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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 2화



* * *



“……재발하셨다.”

주먹 쥔 효은의 손에 좀 더 세게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떨리는 걸 가까스로 붙잡았다. 무슨 일이든 이유가 없을 순 없었다. 갑작스럽게 손녀를 결혼시키려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추리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추측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 효은은 그저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괜찮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게 최선이었다.

“괜찮아요. 이번에도 잘 이겨 내실 거예요. 그렇죠, 교수님? 그렇다고 해 주세요, 빨리.”

“효은아…….”

손 박사의 제자이자 주치의인 김 교수가 확답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때는 홀로 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스승이 미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자식을 앞세운 부모를 여럿 봐 왔지만 김 교수의 눈에 스승 태호는 유난스러웠다.

딸이 손녀를 낳다 죽게 되고, 사위는 한 해가 가기도 전에 손녀를 두고 새장가를 들었을 때도 태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효은이 걸음마를 떼던 해, 김 교수는 태호에게 권했다. 효은을 아빠에게 보내 주라고. 태호가 붙잡고 있는 건 효은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효은의 엄마 희진이 아니냐고. 효은의 미래를 위해선 그게 맞는다고.

그때 손 박사의 몸에선 이미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태호는 매일 밤마다 그리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것처럼 잠투정을 하던 효은도,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몸도,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 항암 치료를 하고, 몇 년이 지나 완쾌란 두 글자를 얻어 낸 태호의 노력 앞에서 김 교수는 더 이상 어떤 충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호가 암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린 손녀 효은 때문이라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러 효은을 어엿한 숙녀로 키워 낸 태호는 또다시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

“힘든…… 싸움일 거야. 하지만 잘 보내 드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부탁드려요.”

효은은 약해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김 교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김 교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또 한고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효은을 김 교수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태호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훑고, 도우미가 차린 아침을 먹은 후, 거실 뒤쪽에 마련한 조그만 정원으로 향했다. 언제나 같은 그림이라 달라질 것이 없다고 여긴 효은은 조용히 다가가 오늘따라 유난히 좁아 보이는 할아버지의 등을 끌어안았다.

“우리 강아지, 일어났어?”

그녀가 ‘아빠’란 말 대신 ‘할부지’란 호칭을 먼저 입에 올린 순간부터 스물넷이 된 지금까지 태호에게 불리는 말은 늘 같았다. 그렇게 달라지지 않을 관계이자 버팀목이자 전부였다.

효은은 밤새 꾹꾹 눌러 담으며 울음을 참아 낸 게 헛수고인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잇새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너무 세게 물었는지 갈라진 입술이 찢어져 피 맛이 느껴졌다. 쓰라리고 아팠다. 이 작은 생채기에도 감각이 서는데 할아버지는 어떨까. 어떤 걸까. 그걸 그녀는 이해할 수 없어 미안했고 슬펐다.

‘우리 강아지 대신 내가 아팠으면…….’

어릴 적 효은이 잔병치레를 할 때마다 태호가 묘약처럼 꺼내던 말이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더 아프지 않고 기운을 차렸고, 언제부턴가 꼭 그 말을 들어야만 병이 나았다. 그렇게 그가 가져간 효은의 아픔이 모두 모여 병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멍청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울 시간이 어디 있어. 죄책감이나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야.’

효은은 마음을 다잡았다. 할아버지가 그녀 대신 아파해 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신도 할아버지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태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그를 편안하게, 행복하게 해 준다면, 병은 소리 없이 달아날 것이다. 기적처럼 완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야 한다. 그녀에게 남은 한 사람까지 데려간다면 신은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 녀석 만났다며? 왜 말이 없어?”

며칠이 지나도 손녀가 입을 열지 않자 태호는 그답지 않게 먼저 물음을 던졌다. 그만큼 그에게는 지금 효은의 결혼이 중요한 문제인 걸까. 자기 자신의 건강보다도 더. 그래. 그녀의 할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한 번 봐서 뭘 알아.”

효은은 그녀답지 않게 새침하게 굴었다. 태호는 그게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손녀의 얼굴을 잠자코 내려다봤다. 그의 입가엔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싫다는 소리는 아니군.”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연은 다 있는 법이야. 하늘이 정해 준 것처럼.”

곧 해탈해 어딘가로 떠나 버릴 것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을 죄어 왔다.

“근데…… 왜 꼭 그 사람이어야 해?”

전부터 이 말을 묻고 싶었다.

어쩌면 태호가 알고 있었던 걸까. 그 옛날, 풋사랑에 떨려 하던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래도 마음에 품었던 남자에게 운명을 맡겨 보는 게 어떠냐는 마지막 애달픈 선물은 아닌지.

