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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갤러리 벽은 전부 하얀색이었으면 합니다. 세기 화랑 3층에 자연광이 잘 들어오는 자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작품은 거기에 걸렸으면 좋겠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엄한 어조를 띠었다. 날카롭지만 어딘가 나른한 눈빛에는 예술가의 관능이 어려 있다.

마주 앉은 남자는 얼마 전 인애가 기획 전시를 제안한 신진 화가다. 증권가에서 저명한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그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2년 전의 일이다.

그는 여러 투자 활동을 통해 부를 쌓았고, 그중에서도 수년 전 헐값에 사들인 인터넷 동영상 업로드 업체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투자 활동 소식이 매스컴에서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주목받는 신진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마주 앉은 자리에 그가 나올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본명과는 다른 필명을 쓰기도 했거니와 공식 석상이건, 비공식 석상이건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없어서 이 바닥에 소문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 자리에는 초대 관장님께서 처음으로 수집하신 작품이 갤러리 개관 이후로 쭉 걸려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작품이 걸렸던 적이 없습니다. 대신 2층에 마련된 전시관을 둘러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는 보란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내뱉고는 물었다.

“그거 얼마나 합니까?”

한껏 예의를 차리지만, 깔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 이 남자가 그랬다.

“그림 말씀입니까?”

인애는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그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지며 기분 나쁜 웃음기를 머금었다.

“아니요. 그깟 그림 얼마나 한다고. 그 갤러리, 얼마나 합니까?”

남자는 절대자의 권력이라도 등에 업은 것처럼 오만하게 굴었다. 돈이 권력인 세상이다. 투자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그였다.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를 바라보는 듯한 거만한 심문자의 눈빛으로 인애를 바라보았다.

“내 회사에서 하루에 업로드되는 동영상이 몇 건인지 압니까? 그중에서 특출난 조회수로 어마어마한 광고 이익을 얻는 동영상은 몇 개나 되는지 압니까?”

인애에게 대답을 바라고 물은 말은 아니라는 듯이 남자가 재우쳐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회사의 최대 주주가 나예요. 투자뿐만 아니라 트렌드를 사로잡는 기술 역시 나한테 있다는 거죠. 내가 최근 케이옥션에서 가장 큰 거래를 성사시킨 신진 화가이자, 4차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의 최대 투자자인 게 밝혀지면 그 파급 효과는 어떨 거라고 봅니까?”

인애가 남자에게 연락했던 것은 케이옥션에서 그의 그림이 팔리기 전의 일이었다. 인애가 단독 개인전을 제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그림이 케이옥션에서 신진 화가치고는 놀라울 만한 가격으로 팔린 것이다.

남자의 질문에 인애는 잠시 머뭇거렸다. 예술을 좇는 직업이지만, 갤러리스트는 갤러리의 절대적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헝그리 정신은 옛말이다. 요즘 세상에는 풍족하면, 풍족할수록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법이다.

이제껏 정체를 숨기고 활동했던 그였기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를 미술 하는 동네 중심뿐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 세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애가 세속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관장님과 거래를 해야 할 것 같네요.”

“거래 조건은?”

“이번 전시와 관련한 사항 전부, 그리고 향후 1년간 강 화백님의 일정은 제가 맡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 줄 사람이 앞에 앉아 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번 전시로 이목을 끈 뒤 규모 있는 아트 페어에 내보낸다면, 스토리의 흥행은 보나 마나다.

“그럼, 내 그림은 3층 햇볕 아래 걸리는 겁니까?”

“오랑주리에 있는 모네의 작품만큼 근사하게 걸릴 겁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얀 벽이니, 자연광이니 할 때부터 그가 모네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후 남자와의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간파한 인애의 통찰력에 남자는 의심을 거두고, 진지하게 회의에 임했다.

긴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인애는 이제껏 무음으로 해 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네, 관장님.”

부재중 통화가 무려 다섯 통이나 된다. 이번 미팅에 관장 또한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 어떻게 됐어?

처음 인애가 신진 화가 무리에서 그를 콕 집어냈을 때, 관장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었다.

굳이 개인전을 제의할 만큼 능력이 출중한 그림쟁이는 아닌 것 같다느니, 될성부른 떡잎이면 벌써 이 바닥에 소문이 파다해야 하는데 그런 끼가 없다느니.

