에 찔린 몸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개는 몸을 숨길 장소를 찾아 달리며 가벼운 의문을 가졌다. 개는 황제의 암살자로 살기 위해 대부분의 독을 먹어 왔고, 그에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성을 갖지 못한 독의 종류는 황제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뒤에서 쏘아진 비수가 발목을 꿰뚫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개는 더 이상 달려 나가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작은 자갈들이 잠행복을 찢고 잔 상처를 남겼다.
개는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급히 눈을 들었다. 검은 잠행복을 입은 암살자는 독에 중독되었음에도 눈을 형형하게 떠 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군.”
“…….”
개는 말없이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낯설어야 할 암살자의 외형과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명령하지 않았으니 반격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는 암살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황제가 고용한 그림자 조직의 단원이었다. 암살자는 엎어진 개의 위에 올라타며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꺼내 들었다.
개는 까만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생채기가 난 개의 얼굴을 비췄다.
“…….”
“날 알고 있는 얼굴이군.”
황제에게 배신당한 것을 깨달았음에도 개의 얼굴은 덤덤했다. 개는 분노도 느끼지 않았고 배신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던 일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평온할 뿐이었다. 암살자는 그런 개의 까만 눈동자를 보더니 쯧, 혀를 찼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같은 이의 아래서 일했던 정을 보아 충고해 주지.”
개의 검고 빳빳한 머리칼이 암살자의 손에 거칠게 휘어잡혔다. 개는 신음 한 번 없이 물끄러미 암살자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랗게 벼려진 칼끝이 개의 동맥 위에 닿았다. 심판자처럼 냉담한 시선이 개를 향했다.
“네가 죽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탓이다.”
칼끝이 살갗을 느리게 파고들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심장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잘 가라.”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였나. 개는 처음 겪는 일에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죽음은 코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 건 개가 아니었다.
푸슉.
소음기 낀 총이 쏘아지는 소리가 숲을 갈랐다. 일순 암살자의 몸이 크게 반동하더니, 곧 후각을 마비시킬 것처럼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는 홉떠진 암살자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곧 생명이 꺼지는 모습까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챙. 암살자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다. 비틀 흔들린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젖은 땅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개는 눈을 크게 떴다. 총을 쏠 때까지 개도, 암살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지?
개는 몸을 바싹 긴장시킨 채,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을 든 괴한은 황제의 암살자까지 죽인 이였다. 얼른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해야…….
“어딜.”
그러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목덜미가 덥석 잡혔다. 개는 괴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중독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이젠 시야마저 흐려져 괴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챙겨.”
괴한은 힘없이 늘어지는 개의 몸을 자신의 수하에게 던졌다. 개의 빳빳한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흰 얼굴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기절한 건가.
괴한은 무감한 얼굴로 늘어진 개를 보았다. 수하의 팔에 매달린 개는 별다른 미동조차 보이질 않았다. 벌써 기절했나 보군. 괴한이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
“…….”
개의 새까만 눈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났다. 독에 중독된 탓에 개의 눈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괴한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해독부터 시작해.”
개는 간신히 들어 올렸던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더 이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해독해.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개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
창덕궁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는 석조 건물 안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은 창에 닿아 부스러지는 햇빛과 따스한 빛을 받아 윤기를 띠는 회색 융단, 은박으로 공예된 가구들, 푸르스름한 난초.
바스락. 넓은 방 안, 얇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공기를 적셨다. 씁쓰레한 차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달칵, 누군가 찻잔을 차 받침대에 놓는 소리가 짧은 소란을 일으켰다.
“…….”
하얀 침대 위에 죽은 듯 놓여 있던 개의 눈꺼풀이 떨린 건 그때였다.
개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수면제를 들이마신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그러나 몸을 뒤척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개는 구역질이 날 뻔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렸다.
……여긴 어디지?
낯선 풍경이 눈에 담겼다. 황제의 방만큼 넓은 방 안이 햇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채도가 낮은 색으로 덧칠해진 그림이 걸려 있었고, 섬세하게 꾸며진 장식장 안에는 반듯하게 정리된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넓은 방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머리 아래로 반듯한 콧대가 보였다. 남자는 옅은 혈색을 띠는 입술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가, 이내 곧고 긴 손으로 신문의 페이지를 넘겼다.
미학적인 기준이 전무한 개에게도 낯선 남자는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그뿐, 개는 가라앉은 눈으로 남자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한다.
오랫동안 사람의 목숨을 끊어 왔던 개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저 남자는 죽일 수 없다.
그러나 개는 남자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건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단검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개는 한 손으로도 능히 사람의 목을 비틀 자신이 있었다. 다만 개에겐 명령이 없었을 뿐이다.
남자를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
개는 몸을 낮춘 짐승처럼 남자의 흰 목덜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죽일 수 있다. 남자와 자신의 거리는 고작 서른 발자국쯤. 달려들어 목을 비틀어 버리면 남자는 자신이 죽은지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일 수 없다. 개는 혼자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황제가 명령하기 전까지 개는 장식물이나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수도 없었다. 개는 감각을 곤두세운 채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셈이지.”
“……!”
불현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개를 향해 돌아선 것도 그때였다.
“황제의 개.”
개는 정체를 들켰다는 생각에 돌격 자세를 취했다.
“윽……!”
그러나 남자에게 달려들려던 개는 꼴같잖게 침대로 넘어졌다.
목을 팽팽히 조이는 것이 있었다. 겨우 삼켰던 구역질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개는 자신의 목을 할퀴듯이 움켜쥐었다.
달칵.
그 순간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
그것이 목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