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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01. 우린 친구잖아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남자 찾아야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빨대를 넣어 휘휘 내젓자 투명한 물이 곧 뽀얀 황금빛을 띠며 감미로운 향기를 풍겼다.
“몰라요…….”
해가 쏟아지는 테이블에 앉아 나른하게 엎드린 나리가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또 소개팅에 실패했다.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루 빨리 결혼을 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세상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왜 차인 건데? 신 대리야, 최고의 신붓감이지. 얼굴 예뻐, 성격 착해, 능력 있어. 대체 뭐가 문제야?”
“제가 너무 조급했나 봐요. 그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나리가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남동생만 자식으로 치는 부모님과 그녀를 시녀 부리듯 구는 남동생.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과 함께 사는 이상 절대 행복해질 수 없었다.
어제도 남동생이 먹고 난 라면 냄비를 설거지하지 않았다며 엄마에게 혼났다. 얼마 전에는 갈비찜 속 갈비를 두어 점 먹은 일로 남동생이 먹을 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구박을 받았다.
부모님은 남동생과 저를 대할 때 말투나 어조부터 명확하게 차이가 났다. 큰 이유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차별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게 일단 나와서 살라니까. 그 집구석에서 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는데?”
“이거 때문에요.”
나리가 엎드린 채로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가뜩이나 동기들보다 취업도 늦은 편이라 돈이 없어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집을 구해 봤자 월세 보증금 정도밖에 안 되고, 그럼 달마다 월세에 공과금에 관리비에…….”
반복된 휴학으로 졸업이 늦어진 게 문제였다. 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생을 핍박받으며 살아왔는데 조금 더 못 버틸까 싶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어서 결혼하는 게 그녀의 장대한 목표이자 꿈이었다.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는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다. 많은 나이, 볼 것 없는 외모, 그러나 안정된 직장.
남자는 자고로 얼굴값을 하기 마련이니, 그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면 결혼 상대로 딱이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나리 역시 이성을 볼 때, 외적인 것보다 다른 점들을 보는 편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만 급했던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성급하게 군 것 같았다. 거기에 서른을 앞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통금 시간은 남자를 피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직장 생활을 하며 10시였던 통금 시간을 겨우겨우 자정으로 늘렸다. 그 과정은 말로 다 하지 못할 피 터지는 항쟁이었는데, 남자들은 자정이라는 통금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만에 남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장문의 문자로 관계의 종료를 알려 왔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였다. 지금까지 소개팅의 결말은 늘 이러했으니.
“그냥 평생 혼자 살아야 하나 봐요.”
그러자 순옥이 큰일 날 소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벌써 포기하면 안 된다니까. 내 말 들어. 일단 독립을 해야 남자 만나기가 쉽다고!”
순옥은 나리의 상사이자 사촌 언니 같은 존재였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주랄까. 조금 보수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그녀만큼 나리를 잘 이해해 주고 진심으로 상담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자고 남자고 결혼해야 안정을 찾아. 거기에 애까지 있어 봐.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 같다니까?”
나리는 팔에 뺨을 푹 기대어 놓고 한숨을 터뜨렸다.
“하늘에서 신랑감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군말 안 하고 결혼할 자신 있는데.”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은 해서 뭐 해? 일어나 커피나 마셔. 식는다.”
나리는 그제야 꾸역꾸역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종이컵을 들었다. 적당히 식은 커피는 달짝지근하니 입맛에 잘 맞았다. 세상사가 이렇게 입에 딱 맞아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 그러면 내가 한번 소개해 줘?”
“진짜요?”
종이컵을 물고 있던 나리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시동생 동창인데, 얼굴은 평범해. 그런데 신 대리가 외모는 안 본다고 하니 생각이 나서.”
“네네. 저 얼굴은 괜찮아요!”
“그럼 오늘 저녁 어때? 마침 금요일이겠다, 시동생 동창도 이 근처에서 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오늘 좋……!”
그러나 나리는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때문이었다.
