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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부덕의 늪
장례 이후 포웰 공작가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일체의 사교 활동도, 편지에 대한 답신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걸어 잠그고 묵묵히 버텼다. 바깥에서 리비아 모브레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걸신들린 개들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직 젊고 어린, 적령기에 접어든 자식을 가진 귀족들은 촉각을 단단히 곤두세우고 공작 부인이 이 깊은 침묵을 깨기만을 기도했다.
보통 젊고 권세 있는 집안의 주인이 홀로 되면 재가를 노리는 이들이 많이 꼬이기 마련이지만 이토록 절실하지는 않았다. 웬만큼 가계가 급박한 것이 아니고서야 좋아 봤자 후처라는 이름에 목을 매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다르다. 그녀는 얼마 전 죽은 포웰 공, 모브레이 가문의 주인 조르주가 자신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고른 칠촌 혈육이라 혈통적으로도 모브레이 사람인 까닭이었다.
결벽적인 세도가로 유명한 포웰 공작가는 일찍이 3대 전 본가의 계승권을 위협할 수 있는 혈족들을 손수 처리했다. 그 이후 선대 공작 부부는 일찍이 타계하였고, 현 공작인 조르주가 원인 불명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아이를 두지 않은 채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이제 포웰 공작가를 주무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유언으로 모든 것을 상속받은 그의 부인 리비아뿐이었다. 혈통적으로 따져 내려갈 때도 그녀보다 모브레이와 가까운 피도 없는 상황. 예컨대 그녀의 남편이 되면 곧장 새로운 포웰 공작이자 차기 공작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누가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리비아 본인이었다. 그녀는 제 앞으로 도착한 온갖 선물들을 분류하느라 바쁜 홀을 스쳐 지나가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 * *
심혈을 기울여 풀을 깎고 다듬은 숲의 초입에 거대한 천막이 서고 사람들이 끓었다. 사냥 시즌을 맞아 우후죽순 개최되는 조촐한 사냥회에 불과했으나 전보다 젊은 귀족들의 참여율이 높아져 활기가 넘쳤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영애.”
“괜찮답니다, 돌부리가 있더라도 새삼스레 제 발에 챌까 봐요?”
새침하게 턱끝을 들어 올린 리플리 후작 영애가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낯을 일별하곤 산뜻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영애께서 참석하기로 한 사냥회 준비가 소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 라시니 몬테필트로가 애교 있게 눈매를 휘어 웃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흘긋 눈짓했다.
“워낙 사람이 많으니 변수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늘상 레이디의 안전을 심려하는 이 미욱한 사내의 마음을 모쪼록 살펴 주십시오.”
“……그도 그렇군요. 정말이지. 다들 개떼같이 몰려든 꼴하곤…….”
“영애께서 너그러이 보아 넘기십시오, 다들 발등에 불 떨어진 양 허둥거리고는 있지만 다른 분도 아니라 포웰 공작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소란도 환대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타당하게까지 느껴집니다.”
“그래 보았자 부인께서는 개의치도 않으실 텐데 말이에요, 흥.”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여느 때와 같이 심기가 편치 못한 그녀를 달래 차양 아래 앉히고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양해를 구한 뒤 테이블 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유연하게 흘러들어 갔다.
“들으셨나요? 공작 부인의 애인 이야기.”
“아하, 그 떠돌이 작가 이야기인가요?”
“그자, 귀족조차 아니라지 않아요?”
“사실이긴 할 것이에요, 다른 게 아니라. 그 말을 처음 팔았던 하녀 계집, 노역형을 받았다더군요. 저희 사위가 이야기한 것이니 확실할 거예요.”
부인들 사이에 경악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곰곰이 시음하는 척 음료를 깔짝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시기상…….”
“네에, 장례식 직후죠.”
“발에 채고 채는 것이 작가 아닌가요? 이름도 모를 것이 어떻게 공작가의 장례식에……?”
“이전부터 공작 부인께서 후원하던 자였다고 하더군요.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시름에 잠긴 공작 부인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 후에 찾아뵀다고 해요.”