“그 녀석이라면…… 이 할아비 맘이 놓일 것 같아서.”

그리 말한 태호가 효은을 꼭 끌어안았다. 하루하루 말라 가는 할아버지의 마른 등을 효은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또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가고 있었다.



* * *



시간. 그놈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녀는 이제야 실감했다. 강의실에서 나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효은이 발을 헛디뎌 그대로 주저앉았다. 엉덩이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효은아. 응급실이야. 할아버님이…….’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는 할아버지가 곧 죽을 것처럼 흐느꼈다. 암이란 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람을 데려가진 않을 거라고 자만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아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었다. 갓난아기였던 그녀를 키우면서도 그 고통스러운 암을 물리쳤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효은아? 괜찮아?”

주저앉은 그녀를 보고 친구들이 놀라 달려왔지만 효은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학교를 벗어나 택시에 타자마자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살려 달라는 말만 되뇌었다.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를 향해 도와 달라는 주문을 외웠다. 제발. 그 애원이 통한 것처럼 살아 있는 태호가 병실에 누워 있었다. 효은은 그제야 안심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치료를…… 시작하자.”

김 교수는 넋이 나간 효은을 다독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마약성 약물을 투여한 태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효은은 할아버지의 손을 목숨처럼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결혼이라도 상관없었다. 그 일로 할아버지가 안심하며 웃을 수 있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 괜찮았다. 이 결혼을 거절해 달라는 그 남자를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죽음과 삶은 스스로가 정할 수 없다는 걸, 그녀의 부모님을 통해서 뼛속 깊이 배웠다. 다만 두려웠다. 혼자 남겨지는 게. 이 세상에 자신 혼자뿐인 게,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들 줄은 몰랐다. 태호의 야윈 얼굴을 보며 효은은 숨을 삼켰다.



* * *



“누구?”

릴레이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박 비서가 급히 다가와 말을 전했다.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되묻는 찰나, 책상 위에 두고 간 그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화면을 누르자 부재중 전화 5통과 짤막한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로비에서 기다려요.]

효은의 메시지였다. 회사까지 찾아올 정도로 급한 일이 무엇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뒤로하고 이도는 일단 겉옷을 챙겨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로비로 내려가자 귀신처럼 하얀 얼굴로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효은이 보였다. 경비 직원이 다가와 상무님을 찾았다는 말을 전했지만 이도의 귓가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분명 눈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마음과 달리 물음은 거칠게 뱉어졌다.

“결혼해 줘요, 나랑.”

효은이 절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성적인 이도는 우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는 눈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효은의 팔을 낚아채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혀 두고 커피를 주문해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전정하라는 의미였지만 효은은 커피 따윈 관심 없다는 것처럼 아까와 같은 눈으로 이도를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절박함이 맞았다.

“결혼해 주세요.”

“내 뜻에 동의하는 줄 알았는데?”

이도는 감정이 섞인 효은을 일부러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동의할 수 없어요. 결혼해야겠어요, 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냉정한 물음을 던지자 들끓던 효은의 눈에 원망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어차피 하기로 되어 있던 결혼 아닌가요?”

“난 한다고 한 적 없어.”

돌아온 답은 철벽이었다. 효은은 이제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결혼이 싫어요?”

“나야말로 묻고 싶어. 너는 결혼이 쉬워?”

눈을 피하던 이도가 그제야 효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쉽다고 한 적 없어요.”

“인생이 걸린 문제야. 다시 생각해.”

이도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효은은 마지막으로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 똑같아요. 나한테는 다 똑같은 인생이라고요. 아저씨랑 결혼한다고 내가 아닌 게 아니잖아요.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어요. 욕심 같은 거 안 부려요. 다른 사람 사랑해도 괜찮아요. 조금만 살다가 헤어져…….”

“일어나.”

이도가 화난 것처럼 낮게 일렀다.

“아저씨.”

“집에 데려다줄게.”

“아저씨!”

“넌 뭐가 그렇게 쉬워! 결혼이 장난이야? 내가 원하는 걸 다 해 주겠다고?”

이도에게선 서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그게 무슨 뜻인지 효은이 알까. 그녀의 눈가가 떨렸다.

“…….”

“자신 없는 일에는 덤비지 마.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니까 명심해.”

서늘한 이도의 말이 효은의 입을 막았다. 그녀가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효은을 데려다주기 위해 그녀의 가방을 챙겨 드는데 뒤늦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난 결혼이란 걸 해야만 해요. 그게…… 누구든 상관없어요.”

효은은 진심이었다. 그에게서 가방을 낚아챈 그녀는 돌아서서 홀로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이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