짙은 눈썹에 맑고 깊은 눈동자, 오뚝 선 콧대와 선이 짙은 얼굴형.
한마디로 얼굴값 제대로 하게 생긴 남자.
“아쉽지만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
“무슨 약속인데. 안 중요한 거면 미루면 안 돼?”
“그게…….”
동창, 차건후. 졸업 후 연락이 끊긴 그와는 치과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의사가 꿈이라고는 했지만 정말로 의사가 되어 있을 줄이야.
“신나리?”
건후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게 뭐라고, 그때는 심장이 쿵덕쿵덕 뛰어 댔다.
사실 단순한 동창은 아니었으니까.
차건후는 신나리의 첫사랑이었다. 비록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음을 접었지만.
나리는 첫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만큼 능숙하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만큼 감정이 무뎌진 것뿐이다. 지금은 그를 철저하게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소개팅은 주말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주말은 늘 한가한데.”
“그래, 그럼. 어색할까 봐 가볍게 저녁이나 먹으라는 거였는데, 신 대리가 주말이 좋다면 상관없지.”
순옥은 당장 얘기해 보겠다며 휴대폰을 들었다.
* * *
“소개팅?”
건후가 긴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 금요일 밤을 만끽하고 싶은 직장인들로 실내 포장마차는 이미 만석이었다.
두 사람은 그 가운데 2인석에 앉아 있었다. 가운을 벗은 그는 어느새 의사가 아닌 편안한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응. 그러니까 오늘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다 골랐어?”
“너 먹고 싶은 거로 시켜.”
나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문을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면서 읊는 것은 치즈 감자전과 골뱅이 소면. 거기에 목이 마르면 안 된다는 이유로 홍합탕까지.
“오늘은 딱 이것만 먹을 거야! 아, 아니다. 육회 하나 더 시킬까? 육회는 살 안 찌니까…….”
건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곤 다가온 직원에게 그녀 대신 메뉴를 주문해 주었다. 술은 나리의 취향대로 소주 한 병에 맥주 한 병이었다.
“너 소개팅한다는 말 지금까지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에이. 여섯 번일걸?”
“자랑이다.”
“하. 지연이가 소개해 준 남자라서 진짜 잘해 보고 싶었는데.”
처음 소개팅에 나간다고 했을 때 건후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놀‘람’은 서서히 놀‘림’이 됐다. 차이고 돌아올 때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꼭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번엔 진짜야. 나, 정말 잘해 볼 거야.”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어?”
“응.”
나리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며 서비스로 나온 뻥튀기를 오물거렸다.
“너처럼 다 가진 애는 결혼이 절박한 이 심정, 이해 못할 거다.”
“뭘 그렇게 못 가졌는데.”
“못 가진 거 많지. 돈!”
“그럼 돈이 절박해야지, 왜 결혼인데?”
왜냐고? 그래야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까. 나도 가족에게 사랑받아 보는 게 꿈이니까.
차마 그에게 개인적인 그늘까지 보일 수 없었던 나리는 그저 어깨를 작게 으쓱여 보였다.
“안정적이잖아. 난 따듯한 내 가정을 일구고 싶어.”
그러자 건후는 별다른 대꾸 없이 나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기에 눈썹을 들어 보이자 건후 역시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여전하구나. 옛날에도 현모양처가 꿈이라더니.”
“정말? 내가 그랬어?”
참 한결같은 인생이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건 10대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리는 먼저 나온 술병 뚜껑을 열었다. 알코올에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녀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는 걸 좋아했다.
“자. 오늘도 우리 선생님 수고하셨으니 소맥 기똥차게 말아 드리죠. 첫 잔이니까 좀 약하게?”
나리가 소주병을 뒤집어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을 턱을 괴고 지켜보던 건후가 손을 툭 내리며 입을 열었다.
“신나리. 내일 소개팅하지 마.”
“뭐?”
“이제 그딴 거 나가지 말라고.”
난데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다며 별명이 ‘차미네이터’인 그인데,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나리는 크게 웃어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리는 그의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01. 우린 친구잖아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남자 찾아야지.”