“제깟 것이 위로라니요? 말본새가 발칙하군요.”
무리 중 아들을 둔 부인들이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누가 보아도 공작 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귀부인들은 이후로도 줄곧 그 이름 모를 무명작가에 대한 험담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산뜻하고 달지 않은 아이스티를 골라 파트너의 곁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셈했다.
* * *
커다란 침대를 뒤덮은 캐노피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입이라도 틀어막힌 것 같은 볼썽사나운 남자의 신음.
“옳지.”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여자가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뭉근하게 앞뒤로 흔들었다.
“응, 웁…….”
그녀는 한 남자의 얼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남자는 반쯤 풀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몽롱하게 그녀의 둔덕 사이로 감각이 둔해진 혀와 입술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살덩이들이 치대지며 낯 뜨거운 소리를 냈다. 여자는 그를 마치 도구처럼 편히 다루며 허리를 얕게 돌리다가, 어느 순간 돌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부인……?”
“쉬…….”
여자는 두서없이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입술 앞에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하얀 몸뚱이만이 희미하게 빛날 만큼 어둑어둑한 캐노피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녹안이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렸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더는 질척거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치기도 여간 지친 것이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너른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내려가 캐노피를 걷고 나서는 순간, 볕 아래에서 화사한 색을 덧입는 리비아 모브레이의 몸뚱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캐노피 자락이 원래대로 침대를 모조리 삼키자 리비아의 낯에 희미한 짜증이 스쳤다.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자극은 되레 불쾌했다. 덥혀졌던 몸도, 촉촉하게 땀이 올랐던 살갗도 서서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나무로 둘러싸인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깐 곁을 데울 사내들을 본저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별관으로 거취를 옮긴 참이다. 아마 이 녹음 너머에 있을 본관은 오늘도 소란에 시달리고 있겠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은 홍차를 가볍게 머금고 갖은 단장과 갑갑한 옷가지들에 눌려 있던 몸뚱이를 끄집어내 놓은 나신 그대로의 해방감을 즐겼다. 꾹꾹 조인 옷으로도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가슴은 억누르는 것이 사라지자 한층 더 풍만해 보였다.
물론 그 외의 쾌락은 마땅치 않다. 여즉 침대 위에 누워 늘어져 있을 남자와의 섹스는 단순한 찬탄뿐이었다. 희열도 쾌락도 미적지근한. 그저 저 홀로 취해 헐떡거리는 수컷. 물기가 메마르기 시작한 다리 사이의 감각이 찝찝하다.
리비아는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익숙한,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부터 쭉 자신을 따라다녔던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자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예상만큼이나 먹음직스럽고 추잡한 흥분이 눅눅하게 배어 있는 진득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몸뚱이를 더듬대듯 핥았다. 얕은 욕망으로 혀를 놀리던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박한 눈길. 리비아는 눈먼 개의 푸른 시선을 만끽하면서 눈치채지 못한 척 입술을 핥았다.
* * *
공작 부인께 꼬리를 친 발칙한 무명의 작가로 들끓었던 사교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화가, 극작가, 조각가, 배우, 발레리노, 가수, 작곡가, 온갖 남성들이 그녀의 곁에서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이 명확한 인지도가 없거나 단순한 지망생이라는 점이 더욱 여론을 달구었다. 어떻게든 치열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는커녕 감읍해야 할 후원자인 귀부인께 요망을 떨어 댔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입을 여는 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세기의 미녀로 추앙받는 리비아 모브레이가 여지를 보였을 때 이성을 잃고 바닥을 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무엇보다 어떻게든 그녀를 사로잡기만 하면 당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차기 공작의 친부라는 사실만 있어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성공보다 영광스러운 장래일 테다.