그냥 솔직하게 돈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관장은 아티스트라는 자부심이 굉장한 인간이라 이마에 쓰여 있는 속물근성을 소리 내 표현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돈이 될 것 같지 않았던 강 화백의 작품이 케이옥션에서 거액에 팔리면서 콜렉터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가격표에 천 원을 붙이면 안 팔리지만, 브랜드 인지도를 얻은 뒤 천만 원을 붙이면 갑자기 명품이 되는 게 시장 속성이다.

“하겠대요. 앞으로의 1년 일정도 저한테 맡기기로 했고요. 그 대신…….”

― 그 대신?

공용 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 서교동 골목을 빠져나가던 인애는 모퉁이를 돌려다 우뚝 멈춰 섰다. 얼른 벽 뒤에 몸을 숨긴 인애는 숨을 흡 들이켰다. 갑작스레 심박동이 빨라지면서 관자놀이가 팔딱거리는 게 느껴졌다.

최휘욱, 그 남자다.

― 그 대신 뭐? 윤 과장!

“잠시만요, 관장님.”

인애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대꾸했다. 보통의 목소리로 대꾸한다고 해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었다.

― 빨리 말해! 뭐! 강 화백이 뭐랬는데?

휴대전화 너머의 관장은 숨이 꼴깍 넘어갈 것 같았다. 인애는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한식당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떨어지는 검은색 슈트, 반듯한 이마 선을 따라 매력적으로 흘러내린 앞머리, 깎아지를 듯한 콧날과 선명한 인중 아래 붉은 입술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내내 앞에 선 누군가를 바라보며 깍듯이 예를 갖추던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인애가 숨어 있는 모퉁이 쪽을 향했다.

깜짝 놀란 인애는 얼른 다시 몸을 숨겼다. 어깨를 하도 움츠려서 뻐근할 지경이다.

‘자는 사람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순간 나직한 울림이 있는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귓불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인애는 머릿속을 잠식한 목소리를 털어 내려 얼른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러고는 남자가 그새 자리를 떴나 싶어서 다시 한번 모퉁이 너머를 빠끔히 내다보았다.

주차장까지 가려면 반드시 그가 서 있는 한식당 앞을 지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죽어도 그의 앞을 지나고 싶지는 않았다.

‘신효 짝으로 휘욱이가 좋겠구나.’

마른 어조로 읊조리던 조부의 목소리도 불현듯 되살아났다.

짝사랑했던 그에게 고백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낸 날, 조부 댁 앞마당에서 사촌 언니 신효와 그의 정혼 소식을 들었다. 조부는 손자, 손녀 중에서도 신효를 특히 귀애했다. 이설 그룹의 후계 구도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그와 신효가 정혼하게 된 데에는 신효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고.

그에게 반한 신효가 몇 년 동안 조부를 조르고 졸라 정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신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정혼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후 그와 여러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람이 많은 모임 혹은 연회였기에 그에게 일말의 변명을 내비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치기 어린 나이에 뭘 모르고 저지른 철없는 일이었다고 수습을 해야 했지만, 어릴 때는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편지를 그가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고, 어정쩡하게 지내온 지 벌써 10년이다.

사실 신효와 그가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신효의 아버지인 큰아버지와 인애의 아버지는 배다른 형제였고,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다. 가족 간의 화합을 논하며 사촌 형부와 화목하게 지낼 일 따위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인애의 아버지와 척을 지는 쪽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 아, 윤 과장! 여보세요? 윤 과장? 여보세요? 아, 왜 전화가 안 들려!

성격 급한 관장은 통화 연결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 순간, 문자 수신음이 연속으로 크게 울려 댔다.

다시 무음으로 바꾸려고 황급히 조작하는데, 휴대전화가 손바닥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선 끝에 검은 구두가 걸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하게 박살 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만 같았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정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에게 고백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 만큼 심장이 거칠게 반응한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남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가 그의 큰 키와 수영 선수처럼 떡 벌어진 어깨에 가려졌다.

갑작스럽게 진 그늘 안에서 인애는 바짝 긴장했다.

그는 그때 그 시절을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흑역사를 쌓은 쪽은 죽을 때까지 이불 킥을 하게 되는 법이다.

“기자라도 붙은 줄 알았네. 오랜만이다.”

그가 웃었다. 지난 10여 년간 볼 수 없었던 낯설고도 익숙한 미소였다.