종이컵에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빨대를 넣어 휘휘 내젓자 투명한 물이 곧 뽀얀 황금빛을 띠며 감미로운 향기를 풍겼다.
“몰라요…….”
해가 쏟아지는 테이블에 앉아 나른하게 엎드린 나리가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또 소개팅에 실패했다.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루 빨리 결혼을 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세상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왜 차인 건데? 신 대리야, 최고의 신붓감이지. 얼굴 예뻐, 성격 착해, 능력 있어. 대체 뭐가 문제야?”
“제가 너무 조급했나 봐요. 그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나리가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남동생만 자식으로 치는 부모님과 그녀를 시녀 부리듯 구는 남동생.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과 함께 사는 이상 절대 행복해질 수 없었다.
어제도 남동생이 먹고 난 라면 냄비를 설거지하지 않았다며 엄마에게 혼났다. 얼마 전에는 갈비찜 속 갈비를 두어 점 먹은 일로 남동생이 먹을 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구박을 받았다.
부모님은 남동생과 저를 대할 때 말투나 어조부터 명확하게 차이가 났다. 큰 이유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차별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게 일단 나와서 살라니까. 그 집구석에서 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는데?”
“이거 때문에요.”
나리가 엎드린 채로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가뜩이나 동기들보다 취업도 늦은 편이라 돈이 없어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집을 구해 봤자 월세 보증금 정도밖에 안 되고, 그럼 달마다 월세에 공과금에 관리비에…….”
반복된 휴학으로 졸업이 늦어진 게 문제였다. 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생을 핍박받으며 살아왔는데 조금 더 못 버틸까 싶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어서 결혼하는 게 그녀의 장대한 목표이자 꿈이었다.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는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다. 많은 나이, 볼 것 없는 외모, 그러나 안정된 직장.
남자는 자고로 얼굴값을 하기 마련이니, 그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면 결혼 상대로 딱이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나리 역시 이성을 볼 때, 외적인 것보다 다른 점들을 보는 편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만 급했던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성급하게 군 것 같았다. 거기에 서른을 앞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통금 시간은 남자를 피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직장 생활을 하며 10시였던 통금 시간을 겨우겨우 자정으로 늘렸다. 그 과정은 말로 다 하지 못할 피 터지는 항쟁이었는데, 남자들은 자정이라는 통금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만에 남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장문의 문자로 관계의 종료를 알려 왔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였다. 지금까지 소개팅의 결말은 늘 이러했으니.
“그냥 평생 혼자 살아야 하나 봐요.”
그러자 순옥이 큰일 날 소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벌써 포기하면 안 된다니까. 내 말 들어. 일단 독립을 해야 남자 만나기가 쉽다고!”
순옥은 나리의 상사이자 사촌 언니 같은 존재였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주랄까. 조금 보수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그녀만큼 나리를 잘 이해해 주고 진심으로 상담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자고 남자고 결혼해야 안정을 찾아. 거기에 애까지 있어 봐.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 같다니까?”
나리는 팔에 뺨을 푹 기대어 놓고 한숨을 터뜨렸다.
“하늘에서 신랑감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군말 안 하고 결혼할 자신 있는데.”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은 해서 뭐 해? 일어나 커피나 마셔. 식는다.”
나리는 그제야 꾸역꾸역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종이컵을 들었다. 적당히 식은 커피는 달짝지근하니 입맛에 잘 맞았다. 세상사가 이렇게 입에 딱 맞아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 그러면 내가 한번 소개해 줘?”
“진짜요?”
종이컵을 물고 있던 나리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시동생 동창인데, 얼굴은 평범해. 그런데 신 대리가 외모는 안 본다고 하니 생각이 나서.”
“네네. 저 얼굴은 괜찮아요!”
“그럼 오늘 저녁 어때? 마침 금요일이겠다, 시동생 동창도 이 근처에서 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오늘 좋……!”
그러나 나리는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때문이었다.
짙은 눈썹에 맑고 깊은 눈동자, 오뚝 선 콧대와 선이 짙은 얼굴형.