장례 직후 적막했던 것이 언제냐는 양 전투적으로 그녀의 곁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고, 사교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패배한 것들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새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처음 시작될 때에나 짤막하게 ‘결국 그도 버려졌군요’ 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부덕의 늪
장례 이후 포웰 공작가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일체의 사교 활동도, 편지에 대한 답신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걸어 잠그고 묵묵히 버텼다. 바깥에서 리비아 모브레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걸신들린 개들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직 젊고 어린, 적령기에 접어든 자식을 가진 귀족들은 촉각을 단단히 곤두세우고 공작 부인이 이 깊은 침묵을 깨기만을 기도했다.
보통 젊고 권세 있는 집안의 주인이 홀로 되면 재가를 노리는 이들이 많이 꼬이기 마련이지만 이토록 절실하지는 않았다. 웬만큼 가계가 급박한 것이 아니고서야 좋아 봤자 후처라는 이름에 목을 매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리비아 모브레이는 다르다. 그녀는 얼마 전 죽은 포웰 공, 모브레이 가문의 주인 조르주가 자신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고른 칠촌 혈육이라 혈통적으로도 모브레이 사람인 까닭이었다.
결벽적인 세도가로 유명한 포웰 공작가는 일찍이 3대 전 본가의 계승권을 위협할 수 있는 혈족들을 손수 처리했다. 그 이후 선대 공작 부부는 일찍이 타계하였고, 현 공작인 조르주가 원인 불명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아이를 두지 않은 채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이제 포웰 공작가를 주무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유언으로 모든 것을 상속받은 그의 부인 리비아뿐이었다. 혈통적으로 따져 내려갈 때도 그녀보다 모브레이와 가까운 피도 없는 상황. 예컨대 그녀의 남편이 되면 곧장 새로운 포웰 공작이자 차기 공작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누가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리비아 본인이었다. 그녀는 제 앞으로 도착한 온갖 선물들을 분류하느라 바쁜 홀을 스쳐 지나가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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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혈을 기울여 풀을 깎고 다듬은 숲의 초입에 거대한 천막이 서고 사람들이 끓었다. 사냥 시즌을 맞아 우후죽순 개최되는 조촐한 사냥회에 불과했으나 전보다 젊은 귀족들의 참여율이 높아져 활기가 넘쳤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영애.”
“괜찮답니다, 돌부리가 있더라도 새삼스레 제 발에 챌까 봐요?”
새침하게 턱끝을 들어 올린 리플리 후작 영애가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남자의 낯을 일별하곤 산뜻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영애께서 참석하기로 한 사냥회 준비가 소홀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남자, 라시니 몬테필트로가 애교 있게 눈매를 휘어 웃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흘긋 눈짓했다.
“워낙 사람이 많으니 변수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늘상 레이디의 안전을 심려하는 이 미욱한 사내의 마음을 모쪼록 살펴 주십시오.”
“……그도 그렇군요. 정말이지. 다들 개떼같이 몰려든 꼴하곤…….”
“영애께서 너그러이 보아 넘기십시오, 다들 발등에 불 떨어진 양 허둥거리고는 있지만 다른 분도 아니라 포웰 공작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소란도 환대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타당하게까지 느껴집니다.”
“그래 보았자 부인께서는 개의치도 않으실 텐데 말이에요, 흥.”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여느 때와 같이 심기가 편치 못한 그녀를 달래 차양 아래 앉히고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양해를 구한 뒤 테이블 쪽에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유연하게 흘러들어 갔다.
“들으셨나요? 공작 부인의 애인 이야기.”
“아하, 그 떠돌이 작가 이야기인가요?”
“그자, 귀족조차 아니라지 않아요?”
“사실이긴 할 것이에요, 다른 게 아니라. 그 말을 처음 팔았던 하녀 계집, 노역형을 받았다더군요. 저희 사위가 이야기한 것이니 확실할 거예요.”
부인들 사이에 경악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라시니 몬테필트로는 곰곰이 시음하는 척 음료를 깔짝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시기상…….”
“네에, 장례식 직후죠.”
“발에 채고 채는 것이 작가 아닌가요? 이름도 모를 것이 어떻게 공작가의 장례식에……?”
“이전부터 공작 부인께서 후원하던 자였다고 하더군요.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시름에 잠긴 공작 부인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 후에 찾아뵀다고 해요.”