한마디로 얼굴값 제대로 하게 생긴 남자.
“아쉽지만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요.”
“무슨 약속인데. 안 중요한 거면 미루면 안 돼?”
“그게…….”
동창, 차건후. 졸업 후 연락이 끊긴 그와는 치과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의사가 꿈이라고는 했지만 정말로 의사가 되어 있을 줄이야.
“신나리?”
건후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게 뭐라고, 그때는 심장이 쿵덕쿵덕 뛰어 댔다.
사실 단순한 동창은 아니었으니까.
차건후는 신나리의 첫사랑이었다. 비록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조차 하지 못한 채 마음을 접었지만.
나리는 첫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만큼 능숙하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만큼 감정이 무뎌진 것뿐이다. 지금은 그를 철저하게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소개팅은 주말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주말은 늘 한가한데.”
“그래, 그럼. 어색할까 봐 가볍게 저녁이나 먹으라는 거였는데, 신 대리가 주말이 좋다면 상관없지.”
순옥은 당장 얘기해 보겠다며 휴대폰을 들었다.
* * *
“소개팅?”
건후가 긴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 금요일 밤을 만끽하고 싶은 직장인들로 실내 포장마차는 이미 만석이었다.
두 사람은 그 가운데 2인석에 앉아 있었다. 가운을 벗은 그는 어느새 의사가 아닌 편안한 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응. 그러니까 오늘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다 골랐어?”
“너 먹고 싶은 거로 시켜.”
나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문을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면서 읊는 것은 치즈 감자전과 골뱅이 소면. 거기에 목이 마르면 안 된다는 이유로 홍합탕까지.
“오늘은 딱 이것만 먹을 거야! 아, 아니다. 육회 하나 더 시킬까? 육회는 살 안 찌니까…….”
건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곤 다가온 직원에게 그녀 대신 메뉴를 주문해 주었다. 술은 나리의 취향대로 소주 한 병에 맥주 한 병이었다.
“너 소개팅한다는 말 지금까지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에이. 여섯 번일걸?”
“자랑이다.”
“하. 지연이가 소개해 준 남자라서 진짜 잘해 보고 싶었는데.”
처음 소개팅에 나간다고 했을 때 건후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놀‘람’은 서서히 놀‘림’이 됐다. 차이고 돌아올 때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꼭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번엔 진짜야. 나, 정말 잘해 볼 거야.”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어?”
“응.”
나리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며 서비스로 나온 뻥튀기를 오물거렸다.
“너처럼 다 가진 애는 결혼이 절박한 이 심정, 이해 못할 거다.”
“뭘 그렇게 못 가졌는데.”
“못 가진 거 많지. 돈!”
“그럼 돈이 절박해야지, 왜 결혼인데?”
왜냐고? 그래야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까. 나도 가족에게 사랑받아 보는 게 꿈이니까.
차마 그에게 개인적인 그늘까지 보일 수 없었던 나리는 그저 어깨를 작게 으쓱여 보였다.
“안정적이잖아. 난 따듯한 내 가정을 일구고 싶어.”
그러자 건후는 별다른 대꾸 없이 나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기에 눈썹을 들어 보이자 건후 역시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여전하구나. 옛날에도 현모양처가 꿈이라더니.”
“정말? 내가 그랬어?”
참 한결같은 인생이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건 10대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리는 먼저 나온 술병 뚜껑을 열었다. 알코올에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녀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는 걸 좋아했다.
“자. 오늘도 우리 선생님 수고하셨으니 소맥 기똥차게 말아 드리죠. 첫 잔이니까 좀 약하게?”
나리가 소주병을 뒤집어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을 턱을 괴고 지켜보던 건후가 손을 툭 내리며 입을 열었다.
“신나리. 내일 소개팅하지 마.”
“뭐?”
“이제 그딴 거 나가지 말라고.”
난데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다며 별명이 ‘차미네이터’인 그인데, 갑자기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나리는 크게 웃어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리는 그의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