“제깟 것이 위로라니요? 말본새가 발칙하군요.”
무리 중 아들을 둔 부인들이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누가 보아도 공작 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귀부인들은 이후로도 줄곧 그 이름 모를 무명작가에 대한 험담을 주고받았다. 남자는 산뜻하고 달지 않은 아이스티를 골라 파트너의 곁으로 돌아가며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셈했다.
* * *
커다란 침대를 뒤덮은 캐노피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입이라도 틀어막힌 것 같은 볼썽사나운 남자의 신음.
“옳지.”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여자가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뭉근하게 앞뒤로 흔들었다.
“응, 웁…….”
그녀는 한 남자의 얼굴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남자는 반쯤 풀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몽롱하게 그녀의 둔덕 사이로 감각이 둔해진 혀와 입술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살덩이들이 치대지며 낯 뜨거운 소리를 냈다. 여자는 그를 마치 도구처럼 편히 다루며 허리를 얕게 돌리다가, 어느 순간 돌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부인……?”
“쉬…….”
여자는 두서없이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입술 앞에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하얀 몸뚱이만이 희미하게 빛날 만큼 어둑어둑한 캐노피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녹안이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렸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더는 질척거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치기도 여간 지친 것이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너른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내려가 캐노피를 걷고 나서는 순간, 볕 아래에서 화사한 색을 덧입는 리비아 모브레이의 몸뚱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캐노피 자락이 원래대로 침대를 모조리 삼키자 리비아의 낯에 희미한 짜증이 스쳤다.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자극은 되레 불쾌했다. 덥혀졌던 몸도, 촉촉하게 땀이 올랐던 살갗도 서서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나무로 둘러싸인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깐 곁을 데울 사내들을 본저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별관으로 거취를 옮긴 참이다. 아마 이 녹음 너머에 있을 본관은 오늘도 소란에 시달리고 있겠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은 홍차를 가볍게 머금고 갖은 단장과 갑갑한 옷가지들에 눌려 있던 몸뚱이를 끄집어내 놓은 나신 그대로의 해방감을 즐겼다. 꾹꾹 조인 옷으로도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가슴은 억누르는 것이 사라지자 한층 더 풍만해 보였다.
물론 그 외의 쾌락은 마땅치 않다. 여즉 침대 위에 누워 늘어져 있을 남자와의 섹스는 단순한 찬탄뿐이었다. 희열도 쾌락도 미적지근한. 그저 저 홀로 취해 헐떡거리는 수컷. 물기가 메마르기 시작한 다리 사이의 감각이 찝찝하다.
리비아는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익숙한, 공작저에 처음 왔던 날부터 쭉 자신을 따라다녔던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자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예상만큼이나 먹음직스럽고 추잡한 흥분이 눅눅하게 배어 있는 진득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몸뚱이를 더듬대듯 핥았다. 얕은 욕망으로 혀를 놀리던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박한 눈길. 리비아는 눈먼 개의 푸른 시선을 만끽하면서 눈치채지 못한 척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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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께 꼬리를 친 발칙한 무명의 작가로 들끓었던 사교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화가, 극작가, 조각가, 배우, 발레리노, 가수, 작곡가, 온갖 남성들이 그녀의 곁에서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이 명확한 인지도가 없거나 단순한 지망생이라는 점이 더욱 여론을 달구었다. 어떻게든 치열한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는커녕 감읍해야 할 후원자인 귀부인께 요망을 떨어 댔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나 입을 여는 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세기의 미녀로 추앙받는 리비아 모브레이가 여지를 보였을 때 이성을 잃고 바닥을 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쯤은.
무엇보다 어떻게든 그녀를 사로잡기만 하면 당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차기 공작의 친부라는 사실만 있어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성공보다 영광스러운 장래일 테다.
장례 직후 적막했던 것이 언제냐는 양 전투적으로 그녀의 곁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고, 사교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패배한 것들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새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처음 시작될 때에나 짤막하게 ‘결국 그도 버려졌군요’ 하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